7월 10일
묵상과 고백의 힘 (2)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시 77:14-15)
본문해설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의심이 될 때 거기에서 벗어나는 나름대로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술은 바로 하나님이 이전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14절, 15절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기이하다’는 말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영어로 'wonder'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믿음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하나님의 고유한 일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내게 보여주시옵소서”와 같은 표현입니다. 표적이나 기사는 인간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속해있는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보여주시는 신앙적인 의도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오는 많은 기이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아니면 그 일을 행하실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상기시켜 믿음이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구약성경에는 ‘민족’이라는 말과 ‘나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나라는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민족은 나라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이 같아도 나라가 다를 수 있고 민족이 달라도 나라가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비교적 단일민족에 속하기 때문에 민족과 나라가 일치하지만, 대부분은 민족과 나라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다종족 사회이기 때문에 한 나라 안에 많은 민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15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같이 살고, 다문화 가정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서서히 국가의 개념이 민족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라고 할 때, ‘민족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안에 있는 다양한 민족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지경 바깥에 있는 민족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혼자 간직하고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뛰어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독점적으로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의 팔로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12절에는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주의 팔’이라고 할 때, 이것은 손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팔은 손 위로 이어져있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팔’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힘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는 애정을 가진 친밀함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신랑에 대한 신부의 노래에서 ‘그 팔로 나를 안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팔로 자기의 백성들을 안으시고, 그 팔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와 같은 표현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세 번째는 보호를 의미합니다. 팔 자체가 보호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팔로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지켜주십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팔은 하나님의 위대한 힘과 능력, 친밀함,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위대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 팔로 주의 백성인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여기에서 ‘요셉’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자손,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대명사였습니다. 요셉은 왕국이 둘로 나뉘어졌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칭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또는 야곱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이삭은 야곱보다 더 온유하고 신실한 삶을 살았는데 왜 이삭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야곱의 자손이라고 지칭한 것일까요? 물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도 이야기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때와 야곱이라고 할 때는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복과 은총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방성과 주권을 강조할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안도하고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으로서 언약에 충실한 삶을 보여야 했습니다. 야곱은 간사한 사람이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바로를 축복할 정도로 하나님 백성다운 사람으로 다듬어 거룩하게 하신 일에 표본이 된 사람입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아브라함을 향한 경륜을 비교해보면 아브라함의 경륜에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과 호의가 많이 강조됩니다. ‘내가 너를 택하고, 모든 민족의 아비로 삼고, 축복의 근원으로 삼고’, 이러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호의적으로 대해주시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면면히 흘러왔습니다. 그래서 외적들이 쳐들어오고 나라에 위기가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실 것이라는 낙관주의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 관점에 강하게 사로잡혀있던 그들은 선지자들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라고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편, 사기꾼 같던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결하고 거룩한 언약의 족장으로서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혹독한 연단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따라 언약백성들을 향해 일방적인 언약을 베풀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더 혹독하게 연단하여 사기꾼과 같던 그를 이스라엘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총의 경륜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야곱이라고 부르실 때는 그런 그림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과 요셉의 자손이라는 말을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속량한다’는 말은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값 주고 사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시련과 환란들을 당신이 대신 담당하고 막으시면서 그들을 건져주셨습니다.
양심의 작용
11절에서부터 15절까지 오면서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까? 77편 처음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시인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내게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매달렸지만 커다란 회의와 의심이 밀려왔습니다. ‘주께서 나를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 베풀지 않으실까? 어쩌면 나를 향한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지도 모른다. 그분의 약속도 이제 폐하였는지도 모른다. 내게 베푸실 은혜를 하나님이 잊어버리셨나보다. 이젠 더 이상 나를 긍휼이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염려들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면서 양심의 작용을 통해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했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양심이 하나님 앞에 명민해진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타락한 인간 안에서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마지막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 올바른 양심이 계속 작동하지 않으면 회개가 불가능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고치는 일도 불가능 합니다.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라는 화란의 신학자가 자신의 책속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엄정하게 살아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지만 이분의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엄정한 양심의 칼날 앞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윤리가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양심의 기능은 점점 무력화됩니다. 인간의 양심에 대한 인식 자체를 허물어버립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고 보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는 안합니다. 공부를 하라는 말이나 행동을 올바로 하라는 말들이 다 속박처럼 여겨집니다. 그 때 자유가 주어지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게임을 하고 술을 먹거나 음란물을 봅니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을 한도 내에서 다른 행동들도 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어느 게임업체 사장에게 학부형들이 게임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다 망가진다고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 하고 자기가 실제로 게임에 몰두해 보았습니다. 한 달 만에 중독이 되더랍니다. 자기가 만들면서도 그렇게 몰입되지 않았는데 구속받지 않은 생태에서 몰입하니까 한 달 후, 게임을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가 깊이 결단하고 사업을 접고 교육 컨텐츠로 사업의 방향을 전환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할 때는 예전에 내 마음대로 행했던 기질과 습관에 계속해서 얽매이는 게 느껴집니다. 개 줄에 묶여서 가만히 엎드려 있을 때에는 속박이 안 느껴지지만 그것을 박차고 나가려고 하면 목이 당겨지면서 고통이 느껴집니다. 바로 그런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뿌리치고 은혜로 못 나오는 이유 자체가 속박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끝났는가? 난 버림 받았는가?’ 이런 고민이 계속될 때 역사를 회상합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모든 것에서 건져주셨던 기억들을 통해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사실이 확신으로 다가오며 놀라운 위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과 은혜, 보호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다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그 분과 혼인 관계에 있는 교회에 전달한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몸에 접붙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주신 것이고, 교회에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은 아버지께서 아들 그리스도께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체들에게 행하고 베푸신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며 위로와 힘을 얻고 아버지 앞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적용과 결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낙심할 때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공동체에 베푸신 놀라운 사랑, 당신의 몸을 사랑하시되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되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무한한 언약의 사랑을 대면하면서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이제 나는 버림받은 것 같다.’는 자기연민과 비참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백성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시편77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