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25일 새벽예배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7-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주시는 원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은 일반 섭리의 것과.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영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내리시는 복입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사물들의 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복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된다든지, 건강을 주셔서 건강하게 된다든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도와준다든지 이런 것들이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어떤 복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합니다. 그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어주신 기업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 찬송을 드리는 것을 우리는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삶, 그리고 우리에게 각자 은혜를 내리실 때 하나님의 마음에 있으셔서 우리를 거기에 두신 그런 삶의 자리, 사명의 터,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기업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으로 아는 사람들이 인생의 만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행복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의 정수를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훈계하신 것에 대해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밤마다 자신의 심장이 자기를 가르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기업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지를 이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이 계속 들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보내신 의미 있는 소명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그 기업을 버릴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큰 형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때로는 욕망이 있어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마음에 들릴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굳게 붙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타이르고 책망하고 바르게 인도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신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항상 우리는 두 개의 자아 사이에 대화를 경험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옳지 않은 것을 행하려고 하면 우리 안에서 ‘안돼’라고 외치는 신앙적인 양심의 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는 고집을 쓰고 우리의 육적인 자아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이, 경건한 마음이 고통 받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아래 있을 때 경험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에 울려 퍼질 때 자기 자신의 심장이 자신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장이라고 하는 것은 비유인데, 심장이 자신의 육신의 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명의 근원이 되듯이, 또한 영혼에 있어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가는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심장부가 자신의 영혼의 깊은 좌석, 심령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부패한 본성을 따라 사는 자기를 책망하고 교훈하는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신령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자신이 하기 싫으면 선입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하며 살아가는 삶이 신앙의 삶이라면 자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성립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혹은 교회가, 목회자가 그를 도울 수 있는 것도 자신이 그런 삶을 살려고 의지할 때 도울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이 그런 삶을 살지 않으려고 의지할 때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속에 들려오는 신앙생활이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인생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내가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간다라고 할 때 이것은 왕국의 문맥과 연결됩니다. 뭇 백성들이 왕 앞에 나아갈 때 왕 앞에 부복을 합니다. 그 때에 그 부복한 백성은 왕이 왕이시라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실감하게 되고, 자신은 그 왕 앞에 그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야 할 아주 힘없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왕 앞에 부복하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아간다라고 하는 의미의 한 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살피고 지켜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모든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는 그 효과를 나의 영혼과 온 지성과 마음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을 오늘 시인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노래하고 있는 이 대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항상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살아가니까 주위의 수많은 대적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기만 하면 그 분이 왕이시기 때문에 나를 얼마나 많은 대적들이 에워싸고 있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대적이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가, 인정하지 않으시는가’ 이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시인이 이런 식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그 삶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을 통해서 가능해 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요동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동한다고 하는 것은 중심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면 쌓아 올렸던 짐들이 떨어지고 서 있던 사람들이 쓰러집니다. 누워있던 사람들은 구릅니다. 이런 일들이 요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요동한다고 하는 것은 따라서 세워놓은 평상시의 많은 질서들이 흩어진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요동하는 많은 것들은 세워진 것들이고 쓰러지는 모든 것들은 이미 서 있던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요동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세워졌던 질서들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지켜주실 수 있는데도 그 앞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세워놓은 많은 질서들이 환란과 시련 속에서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고 하면 그 무너진 것들은 세우지 말았어야 될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요동치 않는 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시고 우리들이 쌓아올린 질서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 편이 되어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면 오히려 우리가 잘못 쌓아올렸던 질서들은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그것들이 무너지게 하시고 악한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서 허물어지게끔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이 ‘밤마다 나의 심장이 나를 교훈 하는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들이 세워놓은 질서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실 때에 우리에게 세워지기를 원했던 그런 사랑의 질서들을 따라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너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면서 세워진 것들이라면 무너질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워 올려 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 때문에 더욱 견고해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게끔 쌓아올려진 것은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요동치면서 무너질 위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으로 무너진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우리 자신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쌓아올린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너지고 변화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현상들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임재 앞에 살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요동함이 없는 그 편안하고 견고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의 정욕을 좇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악인에게는 항상 평안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스려서 자신의 사욕을 좇아 사랑의 질서를 계속 세우고 사물들을 쌓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끊임없이 이런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악인의 삶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이 악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삶의 삶은 흔들리지 않은 것이니 이는 날마다 하나님께 교훈을 받고 그 말씀에 찔림을 받고 인도를 받아서 자신의 심장으로 자기를 교훈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질서 속에서 사물들을 세우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들은 세우고 서기를 원하시지 않은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모든 자신의 세워놓은 것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기 때문에 하나님이 견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이 ‘악인은 요동하나 의인은 항상 견고하도다’ 마치 산이 견고함같이 성의 터가 견고한 것처럼 그렇게 견고하다고 노래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자신의 욕망을 날마다 부인하고, 주님이 자신을 선택해 놓으신 구속의 목적을 따라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