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첨하는 자와 교만한 자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시 12:1-4).
이것도 탄원 시인데 역시 다윗이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탄식하고 있는 바는 경건한 자가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자기나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 경건한 자가 끊어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을 정말 경외하고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이 신자의 마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자기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 세상이 꽉 차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쉽지 않고 매우 어렵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서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제 설교에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한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 전에는 이 세상의 부패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한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사랑하며 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친구이지만,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는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경건한 자가 이 세상에서 끊어진 것에 대해서 탄식하고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성도가 성도답게 살지 않을 때에는 성도와의 교제를 원하지 않지만, 성도가 참으로 성도답게 살 때에는 이 세상에서 성도와의 교제를 간절히 갈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성도가 성도답게 살 때에는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그리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아름답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면 수시로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외톨이가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을 함께 경외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오늘 시인이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하나님 앞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악한 사람들로 에워싸인 이 세상을 보면서 그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둘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 그들은 아첨하는 자들입니다.
이 아첨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행위입니다. 진실과는 상관이 없고 아첨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아첨은 대부분 자기보다는 훨씬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아첨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에 의해서 사랑의 질서들이 재편 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물들의 질서가 재편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아첨하기 마련입니다.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다스린다든지, 물질이 많아서 그 물질로 다른 사람들의 사물의 질서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그것이 큰 권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첨을 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첨과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반된 것입니다. 아첨은 비굴한 것이고 자랑은 교만한 것입니다. 사람 앞에 비굴한 사람이 사람 앞에 교만합니다. 그래서 이런 아첨이 사람에 대해서 행해지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들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만이 자기 인생의 진정한 행복의 근원이 되고, 하나님만이 자기 자신의 도움이시다라고 하는 이 신앙 고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아첨이 타인에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도 아첨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첨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와 마음 이런 것들은 바꾸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어떤 두려움, 내가 복을 받기 위한 그런 것,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일은 없이 어떤 행동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거나 복을 받아보려고 하는 이런 태도들이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치면서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려고 나왔는데 그 중에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나올 때 세례 요한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은 자마다 하나님이 찍어버리실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려고 나온 것입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 죄를 회개하고 버리는 진지한 참회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 없이 세례를 받으려고 나오니까 결국은 하나님께 잘 보여서 자신에게 임하는 진노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아첨입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어떤 일들을 행해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보려고 하는 태도 이런 것들도 하나님께 대한 아첨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첨이 하나님을 향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아첨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악한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이 점점 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진실해 져야 하는데 자기 스스로 아첨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편이 되어서 부패한 자신의 욕구, 자기 부인이 없는 자신의 이익, 방종한 삶, 이런 것에 대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는 자기 아첨의 삶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아첨이 얼마나 악인에 속한 특성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아첨에 빠지게 되면 자기 의가 쌓이지 자신을 엄격하게 정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기를 깨뜨리고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그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자신은 항상 부패한 욕망, 죄 된 생각, 이런 것들로 달려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감시하고 엄격하게 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내세를 묵상하고 이런 일들이 필요한데 그렇게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아첨은 비굴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고, 그 비굴한 것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이 될 때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해서 아주 비굴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고 안 살고 하는 것은 상관이 없이 자기 자신의 이익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에게 아첨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자랑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기리다’라는 뜻입니다. ‘기린다’라는 뜻은 찬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찬송하고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에게 속한 소유 같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높이고 칭찬을 해서 궁극적으로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을 자랑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랑이 계속해서 넘쳐나게 되는데 이런 것이 결국은 그 사람의 영적인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다 부서뜨리고 깨뜨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런 고백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의존의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의존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세리와 바리새인 둘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세리는 성전에 올라갔는데 자신의 죄가 떠올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두 팔을 벌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고개를 들고 기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이 세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울면서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고, 하나님께 대한 의존이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하시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게 해 주시니 감사하고, 십일조를 드리게 해 주시니 감사하고...’ 모두 다 자기 자랑입니다. 자기를 많은 사람들 앞에 뽐내고 자랑하다 못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뽐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할 리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정말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면 자신에 대해 아첨하기는커녕 자신에 대해 엄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진실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첨하는 대신 진실해지고 자랑하는 대신 겸비해 집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교만한 자는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