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에 대해 비는 기도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시 35:25-26)
녹취자: 안두현
원수를 향해서 시인이 그들이 악을 행하는 것처럼 자신도 악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원수를 너무 사랑하고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원수를 갑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입니다. 언젠가 한번 뭔가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비난을 받게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오해가 생겨났습니다. 그사람에게 사실은 내가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변명을 과정을 통해서 나는 사실을 말한다고 말했지만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내가 사람들에게 결백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순간 그렇게 비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제 마음에 주시는 생각이 이것은 정말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을 하고 평판도 깍아내리고 명예도 훼손하고 심지어는 근거도 없으면서도 이말 저말 하고 나중에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만약에 그런 입장이 되어 보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과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에게 원수를 갑는 것 그 자체 혹은 보복을 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악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엔 악인을 벌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시고 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에 복종하여 자신도 그 하나님을 따라서 판단하고 또 그 하나님께 복종하며 자신도 살아야할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악인인 것을 판단하시면서 벌을 주시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사람을 판단하고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판결을 내리셔서 모든 문제를 정상으로 돌려놓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 속에서 하나님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이 안해주실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깊이 의존하는 마음이 있으면 항사아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아닐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나의 한을 풀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결백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결국은 나를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혈기를 부리는 사람의 문제가 뭐냐하면 그 순간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사를 살면서 모든 것이 그렇게 즉시 즉시 명백하게 선후, 원인, 결과들이 딱부러지게 이어지고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서 벌받고 상받고 하는 것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렇습니다. 자기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데도 남보기에 복받은 자처럼 살아남고 선을 행하는데도 어떤 때는 고난을 받을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다루신다 생각하는 것도 독단입니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는 것이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도 눈물 나는 사연을 안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도 왜 그런지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꼭 그렇게 하셔야 했다라는 고백이 나오듯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있으면 절대로 그렇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결백해지기 위해서 그로하여금 나에 대해서 묻는 자를 향하여 나를 대적하는 자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자기가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나는 주 앞에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나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원수에게 악재를 당할때에 하나님께 호소하고 그래서 결국은 선하신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만 하면 또 내가 그릇 행했다 하더라도 뉘우치고 하나님의 선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주실 것이다 하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이렇게 만나 보면 저 사람이 웃어도 나를 좌불안석이 되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무표정해도 이상하게 그 사람 옆에 있으면 포근하고 기대고 싶은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냐 하면 지금 내게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이야기, 그리고 원수들로 말미암아 당하는 비난, 혹은 원수는 아니어도 내 마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 속에서 나를 향해서 평판을 깍아내리는 사람들의 그 원한과 비난. 이런 것들을 자신이 다 당하면서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이 내 편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지키실 것이며 내게 지금 일어나는 모든 가슴 아픈 일이 결국엔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 때문에 거기에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원수 갚고 싶고 자신은 욕을 하고 싶고 나를 때린 자를 나는 칼로 그를 찌르고 싶지만 나의 감정보다 더 높은 나의 원한이나 상처보다도 더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것을 참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 많이 봉사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오래 하다 보면 숙달이 됩니다. 교회 봉사하는 것도 그렇고 무례하고 교양 없던 사람들이 교회 오래 다니면 참 교양 있어집니다. 어쩜 그렇게 배우지도 못했는데 예절 바르고 교양 있게 되는지 모릅니다.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색했던 사람도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섬기면서 바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익숙하게 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뭐냐하면 사랑입니다. 내가 꽤 많이 주님을 닮은 것 같다 여겨지는데 어느 한 순간에 아주 쓰레기 같은 나의 본성, 원수 맺기를 좋아하고 한번 원수 맺으면 화해하기를 싫어하고 남을 판단하기를 하나님같이 하려고하는 그 무엇인가 단칼에 베려고 하는 잔인함이 어느 한순간에 은혜가 식으면 쓴물처럼 확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트림 꺽하면 신물이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위액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실 것입니다. 쇠를 녹일 정도입니다. 어렸을 때인데 제 동생이 500환짜리 동전을 먹었습니다. 집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모두들 큰일 났다 하는데 병원은 엄두도 못내고 있는데 그 다음날 24시간이 넘게 지난 후 변으로 나왔습니다. 물에 깨끗이 씻어서 가지고 놀았는데 하루만에 한쪽 면이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위에서 나오는 액이 쇠를 녹일 정도의 어마어머하게 강한 산입니다. 위의 벽이 잘 코팅이 되어 있어서 아무리 그것이 나와도 위를 손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위벽이 상했다 하면 이건 굉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지독한 산이 코팅이 벗겨져서 살을 파고 든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술을 많이 먹고 그러면 위가 천공이라고 해서 구멍이 뚫어집니다. 그렇게 무섭습니다. 그렇게 쓴 물이 올라오는 것처럼 한순간에 확하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이냐? 사랑은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지탱이 됩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면 혹은 누군가에게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마음과 영혼 안에 이미 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원수도 못 갚았는데 가서 한번 때려주던지 아니면 권력 있는 황제 같아서 한번에 불러다가 능지처참을 하든지... 못하지 않습니까 권력이 없어서... 그리고 마음으로 미워만 합니다. 그러므로 복수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은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기도가 잘됬는데 오늘 남편이랑 크게 싸우거나 아니면 시어머니나 시아버지 미워하는 마음이 있거나 자기에게 이런 처지를 허락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들면 한순간에 기도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 속에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가장 풍부한 언어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순가에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해서 채찍을 휘둘렀지만 그 채찍은 상대방을 때리지도 못하고 결국은 자신의 영혼을 휘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대부분 상처가 많은 사람을 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상처를 받기 마련인데 그런데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고 살아가면 우리는 남들에게 피해를 받았다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그 올무에 걸린 것처럼 묶여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미워하는 원수가 아니라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꺽어 포기하며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상처를 많이 받으면서도 자유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복도 하지 못하면서 자신이 그 미움의 사슬에 매여서 스스로가 자신을 묶어서 부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그런 모든 올무에서 벗어나는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무 것도 보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일의 시작과 진행, 종말까지도 모든 것을 이해하시는 분이시다라는 신앙을 가지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가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는 것이 한번 용서한 사람은 영원히 용서가 됩니까?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미워질수도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참 얼마나 인간이 묘한 존재입니까? 그러니깐 한번 용서한 사람을 계속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깊이 용서했는데 은혜가 식어지고 나면 다시 그 용서가 잊혀지고 옛날의 상처가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인간이 마음과 육체와 환경에서 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칫하면 어떤 신앙을 가지게 되냐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고 나면 아주 놀라운 해방만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엔 아무렇게나 살아도 참 잘될 것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얼마나 지혜로우십니까? 제멋대로 살던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깨달을때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시지요? 그리고나서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시면 자만해지기 쉽지 않습니까? 그때 또 이렇게 원수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고난을 당하면서 자신 속에 있는 끊임없는 악함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