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시 34:22).
영혼과 육체가 만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됩니다. 영혼만 있다고 해도 인간은 아니고 육체만 있다고 하면 더더욱 인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있는 시체를 향하여 인간의 의무를 다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또 육체가 사라지고 영혼만 남은 존재를 향해서 인생의 기쁨이 뭐냐고 묻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만나서 인간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는 영혼도 육체도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이셨고 마지막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부활하고 하늘에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그 몸은 지상에 계셨을 때의 그 몸과는 다른 몸으로써 공간을 넘나드실 수 있는 몸이셨습니다. 그런 몸은 후일 부활의 때에 우리도 입게 될 것입니다. 영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33년 정도 사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만 오늘날 우리가 겪을 것과 조금 다르고 나머지는 똑같은 양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그 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양쪽으로 뻗쳐서 알게 되지만 그러나 우리 몸에 보일 수 있도록 사람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그 분은 아주 영광스런 하나님 자신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예수 귀하신 나의 주님’이라고 노래할 때 그것은 이 세 토막의 시간의 구분 중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볼 수 있게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생애는 한정된 생애였습니다. 33년이라는 한정된 생애이고 그 한정된 생애 중에서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지극히 적은 부분이고 그 적은 부분 중에서도 우리의 찬송이 제목이 된 것은 또 그 시점으로 보면 더 적은 부분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은 영혼 이 끝에서부터 영혼 저 끝에까지 걸쳐있는 그 성자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드는 하나의 작은 바늘구멍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의 지극히 적은 일부분이지만 그 적은 일부분에 바늘구멍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이 끝에서부터 영혼 저 끝에까지 걸쳐 계신 우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신성과 무한한 인성의 깊이와 넓이, 높이, 크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찬란한 빛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찬송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점을 우리 인간존재에게로 이동하게 되면 우리의 육체는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나온 시점이 있고 사라지는 시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보다는 좀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의 연장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십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때에 맞이하는 시간이 틀립니다. 물 떨어지는 소리 똑 !똑 ! 똑! 하고 날 때마다 인생이 깎여져 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흘러갑니다. 이 세상에서 70이나 80 ,90이나 100 이렇게 오래 산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배회하면서 산 100년보다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꽂혀서 10년을 산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목표는 정해졌으나 에너지가 없는 10년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1년을 산 시간이 훨씬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육체는 시간 안에 태어나서 시간 안에 사라져가는 것이지만 영혼은 이 끝에서부터 저 끝에까지 걸쳐 있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오른쪽 끝이 시작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시작이 있고, 왼쪽에 끝은 시작이 있지만 오른쪽 끝은 시작이 없이 계속되는 유시무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뻗어가는 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영혼이 육체보다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의 육신을 멸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지옥 불에 던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몇 십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영혼과 함께 있다가 사라지는 한시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정말 소중하게 보십니다. 인간의 육체는 동물들의 그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의 유전자를 연구한 사람들이 동물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 사이에는 숫자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전공학이 발달하고 파헤치고 나니까 인간의 유전자와과 동물의 유전자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실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동물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영혼을 담아야 하니까 그 영혼이 움직이는 기능들을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인간의 마음과 육체를 통해 감각되는 모든 상상력의 경험들을 인간의 영혼 안에 역량을 미치도록 하시려니까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다른 육체적인 요소가 조금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뇌라든지 정신작용에 관계되는 것들입니다. 나머지는 거의 똑같이 일치합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소화가 안 되면 먹는 거의 모든 약이 돼지 췌장에서 만든 약들입니다. 왜냐하면 돼지 췌장에서 나온 분비액이 우리의 소화를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같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의약품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어마어마한 한계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자연적인 질서 속에 속해 있어서 하나님이 똑 같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은 물론이거니와 동물에 있어서도 많은 의약품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인간의 존재로 살아있다는 관점에서는 육체와 영혼의 통합을 이야기해야 되고 육체는 영혼 못지않게 매우 중요해서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고 영혼만 남게 되면 인간 존재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영혼과 육체의 통합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품에 안으시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혼 이 끝에서부터 저 끝에까지 우리의 영혼을 포섭하십니다. 베드로 사도가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라고 이야기 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오늘 구속되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영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속’이라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에 남에게 팔린 것을 물러온다는 뜻입니다. 물러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값에 물러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거기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구속 하신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국은 ‘죄에게 팔린 것을 구속 한다’ 인간이 범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주신 것이것이 구속의 원래의 뜻 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이 신분제도 즉 ‘종’이라는 제도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종들이 생겨납니다.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업을 상실할 때 종이 되는 것입니다. 기업은 땅입니다. 땅이 있으면 거기서 일구어 먹으면서 생존해나가는데 땅이 없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서 누군가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판다든지 전쟁에 잡혀 와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든지...
그런 상태는 자신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이 신년에 해방을 주시거나 아니면 안식년에 그 값을 지불하고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에게 돈이 많다면 그 돈을 주고 그 사람을 빼어낼 수 있는 데 그것이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구속이라고 한다면 범죄 한 자가 그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을 죄에게 팔리게 되었을 때 용서와 자비로 건져내어 주시는 것도 구속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구속의 개념이 시간이 흐르면서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속은 인간이 도저히 벗어나올 수 없는 위기와 고통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행동을 보이셔서 우리를 전격적으로 거기서 건져내 주시는 것을 가리켜 구속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애굽에 종살이 하다가 마지막에 거기서 하나님이 구출해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건으로 자주 자주 노래했습니다. 사실은 원래의 구속의 뜻보다는 훨씬 더 넓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갇혔을 때 하나님이 무슨 희생을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크고 놀라운 능력을 보이신 것 왜에는 하나님이 무슨 희생을 하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을 구속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운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이 구속은 영혼의 가치, 그리고 그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그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동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그 백성들에게는 감읍하는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이 이런 노래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그 영혼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위해서 일하고 섬긴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섬김은 육체에 대한 섬김이지만 영혼을 향한 섬김은 그야말로 영혼을 위한 섬김이기 때문에 영혼이 영원한 것처럼 그 섬김의 아름다운 의미도 영원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은 몰라도 영혼을 섬기는 이것은 자신이 아름다운 영혼이 끊임없이 아름다운 영혼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육체는 섬길 수 있지만 영혼은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만이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영혼을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은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위선이 되는 것이 되고 해 주지 않는다면 자기의 의무를 기피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영혼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어루만지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축복,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 이런 것들이 지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것들입니다.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내리는 축복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벗고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께 받을 그 사랑은 오늘날 우리의 영혼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통해서 미리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우리의 육체가 그 지존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데 도움이 될 때보다 방해가 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영혼을 소중히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한 말을 덧붙입니다. ‘주께 피하는 자는 죄를 얻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이 ‘죄’는 시인이 계속 원수들에게 쫓기고 고통을 받는 상황이니까 ‘죄를 얻지 아니하리라’이 말은 결국 인간이 상황에 몰리게 되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아름다운 하나님을 온전히 앙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이 복된 삶, 그러한 삶 가운데 있을 때에 영혼은 참 영혼일 수가 있고 그렇게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우심을 느끼면서 그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영혼답게 우리 인간존재에 이바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영광의 주를 보라
우리 마음으로 보는 이 지상의 눈도, 우리의 내면의 세계로 보는 이 지상의 눈도 마지막에 보는 것들을 우리 마음에 갖다 놓고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상을 통해서 보고 본 것도 우리의 마음에 실어다 날라주고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본 것도 그 영상들을 마음에 실어 놓아 줍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극장화면에 영상이 두 대를 가지고 두 영화를 동시에 쏜다면 두 개의 영화를 볼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육신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맑음과는 상관이 없이 언제나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맹인인데 그의 삶을 보면서 의사 한 사람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개안수술을 해주겠다고 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쯤 지나서 그 환자가 고백하기를 ‘내 육신의 눈이 볼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을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보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서 씻어내어서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물질들은 우리의 마음의 여유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에 부지런히 영상들을 실어다 날라주지만 우리의 정신세계와 영혼의 세계에 속하는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들은 우리의 마음이 여유가 없으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의 여유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마음의 여유 그래서 그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그것이 없이는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는 바로 이렇게 우리의 영혼의 소중함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육체에 탐닉하게 되고 거기에 온전히 몰두하게 됩니다. 그 때에 거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육체의 충동에 의해서 자기의 육신에 도움이 되는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지혜를 잃은 육체를 이끌면서 우리의 영혼은 피곤한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거기에서 보복, 미움, 음행, 살인, 폭행 각종 더러운 인간의 추한 것들이 모두다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그런 것들에 의해서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누구를 시기하고 미워함으로써 영혼이 무슨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게 됩니다. 원수를 갚고 사람들을 살인하고 미워하는 것을 통해서 영혼이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히려 우리 스스로 영혼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누군가를 미워할 때 가슴 속에서 큰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오히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를 소망하고 다시 만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는 그 내세적인 것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정신적인 힘에 의해서 영혼은 보호를 받고 사랑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영혼을 구속하실 때 인간이 죄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면 육체만을 편애하면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끊임없이 가슴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통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깊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을 사는 자신의 존재 그리고 우리의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생각 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도이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찾아가면서 이 세상에서의 어떤 환경의 변화, 여건의 변화, 이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공급되는 모든 좋은 것,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영혼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본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집착 그리고 그 분께로 돌아가려는 영혼의 순수한 몸부림 이런 것들이 육체에 까지 베어서 나타나는 그것이 구도의 삶입니다. 그도 연약한 인간이니 쓰러질 때는 왜 없겠으며 넘어질 때는 왜 없겠습니까? 언제든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의 인생의 참다운 즐거움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서 찾거나 우리의 삶의 어떤 양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참된 양식이신 ‘진리’ 거기에서 찾고 끊임없이 자기를 꺾고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자신의 삶을 진리에 합치시킬 때 거기에서 나오는 그 희열 그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