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시 39:2-5).
2절부터는 구체적으로 1절에서 내린 결심, 즉 시련을 당할 때 내 행위를 조심해서 범죄치말아야지 하는 그 결심을 어떻게 이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2절에서도 똑 같이 ‘내가 잠잠하자. 악인이 나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줘도 내가 침묵하자’ 이랬더니 내가 단숨에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게 아니라 화가 밀려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란 말이예요.
그래서 인간이 분노가 폭발할 때에는 말부터 폭발하는 거예요. 잠잠코 있다가 화가 나니까 사람을 때리거나 물건을 부스며 집어던지는 게 아니라 분노가 폭발하면 말부터 폭발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이 먼저 잇고 나서 언어가 오는 거예요.
비유를 하자면, 우리가 설날에 만두를 만들잖아요. 만두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잖아요. 결국은 그게 어떻게 만들어졌든지 그 만두껍질은 하나의 반죽에서 나오잖아요. 인간이 무엇인가 감동을 받거나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 출렁거리는 것 자체가 비유를 하자면, 여러 가지 모양의 만두를 만드는 만두의 반죽의 크기에요. 희로애락 무엇이든지간에 크게 경험을 하게 되면 큰 덩어리가 형성돼요. 부딪치는 느낌이 거의 없으면 형성이 안되는 거죠. 거기서 많은 글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예술가의 정신은 평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거의 느낌이 일어날 수 없는데 그 사람은 그것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가의 정신이죠.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깜찍 놀라는 거죠. 그렇게 해서 감정에 커다란 덩어리 들이 형성될 때 그것이 구체적인 언어로 만들어 지는 것이 만두를 하나씩 하나씩 빚는 것과 같단 말예요.
그러니까 시련을 만나고 원수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덩어리는 형성하는 거죠.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 막 나오는 거죠. 여러분 그런 경험 안 해봤어요?
누군가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밤새도록 떠오르는 게 말이 예요, 말. 가상 속에 그 사람을 세워놓고 자기가 말을 하는 거죠. 자기가 내세우는 논리로 여러 가지 말을 하는데 화가 나는 거죠. 이 시인이 새로운 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경험한 똑같은 것을 경험한 거죠.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고 성화되어도, 희로애은 있게 마련 아니겠어요? 다만 그것이 모두 언어로 만들어 지는데 그것을 표현하느냐 안하느냐가 성화된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거예요. 근심이 더하고 마음에 묵상할 때, 묵상이라기보다는 생각할 때, 화가 확 발하면서 감정자체가 흔들리는 거죠. 이때에 시인이 1절에서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자갈 아시죠? 말을 잘 운전하기 위해 입에 물리는 거죠. 막 달리는 말을 당기면 입이 찢어질듯 아프니까 말이 멈추는 거죠. 그런 자갈을 어떻게 물렸는지 보여주는 거죠.
그게 뭐냐하면, 시련을 당하면서 자신이라고 하는 인간의 가치, 인간의 생명의 길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볼 때 자신의 존재가 정말 하찮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인생의 길이가 주앞에서는 없는 것 같고, 나의 날은 손넓만큼 하게 하셨나이다’ 한 뼘이라는 거죠. 그것은 뭐냐하면, 한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잴 수 있는 길이데 하찮다라는 것 아니겠어요? 인간의 길이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나의 일생이라고 하는 시간의 길이가 주앞에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면서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다고 말하잖아요? 그것이 아무리 귀해도 오래 있지 않는 것은 귀하게 취급을 못받아요. 잠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생의 길이로 볼때 하루살이는 정말 하찮아요. 왜냐하면 오늘 아침에 태어나서 오늘 저녁에 사라지니까. 그것이 하루살이의 일생이니까.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별에다 비교한다면, 별은 몇억년, 몇십억년이 지나면서 생겨났다 사라지곤 해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인간의 인생이 80연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로 바람처럼 지나가는 없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런 거죠. 엊그제도 자료들을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가 살고 있는 별들이 속해있는 곳이 우리 은하계라 그래요. 약 2천억 개의 별이 잇고 그 2천억 개 안에는 수성, 금성, 지구 같은 것들은 해당이 안 되고 태양 같은 것들만 2천억 개가 있다고 그래요. 그것을 은하라고 하는데,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은하를 안드로메다 은하 예요. 그것이 시속 50만 킬로미터로 우리은하를 향해 돌진해온데요. 시속 50만 킬로미터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냐했더니, 우리 은하가 2천억개의 별이 되고, 그게 1천억개에서 2천억 개 사이인데, 30억년 후에는 두 은하가 합친다는 거죠. 약 3천억개의 별이 되는 은하가 되는 거죠. 합치는데 만나서 스쳐지나가다가 별의 중력으로 끓어당겨지면서 그별들이 함께 덩어리가 지게 되는데 약 1억년정도 걸린다는 거죠. 우리가 이야기할 때 그게 10억년, 30억년, 1억년 하는 그것이 우리이게 어마어마하고 상상이 가지 않는 수지만, 인류의 역사가 기껏해야 문자기록이 남겨진데 5000년 될까 정도 밖에 하잖아요. 그런데 1억년, 10억년하니까 이해가 안가는 거지만, 별들의 나이로 보면 아주 잠깐 지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인간은 없는 것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렇게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사는 기간이 순십 간에 지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관점자체가 여기에 있어서는 안되고 나밖에 영원한 세계에서 나를 보는 관점이 있을 때 내가 속히 지나가는 하찮은 아주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우리가 가진 욕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이런 것들이 어떤 것들이 영원을 향해 의미가 있고 또 의미가 없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것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요, 또 살아가는 삶의 슬기라고 할 수 있죠.
시인이 이것을 깨달은 거죠. ‘아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지만, 나의 일생자체가 하나님 앞에 없는 것 같구나. 그리고 정말로 등든히 서있는 그때에도 그림자 같을 뿐이구나’하는 것을 깨닫는 거죠. 그렇니까 어떻게 되요? 사람이 자기가 집착하는 것을 버릴 수있는 용기, 이런 것들이 생기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빛 아래에서 우리의 인생을 비춰 보아야지만 이 인생의 참된 가치,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장사집에서 슬기를 얻는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얽매이기 쉬운 욕망으로부터 벗어버리고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순례자와 같와 같은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