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과 인자를 구할 때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이 부분은 이제 지금 드리는 기도라기보다는 과거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 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 안에는 시제가 종종 섞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과거처럼 묘사되기도 하고, 또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인데 현재처럼 묘사되기도 하죠.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시인이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는데 쓴 시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래서 인간의 기억 속에는 현재든 과거든 또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측이던지 간에 다 하나의 평면에 존재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머릿속에는 사실 시간을 초월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죠. 무슨 소리인지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어제 10년 전에 일어난 일은 과거의 일이고 같은 과거라도 어제에 일어난 일은 훨씬 가까이에 일어난 일 아니에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예전에는 안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이 전부다 하나의 기억 속에 들어가 있어서 일단 기억 속에 들어가고 나면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나, 어제 일어난 일이나, 지금 일어난 일이나 똑같이 하나의 평면에 있지, 10년 전에 일어난 기억은 회상을 하는데 1시간이 걸리고, 어제 일어난 일은 1초가 걸리지 않느냐 이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평면 속에 존재하는 과거, 현재 그리고 어쩌면 미래에 기대하는 것, 이런 평면을 오가면서 전개하기 때문에 시재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 회상을 하는 거에요.
뭐냐 하면 깊은 수렁이와 웅덩이에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를 "주의 긍휼을 내게서 그치지 마시옵소서" 이게 가장 간결한 기도였던 것이죠. 한 번만 드린 것이 아니라 이런 기도를 그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여러 번 반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드렸던 것이에요. 그게 바로 이 시인이 회상하는 바였습니다. 이 성경에서 나오는 긍휼이라고 하는 단어는 무슨 의미냐 하면, 원인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어떤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슬픔어린 연민을 갖는 것을 가리키는 거에요. 그것이 긍휼이에요.
예를 들면, 사람이 똑같이 다쳤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일을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있고 장난치고 까불다가 다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그 둘은 아주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 임금인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다친 것이고 하나는 그렇게 일해야 할 시간에 일하지 않고 까불고 장난치다가 다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똑같이 고통 받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저 사람은 참 가치 있는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고 그 인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그렇게 고생을 해도 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든지 간에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상태에 대한 슬픔을 동반한 연민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싸다 싸" 이렇게 얘기하는데,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하면서 슬픔어린 연민을 동반한 그런 슬픔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고통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성향의 문제에요. 그 성향이 뭘까? 사랑! 간단하잖아요.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의 성향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긍휼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사람이 긍휼만 가질 수 있다는 게 불가능해요. 그 긍휼은 사랑이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감정적인 표지에요. 나의 표현으로 이야기 하면 '정동적인 표지'라 이렇게 얘기해요. 사랑이라고 하는 성향이 자기 안에 없으면 그렇게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면서 슬픔어린 연민을 가질 수 없는 거에요.
그렇게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이니, 이는 이미 이 시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 그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그가 살아계신 것과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라는 사실, 이 두 가지를 믿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11장 3절, 4절은 우리에게 말해요.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거에요. 두 번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여기서 "하나님을 찾는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에게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찾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죠.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분이 자기 인생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부합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인정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거죠. 근데 그것은 단지 머리로 찾는다던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전 존재를 가지고 찾는 것을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를 들자면 "잃어버린 지갑을 찾는다", 아니면 "돈을 찾는다" 이런 개념하고는 틀린 거죠. 그것은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을 찾아서, 그것을 찾음으로 자신에게 더 좋은 만족을 위한 것이지만, 여기서 얘기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찾는 것이 아니에요. 어쩌면 그 찾는다는 의미는 하나님 밖에서 찾던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찾으려고 하는 그러한 노력을 의미하는 거죠. 그게 바로 믿음의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고 하는 그 사실은 "하나님이 사랑으로써 살아 계시다"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이 간절한 기도는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성향을 믿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이에요. 그리고 이 신앙이 바로 이 시인으로 하여금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성향을 믿는 거에요. 자기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자신이 처한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인해 하나님이 긍휼이 여길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은 달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긍휼이 여길 것이라는 신앙, 그런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쓸모없는 죄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면서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해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인자와 진리' 두 가지는, '헷세드'와 '에메트'인데, 이 두 가지는 특별히 이 다윗의 시에서 짝으로 아주 여러 번 등장한 표현입니다. 이것도 저는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였던 그 풍부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표현이라고 저는 믿어요. 그러면 이 인자와 진리라는 것이 무슨 관계에 있느냐 하면 말이죠. 하나님이 자신이 어떤 경우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 그 성품과 관련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인자와 진리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 인자는 히브리 말로 '헷세드'에요. 이 '헷세드'가 뭐냐 하면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그것을 여기에서 '인자'라고 부르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인자는 어떤 사람의 자격을 가지고 더 줄자에게 더 주고 덜 줄자에게 덜 주는 그런 종류의 그 사람의 사람됨이나 공로에 따라서 나누어 주는 그런 걸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이건 뭐냐면 어떤 사람의 선하고 좋은 상태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역시 같은 사랑의 성품, 그 사랑의 성품 때문에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매우 특별한 호의, 은총을 가리키는 거에요. 그래서 이 '헷세드'라고 하는 단어가 피동명사 '핫시드'라는 말로 쓰이면 이게 성경에서 번역한 '성도'가 되는 거에요. 이게 원래 '성도'는 그런 '헷세드'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거에요.
그러면 이제 여기서 어떤 질문이 나오냐 하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렇게 분에 넘치는 자비, 분에 넘치는 은총을 베푸실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맺으신 언약관계에요. 이 언약관계 안에 내포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 이 '헷세드' 곧 '인자'에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끝없는 은혜와 용서를 베푸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셔서 그것이 언약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이에요. 또 들어가면 굉장히 정치한 담론들이 이루어지지만, 좀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얘기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약관계인데,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바에 따라서 하나님이 똑같이 대하시면 그러면 이 언약관계는 유지가 될 수 없는 거죠. 왜냐하면 인간이 수시로 언약관계를 깨뜨리니까, 그러니까 만약에 "네가 그러면 나도 끊는다"라고 해서 하나님이 만약에 이 관계를 끊으시면 "나는 영원히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는 이 성경 최대의 언약은 성취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면 이제 여기서 딜레마가 생기는 거죠.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이 뭐라고 하던지 간에 무조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면 인간이 구지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이유가 없죠. 제가 말씀드리잖아요? 죄짓고 악하게 하는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성결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렇죠?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하셔도 안 되는 거죠. 어려운 문제죠? 그래서 인제 도입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끊임없는 용서와 긍휼 그리고 은혜 베푸심과 사랑, 이런 것들은 그대로 약속되어 있고 실제로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셔서 인간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언약관계가 파기되지 않도록 인간을 붙드세요. 그렇게 해서 그것을 유지하시면서 단,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풍부한 생명과 은혜를 일시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곤고해지도록 만드심으로써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계속 하시는 거죠. 그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죠. 당신을 버린 인간들을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성향 때문에 버리지 않고 붙들고 계신 것, 그래서 그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것, 그리고 용서와 긍휼에 대한 약속이 여전히 살아 있고 하나님은 베푸시지만 인간의 마음이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부으시는 사랑과 자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은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간을 인도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의존하면서 살수밖에 없는 그런 백성들이라는 거죠.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인자가 풍부하게 드러나는 거에요. 진리를 떠난 하나님의 사랑, 진리를 떠난 하나님의 자비, 진리를 떠난 하나님의 큰 인자, 이런 것들은 신뢰할 수 없는 경험이에요. 그래서 인자와 진리를 항상 같이 가는 것이에요. 시인이 기가 막힐 수렁이와 웅덩이에 있을 때에 이것에 대한 사모함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