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플 때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3-4).
맨 첫 절에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이제 이어서 2절과 3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후대해 주시는 지를 기술해 나아가고 있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아마도 이것은 시인 자신을 하나님 앞에 비겨서 그래서 한 말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빈약한 자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곤고한 그런 사람들을 도우십니다."하고 고백을 하면서 병들었을 때를 이야기 한 거죠. 병들었을 때에 일생에 빈약한 자를 권고하고 붙들며 하나님 때문에 자비를 베풀며 살았던 그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 병상에서 저를 붙들어 주시고 병중에 그 자리를 다 고쳐서 폅니다. "그 병상에서 낫게 해 주신다." 그런 뜻이겠죠. 이 시인이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의 하나님의 자비를 가늠하는 아주 훌륭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친절 중에 하나가 병중에서 저를 위로하시고 고치시는 것이었죠. 지금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의료혜택이 없던 때이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은 항상 이 세상에서 살면서 질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선교 초기에, 초기뿐만 아니라 60년대,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을 낫는 그것이 주님을 알고 믿게 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죠. 그만큼 의료혜택이 없고 하니까 질병에 대해서 무방비로 노출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죠. 이때는 더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시인이 자신뿐만 아니라 이제 일반적으로 보면 하나님 편에 서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빈약한 자를 붙들고 위로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던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 질병에서 그를 돕고 외롭게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셔서 그들을 일으켜주시는 것들을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의 연장선상에 있다 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아마 하나님이 그렇게 베푸시는 은혜의 많은 친절들을 이 시인은 언약백성들의 공동체 속에서 많이 경험했을 거에요.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경험,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아주 분명한 약속, 이런 것들을 붙들면서 이제 하나님 앞에 본론을 말씀드리는 거에요. 그 본론이 뭐냐 하면,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 41편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깊이 참회하는 그런 배경에서 쓰여 졌다고 우리들이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거죠.
이 다윗은 그야말로 영혼의 침체 속에서 이 영혼과 육체가 인간 존재에서 어떻게 하나 되는 지를 잘 보여주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는 어김없이 육체의 큰 고통이 찾아왔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참회할 때에 자신의 살가죽이 뼈에 붙는 것 같은 그런 육체의 상태가 되었고 눈이 깊이 푹 패여 그렇게 가련한 육체의 처지가 되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회개와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진지하고 절실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 시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을 때에 그는 영혼만 병든 것이 아니라 육체도 깊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속에 살았던 이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신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찾고 갈망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잘 되고 좋은 날에는 별로 표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잘 안되고 어둡고 힘든 그 날에 그 때에 신자가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간절한 갈망과 몸부림, 그것들이 얼마나 절실한가 하는 것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그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은 육체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아주 많이 사랑하는 자녀인대도 그릇 행하고 당신을 떠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떠남으로 말미암아 그 신자가 받게 되는 큰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소중한가 하는 것을 깨닫는 기회로 삼게 해 주시는 거죠.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고통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닫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자비 속에서 그분의 말씀의 빛 아래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말씀의 빛이 없는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끊어진 단절 속에서 살아가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이 없으면 단지 그것이 없는 것이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범죄함으로 영혼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고 육체는 그 고통하는 영혼으로 말미암아 질병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시인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는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아뢰며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빈약한 자를 붙들어 주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병들었을 때에 주님이 그의 육체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모든 질병 중에서 건져주시는 것처럼 또한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병들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그래서 자기를 그 영혼의 깊은 질병의 상태로부터 건져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병들지 않는 건강 속에서 육체가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이 어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병이 들게 된다면 그러면 즉시 그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는 한 때는 병들었으나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죠. 똑같이 우리의 영혼도 순결하고 하나님 앞에 죄짓지 않은 상태 속에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장 경건한 신자의 영혼이라도 범죄하고, 예전에 하나님 앞에 말씀과 그리고 그 은혜의 감화를 입어 빈약한 자를 붙들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면서 섬기던 사람도 때로는 죄를 짓고 영혼이 추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육체와 꼭 같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리고 치료를 통해 고침을 받음으로써 영혼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언약 아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그 무한한 두 개의 약속이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끊임없는 은혜의 베푸심과 그리고 그렇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무한한 용서, 이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늘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의지하였던 모든 경건한 성도들은 한 결 같이 이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은 인간들이 지은 그 많은 죄와 그리고 그 불순종을 통해서 오히려 영광을 받으시는 거죠. 불순종과 죄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곤고해진 영혼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던 모든 것들이 자신의 영혼에 진정한 쉼과 위로,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병들었을 때 참된 치료를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의지하며 사는 것 밖에는 인간에게 아무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 같은 후기 청교도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의 육체의 양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떡과 물이지만, 우리의 영혼의 양식은 또 다른 먹을 것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의 용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가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진실한 뉘우침,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행했던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를 다 보여 드리는 자기 개방, 머리끝부터 발끝, 무엇 하나도 하나님 앞에 숨기는 것이 없는 솔직함과 그리고 진심함,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일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고 뼈아픈 양심의 가책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 진실함과 아름다운 성실함, 그것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다시 일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짓과 허위, 그리고 위선과 그리고 그 모든 위장, 이런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한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말씀의 찬란한 빛 앞에 자신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아름다운 헌신으로 다시 옷 입기 위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받은 적이 없는 모든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누구도 그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그 크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손에 붙잡히는 떡과 물, 그리고 우리의 일생의 육신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받은 그 감격은 마치 하나님의 그 은혜를 물에 세기는 것 같이 잊혀 집니다. 그러나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주신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그 모든 자신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진 영혼의 상태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죄의 은혜, 이것은 돌에 세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잊지 않고 우리의 가슴에 남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부당하게 대해주시는 것 같을 때 우리를 어떻게 이 세상에서 용서해 주셔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나를 소외시키는 것 같은 외로움이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회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기에는 너무나 큰 죄를 지은 것 같았을 때, 주님이 우리를 어떤 죄악 가운데 있을 때 건져주셨는지, 주님을 믿고 알게 된 그 이후에 우리의 삶과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반역하던 우리의 옛 삶을 한번 대조해 보십시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이 경험하고 또 하나님 앞에 받게 되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사랑이며 자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