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상한 마음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3-4).
여기에 보면 시인이 망명한 곳에서 당하고 있는 설움과 그리고 과거의 하나님을 섬겼던 추억에 대한 회상이 함께 나옵니다.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은 망명을 한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인과 아마도 이 시인과 함께한 무리들에게 물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말이죠. 제사는 드릴 수 없었겠지만 아마 거기서도 율법을 묵상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는 올릴 수 있었겠죠. 그러한 여호와 종교의 행위를 보면서 그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뇨?" 네가 그렇게 공경하는 하나님이 이 천상과 천하에 최고의 존재이시고 그리고 너를 지키시는 분이라면 왜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나라에 망명을 올 지경이 되었느냐 라고 그렇게 물었던 것이죠.
사연이 없는 사람에게는 스쳐지나가는 이야기도 사연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쓰라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러한 말을 많이 안 쓰지만 우리 어렸을 때 한동안은 무식하다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사실 그 때 무식하다는 말은 공부를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행하는 일이 조리에 맞지 않고 이치를 잘 모른다는 뜻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일을 지혜롭지 못하게 했을 때 무식하다고 말하면 상처가 안 됩니다. 얼굴 예쁘게 생긴 사람에게 “얼굴도 못 생긴 게.” 해도 별로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 기도도 안하느냐고 하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못생긴 사람은 그 말에 깊은 상처가 되고 싫은 말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그런 것이었죠. 그 사람들이 꼭 조롱하려고 물어보지 않더라도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러고 물어보면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그 마음에 깊은 찔림을 받으면서 그가 보인 반응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뭐라고 얘기 하겠어요. "나와 함께 한다. 우리와 함께 한다." 그러면 "너희가 어떻게 나라를 잃어버리고 우리 땅에 쫓겨 와서 더부살이를 할 수 있느냐?" 묻지 않았겠어요?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주야로 음식이 된 이 눈물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눈물이었을까? 아마 이 눈물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고통스럽고 아파서 우는 그런 상처의 눈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 주님의 징계를 받으니, 우리가 잘못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시니,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이방의 땅에서 모욕을 받는구나" 하는 그런 눈물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하니,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슬픔 속에서 그는 먹고 마시는 모든 일들조차도 마음속에서 어떤 기쁨과 참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멀어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인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시인의 일은 성전에서 수종을 들며 하나님을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잘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며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한 추억을 인해서 마음이 깊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리고 주님을 향한 그리움이 이 마음속에 더 많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어제 병원에 가서 심방을 했어요. 의사의 이야기로는 곧 임종할 것 같이, 막바지 지경에 온 그런 형제였어요.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해요. 그래서 한 번을 갔는데, 그래서 어제 또 갔어요. 그래서 이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우리가 꼭 붙들고 얘기했어요.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말거라,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주님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그래서 많이 아프대요. "아픈 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짧은 인생 살아오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했던 기쁨,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셨던 참 크고 놀라운 일, 그리고 따뜻한 사랑, 그것을 생각하거라. 내가 널 위해 죽으면 참 좋겠지만, 깊이 생각하거라."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그 때에 네 마음속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찰거다. 어느 순간에 주님이 뜻이 계셔서 널 부르실 그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 되게 하거라."
만약에 이 시인이 단지 인생에서 괴로웠던 일, 그리고 다윗 왕을 반역하여 왕권을 뺏은 반역의 도당들을 생각하며 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것에서 그쳤다면, 이렇게 경건한 슬픔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 환란을 통해서 자기를 돌아보게 만들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을까요? 불가능하죠. 그래서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쓰라린 일, 괴롭고 힘겨운 일,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문제를 일으켜서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을 보지 말고,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시는 우리의 삶의 질서의 주관자이시고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해요. 가장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삶의 상황에서 가장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였던 그 달콤한 기억을 생각하는 것은 침체에서 벗어나는 오래된 경건의 기법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겨했던 일이 회상하는 일이었어요. 회상을 하면 지금 처해있는 여건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향한 아주 기쁜 찬송과 경배가 이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거에요. 이 시인이 그것을 기억합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 원래 이 "상한다."라고 하는 이 말은 제가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데, 히브리말로 말하자면 이런 의미에요. "부패해서 상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실컷 두드려 맞거나 어디에 많이 부딪치면 어혈이 들잖아요. 시커멓게. 그러고 나면 손을 살짝 대기만 해도 자지러질듯, 말하자면 타박상을 입었기 때문에, 손가락만 대도 자지러지게 아프거든요. 그런 상태를 가리키거든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상하지 않았을 때에는 살갗에 웬만한 것이 닿아도 감각이 없었을 텐데, 상하고 나면 아주 작은 것이 닿아도 아주 뚜렷하게 감각을 하고 통증을 느낄 수 있겠죠. 마음이 그런 상태가 된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의지, 이런 것들이 느껴질 때에 그때 그것에 대해서 일일이 반응할 수 있는 그런 감각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에요. 그런 감각이 우리의 육체가 아닌 마음에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예전에는 하나님이 고함치듯 말씀하셔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셔도 보지 못하던 그런 사람들이 아주 작은 하나님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아픈 마음, 기쁜 마음,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게 뭐에요?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복잡할 거 없어요.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이 뭐에요? 하나님의 마음과 그리고 그 선한 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의 핵심이에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마음이 아주 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그 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오늘 여러 분들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