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복종하라
녹취자: 김정규
가족관계 회복에 대한 강의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주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입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벌써 기분이 나쁜 여성이 계실 것입니다. ‘요즘 어떤 시대에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가정에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의무를 말한 후, 남편이 아내에게 행할 의무를 말합니다. 이는 가정에 주는 첫 번째 교훈이고, 이것은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족 관계에 있어서 질서의 시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떤 사람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한 쪽에서는 여전히 전근대적으로 남성이 여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억누르는 가정도 있지만,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여성들(아내들)의 권한이 대폭 증대되어서 남편들이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주셨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아내와 남편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십니다. 그리고 그 둘을 한 몸으로 창조하셔서 아내와 남편으로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결혼은 육체의 결합인 동시에 영혼의 결합입니다.
결혼을 해도, 남자는 여자와 다르고 여자는 남자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을 때까지 남자는 여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여자도 남자를 끝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부지런히 남녀를 공부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여자는 남자를 너무 모르고, 남자는 여자를 더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갈등을 안 일으켜도 되는데 더욱 심각한 갈등을 만듭니다. 긴 세월을 살아보니까 -제가 올해가 결혼 38주년인데-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랑하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을 느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되면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사랑은 굳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해를 못해도 상대방과의 관계를 위기로 몰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가,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다릅니다. 처음부터 저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개척하고, 도전하고, 성취하려 한다면, 여자는 질서를 세우고, 평안을 도모하며, 관계를 세우려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서로 다른 사람을 결합시키셔서 서로 모자라는 것을 보완하여 보다 더 완전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남녀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상대방의 결함은 다른 상대방에게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몸에 구멍이 뚫린 남녀의 그림) 구명이 뚫어진 부분은 ‘결함’입니다.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랑의 위대함을 깨달을 때, 남편의 결함을 보고 소명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남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때, 남편은 아내가 가지고 있는 결함을 보면서 소명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이상적인 부부생활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연애할 때는 좋은 것만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른들이 콩깍지가 쓰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연애할 때는 상대방의 결함이 무엇인지 안 보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이틀에 한번 -너무 좋은 사람이야 매일 만나겠지만- 며칠에 한번 만나는 관계일 뿐이지만, 그 여자가 어디에 사는지, 집안을 어떻게 하고 사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냥 자기만 싹 빠져나와서 예쁘게 하고 나온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터득한 지혜가 있습니다. ‘꾸미고 다니는 것만 봐서는 그 사람의 살림살이를 알 수 가 없다.’ 자매들 중에서도-청년들마다- 예쁘게 단장해서 그림같이 교회에 나타나지만, 그 자매의 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삶의 현장을 봐야 합니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결점도 눈에 안보이지만, 결점을 노출시킬만한, 흠을 보일만한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면, 24시간 같이 자고 아침에 눈떠보면 옆에 있고, 그러고 싶어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나서 부터 그렇게 결점이 보이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생활의 태도가 이럴까?’ 설거지도 안하고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면 아내는 쉽게 말합니다. ‘뭐가 어때서? 사는데 무슨 지장이 있느냐?’ 라며 다툽니다. 일상적인 삶인데 중대한 인격적인 결함들을 보게 됩니다. 결점이 보일 때, 사랑이 마음이 넘칠 때는 불쌍하게 보입니다. ‘저렇게 결함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왔는데 나 없는 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연애할 때는 결점을 고백해도 그것을 딛습니다. 그러나 전혀 모르고 결혼을 하면 속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이 제품을 잘 못 골랐구나, 충분히 두르려보고 고를걸, 수박을 따볼걸’ 하고 말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수박을 삼각형으로 따주지 않습니까? 안 익었으면 안사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따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따보겠습니까? 왜냐하면 연예를 20년 동안 해도 1년 동안 결혼해서 알 수 있는 것을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결혼을 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결함들이 있을 때, 결혼생활에서 힘이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혼 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며, 이는 결혼생활의 관건입니다. 살면 살수록 이 여자가 너무 훌륭한 여자다. 살면 살수록 이 남자가 너무 훌륭해서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하고 결혼하겠다는 것은 많이 살고 난 다음에 기분이 좋을 때 긍정적으로 하는 얘기입니다.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어느 날 저녁때 “여보. 나 좀 봐. 나 당신 사랑해.” “고마워.” “근데 오늘 밤에 고백할 것이 있어.” “뭔데?” “나 다시 태어나도 꼭 당신하고 결혼할거야.” 하니 아내가 “당신은 어떻게 다음 생에도 당신 맘대로만 하려고해? 당신 생각 만 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내가 38년이라는 세월을 살면서 얻은 지혜입니다. 우리 부부가 마지막으로 약간 언성을 높이면서 말다툼한 게 26년 전 입니다. 그 후로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언성 높이는 것을 큰애는 한두 번 봤는데, 작은 애는 거의 못 봤습니다. 그럴 일이 없습니다. 어떤 결함을 발견하면 ‘아 저 여자가 저 결함을 안고 60년을 살아왔는데 하나님의 뜻이 저것을 내가 칼로 파내어서 고쳐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것을 보충하며 살라는 것이 나의 소명일까?’ 여러분은 어느 쪽일 것 같습니까? 그 집 남자의 엄마 아빠도 평생 그 남자를 못 고쳤습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잠깐 살고 그것을 뒤집어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마어마한 죄가 아닌 한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이 사람의 결함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결혼에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이 있고,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이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은 이제 다루겠지만 괴롭게 하지 않는 것,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은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종하다’라는 이 단어가 ‘휘포타쏘(ὑποτάσσω)’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둘로 나눠지는데, ‘휘포(ὑπο)’라는 ‘아래’라는 뜻의 전치사와 ‘타쏘(τάσσω)’는 ‘배치하다’의 의미입니다. ‘질서 상으로 아래에 배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 동양사상에서 이해하는 부부관계하고는 좀 다릅니다. 맹자가 인간과의 관계를 규율해야 할 중요한 원리를 얘기합니다. 예를 들자면, 아버지와 아들은 친해야 하고, 임금과 신하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하고, 부부사이에는 유별함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친구들 간에는 신의가 있어야 하는 원칙을 이야기 합니다.
‘부부유별(夫婦有別)’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는데, 확실한 것 하나는 ‘부부’가 ‘유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부와 부를 끊어서 유별이라고 볼 수도 있고, 부부를 하나로 합쳐서 유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해석은 첫째로 부부가-남편과 아내가-둘 사이에는 뭔가 또 다른 성향과 질서, 자리, 기능에 있어서 부부사이에 그런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부’는 유별해야 한다. ‘부부는 다른 부부와 유별해야 한다.’ 이것은 부부는 부부 끼리만의 관계가 있어야지 다른 부부와 관계가 섞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맹자까지만 해도 여성에 대한 것을 굉장히 존중합니다. 그런데 후에 주역이 나오면서 주역에 대한 해석을 남녀관계에 잘못 적용하면서 소위 남존여비의 사상이 나옵니다. 이것은 동양에서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모본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도 여성의 참정권을 1920년까지 주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주 별로 어느 주에서 먼저 늦게 주고 이러다가 1920년에 헌법이 개정되면서 모든 여성에게 투표할 수 있는 참정권을 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00년도 안된 최근의 일입니다. 미국이 독립이 1774년인데 그렇게 보면, 현대에서 짧은 역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과 관련시켜서 여성을 남성보다 비하하는 의미에서 복종하라는 대목을 다르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남편과 아내가 그 둘을 결합시켜서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상정하시는 질서가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자리와 여자의 자리를 기능적으로 나누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종한다고 할 때 대상은 남편입니다. 이 서신서가 이야기하는 남편은 교회에 있는 남편들이며 이들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경외하는 남편, 최소한 그런 남편에게 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힘의 논리를 가지고 복종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폭압과 강제가 아니라 사랑과 상호존중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가정 안에서 찾아가는 관계에서의 복종을 이야기합니다.
가정 안에서 남녀가 이렇게 있는데, 서로가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충분히 이해하면서 남편과 아내를 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연애할 때 너무 사랑했으니까, 결혼하면 모든 것이 아주 환상적으로 들어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느끼는 사람은 매우 착각하는 사람이거나 특수한 사람입니다.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그렇게 환상적으로 맺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학교에서 그렇게 많은 친구들을 사귀지만 그렇게 환상적으로 우리가 서로 잘 맞는다는 생각하는 친구는, 내가 아는 친구들 중에서 극소수이고, 그것도 몇 년 동안 그랬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의 구성원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엄마하고 너무 잘 맞아. 엄마 없는 세상은 내게 허무한 세상일거야.’ 라는 착한 딸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딸이 50대이고 엄마가 70대에 있을 때 일입니다. 딸이 15살이고 엄마가 35살일 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태어나서 마음이 딱딱 맞는 관계를 장기적으로 지속해 본적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인간은 그렇게 되기 매우 힘든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유독 만난 지 불과 2, 3년밖에 안된 이 남자에만 집중해서이 모든 기재를 이 남자가 다 맞춰줄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합니다. 그리고 실망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만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똑같이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살아올 때에 그렇게 긴 인생을 어느 한 사람과 딱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적이 없다. 그러니 이 남자도 이 여자도 절대 그 평균이지 그 이상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결혼하는 형제자매에게 ‘원래 부부는 잘 안 맞는다고 생각을 해라, 그리고 뭔가 맞는 일이 일어나면 아주 고맙게 생각을 해라, 어느 정도 바꿔서 생각 하냐면 연애할 때 잘나가다가 뭐가 안 맞으면 엄청난 혼란을 느끼듯이 결혼하면 반대가 된다. 모든 걸 다 보기 때문에 참 안 맞는 게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이렇게 한두 개씩 맞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참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든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르다고 하는데도 존재의 의미가 있는 이유는 서로의 결함 속에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저 여자에게 이런 결점이 있었구나, 저 결점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데 아마 평생 못 버릴 거야. 나 안 만났더라면’ 지금도 아내는 자기가 그런 결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 안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설명하려면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고치려고 할 때는 그때는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게 시부모님 눈에는 보이는 것입니다. “쟤 저러면 안 된다. 저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남편이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라 고치려면 결국은 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럴 때 어떤 생각을 해야 하냐면 ‘아내는 저런 결함이 있구나. 저 결함 때문에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까? 앞으로 저렇게 힘들게 살 텐데 하나님이 나를 만나게 하신 것은 저 모자란 부분을 보충해 주라고 부르셨구나.’ 생각하면서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서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한번 미워지기 시작하면 미움은 계속 증폭이 되고, 마지막은 결국, ‘내가 왜 이런 여자와 이런 남자와 결혼했을까?’ 생각하면서 잃어버린 수많은 기회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직전에 만났던 그 남자하고 했더라면 지금쯤 훨씬 더 나을 텐데’ 그런 생각은 정신적인 외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다음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가 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 질서는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이 폭압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는 논리 속에 주어지는 질서가 아니라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능의 질서입니다. (원을 그리며)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이것보다 더 큰 단위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을 것이고, (더 큰 원을 그리며)그리고 이것을 창조하실 때는 수많은 인류들을 창조하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둘을 만나게 하실 때에, 우리를 하나로 결합시킬 때에 하나님이 마음에 가지고 계신 질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깨진 가정을 보며) 가정이 깨졌습니다. 이런 깨진 가정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회복이 되는 것은 서로 잘 살아보자고 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과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 사랑이 집안 안에 있을 때에 아들이 너무 힘들어도 아빠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아들을 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랑,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아내를 참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질서를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서로 사랑으로 복종하는 관계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사랑을 줄 때 만족을 느끼지만, 남자는 아내에게 무시당한다고 할 때 정신적인 결합이 깨집니다. 그 부분은 여성이 민감한 부분만큼이나 남성에게 민감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노예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억압을 해서 숨을 못 쉬게 하고, 아내의 마음속에 ‘막 비유를 안 맞춰주면 저거 오늘밤에 난리나지, 그렇게 어려운 일을 당할 바에야 내가 죽어지내지’ 하는 것은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습관이 되면 남편을 점점 나쁜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렇게 살면 나중에 둘 다 외로워집니다. 남편이 이렇게 하려고 할 경우에는 아내는 정색하고 부부관계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남편에게 설득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설득이 잘 안되면 강한 반응을 보여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게 부부간의 결합을 증진시키는 방법입니다. 노예적으로 사는 부부들, 황혼이혼이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남편이 은퇴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젊었을 때 너무 가정을 도외시하고 돌아다녀서 아내에게 잘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혼자 있고 싶은 것입니다. 가정일 한다고 이것저것 해도 아내는 그게 다 역겨운 것입니다. 그래도 아내는 혼자 있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이 이미 깨진 것을 나타냅니다. 아부하면서 복종하는 것도 진정한 인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대가와 복종은 잘 해주면 뭘 주고, 뭘 주면 이것을 해주고 하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종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실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낮은 자리로 내려오십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을 그의 발아래 꿇어 주라 부르게 하셨으니(빌2:9-11)’ 높은 자리에 오르신 것처럼 남편이 아내가 서로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서 그를 불쌍히 여기며 마음을 가지고 섬기기를 자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 젊은 날에는 정신없이 바보처럼 살았구나.’ 한 순간도 놀거나 아내를 미워하거나 가정을 하찮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다 쏟아 부었습니다. 좀 더 균형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도 생기지만 이미 흘러간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저 사람 하나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내가 한 인간으로서 완성의 길을 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난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일생동안 자기 자신의 숙제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면 내가 그럴 수 있다? 부부가 싸웁니다. “성경에 목사님이 뭐라 그랬어?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그랬잖아.” 아내가 하는 말이 “사랑해줘 봐. 복종 안 하나?” 남편이 말합니다. “사랑받게 해야 예뻐해 주지. 복종해봐. 실험삼아라도 해봐. 내가 사랑 안 해주나? 모든 문제는 너에게 있어.” 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폭력과 권력으로 서로를 지배하는데 이게 남편만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아내도 이 일을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결국 관계는 깨지고 복수의 감정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잘 살던 아내가 어느 날 이혼소류 들고 와서 도장을 찍으라고 합니다. 수십 년 동안 쌓인 것이 한꺼번에 터진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보험에 비유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보험료를 꾸준히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내야 합니다. (청중에게) 아직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살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질서가운데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어린아이가 배우면서 이렇게 자라가면서 결국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정에서 배웁니다. 대부분을 가정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받고 엄마 무릎을 밟고 일어나서 아빠와 엄마와의 관계가 어떤 사랑과 존중의 관계인지를 배우면서 아이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성과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과 결론입니다.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네켄(ἀνἦκεν)’는, ‘알맞다’는 뜻입니다. 가정이 이렇게 있습니다. 크게 세상의 정신과 성경의 교훈이 가정에 함께 들어옵니다. ‘남편은 초장에 밟아버려야 한다. 아내는 무섭게 다뤄서 남자가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네가 제일이지 무슨 남편이냐 혹은 아내냐. 네가 있고 다음에 가족이 있는 거지.’ 이런 식으로 세상의 정신이 막 들어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우면 성경의 영향을 받고, 그럴 힘이 없을 때 세상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오늘 배운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에 질서를 주셨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질서를 주셨는데, 이것은 서로 복종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 가정에 주신 기능적인 질서입니다. 아내가 집에서 살림만 하는 것을 아내들이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혹은 남편이 하는 일보다 열등하거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몇 년 전에 이혼할 때 가사 노동하는 것을 150만원 쳐줬는데, 오늘날 난 이건 난센스,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봅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돈으로 환산해서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결혼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게 아니라 채워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은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서로가 결함이 있을 때, 소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 여자의 저런 부족한 부분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만나게 하셨구나, 이 모자란 것 때문에 이 여자가 더 아프고 고통당하지 않도록 내가 보호하려고 태어났고 보호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은 사랑의 소명이라고 남편과 아내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원래 힘든 것입니다. 독신으로 살았어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까불고 다니지만, 독신으로 살다가 한 60세 되면 저한테 와서 결혼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들어서입니다. 원래 인생이 힘듭니다. 힘들다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하십니까? 그 사람도 힘든데,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원래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힘을 내야합니다. 힘이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의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 그때 가정은 온전한 가정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배운 내용이었습니다.
Q & A
Q: ‘복종’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와 닿아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남편과의 사이에서 실망하는 부분이나 아닌 부분, 이런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남편한테 진정한 복종이 잘 안되고 내가 원래 모습대로 내 성향대로 남편을 많이 대하게 됩니다. 남편을 진심으로 대해야 하지만 연기가 필요한 것 같은데, 현명한 방법이 궁금합니다.
A: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종하라고 가르쳤다고 해서 모든 일에 남편의 말이라는 이유 때문에 복종하면서 살라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오늘 가르친 말씀 속에서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도 주안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소한 일에 남편에게 늘 져주고 매우 중대한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내가 되고 싶습니까? 반대로 사소한 일에 늘 남편을 복종시키고 중요한 일에는 아무 영향을 못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은 둘 다 하고 싶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60년이 된 부부인데 결혼하고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 부부가 인터뷰를 했는데, ‘평생 행복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싸울 일이 없었습니다. 결혼할 때부터 우리는 결혼생활의 원칙을 정했는데, 중요한 일에는 남편인 내가 결정하고, 사소한 일은 아내가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60년 동안 한 번도 중요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드리고 싶습니다. 남편이 하라는 말 한마디의 모든 것에 다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다가 보면 남편이 세상물정을 모르고 가정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한 가정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매가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굉장히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인데, 규모가 없습니다. ‘여보 300만원만 찾아서 시댁 좀 도와줘. 사촌 도와줘. 얼마 찾아서 후배 도와줘.’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해서 살림이 거덜나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가정에서의 질서가 하나님이 가장을 통해서 가족들을 이끌고 이렇게 살게끔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정을 사랑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진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니 자매가 자기는 학벌이 뛰어나지 않고, 돈을 많이 못 벌어도 되니까 존경할 수 있는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에게는 2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결혼상대를 30년 연상 중에서 찾든지, 아니면 위인전기나 읽으면서 혼자 살던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실제로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비는 것은 나도 부족하지만 남편이 하나님을 잘 믿고, 가족을 영적으로 이끌 수 있는 남편이 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복종하라는 말을 좀 더, 한 번 적용을 해보십시오. 남편이 기분에 막 퍼부을 때 지혜로운 여자는 알았어, 그렇게 해보자고 하고, 폭풍이 지나고 난 후, 며칠 지나서 가라앉으면 조리 있게 하나하나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당신말대로 하면 이런 결과가 오는데 할 것인지 묻습니다. 대부분 남편이 당신 맘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여자는 그 자리에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 자리에서 남편을 깔아뭉개려고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남편을 억누르지 않고 설득하면서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을 배우라. 그것을 ‘복종하라’는 것의 한 적용으로 꼽고 싶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렇게 하면서도 너무 힘들다는 것이 느껴질 때, 어떡하겠습니까? 이미 그런 힘든 사람을 만나 살아왔는데.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용서하고 같이 살아갈 결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서로서로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야 될 것 같습니다. 불쌍히 여기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