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0 새벽예배
영혼이 하나님만 바랄 때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시62:1)
이 시도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원이 보다 내면화되어서 우리가 내적으로 죄에 매여 있는 상태이고 그리고 그 죄에 매여 있는 상태가 모든 인간의 불행의 뿌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마치 골수에서 우리들이 피의 성분들을 생산해내듯이 우리 안에 하나님을 맞서려는 이 죄의 법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살려는 경향들을 산출해내서 그래서 우리의 말과 사고와 그리고 우리의 행동과 모든 것에 죄를 깃들게 하고 그리고 이것들은 각양 많은 악들을 생산해 냅니다. 이런 사람이 홀로 무인도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렇게 상태가 나쁜 사람들끼리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들이 파괴와 갈등, 불행과 고통 이런 것들을 산출해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신약에서는 그 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근본적인 뿌리를 명료하게 제시하면서 거기로부터 인간을 구해내는 것을 구원의 일차적인 핵심의 관점으로 삼고 거기서부터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개념을 펼쳐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약은 구약보다 훨씬 뿌리와 근본에 관심이 많아요. 그렇지만 구약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근본적인 뿌리에 신약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예표 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구약에서의 구원의 관점은 훨씬 더 포괄적이에요. 비유를 하자면 신약에서는 핵심적인 관점으로부터 시작해서 포괄적인 관점으로 나아오는 구원의 개념이라면 구약은 포괄적인 관점에서 핵심적인 관점으로 들어가는 그런 의미에서의 구원의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구원이 그에게서 납니다.’ 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아주 굉장히 포괄적인 것이죠. 좁게는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영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국가적으로는 원수들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보호,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크게 세 가지를 베푸시는데 선택과 그 다음에 인도와 보호에요. 그러니까 그런 모든 하나님의 섭리적인 계명을 함께 거론하면서 구원의 개념을 펼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구원의 개념을 펼치는데 그렇게 해서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납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커다란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의존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가정적이고 그 다음에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모든 문제, 특히 전쟁과 그 다음에 기근이나 자연적인 재앙에서 자기의 백성들이 구출 받는 그 모든 악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여기서 얘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신약에서도 비슷해요. 같은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다만 그 중심적인 시작점들이 구약에서는 상당부분 가리어져 있고 신약에서는 그것이 아주 특징적인 것으로 부각되어 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신약적인 구원에 압도되면 그러면 까딱 잘못하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은 영혼이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구나! 이렇게 아주 단선적으로 생각하기가 쉬운 것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어쨌든 구원이라는 것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결국은 그 뿌리인 죄로부터 건짐을 받고 모든 죄의 결과인 악과 고통으로부터 구출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모든 구출이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간을 그 모든 불행과 그리고 궁핍, 그 속에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낼 수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다가보면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스스로 건져내지 못할 영적인 위기 그리고 우리의 환경적인 위기 이런 것들을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에 그런 모든 위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인간이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모든 신학사상은 바로 이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 이 지점을 기준으로 갈리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칼빈주의 교리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신학에 있어서의 출발점이 바로 거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에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 그게 바로 신학을 아름답게 하는 출발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자신의 이 모든 불행과 결핍의 상태로부터의 해방이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출 받을 수 있다는 그런 강한 확신을 갖게 될 때에 그 인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연약함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 없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그것은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 확신이에요. 내가 이렇게 저렇게 될 것이라는 자기의 확신이에요. 성경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잘 안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정의를 내리고 믿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담론보다는 오히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그리고 어떤 기능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지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져있어요.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것이에요. 그것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에이든 토저 같은 목사님은 Believe is seeing. 이라고 했어요.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오늘 여기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그랬습니다. 조금 번역이 다르게 될 수도 있지만 히브리어성경에는 ‘나의 영혼이 조용히 하나님을 바랄 때 나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어요. 어쨌든 비슷하잖아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이렇게 나오지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만을 의지하라고 할 때에 아주 자주 쓰시던 표현이 ‘잠잠히 나의 행하는 것을 보라.’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 ‘하나님께 기도하라.’ ‘너희는 잠잠히 있어 오늘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라.’ 잠잠히는 늘 따라다니는 하나의 부사에요.
그러면 그 잠잠히는 무슨 뜻이냐 하면 영혼에는 수많은 기능들이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래서 영혼은 마음을 통하여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기도 하고 또 우리의 정신을 움직이기도 해요. 그리고 마음은 고정된 실체로 가만히 있지 않고 거울이 밖에 사물이 자신에게 비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은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면서 끊임없이 자기의 상들을 이 마음 안에서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해석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우리의 마음이 분요해지는 이유잖아요. 우리들이 할 일이 많고 만나는 사람이 많고 또 도심 속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많은 사물들을 볼 때에 우리의 마음이 아주 번잡스러워지게 되지요. 그런데 기도원에 가서 홀로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그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조용히 정돈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잠잠히 라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에요. 그런 모든 마음의 쓸데없는 작용들을 멈추고 사실 자기 마음대로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눈에 보이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인데……. 그런데 생각이 없으면 사물을 들여다보고도 거기에 그것이 있는 줄을 모르고 찾는 경우가 있듯이 우리 눈에 수많은 사물들이 우리 눈에 들어와도 생각이 다른 데에 있으면 사실은 그것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의미는 뭐냐 하면 하나님 한분만을 쳐다보라는 뜻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에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하나님을 향한 집중의 상태에요. 그래서 그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 그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의식과 사고에 아무런 커다란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래서 그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모든 우리의 정신의 작용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이것이 믿음이에요. 하나님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심령의 가장 깊은 좌소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내적인 세계에 중심적인 사고의 기능이 오늘 영혼이라고 묘사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자는…….’ 이라고 할 때 그 심령과 같은 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한분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주목하게 될 때에 그 때에 우리의 구원이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을 본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믿음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에요. 믿음이 사랑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마음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응시하게 되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그 한사람을 끊임없이 응시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사라져버리게 되면 질병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게 상사병이잖아요.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사랑에서 바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이러한 비밀들을 담고 시인이 이 위대한 시 62편에서 자기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것은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아야할 존재라고 하는 것이에요.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고난과 시련도 지나고 때로는 평탄하고 즐거운 길도 지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권아래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의무는 행과 불행, 시련과 고난, 기쁨과 좌절을 그대로 주권적인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피할 수 없이 그것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에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에 자살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어요. 그것은 칼빈 한사람만의 의지는 아니겠지만 의회에서 법을 만들어서 자살한 사람의 재산은 유산으로 물려줄 수 없게끔 시에서 몰수했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불행과 고통 좌절, 이 많은 것들을 겪어도 한 가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고 찬송하게 하는 재료가 되어요. 그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믿음이에요. 믿음……. 그것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냐 하면 그분은 반드시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며,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정에 처해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이에요. 그 세 가지에 대한 믿음.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리고 그분은 선하신분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세 가지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하나님 한분을 온전히 앙망하게 되면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은 아름다운 악기의 현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손길처럼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뜯고 두드릴 때에 현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런데 그런 두드리고 건드리는 그 타격 때문에 그 줄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서 가락을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 한분을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온전히 앙망하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의 본분입니다. 이러한 의존 속에서 기도할 마음도 생기고, 다시 일어날 마음도 생기고, 좌절했던 사람이 희망도 갖게 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모든 선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