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5일 새벽예배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다시 한 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여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아멘..
이런 표현들이 그 시편에 많이 나오죠.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그래서 소유격을 사용해서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소유물인 것처럼 이렇게 표현하는 거 말입니다. 그래 또 하나님도 우리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 어 그렇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내 것이라. 응?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불렀나니 너희는 내 것이라...또 예를 들자면 너희는 나의 기업이라..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재산이잖아요 그죠? 그런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이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고 고백합니다. 이건 뭘 뜻하는 거냐 하면 실제로 뭐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 성립되는 매우 특별한 관계를 그 지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 마치 나의 책, 나의 돈, 아니면 뭐 우리 그 집, 이런 것처럼 소유되면 그것을 소유한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누구의 제약을 받지도 않고 내가 어 그것을 충분히 누린다는 것 아니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세 사는 것보다 집 사는 걸 좋아하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물론 뭐 같이 사는 데는 남의 집이나 내 집이나 뭐 마찬가지잖아요 그죠? 어떻게 보면 뭐 남의 집이 더 편한 것도 있지 않아요? 망가지면 전화 또르릉 해서 “물 새는 데 빨리 고쳐 주시오” 그럴 수도 있으니까..그런데도 이제 우리들이 자기 집을 갖고 싶어하는 이유는 뭐냐면 자꾸 나가라 그래, 2년만 살면은. 나가라고 그러고. 요즘은 뭐 교회가 인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런 걸 모르지, 그거 보통 2년 진고 나면 보통 그거 괴로운 게 아닙니다. 또 못 나갈 게 뻔할 때는 집세를 많이 올려 달라고 그러잖아요. 그게 왜냐면 매일 살아가는 생활은 불편이 없는데 그걸 충분히 누리지 못 하는 거죠. 그런데 어 이제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소유격으로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언제든지 그 하나님을 충분히 누리고 그 분과 관계를 그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는 변동성이 없는 그런 누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 그렇게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소유격을 써서 마치 배타적으로 자기만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거죠. 근데 이러한 형태의 표현이 시편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아주 많이 나와요.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가장 큰 특권은 이렇게 하나님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에요. 이제 이렇게 하나님을 누리면서 살아가는데, 근데 이것이 인제 그 다윗의 시라고 하고, 유대광야에 있을 때에 다윗이 시를 썼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 유대광야에 있을 때라는 건 언제냐 하면 그 저기 유대 유대 유대광야에 있을 때라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라고 기록을 하는데 이게 지금 뭐 어떤 상황에서 정확하게 유대광야에서 가르쳤는지 우리들이 인제 정확한 정보를 가질 순 없지만은, 생각하기에 아마 이게 그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을 다닐 때에 그 때에 쓴 시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근데 그 뭐라고 얘기하냐면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이건 인제 어 번역이 좀 이상하지만은 그냥 이렇게 “내가 간절히 주님을 찾습니다.”이렇게 되면 돼요. 그리고 “이는 마치”이렇게 하면 되는데, “찾습니다. 이는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갈망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육체도 주를 바라봅니다.” 뭐 이런 정도로 번역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제 이게 무슨 뜻이냐하면은 광야는 기본적으로 어 물이 없는 땅이죠. 그러고 이 쪽은 강수량도 적고, 그리고 어 이 그 샘이 샘이 별로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우물을 파도 물이 잘 안 나오고 또 물이 나와도 쓴 물이 나와서 사람이 먹기 어려운 그런 물이에요. 그런 그러한 곳이니까 인제 그거를 뭐라고 표현하냐면 ‘마르고 곤핍한 땅이다’ 그렇게 표현을 하거든요? 물이 없어서 마르고 그리고 어 뭐 문자적으로 표현하자면 지친 땅인데 어쨌든 땅 자체가 지쳤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척박하다는 거죠. 땅이 막 그 식물을 심으면 습기와 그 다음에 양분 같은 거를 적절하게 머금고, 머금어서 씨를 뿌리거나 곡식을 심으면 그것을 무럭무럭 자라게 만들어 주는 그 땅이 말하자면 젊은 땅이고, 그리고 어 이 그 생산력이 있는 땅인데, 그렇질 못 하고 뭐 심어도 농사가 안 되고 뭐 이렇게 땅에 그 지력을 잃어버린 그런 상태에요. 근데 이거를 인제 피곤한 땅이라고 지금 얘길 하는 거죠. 곤핍한 땅이라고 그러는데..그래서 물이 없어서 마르고 곤핍한 땅, 이건 인제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이 광야를 지시하는 거거든요. 근데 그런 물이 없어서 마르고 곤핍한 그런 광야와 같은 땅과 자기의 영혼을 이렇게 연관시키는 거죠. 그래서 이거 보면은 좀 이상해요. 그래서 어 이 저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이 영적인 거잖아요? 근데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그러니까 인제 이게 이것이 자기가 처해 있는 자연적인 상황 속에다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고통하는 영혼의 상태를 투사시킨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시편 42편에 보면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목마르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인제 이 시편에서 이 물이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에 이 물이 그 육신의 육신, 육신이 물을 먹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것처럼.,무슨 뜻이냐 하면 음식을 못 먹어서 죽는 것과 물이 없어서 죽는 것은 종류가 달라요. 그러니까 음식을 많이 먹어서 아직까지도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많이 있어도 그래도 이 물을 마시지 못 하면 그러면은 그 아주 고통스러운 가운데 서서히 죽어가는 거죠. 그러면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물이 성경에 특별히 시편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에 다른 자원들이 우리에게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영적인 자원이 나에게 없을 때 그 때에 나는 인간에게 없을 때, 인간이 정상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똑같이 또한 우리의 육체 어 우리의 육체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는 다른 것들이 모두 있어도 우리들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그 “메마르고 곤핍한 땅에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의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나와요. 갈망한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인제 그 뭐 “갈급합니다”라고 번역을 하면은 더 좋아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향해서 내가 매우 목마르고 그리고 내 육체는 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이렇게 고백을 하는 거죠. 이것은 뭘 보여 주냐면은 마치 그 물이 없을 때에 다른 모든 인생의 즐거움과 이런 것들은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찾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 쳤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그 물이 없을 때에 육체적으로 오직 물을 찾기 위해서 처절히 몸부림 치는 것처럼 똑같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원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원하듯이 제가 그렇게 주님을 바라봅니다..이게 뭐냐면은 집중이에요. 영혼의 집중..그래서 뭐냐면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래 해도 남 하는 거 다 따라 해도 주님은 만날 수 없어요. 근까 어 하나님은 그 당신을 향한 갈망의 마음이 없이 대충 살아가는 그런 것보다는 단 한 번 하나님을 향한 처절하고 간절한 갈망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사는 그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많은 당신의 성품의 그 빛깔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절실함과 하나님을 향해 향한 집중된 간절함이 없이 온통 흩어진 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삶의 모양은 끊임없이 종교적인데, 그 마음은 한 번도 신앙적이 되어 본 적이 없는...인제 그럴 때 끊임없이 자기 신앙에 맞는 어떤 그 신앙생활의 양식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치지만 사실은 그것은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한 번도 하나님을 목말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 있는 것에 만족하고 부요하여서 자기의 영혼에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사모함으로 바라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 이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하나님 만나기 어려워요. 만나기 어려워요. 오늘 시인은 ‘나의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왜 구지 영혼과 육체를 이렇게 아울러 섰을까요. 그것은 뭐냐면 그 육체라고 표현되는 건 뭐냐면 자신의 모든 감각적인 생활이거든요. 그래서 이게 인제 마음의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 가끔 생겨나는 사람도 실제 생활로 들어가면 다시 또 확 퍼지는데 그게 뭐냐면 생활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생활의 여건, 상황, 이런 것들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3장에 보면은 하나님의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하는 즉 구원에 이르지 못 하는 신앙을 이야기 하면서, 핍박과 환란이 오면은 그러면 마치 돌짝밭에 뿌려진 씨처럼 말라버린단 말이죠. 그것도 모두 환경이죠 그죠? 핍박과 시련이 올 때 그것을 보면서 마음을 빼앗기면서 자기 안에서 시작됐던 이 신앙을 버리게 되는 거죠. 또 반대도 있잖아요? 재물과 이런 것들이 많이 늘어나고 자기에게 그 뭐 좋은 일들이 생겨나고 할 때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 가끔은 있지만 그것이 지속이 되지 못 하는 거죠. 이렇게 될 때에 결국은 우리의 육체로 말미암아서 잠시나마 하나님을 집중하려고 했던 우리의 마음과 생각 이런 것들을 확 흩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 이 시인과 같이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간절히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앙모합니다...라는 이런 고백,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주님과 동행하며 이기는 아름다운 생활이 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힘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오며 이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