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신 하나님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시 55:19).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면서 악한 자들이 행하는 그 악과 고통을 견디고 이기는 이 시인이 다시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성품을 회고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회고합니다. 결국 인간사는 복잡하고 아주 어려운 거 같아도 결국 그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하나님에게 있어요 그래서 결국 인간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귀착이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둘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또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가 하는 이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이 이 두 가지 질문 속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내보이시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앎이에요. 그러면서 시인이 제일 먼저 회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영원성이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이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태고라고 하는 것은 창조의 시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파악할 수 없지만 그 모든 만물 있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그 무한한 과거로서의 끝없는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만약 그것이 창조 시점이라고 하면 창조시점부터 하나님이 계시어도 그 계신 것이 거기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창조시점에 봐도 하나님이 과거에서부터 계속 계시어 오셨다는 그래서 결국은 그 끝은 우리가 추론해 갈 수 없는 곳이에요. ‘그때부터 하나님은 계셨고‘ 라는 것이 이 시인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고죠.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그걸 회고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놀랍게도 이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존재는 들풀처럼 잠시 번성한 것 같으나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악인들의 제한된 시간성과 아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루는 거죠. 여러분들 성경에서는 악인들은 벤 풀과 같다고 묘사를 해요
시골에 살아본 분들은 아시겠죠, 이제 논둑에 풀들이 많아요. 그것들을 이제 베어서 꼴을 주겠다고 낫으로 벱니다. 혹은 하두 지저분해서 그것들을 썩둑썩둑 베죠. 그것들을 풀밭 옆에다 쌓아두면 살아있는 풀들과 똑 같아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벤 풀은 더 이상 습기와 양분을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모두 시들어 가요. 그리고 나면 이튿날 보면 지푸라기로 변해있는 거죠 그래서 커다란 잔디밭을 관리할 때 잡초들을 제거하거나 혹은 잔디를 깎쟣아요. 깎은 잔디를 거두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지저분해 보여도 삼일 만 지나면 다 말라서 잔디 아래로 다 내려갑니다. 그러면서 그게 썩으면서 거름이 됩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악인의 일시성이에요. 그렇지만 이렇게 일시적인 악인들과 달리 하나님은 태곳적부터 영원하신 분이시다. 인간의 악에 의해서 영향을 받거나 인간의 배반에 의해서 고통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땅에 있는 사물들이 어떤 변활르 가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래서 아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 시인은 번성한 것처럼 자기를 향하여 발꿈치를 들고 자기를 배반하는 무리들의 일시성과 하나님의 존재의 영원성을 대비시키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과 일시성을 가지고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악인들 사이에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거에요. 이 성도는 하나님처럼 영원한 존재는 아니죠. 그러나 그 영원하신 하나님을 덕 입어 그분 안에 있을 때에 그 행복은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성도의 정체성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변함없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악인을 대조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안에 있는 축복받은 성도와 하나님 밖에서 그렇게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악인을 대비시키는 거죠. 그래서 악인에게도 즐거움이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성도에게도 즐거움이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이에요. 왜, 성도는 악한 즐거움을 꿈꾸지 않아요. 성도는 악한 즐거움을 꿈꾸지 않아요. 성도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 때문에 비롯되는 복이에요. 악인의 복은 하나님 때문에 비롯되는 복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복이고 욕망 안에 있는 복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천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의 변화에 따라서 어제 복이었던 것이 오늘은 복이 아닐 수도 있고 세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욥의 경우처럼 한 번 재앙이 임해서 그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면 비참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는 그런대서 행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행복을 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성도가 진정한 행복을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면 그는 이미 영혼이 중대하게 망가진 것이라 이거죠. 물론,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리고 살 수 있는 많은 분복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에요. 그래서 칼빈 선생이 자기의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받은 유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은 성도의 복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누리는 것은 정당하다‘ 라고 말이죠.
금욕주의와 정통신앙은 어떻게 다르냐 하면 이런 거죠. 자,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금욕주의는 그것을 먹으면서 맛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거죠.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데 현저한 방해가 된다고 보는 거에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음식을 취할 때에도 맛있는 음식인줄 알면서 그것을 피하는 거죠. 맛있는 음식을 참는다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거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빵도 요것조것 발라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생 빵을 먹는 거죠. 거기다 계란도 넣고 설탕도 넣으면 맛있는데 그냥 소금만 넣어서 굽는 거에요. 금욕주의에요. 그런데 참된 신앙은 그렇지 않아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그 혀 끝에 도는 많은 맛들을 느끼며 “야, 정말 감사하다. 하나님은 어쩜 이렇게 일반은총 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하셔서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이렇게 즐겁게 식사하게 해주실까.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구나. 아, 감사하다. 음식이 우리가 조금만 더 탐구해도 이렇게 우리의 혀끝에서 현란하게 맛을 내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으로 탐구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이렇게 하면서 음식을 먹는 것이 이게 참된 신앙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도 함정이 있는거죠.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 점점 더 아름답고 좋은 것을 발견하면서 누릴수록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위대하심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 연결이 만약에 끊어지게 된다라고 할 때에 그때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했듯이 입맛의 노예가 되어서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가 자기의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한 번 육체를 미워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육체를 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자기 안에 있을 줄도 모르는 다섯 가지 죄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회개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없이 더 아름다운 것을 보고자 하는 눈, 하나님 없이 달콤한 냄새를 맡고자 하는 코, 하나님 없이 입맛에 취하는 미각, 하나님 없이 가락에 취하고자 하는 귀, 하나님 없이 보드라운 것 자체에 탐닉하고자 하는 살갗. 이 다섯 가지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니까 문제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시인은 그런 방식으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죄인들을 대비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성도인 이 시인은 다시 한 번 깎고 다듬어지면서 이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자기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 자기의 진정한 복이 우리 아버지 밖에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짧은 시야에서 인간적인 안목만을 가지고 본다면 다윗의 생애에 일어났던 이 가슴 아픈 일, 자기가 가장 믿고 사랑한 사람의 배신, 이런 것들은 불필요하고 단지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들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시험들과 어려운 일 또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 그리고 가장 나를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악인처럼 살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태고부터 영원하신 당신 자신께 속한 사람들로 남겨두시기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거에요. 아멘 하셔야지.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반절밖에 못했네요. 반절은 내일 하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