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드시는 하나님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려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 하시리로다”(시 55:22).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탄원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권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갑자기 시 속에서 노래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 하는 궁금증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의 가능성은 두 가지라고 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계속하다가 “내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할 때에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음성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시는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써내려간 시이지만 시 속에서 들려오는 어떤 하나님과의 교통, 하나님과의 교감에서 나오는 응답 시구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고 한 이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다가 갑자기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많은 언약 백성들에게 주는 교훈적인 시구라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이제 “다른 사람을 향해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 속에 삽입되어 있다” 이렇게 보게 되는 거죠.
지금에 와서 우리들이 이 시를 펼쳐놓고 이런 교훈적인 구절들이 “어떤 것은 하나님께 직접들은 음성이고 어떤 것들은 다른 사람을 향해 우러나온 교훈이 삽입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판단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어요? 다만 우리는 이 시에 있어서 이렇게 나오는 2인칭의 인간을 향한 이런 교훈들이 얼마든지 시인 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이 기억되었다가 후에 시를 쓸 때에 삽입된 형태로 나오는 것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 정도까지는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쨌든 그 내용을 들어가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려라.” 이런 시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인을 대상으로 해서 들리는 주님의 음성이든지 아니면 그렇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또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인들로부터 집요하게 공격을 받는 사람은 그 상황자체가 고난 속에서 짐을 짊어진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 때 이 시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것이죠. “그 짐은 여호와께 맡겨버려라”에서 이 짐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경에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오잖아요? 그러면 현실적으로 악인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인데도 배신을 하고 해서 시인을 곤경으로 몰아넣을 때 그 지고 있는 짐이라고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고 큰 아픔인데 어떻게 여호와께 맡겨 버린다는 겁니까?
그런데 이것이 여호와께 맡겨버린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하는 것이죠. 우리들이 좀 눈여겻 교리를 배운 사람들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배우신 기억이 날 겁니다. 어제도 부분적으로 설교했지만 사실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와 유사한 고대적인 형태가 구약 속에서도 나타난다 라고 봐야 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언약관계 안에서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인들에 의해서 내가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을 내가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랑의 연합 속에서 그 대적을 나의 대적으로 보지 않고 공동체에 대한 대적으로 보고 하나님에 대한 대적으로 보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들이 많이 나타나죠. 특히 이 시편과 잠언에 나타나는 악인과 의인의 날카로운 대죠, 악인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고 혹시 언약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물러가서 그 언약관계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고 의인은 바로 그것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예요. 그러니까 이런 형태가 사실은 이미 구약에서도 보이고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그 고통과 많은 괴로움들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써 하나님께 숨으며 자기에 대한 개인적인 대적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언약백서의 공동체 전체를 향한 대적으로 보는 이러한 그 문학적인 플롯, 이런 것들이 성경의 구약에 아주 빈번하게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 같은 것들도 사실은 이러한 구약적인 생각에 의해서도 뒷받침이 되는 교리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린다.”는 것은 최소한 2가지를 포함하는 거죠. 그래서 시인이 이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자신을 합치시키고 순종함으로써 자기를 향해서 공격하고 악을 행하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피한다는 개념입니다. 마치 아이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망 와서 엄마 뒤에 숨듯이 이렇게 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뒤에 숨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이러 개념들이 여호와께 짐을 맡기는 개념들이예요.
이러한 개념 속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신앙,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절대적 의존의 마음이 뒤따르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과 그 분에게 의지하는 그 마음 안에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맡긴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자신은 그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서 이제 그 악인들을 맞서는 그러한 상황으로 가는 것이죠. “이제 혼자 그것을 당한다는 것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하나님이 그것을 맡으시고 나는 인생에 어떠한 일이 생기든지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거든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신앙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 하시리로다”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붙드신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할 때 그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를 붙드시고 도와주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 시리로다”에서 “요동한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벗어나서 악인에게 공격을 받으므로 삶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 사람이 견고하고 요동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삶이 뿌리 채 흔들리는 이러한 일은 없다는 거를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섯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악인이 공격하고 악인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의 기반을 뒤흔들 것처럼 아주 커다란 위력을 과시할 지라도 그것을 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지한는 것, 그래서 이러한 인생의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것,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요동하지 않도록 그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죠.
비록 이 시인의 환란과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 그의 범죄로 말미암는 징계 때문이었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의지하는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게 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할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