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을 위한 기도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시 58: 6-9).
Ⅰ. 본문해설
악인의 정체를 드러낸 후에 시인은 악인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인을 위한 기도는 여기에서 악인을 꺾으시라는 간절한 간청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다소 혼란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깊이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에 붙잡혀있는 사람이 어떻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해서 이렇게 철저히 저주할 수 있을까? 라고 말입니다. 특히 오늘 마지막 구절에 보면 섬뜩해지는 기도가 나타나죠. 그것이 뭐냐 하면 악인을 만삭하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같이 그렇게 악인을 멸해달라고 하는 기도죠. 그래서 이제 이런 시편에 나와 있는 저주의 본문을 해석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윗의 영적 성숙과 관련지어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이 신앙은 있었지만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혈기가 담긴 저주를 원수를 향해서 쏟아내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해석을 해내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여기에 나오는 이 시인이 악인을 향해 퍼붓는 이런 저주의 기도가 담긴 본문들은 이제 우리에게 거의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Ⅱ. 저주 본문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이러한 악인의 저주를 비는 이러한 저주 본문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가져야 되겠느냐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들은 최소한 세 가지 정도의 생각을 가져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우선 첫째는 이 당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이 세계를 구속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한 번에 모든 것이 알려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구약의 인물과 역사, 혹은 축자적인 전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인간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처음에는 상징과 비유로 그리고 불분명하게 주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징과 비유들은 더욱 더 뚜렷한 계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마침내 이 모든 것들이 완전한 실체로 드러나게 된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성취되어 가고 있는 중이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깊이는 구약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깊이를 누리고 있는 것이죠. 다만 사람들이 너무나 게을러서 이 계시를 외면하고 살 경우에는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자하는 이 계획은 결국은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이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어두운 하늘에 찬란한 불빛이 빛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런 것들을 아직 충분히 계시 받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 다윗은 궁창에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영광을 노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구약의 최대의 철학자였고 신학자였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던 성도였습니다. 그런 훌륭한 탁월성이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아주 놀라운 그런 그 증언은 우리들이 누리는 것만큼 누리지는 못했다고 우리들이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우리들이 고려해야 할 것은 시인의 악인을 멸해달라는 이 기도가 단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잠시 실수하고 넘어지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파멸해 주시도록 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본질까지도 철저한 악인입니다. 시편 1편도 다윗의 시라고 그렇게 믿어지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라고 나옵니다. ‘악인의 꾀를 좇고’ 그 다음단계가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그 다음에 세 번째 단계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나오는 그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이지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성경에서 길은 히브리말로 ‘데레크’ 라는 것은 그냥 다니는 길도 뜻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의 인생길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길을 걷느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람됨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일평생 죄인이 걸어온 길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할 때에 히브리말로 ‘호테’인데 여기에는 히브리어에만 있는 독특한 하나의 문자표식이 있습니다. 그게 ‘다겟’이라고 하는 것인데 히브리어 동사요소 명사 속에 반복되거나 특징이 되어버린 특정한 행동을 가리킬 경우에는 거기에 점을 찍습니다. 이 점 하나가 사실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라고 할 때 이 죄인이 어떤 종류의 죄인인지를 암시한다는 것이죠.
늘 바르게 살던 사람도 개별적인 어떤 사안에 있어서 실패를 해서 죄인이 될 수 있지요. 여러분들도 항상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크게 잘못했을 때에는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어떤 개별적인 사안, 어떤 일에 대해서 우리들이 잘못했을 때 우리들이 죄를 짓고 개별적으로 되는 것이죠. 오늘날의 문제는 죄를 이렇게 개별화 하지 않고 죄 자체를 인간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약점이라든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연약성이라든지 이렇게 애매하게 버무려버려서 그저 확 펼쳐서 그래서 너나 내나 다 같은 인간이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견해가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호테’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죄인이 아니에요. 어떤 올바르게 살려다가 실수하고 죄를 짓고 또 의도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한 충동으로 죄를 범하고 개별적인 사안에서 넘어졌던 그런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죠. 다윗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나 그도 역시 인간인지라 범죄하게 되지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버린 사람, 그래서 인간에게 악을 행하는 모든 동기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그것이 되어버린 그야말로 뼈 속까지 악인인 사람들을 향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죠.
마지막 세 번째는 이 기도가 시인 개인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더럽혀지고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있다는 신적인 영광에 대한 갈망에서 나오는 기도라는 고려해 넣어야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그 골리앗에 대해서 아주 독한 말을 퍼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할례 받지도 못해서 짐승 같은 이방의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신 백성들을 모욕하는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분연히 일어나서 악인을 처단하러 가는 장면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은 단순한 자기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의 존귀함, 이런 것에 해를 입히고 있는 이 원수를 통해서 깊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시인의 갈망이고 그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거든요. 그러한 기도로 우리들이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이죠.
Ⅲ.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을 적용할 때에는 그대로 우리에게 이 기도가 적용되는 것은 그런 풍부한 사랑의 계시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가운데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 다음에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있지만 그러나 악인을 형벌해달라는 기도는 나오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달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하게 계시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이 전망을 넘어서야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하고 그들이 그렇게 악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는 그 속에서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고통 받는 우리를 보기보다는 그렇게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게 살아가는 그 영혼의 불쌍한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빌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모본을 통해서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다는 것이죠. 불공평하다고 생각될 필요가 없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일을 행하기 위해서 구약의 사람들은 충만한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이렇게 원수도 사랑할 수 있도록 간구하고 주님께 빌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놀라운 의지의 크기와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누구도 우리가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때문에 이겼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죠.
그러나 마음속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훼방하고 악을 행함으로 주님의 질서를 더럽히는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그 죄의 본질, 그들이 행하고 있는 악한 행동의 그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동일하게 미워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존 오웬 목사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죄는 미워하되 죄를 짓는 그 사람은 사랑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제 이런 시인의 정신을 복음적으로 계승하고 해석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