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중의 다스리시는 하나님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시 59:12-13).
시인은 계속해서 악인의 정체를 하나님 앞에 폭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아실진대 악인들의 그 속을 모르실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이 악인을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그 악인의 어떠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는 것은 하나님이 악인을 모르고 계시기 때문에 일깨워 주시겠다는 마음으로 악인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은 이렇게 악인이 누구인지를 고백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그 악인의 정체를 일깨우고 동시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언약을 맺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악인과 대조함으로써 확인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이 시인이 ‘저희의 입술의 많은 말이 있는데 그것은 곧 저희 입의 죄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악인들이 수많은 말로서 시인을 모함하고 그리고 시인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덮어 씌워서 큰 고통을 겪게 했는데 그 입술의 많은 말은 곧 그 사람 자신의 내면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대적하는 죄를 보여준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시인이 바라본 악인의 정체예요. 하나님을 믿는 의로운 자녀들도 화가 나고 혹은 분노하게 되면 험한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죠. 그러나 속속들이까지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이 악인은 시인을 미워하고 싫어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입에서 나오는 자기를 향한 독한 말과 악한 모든 표현들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의 발로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 때문에 저희로 교만한 중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믿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그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데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이 그 악한 사람들도 다스려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주하고 거짓말을 하는 그 악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죄예요. 하나님의 언약백성 안에 있는 악인을 가리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런 저주하는 것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백성들이에요. 그러면 그 축복을 받은 언약백성중 하나가 그렇게 하나님께 축복받은 백성을 저주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저주하는 거죠. 그것은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가 되는 거죠. 왜? 하나님이 복주겠다고 축복하신 사람을 저주하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맞서는 행동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미움의 죄가 큰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의 지체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어느 지체를 미워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맞서는 행동이에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데 그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지체들을 미워하게 될 때 그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은 참 모르시는 군요, 실수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간을 왜 축복하십니까? 나쁜 놈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꾸짖고 나무라는 거예요. 그것이 무슨 죄예요? 교만의 죄예요.
그래서 이어서 곧바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면 ‘교만한 중에 사로잡히게 해 주시옵소서’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이제 전쟁의 문맥이 아니겠어요, 그죠? 전쟁에서 군인들이 전투를 하다가 싸움에 지는 것은 참 수치스러운 일이죠. 그래서 옛날에는 전쟁에 나가서 군인이 지면 스스로 자결을 하든지 아니면 처단되었어요. 죽는 것은, 싸움에 지는 것은 그런 큰 수치예요. 그러나 죽음은 비참한 종말이기는 하지만 그 수치를 모르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살아서 적군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그것은 이제 목숨도 자신 맘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잖아요.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수치죠. 다윗은 수없이 전쟁터를 누빈 사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로잡힌 것의 수치를 아는 거죠.
표제에 보면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킬 때에 그러는데 설마 그 도망 다니는 와중에 썼겠어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러면서 그때에 하나님 앞에 마음속에서 노래하는 것들을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나중에 정리하지 않았겠어요? 그런 전쟁에서의 사로잡히는 수치를 알고 있는 이 다윗이 이것을 오늘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시인은 ‘저희들을 소멸하사 없기까지 소멸하사, 소멸하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없애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데 이 목적이 원수에 대한 독한 미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함으로써 결국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무기력하시고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능력 있게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자신이 악인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 시인의 관심사는 자기의 개인적인 고통이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악인이 횡횡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신이 끝없이 고통을 받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어쩌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무데도 없구나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봐 하나님 앞에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야곱은 이스라엘의 애칭이에요. 야곱이 옛 이름이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이 이름을 고쳐주시잖아요. 그 야곱이라는 이름이 그 후에도 불리워요. 나쁜 뜻으로 불리기보다는 애칭으로 불러요. 그래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또 다른 별명이었어요. 그러니까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그랬으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 이스라엘, 오늘로 말하자면 ‘교회를 다스리심으로 그것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땅 끝까지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인생의 모든 항로 가운데 주님을 꼭 붙들고 그리고 주님을 친히 우리를 다스리심을 믿고 의지하며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