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육체가 주 앞에 나올 때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2-3).
시편 65편 2절과 3절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아멘
이제 여기에서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커다란 결론을 1절에서 먼저 내고 그 다음에 이제 2절서부터 그 결론을 입증해 가는 그런 방식의 글쓰기죠. 그래서 우리들이 두발시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러한 문학적인 기법이 시편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기법입니다. 시편뿐만 아니라 특별히 역사를 기술해 나갈 때 그 때에 히브리 사람들이 아주 잘 쓰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먼저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다...이렇게 먼저 커다란 타이틀을 쓰고 그 다음에 그게 뭘 의미하는지를 찬찬히 설명하고 입증해 가는 그런 방식이에요. 여기에서도 그런 방식입니다. 그래서 2절은 이제 1절과 함께 짝을 이루는 그 결론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게 뭐냐면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올 것입니다...에요. 여기에 바사르라고 되어 있는 이 육체라는 말은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이 얘기는 그냥 모든 사람이 주께 나아올 것입니다...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왜 구지 바사르라고 하는 이 육체라는 말을 사용하느냐...이 얘기죠. 성경에서 이렇게 인간을 모든 육체 혹은 육체 모든 육체 이렇게 이렇게 인간을 대행하는 말로 이런 걸 사용할 때는 무슨 의미냐 하면요, 인간을 하나님의 손이 비를 내리시고 또 햇빛을 주시고 이렇게 해야지만 생존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적 피조물과 같은 선상에 인간을 놓고 그 인간의 육체의 하나님을 향한 의존성을 지시할 때, 이러한 단어를 사용을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 자기 자신을 알고 사람을 알고 자기 아래 피조세계를 알아서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계를 돌보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거죠. 더욱이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현저하게 구별이 됩니다. 그런데 종종 이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혹은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되는 아주 탁월하고 특별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힘과 능력에서 본다면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피조물과 꼭같이 인생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 아니하면 생존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도 생명이라는 것이 그 코의 호흡에 있다. 그래서 인간의 그런 탁월성에도 불구하고 물 속에 집어넣고 20분만 내버려 두면 죽는단 말이죠. 그렇게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 육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과 함께 주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인간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실 때, 이 바사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언약백성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결론적으로 1절과 함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는데, 그렇게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그 존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것이 커다란 죄다...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면 가장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면에 있어서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자연적인 돌봄에 의존해야 될 존재이지만, 그 위에 영혼을 주셨는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그렇게 자연적인 돌봄만을 받으면 되지만 인간의 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채워질 수 있는 영혼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영적인 측면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더더욱 하나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이런 이야깁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이렇게 이야기를 선언을 하고,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 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결국 언약백성들이 기도라고 하는 그런 은총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증명을 받는 것이다..이 얘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결국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선하심은 결국은 객관적으로 이렇게 계량적으로 이렇게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하는 우리의 마음의 지각의 작용을 통해서 파악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기도생활을 많이 하게 되면 기도하지 않았을 때 우리들이 그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들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삶의 여러 가지 많은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나님 앞에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시인이 3절서부터 이제 그렇게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실만 하고 그래서 자기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며 살만한 그런 분이신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3절서부터 죽 묘사를 해요. 그래 3절에 처음 나오는게 뭐냐면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죄악이 나를 이겼다...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 하게 하옵소서...라는 탄원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다 무엇이냐 하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언약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짓거든요. 근데 그런 죄를 짓는데, 여기에서 이기었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죄를 짓는데 이것이 그 죄가 그러니까 내가 죄를 짓는데 이것이 우연적이고 그리고 간헐적인 이런 죄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죄가 큰 힘을 가지고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죄라 그렇게 죄...이렇게 이야기 할 때, 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한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게 뭐냐면...
이 죄가 의미하는 게 첫째는, 죄를 죄라고 할 때, 다 똑같은 걸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죄...이렇게 이야기 할 때, 그 죄가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성향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총체적인 삶의 체계화에요. 그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마음 안에 있는 이런 죄의 성향들이 바깥으로 나와서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체계를 이루는 거야. 생각에 있어서나 습관에 있어서나 마음의 움직임에 있어서 커다란 체계를 이룬 거예요. 세 번째는 뭐냐면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는 것을 죄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다가 죄...그러고 얘기하면 대개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이것을 판단을 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 경우의 용례를 뜻하는 거예요. 첫 번째 경우에...첫 번째 경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은혜 생활을 잘 못 하니까 이게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강한 마음의 성향이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 소원을 이기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왜 이 시인이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마치 죄악이 자기와는 무관한 외부의 침입인 것처럼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이거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내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런 성향이 사라질 수 없게끔 존재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것이 강해질 때도 있고 약해질 때도 있는 것이 마치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살고자 하는 성향이 강해질 때도 있고 약해질 때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언제나 마음 속에서 가변적이란 말이요. 가변적이라 이 얘기에요. 가변적이긴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 불신자들은 죄를 지을 때, 이 머리 끝부터 시작해서 이 몸 전체가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지어요. 그러나 거듭난 신자가 죄를 지을 때는 언제나 복합의지에요. 하나는 죄를 지어서 내 자신에게 즐거움에 취하고자 하는 그런 의지와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의지, 이 두 가지가 이 속에서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죄를 지으면서 마음에 가책을 느껴서 그만 둘까?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그런 갈등을 분명히 일으키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두 개의 의지의 문제라고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본성의 빛에서 나오는 양심의 가책의 문제로 우리들은 해결을 해요. 그래서 양심의 가책이 우리를 억제하여 그래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다른 의지가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의지 안에서 말하자면 억제를 느끼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 신자의 경우에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런 양심의 가책 정도가 아니라, 이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그런 거듭난 의지가 언제나 살아 있어서 그래서 복합의지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죄를 짓게 되면 신자의 경우가 더 비참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불신자의 경우 보다...그래 지금 이 시인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죄악이 자기를 이긴 상태가 되었다고 하니까 이것은 사실은 정직하게 이 고백을 한 것으로 우리들이 판단을 하면 굉장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된 거예요. 그 때에 이제 이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할 것입니다...죠. 그래서 혹은 뭐 현재도 되는 거죠. 우리의 죄과가 나를 이기고 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사하고 계십니다...용서하고 계십니다...뭐 이렇게 번역을 해도 돼요. 근데, 결국 뭘 뜻하냐 하면 죄악이 자기를 이겼을 때 자신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다윗의 경우에도 보면 이제 왕이 되기 전까지는 순전한 삶을 살지만 그러나 이제 왕이 된 후에 여러 가지 죄에 빠지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을 때, 죄가 자기를 이긴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 그가 통회한 것, 회계한 것, 그리고 마음을 바꾸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지, 자기 자신의 결단 하나에 의존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이 다윗은 이러한 범죄를 통해서 범죄가 없었더라면 깨달을 수 없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는 자신의 철저한 죄성을 발견하게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처절한 그 비참성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오늘 시인은 여기에서 그 하나님의 용서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죄가 자기를 이겼을 때,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없는데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얼 주실 때에는 그 은혜의 도입의 시작이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봇물처럼 확 밀려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회계하게 되면 그러면 이런 은혜들이 봇물처럼 밀려오는 거예요. 이게 이제 하나님의 단순성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단순하신 분이거든요. 단순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것도 섞이지 않으신, 구성요소가 없는 분이시란 말이에요.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은 단일하게 이뤄진 게 없고 전부 다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이 연합하여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이에요. 그것들은 이제 서로 서로 의존을 하면서 그러면서 사물 자체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불완전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런 것만 해도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구성이 되어 있잖아요? 근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뤄지신 분이라면 그 요소를 결합한 자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렇게 되면 하나님 위에 누군가가 하나님을 결합시켰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 거 없어요. 하나님은 완전히 하나의 본질로 존재하시는 단순하신 분이시고 그것이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단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단순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 단순하다는 것이 뭐냐면 섞임이 없는 마음의 상태에요 음? 그렇게 심플한 그래서 섞임이 없는 상태가 되길 바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막 찢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시간과 연관을 지어서 설명을 했어요. 이게 결국 인간의 마음이 찢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인간이 시간 세계가 아니라 영원 세계를 바라보고 영원을 사랑하게 될 때, 신기하게 시간 속에서 찢어졌던 마음이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 영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란 말이에요.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그 사랑 안에서 이 시간 세계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향해 찢겨진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벗어나게 되는 것,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찢김과 나누어짐이 없는 일치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참마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이 이 땅에 물 붓듯 내리는데 그 때 바로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의 마음의 찢어짐이 아파해서 하나님을 향한 단일한 마음이 되고, 하나님 한 분 만을 바라보게 되고 그 마음이 다른 사람들 속에 함께 번져가서 사람은 여럿인데 마음이 일치를 이룬 상태를 교회의 아름다운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강한 영적인 부으심과 은혜와 당신 자신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 교회를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니 앞에 나아가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