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중적 통치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찌어다(셀라)”(시 66:7).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열방을 감찰하신다고 하는 뜻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나라에 까지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나라와 세상을 통치하시되 이렇게 당신 자신이 직접 권능으로 다스리고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거역하는 악인이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그 이스라엘 백성들 선택한 언약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은 교만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거역이 거역의 동기가 자기 사랑이지만, 그 자기사랑이 실행되는 방식은 교만을 통해서 실행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러이러하게 살아라 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그렇게 살지 않고 불순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도 있고 나의 판단도 있지만, 당신의 판단보다는 나의 판단이 훨씬 더 훌륭합니다. 라는 판단의 교만이 섞여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러한 판단에 판단은 가치의 질서를 정복하고 결국 자기사랑을 통해서 방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을 향한 통치를 내포와 하나님의 통치를 중심과 그담에 주변으로 이렇게 나누어서 설명하시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즉 능으로 영혼을 치료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이것을 결국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권능으로 통치하시는 것을 그져 그냥 중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은 그러나 지금 이 66편의 시에서 뿐 만아니라 모든 시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통치에 관하여 이런 방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즉 중심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그리고 그 중심에 이스라엘백성을 향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있습니다. 이 언약관계는 엄중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특권을 도입합니다. 그러니깐 언약 백성들의 가장 큰 의무는 큰 나라를 만들고 강한 나라를 만들고 총 칼과 병기를 제조해서 군대를 무장시키고 황금과 보석으로 왕국을 꾸미고 하는데에 언약국가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언약국가로써의 가치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에요. 타락한 인간에게 그것이 불가능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에 복종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민족이 되게하므로 하나님이 그 민족안에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게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언약백성의 아름다움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을 통치하시는 방식이에요. 그렇다면, 열방백성들을 통치하시는 것은 어떤 방식인가. 하나님은 열방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거룩함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용도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에요. 그러니깐 열방도 하나님앞에 악을 행하고 죄를 짖고 하는 일들이 심해지게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통치하시는 것이에요.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들이라 할지라고 이차적으로 나마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게 살면, 하나님이 일반적인 섬리속에서 그나라를 복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로마의 오황제를 거론하면서 그나라들이 하나님앞에 상당히 바른 나라들로 이끌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황제들에게 복을 주셔서 나라가 강해졌다는 사실을 언급한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깐 이 세상 나라를 향해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것과는 다른 기대를 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지극히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나라를 참으시지만, 결국한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러니깐, 나라마다 각각 용도와 쓰임세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어떤식으로든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이것은 율법을 통해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복음을 통해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비견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통치는 발견됩니다. 그러나 양심의 강력한 송사와 율법의 정죄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악을 행할 때는 그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핑계 할 수 없으리 만치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보여주지느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은 율법을 통해서 발견하였다 할지라도 그 율법을 이룰수 없는 우리 인간을 사랑으로 감화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행할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마음먹어도 행할 수 없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부여주십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죠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백성들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열방의 백성들 가운데서 누구라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자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방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과,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겸비해져야 하고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떻게 우리에게 자비와 은총을 배푸셔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또,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기역하면서 겸비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인간이 모든 자신의 의무를 다 감당한다 할지 라도 그것이 각각 다른 것이라도 할 지라도 그 다른 것들 속에 공통적으로 배어있어야 할 것이 둘있는데 그것이 사랑과 겸손이에요. 그 두가지가 배어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겸손이 없다면, 아마 자기 힘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사람을 사랑한 공로를 자신에게 돌릴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되 겸손이 없으면 아마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정죄가 될것이에요. 거룩하게 살되 겸손이 없으면, 바리세인들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약한 것을 자랑하리니 약한데서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기 때문이라 고백이죠. 그래서 주님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엎드리는 그 진지한 엎드림과 고백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며 사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