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행하신 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 66:16).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셨던 것을 진지하게 회상하고 나니까 하나님 앞에 번제드릴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시련의 날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서원했던 헌신을 하나님 앞에 이행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15절과 16절 사이에 단락이 바뀌게 됩니다. “내셀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음악적인 기호라고 여기면 될 것 같아요. 음을 바꿔서 이 부분의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이런 기호를 붙인 것은 후대일 것이라고 생각이 되요. 그런데 어쨌든 16절이 15절하고는 좀 문학으로 말하자면 단락이 바뀐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이번에는 언약 백성들에게로 향하는 선언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라고 할 때 ‘두려워한다’는 단어가 ‘공경한다, 경외한다’ 뭐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방의 백성들에게 한 선언이라기보다는 언약 백성들에게 한 선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이건 뭐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그런 의미에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주님을 향한 경건이에요. 경건. 그래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어라’ 그러면서 불러내고 있는 것이죠. 시련을 통해서 간증이 생기는 법이에요. 누구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신앙의 학습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당신의 뜻과 성품들을 보여주시는 계기로 삼으셔요. 그런데 그것을 우리 인간들이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학습이 잘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이죠.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불길이 어떤 물체가 있을 때 그 물체를 공기 중에 두었을 때, 그 다음에 물속에 담갔을 때, 그리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 그것을 집어넣었을 때 각기 모양이 다르지 않아요? 뭐 아주 특별한 물체가 아니라면. 그래서 우리들이 보는 것은 대부분 공기 중에서 그냥 어떤 물체를 보잖아요. 이런 것들을 이렇게 보잖아요. 이게 물속에서는 뭐 커다란 변화가 없을지 모르지만 불 속에 들어간다면 아마 검은 연기와 그리고 붉은 빛을 내면서 확 타오르기 시작할 거예요. 그렇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늘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당신 자신을 보게 하실 때 우리의 감각이 둔해져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성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이해하지 못한다기보다 그저 감각이 없이 그렇게 대할 때가 있는 거죠. 그럴때 고난의 불길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줘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해 주실 때에는 언제든지 사랑해 주시지만 평탄한 환경 속에서 사랑해주실 때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지 몰랐다가 오히려 하나님이 마치 사랑하시지 않은 것처럼 때리고 징계하실 때에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그런 모순처럼 보이는 일도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갖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런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앎을 터득하면서 사람들에게 간증할 마음이 생겨나는 거죠.
그래서 “다 와서 들으라” 뭘 들으라는 거예요? 내가 환난 날에 하나님이 나에게 알게 하셨던 그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오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헌신과 감사의 제사,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우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해서 내가 가르쳐 줄테니 빨리 와서 들어봐라, 그것이죠.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는,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 무지에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주님의 성품과 그 하나님 되심을 가르쳐 주어서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의 섬김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올바른 길로 이끈 사람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리라고 다니엘서가 예언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며 사는 사람들의 받을 상급과 영원한 축복에 대해서 그렇게 자주 언급하였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중요한 선언을 하지요. 뭐냐면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그렇게 노래하고 있죠.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환난을 만나는 것, 또 그 환난 속에서 하나님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일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사물들의 질서를 하나님이 움직이시면서 우리를 다루시는 거지요.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통이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거예요. 상당히 주관적인 거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고생하고 그것이 선택된 특권이라면 고생이라고 생각할 사람 없어요. 오히려 그렇지 못하는 게 고생이죠. 그래서 이 고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물들의 질서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우리를 그 모순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거죠. 그것이 고통이죠. 그런데 그런 고통들을 다시 정시해서 그래서 우리를 그 고통 속에서 건져내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거죠. 이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환경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라고 이야기 하죠. 그래서 시인이 시편 130편에서 “내가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아룄더니” 라고 할 때 그 깊음을 존 오웬 목사님 같은 분은 둘로 나눠요. 그래서 내면의 영적인 깊음과 환경의 깊음으로 나눠요. 환경적으로는 깊음 속에 떨어졌는데 내면에는 완전한 자유가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환경적으로는 모든 것이 평안하고 깊음이 없는데 영적으로는 깊음에 떨어질 수 있는 거라 이거에요. 혹은 둘 다 한꺼번에 찾아올 수도 있는 거죠. 거기로부터, 환경적인 그런 어려움으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시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을 때 그것은 하나의 껍질이고 주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영혼의 구원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로운 일들을 해 주시잖아요. 집을 사게 해 주시고 뭐 그다음에 이런 일, 저런 일 많아요. 그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하는 것이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영국 속담에 “하루를 행복하고 싶으면 이발을 해라. 일주일을 행복하고 싶으면 결혼을 해라. 한달을 행복하고 싶으면 말을 사라. 1년 동안 행복하고 싶으면 집을 사라” 그런 속담이 있어요. 그러니까 결혼을 해서 누리는 기쁨이 말 한 마리만도 못하다고 그 사람들은 생각을 한 거죠. 모든 게 그래요. 무엇인가 새로운 것들이 주어지면 감격을 하지만 인간은 금방 싫증을 내고 시들해 지고 감사하다가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그에 비해서 영적인 하나님의 복은 굉장히 오랫동안 우리에게 남아서 그래서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에 감사하겠끔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 증거가 뭐예요? 우리 오늘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리고 노래하면 찬송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신앙의 감격이 확 밀려오잖아요? 그게 놀라운 은혜에요. 사랑 아니에요. 그런데 뭐 살다가 3년, 4년 지나서 새 아파트 서금서금 해질 때 그때 이 새집 주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 그래서 감동이 밀려오는 사람 있습니까? 새로 아파트 계속 짓고 더 좋은 집이 나오고 이웃들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데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신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인이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고 싶다. 그래서 그 환난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 그 놀라운 사랑, 이런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려주고 싶다 이런 거죠. 그래서 시인이 고통 받던 날에 그렇게 노래하였습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가 되게 하소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그러면서 노래 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위로로 삼는 사람들은 시련이 오고 고난이 오고 또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근거 없는 모욕을 당하거나 괴로움을 당할 때 그때에 오히려 그러한 사물들의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가르쳐주시는 아주 놀라운 비밀들을 터득하게 돼요. 그래서 언제나 위로가 돼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런 주님이 없었으면 나를 괴롭히는 인간과 맞붙으면서 서로 악악거리고 그러고 살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텐데 주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러면서 평탄할 때는 몰랐던 일을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의 영혼에 베푸신 일, 그리고 허락하신 그 놀라운 섭리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를 깨달으며 주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어요. 가장 나빠 보이는 일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일들을 행하시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모든 관용과 그리고 용서, 그리고 사랑 이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환난을 당할 때마다 그것을 주셔야만 했던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평소에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경험하고 주님 앞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