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행차 하실 때에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시 68:24-25).
하나님이 날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짐을 함께 지시고 동행하시는 것을 찬송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앞부분 22절에서 24절 사이에서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장면을 노래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관야를 지나면서 혹은 광야생활이 아니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는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동참하고 함께 해주셨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요.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배성들과 맺은 언약관계에요.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아주 분명한 언약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동행해 주시는 것이죠. 언약관계라고 하는 것은 무었이에요. 나라와 나라사이에도 그런게 있잖아요. 예를 들자며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상호 방어조약이 맺어졌다. 그럼 어떻게! 이 나라를 공격하면, 그것은 우리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알겠다. 그래서 자동으로 전쟁이 개입이 되는 거죠. 언약관계가 바로 그런거에요. 그런데 그런 것은 단순히 전쟁이 났을때의 경우이지마는 전쟁이 아닌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렇게 포괄적인 언약의 관계를 맺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특별히 간섭하시고, 간섭하셔서 역사하시는 그 모든 일 속에서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것이 언약의 관계에요. 근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저희, 저희라고 하는 것은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이죠.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행차하시는 것을 보았으니, 하나님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이것은 뭐냐면, 전쟁에서 소이 애기하는 왕의 친전을 가리키는 그 문맥이에요. 나라가 크고 작은 많은 전쟁을 치르잖아요. 모든 전쟁이 전부다 다 중요하고 나라의 안위에 관련된거긴 하지만는 모든 전쟁이 국가의 운명을 다 결정지어 놓는 건 아니죠. 예를 들며는 남해안에 조금마한 외구의 때가 몰려 왔데더라, 격퇴하려고 사람을 보냈데더라, 그런 거는 나라의 움명을 좌지우지 할 정도는 아니. 그러나 어떤 전면전이 시작이 됐다던지, 아니며는 나라의 전망이 걸린 중대한 전쟁이 있게 되며는 이것은 인제 매우 나라에 운명을 갈하는 전쟁이 되는 거죠. 이때에 왕이 친전을 합니다. 왕이 친히 그 전쟁에 나서는 거죠. 그러면, 왕이 그 전쟁에 직접 나서게 되며는 사실 왕 자신이 전투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확신이 없어요. 왕이 전쟁에 나서게 되며는 수많은 군대들이 왕을 애워싸야 될거아니에요. 그죠. 그래서 왕이 절대 죽지 못하도록 보호주어야 될거아이에요. 그죠. 그대신 이제 그 병사들에게 있어서 그 사기는 굉장한거에요. 그렇지 않겠어요. 왕이 친히 우리의 전쟁에 임하셨다. 여기에서는 바로 그런 왕의 친전의 그림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거죠. 일반적인 왕의 친전에 있어서는 병사들이 오히려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신을 많이 빼앗겨야 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깐, 전쟁터에서 전사하거나 아니며는 전쟁에 패배할 위험은 없죠. 그래서 그 하니님이 친히 이 전쟁에 임재 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쟁을 주도하셔서 승리하게 하셨다 는 그런 뜻이에요. 이런 기록들은 구약에 특별히 많은 역사적인 증거를 가지고 나타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나셔요. 그러니깐 앞에서 오는 바와 같이 바다에 심히 깊은데서 나오고 피에 네발을 잠그게 하고 혀로 원수에서 각각 제 분깃을 얻게하는 이 모둔 전쟁에서의 승리가 결국은 하나님이 친히 그 전쟁에 행차하셨기 때문이라 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 전쟁에 임재하십니까? 오늘 말하는 것은 성소에 행차하셨도다. 라고 말하죠. 성소는, 여로분도 알다시피 성막안에 있는 작은 방이에요. 그러니까, 열여덟평 정도 되는 것을 삼분의 일 삼분의 이 크기로 잘랐을 때 그 삼분의 일 크기의 방이 지성소고 그리고 그 배의 크기가 성소에요. 이 성소는, 이제 성소 지성소 할 때에 그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는 주님이 찾아와 주시는 그 모든 회막을 가리켜서 성소라고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죠. 그래면 결국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행차하셨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왕의 성소에 행차하셨도다. 그 성막에 혹은 성전에 주님이 오셨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뭘 의미하냐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매우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의 전쟁에 있어서 하나님이 행차해 주셨는냐! 그건 아니죠. 심지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블레셋과의 전쟁이 있었어요. 아벡이라는 전투였어요. 거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법괴 까지 가지고 나갔어요. 근데 결국 법괴도 빼앗기고 전쟁에 패배하게 되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일 일어난거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종교관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 법괴도 빼앗기고 그리고 결국은 전쟁에도 패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데, 어덯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게 된거죠. 근데, 그 이유는 아주 분명해요. 왜 분명하냐며는 예전에는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였지마는 여호와를 믿는 종교가 그런 의식에 붙갑히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영적종교라고하는 사실을 보여 준거죠. 법괴가 아무리 거룩하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긴 하지마는 그래도 너희가 아무리 법괴를 가지고 간다고 할 지라도 나 여호와가 너희를 기뻐하고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며는 그러면, 결코 전쟁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 맺는 영적인 관계가 의식적인 종교보다 훨신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거에요.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에요. 그러니깐 이 전쟁은 하나님이 매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임재하셔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해주신 거죠. 그럼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이러한 전쟁에 돌입할 때가 수없이 많고 지난주에 설교한 것처럼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전체가 끊임없는 영적인 전쟁의 연속일진데, 이런 끊임없는 영적인 전쟁의 연속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느냐 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에요. 결국은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가 그 모든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오는 거에요. 그래서 세상에는 환란과 실현이 그리고 많은 유혹의 태풍이 불어도, 주님과 특별한 관계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거에요. 남들이 보기엔 연약한 것 같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의 신앙의 성소에서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이길 수가 있는 것이에요. 우리의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제 소고치는 동료중에 가객은 앞세우고 악사는 뒤따릅니다. 이건 뭐죠. 전쟁이 끝나서 개선의 행진을 하는 거에요. 유사한 행진이 언제 일어났죠? 이스라엘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그때 그 언덕에 모두 모여서 미리암의 소고에 마쳐서 그래서 여호와와 같은 분이 어디에 있느뇨. 하는 그 유명한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찬송이 온 홍해 바다위에 두루 퍼졌어요. 옛날에는 어느나라 든지 다 마찬가지죠.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나라를 위해서 싸운 그들에 대해서 열렬한 환영을 보내는 환영 행사가 있었어요. 여기에서 바로 그걸 보여주는 거에요. 그니깐, 전쟁에서 이렇게 이겼을 때, 소고치는 여자 아이들 중에 노래부르는 사람들은 앞서고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뒤를 따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삶을 이렇게 들여다 보면, 결국은 뭐냐며는 우리의 삶에 많은 승리가 있으면, 찬송은 저절로 나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앞에서 우리들이 승리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승리 그 자체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마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 차게 하게 하기위해서 더더욱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온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앞에 우리의 삶자체를 영적인 전쟁이라고 여기고 거기서 이길 수 있는 그러한 은혜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 전쟁에서의 승리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성소에서 행차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깐 시련이 많고 영적인 전쟁이 끊임 없이 계속되는 이때에 우리가 말씀가 기도로 성령으로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죠. 기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