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73:25)
녹취자: 이지영
시인은 이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소에 들어 갈 때 재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가 있겠습니까? 땅에서는 내가 주밖에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 라는 유명한 고백을 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을 고백을 합니다. 성소에 들어 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기를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영광으로 자기를 영접할 것을 고백하며 주님이 자기에게 있어서 사랑할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성경에서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겠습니까’ 이부분을 ‘하늘에서는 누가 나를 위하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번역이 틀리진 않았지만 지금 말씀드린 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하늘에서는 누가 나를 위하겠습니까’ 혹은 ’누가 나를 위한 자이옵나이까‘ 이런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많은 것들이 나를 대하여 나를 위하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소멸하는 것들이고 이 땅에서만 있는 것들이지 죽음 넘어까지 우리와 함께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있는 것들은 있는 것 같지만 소멸의 혹은 죽음의 빛으로 보면 지금은 있지만 사실은 없는 것들입니다.
이 시인이 성소에 들어 갈 때 깨달은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의 차이였습니다. 그것을 아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이 땅에서도 알야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잠시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의 회의에 빠지는 동안에 이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인생에 유일한 궁극자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은 이런 존재의 질서가 올바로 된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은 바로 이렇게 소멸하는 것과 영원히 계신 하나님 사이를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삶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바로 하나님이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이 이 땅에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시인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 없이 형통한 자들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면 절대로 하늘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섬광과 같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깨달음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간이 라고 하는 장막이 가리고 있는 그 현실을 휘장을 찢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이 눈앞에 있는 현실보다 더 영원하고 궁극적인 현실이 펼쳐졌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이외의 모든 번영하는 악인들은 소멸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만이 영원히 계신 분이고 만약에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다면 그분은 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시며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악인이라도 잠시 번영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없앨 수 없구나 라는 현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의 악과 선이 모두 징벌되거나 보상된다면 아마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실적인 이유가 악의 문제입니다. 이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거나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만 선과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악과 죄의 문제, 선과 공평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훼손했던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 없다 말하기 이전에 그것은 반듯이 있어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 인생의 공평의 문제를 죽은 이후의 심판과 상급에까지 연결해야 금생에서의 모든 선약의 모순들이 극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논리적으로 이것을 요청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필요해서 요청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있게 하셔서 이 세상에서의 선과 악의 모순을 종결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종결자적인 역할을 이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데 죽은 이후의 일어날 현실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현재적으로 시인의 마음속에 각성시키는 하나님의 강력한 영적인 은혜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의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이는 이 세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초자연적인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깨달음과 지혜의 빛을 받으며 우리가 인생을 슬기롭게 영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초자연적인 빛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에 직통적으로 주시는 빛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들을 우리에게 일깨우시거나 성경을 통해 새롭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적용해 주시는 지식의 빛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의 기록된 계시와 그것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속에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매일 매일 현실로 다가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재난문제, 우리 앞의 행복, 우리 앞의 나의현실, 어느것 하나 우리가 노력해야지만 겨우겨우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픈 곳은 아픈 곳을 느끼지 않아도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스러운 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고통을 겪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속한 신령한 사실들은 우리의 본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번쩍하고 비치며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실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깨닫게 되고 하늘에 속한 것이지만 이 땅에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이 사실을 경험하게 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들 사이에 있는 영원한 차이를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고 하나님이외의 모든 사물들은 소멸한다는 것이였습니다. 특별히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시인의 마음에 가득 찼던 하늘의 전망은 이 땅의 전망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고는 고백합니다. 이땅에 사모 할자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땅에서는 주님밖에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의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흔들렸던 고백이였습니다. 이런 고백이였죠? 땅에서 주님만 사랑함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내가 과연 이 땅에서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으나 악인은 형통하고 나는 고통을 당하나이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한 결과입니까 이렇게 주님께 항의하고 대들고 싶었던 시인의 마음이였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악인이 심판을 당하는 것과 하나님이 항상 거기 계셔서 당신이 뜻대로 사는 성도들에게 용납하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면서 이 시인은 결국 이 땅에서 정말 사모할 분이, 성경에서 내가 진정으로 욕망할 대상이 우리 주님밖에 없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인생들 안에 있는 것들로만 우리 인생을 보면 우리의 인생의 실체가 잘 안보이나 우리의 인생의 실체를 우리의 인생이 아닌 또 다른 실체로 볼 때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잔치집에 가서 즐거워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초상집에 가서 슬퍼하는 사람이 인생이 무엇인지 정확히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듯이 이 땅의 모든 삶과 사물을 하늘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무엇을 얼마나 사랑하고 무엇을 얼마나 좋아할지 올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 있는 것들은 시간의 빛으로 본다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에 있는 것들을 영원에 빛으로 비추어 보았더니 이 시인처럼 하나님만이 영원한 분이시고 살아계신 분이심을 깨달았고 번성하던 악인이 자신에게 신앙의 문제를 준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살아도 영원에 빛으로 살고 매일매일 이땅에 살아도 영원에 잇대어 사는 신자의 삶이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