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멀리하는 자의 불행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73 : 27)
녹취자: 이병두
이제 시인은 이 시의 말미에서 자신이 성소에 들어갈 때 새롭게 깨달았던 하나님, 그분을 아는 지식과 그렇치 못한 사람들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아주 분명하게 이전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공의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했던 자기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 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 혹은,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여기서 ‘망한다’는 것은 무엇 입니까? 성경에서 ‘멸망한다’는 표현이 아주 자주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망한다’는 표현은 건물이 파괴되거나 혹은 전쟁이 나서 도시가 파괴되는 그런 종류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망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질서 잡히고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기운을 가지고 서 있는데, 물질의 경우에는 골격들이 서고 힘들이 균형이 이루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타격에 의해서 무너지면서, 본래의 존재을 상실하는 것을 ‘망한다’라고 말합니다. 집을 생각해보면 집이나 성이 각기 질서를 갖추고 힘들의 균형을 이루면서 건물로 성벽으로 왕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타격을 받아서 무너져 버리는 것이 바로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물리적으로 이런 건물이나 시설들이 망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망한다’하는 표현은 꼭 ‘죽는다’라는 표현은 아닙니다. 죽는 것을 포함 할 수도 있지만, 인간에 대해서 이 말이 사용되어 질 때는 ‘망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로서의 가치,존엄,그리고 어는 정도의 영광이 질서 잡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무너지고 나면 그 사람의 본래의 영광도 잃어버리고, 본래의 힘과 세력도 상실하고, 자기가 파괴 되어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 이것을 ‘망한다’라고 하는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화) 한나라의 임금이 나라를 통치하고 다스립니다. 왕궁에 살고 모든 대신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권좌에서 쫒겨납니다. 몸은 살아 있지만 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위엄, 존재감, 그리고 그를 통해서 구현되던 질서, 이런 것들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왕으로 있을 때에는 한번 명령을 내리면, 도시와 촌락, 저 먼 바다의 섬까지 자기의 통치에 복종하다가 왕국이 망하고 나면, 자신이 무엇 이라고 말해도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몸은 터럭하나 상하지 않고 건강하지만, 본래 가지고 있었던 영광과 위엄, 가치, 존재감, 능력 이런 것들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을 ‘망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 혹은 ‘망합니다.’ 라고 단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를 멀리하는 자’라고 것을 포괄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키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이 세상을 공정하게 통치하실까?‘라고 하는 의심입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면, 악인들의 번영과 의인이 고난 받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면, 차라리 나도 이 시대의 아들들 처럼 그렇게 막 살았으면 차라리 좋았을걸! 내가 손을 씻어서 매일 하나님 앞에 나를 정결케 하고 말씀에 의해 책망을 받으며 산 것이 내게 무슨 행복을 가져다 주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던 그 모든 생활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생활이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는 자’는 은유적으로 자신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전절과 후절에 아주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전절에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무지가 그 원인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무지는 사실적으로 자신이 입은 피해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는 자신이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는 곧 악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무지를 죄악처럼 동일하게 미워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지식에 배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 6장 보면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것을 선지자가 예고하면서, 그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고, 또 그들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하는 그러한 시대가 올 이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셨겠지만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너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평생 사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렇치 않은 사람들은 때로는 자신이 원해서, 혹은 자신이 그렇게 까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 지독한 회의의 과정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 눈에 보이는 우리의 인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영원한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무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면서 그런 삶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무지의 어둠 속에 갖혀 있기 때문에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지 가운데 행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거절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그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원인이 무지를 극복하는 지식을 통해서라고 하는 것은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가장 옳치 않은 방식으로 사랑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입니다. 하반절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라고 소극적으로 말해놓고 하반절에서는 ‘음녀같이 주를 떠난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음녀‘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음탕한 마음을 가지고 본래 자신의 남편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육욕을 쫓아서 다른 남자를 탐하는 여자‘입니다. 이것은 순간순간의 의지적인 결정이지만, 그러한 의지의 결정의 밑바닥 속에는 이 여자의 음녀적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켜 우리들은 ’바람끼‘라고 이야기합니다. 성향으로 마음에 흘려서 자기가 매순간 의지로 결단을 해서 악을 행하고 죄를 짓지만, 이 속에는 한 남자에 정착하지 못하는 그런 음탕한 기질이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음탕한 기질이 추호도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아직 강하고 깊은 성향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엄청난 의지를 발동해야지만 지을 수 있는 죄를, 이런 음녀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의지의 힘으로도 넉넉히 그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음녀는 경건하게 살고자 하나 어는 한 순간에 음탕한 유혹을 잠시 느끼는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닙니다. 이는 뼛속까지 그런 기질이 배어있는 성향화된 죄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었습니다. 그가 남편과 혼인했습니다. 그런데 외갓 남자에게 가서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가서 그를 찿아옵니다. 다시 돌아올 때 그 마음은 진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실성과는 상관이 없이 ’고멜‘이라는 이 여자의 속에는 이미 오래전 부터 신전의 창녀로 제의에 자신의 몸을 바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외갓 남자와 몸을 섞으며 살아가는 그것이 그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뿐더러, 또 어는 정도 죄책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이 음탕한 성향이 그런 죄책감으로 통제될 수 없을 정도로 기질화된 음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음녀같이 주를 떠났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인관계로 묘사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신약에 와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묘사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남편이라고 보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보는 이 비유는 신약에서 새롭게 고안된 비유가 아닙니다. 구약에 이미 뿌리를 두고 있는 여호와와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을 혼인관계로 설명하였던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혼인 관계에 충실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람을 피웁니다. 그것을 가르켜서 ‘음란하게 우상을 섬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동기가 마치 한 여자가 남편을 배신하여 정절을 잃어버리고 음탕한 일을 하는 것과 아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에게 절하고 이방신을 공경했던 이유는 무엇 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그렇게 하였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간단합니다. 자기번영과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 애굽땅으로 부터 건져내어 가나안까지 데려오셨지만, 가나안에 와보니 수 많은 신들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고 생각 한 것은 왜 그런지 원시적인 신앙처럼 생각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이렇게 20세기에 새롭게 생겨난 사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지만, 굳이 배타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므로 가나안의 신들에게 밑보일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행복과 번영에 차질이 올 것이다’ 그러면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음란한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니 ‘음녀와 같이 주를 버린자’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죄를 짓고, 이 세상에서 취해야 할 자신의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절은 미완결형을 사용하고 후절은 완결형을 사용합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앞에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 미완결형을 사용하고, 뒤에는 완결형을 사용합니다. 두 개를 대조하면서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멀리 떠나고 음녀와 같이 언약을 파기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이 시인의 마음속에 이미 그렇게 일평생 악을 행하고 마지막 죽을 때에도 꽃상여에 쌓여 지나가며 평안한 얼굴로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예전에는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악인이 저렇게 행복을 누리다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지만, 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일의 결국을 깨달은 다음에는 ‘음녀와 같이 주님을 떠난 자’에게 주께서는 다 멸하셨나이다. ‘이미 그들이 죽은 후에 사후에 심판이 행해졌다’라고 하는 사실을 시인이 완결형으로 표현 하면서 확신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바는 우리가 어떤 성경의 진리를 체험적으로 확고히 붙들고 있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리를 배우고,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꽉 붙들고 신뢰하면서 실제적으로 헌신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지식이 좀 적어도 받은 그 지식중 올바른 지식들을 믿음으로 꽉 붙들고 그것에서 은혜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의 신앙이 훨씬 더 견고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꽉 붙들고 견고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은 말씀을 배우면서 그 말씀을 붙들고 산다면, 그 삶의 질은 현저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는 한 진리를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앞에 실제적인 믿음의 삶을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런 확신과 신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커다란 신앙의 낭패를 보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굳게 믿어야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배운바 그 진리에 대한 깊은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실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믿음 생활을 해 나가는 이 생활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굳게 믿으며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