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순종하라
녹취자 : 장미연
반갑습니다. 가족관계의 회복을 위한 시리즈 오늘 7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공경과 순종이 자녀가 부모에게 보여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을 보면) 하나님이 세계와 인류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의 세계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해 종교 명령을 지키고 노동 명령에 순종하면서 이 세상에 모든 사물들을 다스리고 돌봄으로써 인간이 없었던 것 보다 훨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서 증진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우시고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오늘 여기 서있는 우리는 아무런 관계없이 단절된 상태로 이 세상 속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는 하나님 그리고 이 모든 세계와 인류를 어떻게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그 속에서 교회 그 교회에 한 지체인 나.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들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 이런 거 모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세계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이 세계가 굴러가는지 모릅니다. 제가 14살 2개월 되던 때에 그렇게 가슴 아파서 했던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저는 그 후에 실존주의자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깊이 공감했습니다. 어느 한 순간 모두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형제, 친구, 이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심지어는 엄마, 아빠는 내 가까이 살면서 살아왔던 사람도 나와 무슨 상관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도 세계도 교회도 나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럼 질문할 것입니다. “믿고 있어도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요?” 그렇습니다. 믿었으나 충분한 지식이 결핍되어 있을 때는 신앙은 다시 오리무중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식의 빛에서 자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기본적으로 가족은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그 다음에 누나 등등으로 이루어졌고 고모도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시집오니까 시할머니 연세가 32살 이더랍니다. 시어머니가 막내아들을 낳기 2년 전에 며느리가 먼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시동생을 자기 젖을 먹여서 길렀습니다. 그때는 왜 조혼이니까 할아버지 14살, 할머니 17살에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40세였습니다. 지금 나이가 40세를 먹어도 아직 장가를 안 간 형제들이 많은데 우리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증조할머니, 할아버지도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가족의 개념이 그때는 훨씬 더 대가족 사회에서 넓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핵가족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버지, 어머니 가족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기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계십니다. 요즘 잘못하는 게 아버지, 어머니라는 젊은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미 자기 결혼할 때부터 함께 살아오셨는데 혹은 중간에 합류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는 굉장히 섭섭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대가족 사회 때의 가족의 개념과 핵가족이 됐을 때의 가족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뭘 하고 있나? 성경은 침묵합니다. 성경은 ‘고모, 삼촌까지 다 가족에 넣어야 된다.’, ‘너희 둘만 가족이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가족구성원은 우리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같이 살지 않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족으로 치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자녀가 결혼을 하고 부모와 함께 살아도 “그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 라는 구절은 ‘결혼한 후에는 반드시 부모와 별거하고 분가해야 된다.’ 라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부모를 의존하던 데서 독립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들이 가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정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쨌든 나라고 하는 존재는 가족들 속에 있는 나입니다.
그러면 가족이라고 하는 관계는 매우 특별한 혈연으로 맺어지고 운명 공동체적으로 살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가족 간에 마땅히 있어야할 유대 관계들이 자꾸 깨뜨려지는 가족 해체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결국은 여러 가지 사회 문화적인 요인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가족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이 안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가족들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져야 합니다. 관계라고 하는 것은 저절로 증진되는 그런 관계는 없습니다. 상호적입니다. 일방적으로 받는 사랑을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부모든지 자식이든지 자식은 그럴 가능성이 많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관계적인 것이니까 서로서로 그 관계를 위해서 기여하며 살아갈 때 그 만큼 그 관계에 혜택을 누리기도 하고 그 관계의 혜택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부와 부모가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질서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게 남편과 아내를 종속관계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 차례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창세기 2장에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구절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설을 내놓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그러한 해석을 내놓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내놓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될 것 사이에는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던 성경은 분명하게 남편과 아내를 종속적인 관계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질서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원하지 않아도 성경이 명백하게 반복해서 주고 있는 질서입니다. 그런 것들을 받아 들여야 하는데 그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남편이 내려주거나 아내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그런 시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대등한 사랑입니다. 질서가 있는 것과 사랑이 대등한 것, 이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질서는 사람을 사람이 지배하는 의미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정을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고 가정에 관한 당신의 경륜을 펼치시기 위해서 그 가정을 하나님이 생각하는 통일된 질서 속에 데려가시기 위한 신적인 질서와 인간적인 질서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데 그 속에서 남편과 아내가 어떤 관계를 갖는지 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싫다. 그러면 자기 싫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남성들은 종속적인 관계로의 질서로 잘못 해석합니다. 여러분들은 생각 없이 지나쳤겠지만 사람들은 결혼할 때 서약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쓰는 예식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남편에게 “신랑 김 아무개군은 신부 최 아무개양을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했을 때나 일평생 그를 사랑하고 일정한 부부의 정절과 대의를 지키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문답을 할 때는 “사랑하고 존경하며”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부교역자를 불러다가 “신학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이게 맞는 거냐? 결혼 표준 예식서에 이렇게 나오는데 남편은 사랑만 해주면 되고 여자는 사랑도 하고 존경도 해야 되는 게 맞겠냐? 존경을 빼려면 다 빼고 넣으려면 다 넣어라.”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사용하는 예식서에는 “형제는 신부 ○○를 끝까지 사랑하며 존경하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남녀에게 똑같이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이와 같은 편견들이 우리 생각에 많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처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유교 문화를 기반으로 들어오면서 남성 우월주의적인 사고들이 함께 해석 속에 묻어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시어적인 사랑이 아니라 대등한 사랑입니다.
두 번째, 부부에게는 생육의 질서가 있습니다. 부부가 결혼을 하게 되면 자녀들을 낳습니다. 부부는 자녀를 낳는 것이 결혼의 주요한 목적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남녀의 결합을 통해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부모의 사랑은 부부의 사랑과 좀 다릅니다. 대등한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녀에게 쏟아 붓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공경이 있을 때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야 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똑같이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면 남편도 존경하고 사랑하라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분명한 거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 따라서 자녀를 향한 끝없는 사랑입니다. 일반적인 상태라면 남편이 못했을 경우에는 아내가 그렇게 사랑을 못해도 자식이 똑같을 정도로 못했을 때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본성입니다. 요즘은 이런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면 자기 자신의 행복과 안락 같은 것들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 것이 많이 학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이 속에 깊이 배여서 자신 속에 하나의 후천적인 유전자처럼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굳이 희생할 필요가 뭐가 있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정하게 자녀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이런 질서조차도 깨지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그 부모의 일방적인 사랑의 그늘 아래서 보호받아야 하고,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보존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못 견디면 가정을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이 보존이 안 되는 것입니다. 또다시 아주 힘겨운 멍에들을 짊어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거겠습니까? 요새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요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가엾다.’ 벽에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부터 시작해서 펄펄 끓는 방황하는 젊은이들로부터 시작해서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 강의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에 이르기 까지 가엾습니다. 살아 있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런데 삶이 우리의 인생의 무게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을 잘 극복하고 이기며 살아갈 때 인생은 살만한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는 표현으로 ‘순종’을 말합니다. 관계의 덕목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아내가 남편에게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복종’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가져야 할 덕목은 ‘괴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은 ‘노엽게 하지 않음’, 자녀가 부모에게 가져야 할 덕목은 ‘공경함’ 입니다. (그림) 옆에 사랑을 써놓은 이유는 ‘사랑이 없는 이유’가 아니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도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하고 남편과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도 사랑해서, 자녀가 부모에게 공경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랑이 이렇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기반이 이루어져야 하고, 사랑을 기반으로 모든 것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질서는 쉽게 이야기하면 기계적인 복종적 질서라기보다 네 가지 관계 다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할 때 우리 각자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각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가정 속에서의 그 질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에서 사랑이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면서 복종하고 남편은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아프게 하지 아니하고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를 마음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규정하는 사랑의 관계의 모습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기어 다니다가 점점 성장을 해서 여기에 이렇게 무언가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감 있게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삶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 괄목할 만한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산에 갔다가 산속을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닮은 짐승을 발견합니다. 이게 너무 기이한 일이니까 다시 관찰을 했는데 틀림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짐승하고 똑같이 소리를 지르며 네 발로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포획을 했습니다. 잡고 보니까 완전히 사람입니다. 한 아이는 7살 쯤 됐고 또 한 아이는 정확한 나이가 생각이 안 나는데 9-10살 정도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왜 산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확실한 것은 짐승들이 그 아이들을 양육한 것입니다. 젖을 먹여서 기른 것입니다. ‘그 아이들을 인류 사회에 데려와서 어떻게 교육시켜서 사회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전 세계에 유아교육학자들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프랑스에 모였습니다. 그 아이들을 4-5년 정도 돌봤는데 결국 실패했습니다. 둘 다 죽었습니다. 9-10살쯤 된 아이를 4-5년을 교육했는데 그 아이의 지능이 겨우 한 4살 정도까지 밖에 안 되었습니다. 교육학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지식과 많은 교육방법이 있는데 그 분량을 아무 때나 시키면 되는 게 아니라 딱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교육의 중요성이 엄청나게 부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도 유아교육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프랑스처럼 아이가 2년 6개월 되었을 때부터 의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프랑스는 전체 교육 예산의 10% 정도를 2년 6개월부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들을 교육 시키는데 투자합니다. 그만큼 유아 교육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만 가도 아이들이 굉장히 거칠고 5, 6학년정도 되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끔직한 범죄들이 일어나고 그렇잖습니까? 이런 것들을 볼 때, 인성 교육이 훨씬 앞당겨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굉장히 앞서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아부부터 시작을 해서 벌써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교회에서 그치지 말고 사회적으로도 이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부분 부모들은 고등학생 자녀에게 교육비를 제일 많이 써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가야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렸을 때 교육에 신경을 써서 양질의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게 꼭 돈을 주고 남에게 위탁하는 교육이 아니라 부모들이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가 유아의 시기라는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게 되는데 그때에 이 아이의 성장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관계가 있지만 특히 부모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일평생 확장되어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교육학자들은 크게 인간을 이야기 할 때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본성, 환경, 교육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서 본성은 어떻게 손댈 수 없다고 하지만 이것도 사실 부모로부터 많이 물려받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사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교육의 환경이 부모 자체라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살, 두 살 된 아이들이 어디 환경이 있습니까? 엄마하고 주로 같이 하는 환경이잖습니까? 아빠도 의식이 있는 사람은 일찍, 일찍 들어오고 토요일, 주일도 꼬박 집에 있으면서 돌보지만 의식이 없는 사람은 엄마하고 같이 있습니다. 어마 어마한 성격 형성의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인간이 자라는데 자녀가 부모를 향해 가져야 할 덕목은 순종입니다.
오늘 성경은 ‘히포아쿠에테’라고 말합니다. ‘히포’는 ‘아래에서’라는 뜻이고 ‘아쿠에테’는 명령형인데 ‘들어라’ 입니다. ‘아래에서 들어라.’ ‘아래에서’ 라고 하는 것은 ‘낮은 자리에서 들어라.’ 이렇게 부모로부터 어린 자녀들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진리를 어린 시절에 배우고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인간이 사는 도리를 배우면서 이 아이가 자신이 외톨이가 된 단절적 존재가 아니라 위로는 하나님과 이웃들이 가족을 통해서 확장되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자연들과 선의를 가지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을 이 가정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보면 한 인간이 태어나서 부모가 된다고 하는 것은 참 어마 어마한 일이고 한 인간에게 또 그 인간이 관계를 맺을 배우자와 그 배우자 사이에서 태어날 자녀들에게 어마 어마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럼 만약에 그 부모가 선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성이 따듯하고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쉽게 이야기해서 그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은 세상말로 땡잡은 것입니다. 인생을 시작할 때 다른 아이들은 0미터에서 시작을 하는데 이 아이들은 한 30미터에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돈이나 출세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경주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부모에게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점이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문맥이 아무 사람이나 불러다 놓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경건한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든지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부모를 염두에 두면서 이 아이가 순종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모가 전혀 아닌 사람. 쉽게 이야기하면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나쁜 인간이 되어갈 수밖에 없는 극단적으로 그런 부모라고 할 경우 어떻게 하는가? 이런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 공경에 대해서 구약부터 강조를 하고 신약에까지 넘어 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들어있다고 봐야 합니다. 자연적 질서와 신령적 질서의 문제입니다. 자연적 질서는 일반은총과 관련된 건데 하나님이 인류를 번성케 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통용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것대로 하면 하나님이 불신자라도 섭리 속에서 복을 받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살게 하심으로써 이 세계를 규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부모로서 마땅히 공경해야할 것과 부모의 가르침이 주님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순종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 둘을 구원해야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어떤 과오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한 칼에 부모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인정은 해주지만 기본적으로 마음속에서 부모를 향한 어떠한 공경도 사랑도 배려도 인격적으로 서로 교통하고자 하는 의욕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거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최근에도 사회적인 상당한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부모의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하고 자기들이 선교를 한다고 하는데 자기가 먼저 선교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가 어떠한 패역한 경우에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에는 어떠한 관계여야 하느냐?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순종하고 공경하고 그 다음에 그 부모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한다.’ 라고 하는 것은 장소적으로 함께 산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의 정신적이고 이러한 연합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보니까 아직은 대충 젊으셔서 아이들한테 소외감을 느끼십니까? 아직 안 느끼시지 않습니까? 그럴 연세가 아직 안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되면 자식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낍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지를 않고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데 어쩜 이렇게 소통도 안 하고 이렇게 살아갈까? 애들은 왜 그럴까?’ 놀랍게도 그 질문을 한 그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 자기 자식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깊이 캐들어 가면 나중에 뭐에 귀결 되냐면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돼서 부모와의 관계가 깨져 버립니다. 깨져 버리면 관계가 깨어집니다. 인간성이 파괴 됩니다. 그 속에서 이 사람이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누리지를 못했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 나냐면 아빠가 되는 것이 뭔지, 엄마가 되는 게 뭔지, 그걸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은 굉장히 올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녀들을 향해서 자신은 전혀 그러려고 하지 않은데 아빠가 자기에게 한 것처럼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똑같이 자기 자식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엄마, 아빠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으면서 그것을 심리학에서 보복적 모방심리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이상하게 부모가 아니라 자식에게 보복하는 심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젊은 형제, 자매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결혼 할 때 다른 모든 것들을 좀 봐야 되잖습니까?
(예화) 지난주에 제가 여러 항의 편지를 받은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목사님은 그렇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남편에게 불만족하냐? 그 남편이 돈도 많고 가문도 좋고 공부도 많이 하고 얼굴도 잘생겼으면 당신한테 시집 왔겠느냐? 가서 한 번 거울을 봐라.’ 제가 그랬습니다. 그게 엄청나게 상처가 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아침에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 집사람하고 결혼하기 위해서 무기한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일주일 금식 기도를 하고 정확하게 10 킬로그램이 빠졌습니다. 진짜 믿음으로 결혼 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하는 것은 정말 믿음으로 했냐? 난 아닙니다. 우리 집사람의 성품도 봤고 얼굴도 봤고 신앙도 보고 다 봤습니다. 누가 그거 안 보고 결혼하겠습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만약 그런다면 사진도 볼 필요 없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응답 받았으면 그 사람이 누구든지 결혼해야지 여러분 중에 누가 그렇겠습니까?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을 하는데 그 신앙이 훌륭했으면 그 사람이 정말 자기 남편과는 형편없이 사회 누가 보더라도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 기도라는 거 하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던졌을까? 솔직해져야합니다. 그것은 내가 여성들의 외모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잖습니까?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깨지면 자식은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과의 관계를 올바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거의 공식처럼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혼 할 때 만약에 다른 거 이외에 가장 중요한 거 한 가지를 골라야 하는 판단이 안선다면 전 항상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확률적으로 부모로부터 한없이 사랑을 받은 자매는 절대로 자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향해 신실하고 자애로웠던 집안에서 자라난 아이는 가정에서 반드시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100%는 아니지만 확률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3, 4대까지 재앙을 임하게 하겠다.” 라는 것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복수를 하지 않으셔도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고 부부와 자녀들과의 관계가 망가지면 그 불행이 계속 대물림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결국 폭력, 폭언 그 다음에 말도 안 되는 엄청난 기대를 자녀들에게 하고 상처와 고통을 줍니다. 소외 속에 버려집니다. 부모를 공경할 수 없습니다. 먼저 용서해야지만 공경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가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자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자녀도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자녀를 공경할 수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이렇게 빨간색으로 변해야지만 끊어진 부모와의 관계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게 보면 폼페이의 유적입니다. 폼페이가 베수비오 화산으로 묻혀 버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이 가까이에서 부모가 죽고 이거는 논란이 많이 있지만 이 사이에 있는 게 아마도 아이 일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죽어가는 순간까지 꽉 끌어안고 재가 되어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부모입니다. 자식들은 사실 부모의 사랑을 정말 나쁜 부모도 있지만 부모의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몰라주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닫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모가 다 죽고 갔는데도 자기 부모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지만 여전히 사랑했다는 걸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배운 내용은 다섯 가지입니다. 1번 자식의 덕목은 순종입니다. 2번 순종은 공경에서 비롯됩니다. 공경입니다. 3번. 공경은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에서 옵니다. 4번. 상처를 준 부모와 화해하라. 화해가 먼저 필요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하나님의 은혜가 관계를 고친다.
Q&A
Q. 지금 현재 중학교 2학년 남자 쌍둥이와 중학교 1학년 여자 아이를 둔 엄마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한참 반항기에 있는 사춘기 아이들에게는 일방적인 강요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학교에 상담을 가보면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이 참 사랑받고 자란 표가 난다고 말씀하시거든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지혜롭게 반항적인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A. 그건 부모에게 순종하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의 신앙의 깊이만큼 또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한 깊이만큼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들이 모두 부모를 사랑합니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아직 부모를 사랑하거나 신앙이나 이런 것들이 두께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이만큼의 부모에게 순종과 공경의 깊이를 요구하면서 막대기를 찌르듯이 밀어 붙여서는 안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이 회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가 “너 날 사랑해라.” 하는 것보다 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 말씀이 “내가 널 사랑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 나는 너에게 참 슬프다. 왜 부모에게 그렇게 하니?” 그게 그 아이에게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걸 완전히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그 부모의 진심을 깨달을 때까지 일체의 인내심과 무한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아이들을 용서하며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이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잘못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지적해서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고쳐집니다. 그 잘못이라는 것이 살인이나 성폭행이나 도둑질이나 이런 거라면 엄마, 아빠가 온 몸을 던져서 막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안 들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매를 무서워하니까 따끔하게 때려서라도 아이를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미 컸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잴 수는 없지만 아이가 매를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 거기서 부터는 매를 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나이를 언제라고 말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 빠르면 3, 4학년정도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치사하게 부모가 “너 이렇게 하면 이렇게 안 해 줄 거야. 너 이렇게 하면 내가 용돈도 안 줄 거야. 밥도 안 줘.” 이런 식으로 하면 애들이 돌아서면서 ‘아이고 치사하다.’ 그러고 돌아섭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기다려 줘야 합니다. 이 아이를 고쳐주어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할 것이 관계가 파괴되는 것. 그것은 좀처럼 복원이 안 됩니다. 어떻게 합니까? “네가 공부 좀 했으면 좋겠어.” 너무 안 합니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관계가 파괴되기 전까지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넌 공부 안 하면 내 새끼도 아니야. 내 자식도 아니야.” 이런 식으로 아빠들이 가끔 이야기하잖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Q. 저희 아버지는 현재 간암과 폐암 3기 투병중이시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어렵게 운을 떼면서 아버지가 전도사님을 만나서 하나님 믿음에 대한 말씀을 들어보기를 권유했는데 아버지는 아직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하나님을 모르시고 떠나실 까봐 마음이 많이 안타까운데 현재 상황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되는 것인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는 것인지?
A. 그런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부모들이 끝까지 안 믿으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돌아가실 때가 됩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면 아버지가 궁극적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하나님과 그 아버님 문제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첫째는 그렇게 임종하시기전에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두 번째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거나 아버지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가지면 안 됩니다. 훨씬 더 넓은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 자체를 불쌍히 여기며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끝까지 아버지가 예수 안 믿고 돌아가시게 된다면 미워 할 것입니까? 포기할 것입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 깊이 한 인간으로서 사랑해주면서 기다려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아버님이 아마 마음을 여시고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워서 하룻밤 사이에도 그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런 사람들 너무 많이 봤습니다. 저희 장인어른은 죽어도 끝까지 예수를 안 믿으실 것 같은 분이었습니다. 굉장히 건강하셨는데 시골에서 장모님과 함께 지내셨는데 넘어지셨습니다. 노인들은 넘어지는 게 제일 무섭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못 움직이게 되신 것입니다. 아버님이 가만히 누워서 조용히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저도 가서 전하고 안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고민하다가 지금은 없어졌는데 mp3 나오기 전에 카세트테이프가 있었습니다. 한 달에 돈을 내면 월별 회원으로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주는 게 있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자기 돈을 내고 여기서 매주 보내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이게 계속 옆에 쌓이는 것입니다. 누워서 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옆에 녹음기가 음악을 좋아하는 분도 아니고 하니까 시골 노인네들이잖습니까? “얘 그거 갖다 놔라.” 녹음기를 놓고 연설을 했다고 하니까 들은 것입니다. 놀라운 게 그 병상에서 회심을 하셨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놀라웠습니다. 회심하시고 시편 23편을 병상에서 닳도록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모릅니다. 낙심하지 말고 자주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