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Ⅱ
(2003-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목자는 계십니까?(시편23:1)2003.11.30(주일오전) 1
2. 염려를 넘어서서(시편23:2)2003.12.7(주일오전) 19
3. 영혼의 침체와 회복(시편23:3上)2003.12.14(주일오전) 32
4. 영혼의 회복을 주심은(시편23:3下)2003.12.21(주일오전) 44
5.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시편23:3下)2003.12.28(주일오전) 56
6.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도(시편23:4)2004.1.4(주일오전) 66
7. 밥상 앞에서 만나는 하나님(시편23:5上)2004.1.11(주일오전) 75
8. 내 잔을 넘치게 하는 하나님(시편23:5下)2004.1.18(주일오전) 86
9.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시편23:6)2004.1.25(주일오전) 96
1. 목자는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한 때 좋은 회사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사십대의 중년 남성이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질병에 시달리면서 이 사람은 밤이면 잠을 잘 수 없고 낮이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이상한 질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신통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고 결국은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 직장까지 휴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어느 독실한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정신병원을 소개받았고, 거기에 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의사가 한 한 시간동안 자기 얘기를 다 듣더니, 젊은 사람이, “걱정 마십시오, 선생님. 그 병은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그러더니 자기 자리에 앉아서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처방전을 봉투에 넣어서 풀로 붙인 다음에 건네주더니, 약국에 가서 약을 지으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 조용히 펴보고 그 때 약국에 가도 늦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봉투를 받아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이제 저녁때에 진짜 혼자 자기 방에 앉아서 펴보니까, 진짜 처방전이 나왔습니다. ‘처방전, 이름 누구누구, 나이 몇 살,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아래와 같이 처방합니다. 1.약 이름, 구약. 약의 종류, 시편23편. 복용방법 일일 5회 물 없이, 천천히 씹어서 드시오. 부작용 발견된 바가 없음. 기타 꾸준히 복용하셔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처방전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분노했습니다. ‘아~ 내 인생이 막판에 오니까 별 거지같은 녀석이 나를 놀리는구나.’
그 날 밤도 가위에 눌려서 한 숨 못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새벽에 엉금엉금 윗목으로 기어가서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의사가 진료를 하고 약을 팔아야 돈을 벌텐데, 이걸 왜 써줬을까?’ 그리고는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성경책을 장롱위에서 꺼냈습니다. 그리고 작은 독서카드에 시편 23편을 잘잘한 글씨로 적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말한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공복에 한 번, 밥 먹고 30분 후에 한 번, 점심 먹고 한 번, 저녁 먹고 한 번, 마지막 잠자기 직전에 한 번. 이렇게 다섯 번을 매일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읽으니까 일주일이면 서른다섯 번을 읽었고, 두 달이 되자 거의 카드 없이도 23편을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평소 하듯이 그 새벽에도 일어나서 조용히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랬더니 그렇게 시를 외워가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던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갑자기 자신의 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더니 콘크리트 더미 같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어떤 건축물이 소리를 내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갑자기 어린 아이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신없는 흐느낌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비로소 자신의 인생의 불행이 건강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이처럼 버림받은 자와 같이 외롭고, 불행하게 된 것은 목자되신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리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동안에 자신의 영혼은 거의 버려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병이 나았을까요? 안나았을까요? 안나았으면 여기서 얘기도 안하죠.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치유의 능력.
질병과 많은 고통이 궁극적인 원인이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생겨나게 된 현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특히 우리의 영혼과 마음 안에 있는 깊은 질병들을 당신의 진리를 통해서 이렇게 고치시는 겁니다.
시편 23편은 표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다윗의 시이고, 이 시는 다윗의 인생의 말년에 기록되었다고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분위기는 목가적인 분위기이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혹은 자기를 해치기위해서 에워싼 원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것은 어린 시절에 지은 시가 아니라, 인생의 환란과 시련의 골짜기를 통과한 후에 지은 원숙한 시라고 우리는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시는 크게 세 토막으로 나뉘어 지는데, 첫째 토막은 일절이고, 두 번째 토막은 이절부터 오절이고,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은 육절입니다. 일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라고 하는 총론적인 고백이고, 두 번째 토막은 왜 하나님이 목자가 되실 수 있는지에대한 근거이며, 세 번째 토막은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산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대한 결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절에서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여호와’라는 성함을 부릅니다. 하나님에 관한 대표적인 성함은 세 가지인데, ‘주’,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주’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향해 주권을 가지고 계신 주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하나님에 관한 또 다른 명칭이고,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와 그리고 ‘하나님’, 이 두 가지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대표적인 명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위대한 시의 첫 시작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가 아니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기록했을까‘라고 묻는 것은 쓸데없는 호기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히브리말로 ’엘로힘‘인데 이 ’엘로힘‘은 힘이 센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알려주시는 이름이 아니라 당신과 언약을 맺은 선택한 백성들에게만 계시 해주시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많은 성함 가운데 이 ’여호와‘라고 하는 성함은 하나님의 본명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대단한 경외심을 가지고 감히 이 하나님의 성함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 ’여호와‘를 바로 오늘 시인이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은 하나님의 성함의 이 한 표현을 통해서 다윗은 이미 자기가 단순히 하나님 앞에 사는 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큰 무리 속에 소속되어 있는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금방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이 시인을 포함한 선택한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선택받은 교회의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전 어렸을 때에 밤하늘을 보면서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마음에 궁금한 게 ‘이 캄캄한 밤하늘이 얼마나 넓은 세상일까?’ 그래서 잡지나 책을 읽어도 우주에 관한 것을 좋아했고, 그 우주를 날아다니는 로켓트나 우주선, 비행기에 대한 그림을 보거나 글을 읽을 때 마음이 뛰곤 했습니다. 우주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과학자들은 1백 50억 광년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과학자들은 950억년을 달려가도 끝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달려가봐야 도착할 수 없을 거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팽창이론에 의하면 이 우주의 넓이는 초당 2000km씩 확장되어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끝이 있다면 그 끝 바깥은 무엇일까?’ 그리고 ‘양쪽 끝’말고 위 아래로 뚫고 가면 거기에는 뭐가 있을까?‘ ’만약에 끝이 있다면 그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모든 무수한 질문을 우리들은 대답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한 철학자는 ‘무한한 우주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무섭게 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게 끝도 없는 한없는 우주, 광대무변한 우주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그 우주, 그 우주를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그 수천억 개의 별 가운데 하나, 지구라고 하는 이 위성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중학교 물리 시간에 어느 학생이 선생님한테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주가 얼마나 넓습니까?” 선생님이, “그걸 내가 알면 여기서 널 가르치고 있겠냐? 그러나 내가 너한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너희 집이 어디냐?” “목동아파트입니다.” “온 세계가 아파트로 뒤덮혔다고 치고 너희 집에 화장실에 빨간 전구가 하나 있는데, 아홉 개의 날파리가 그 빨간 전구 주위를 돌고 있는데, 그 중에서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란다. 너는 거기 등떼기에 붙어서 사는 세균정도라고 말할 수 있지.”
하나님은 그 광대한 세계의 창조주십니다. 그래서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시작이 뭐냐면,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이고, 이 온 우주를 만드신 위대하신 창조주가 계시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자기 친구처럼 생각하고 농담이나 하고, 심지어는 장난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에대한 천박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계셔서 시간적으로는 영원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하시며, 도덕적으로는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 우리의 예배를 받고 계시는 그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인간이 인정해야 될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 그 분은 온 땅의 신이시고, 온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지금도 모든 우주를 붙들고 운행하고 계신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분이 지으신 세계에 살고 있는 무한하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은 한 마리 벌레처럼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하찮은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래서 그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완전하신 그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질적인 차이, 하나님은 온 세계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권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정말 하찮은 일개 피조물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피조물 중에 한 사람인 이 시인은 그 위대한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의 목자라고 하는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 우주를 만드신 위대하고 객관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 속에 관계를 맺으실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경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학 문제를 풀듯이 사람들에게 쉽게 가르쳐서 지식을 통해서 그 사람 마음 속에 신앙의 실체를 넣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가 개인적으로 그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만나기 전까지 정말 그 분이 내 아버지이시고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도 알고, 그리고 절대자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절대자와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가정평화를 위해서, 아내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서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서 교회에 나왔습니까? 남편의 손에 어거지로 이끌려서 교회에 나왔습니까? 이제는 이런 신앙생활을 청산할 때가 됐단 말입니다. 내가 직접,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인격을 체험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고 그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이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이 내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내가 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할 때 그 때에 비로소 내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이 신앙을 통해서 위로와 용기, 능력과 지혜를 공급받으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자라면, 이 시인은 자기를 누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근데 23편을 모두 뒤져봐도 양이라는 단어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개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요, 돼지를 기르는 사람도 목자인데, 이 성경을 읽으면서 여호와는 목자요, 나는 그의 손에 기르는 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에 보시면 알겠지만,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양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 많은 동물 가운데 양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이라고 성경에서 표현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문맥에서는 양 그러면, 양 같은 사람 그러면, 법 없이도 살 사람, 착한 사람, 평화로운 사람, 주위에 해를 끼치지 않는 온순한 사람, 이런 모든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팔레스타인 컨텍스트에서 보면, 이 양이라고 하는 짐승은 결코 긍정적인 짐승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도 중동지방에 가면 가장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상스러운 욕이 있는데, 양 같은 놈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양 같은 놈 그러면 그 사람들 생각에는 닭처럼 머리가 나쁘고, 돼지처럼 욕심이 많고 그리고 고집이 있는 그런 더러운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도 이 양을 긍정적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래서 이 양이 고집스럽고 제멋대로 가는 그런 피조물로 묘사가 됩니다. 다만 우리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묘사를 하는 것은 양의 이런 부정적인 특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양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제물로 바쳐졌던 것을 염두에 둔 그런 그림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이 양이라고 하는 짐승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양은 다른 많은 짐승들과는 달리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 기재가 없는 그러한 동물이 바로 양입니다. 여러 해 전에 제가 봤던 동물의 왕국에서 상영된 내용입니다. 저는 그 사자가 모든 짐승을 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코끼리만 빼놓고. 코끼리는 워낙 크니까. 코끼리만 빼놓고 다른 모든 짐승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동물의 세계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이제 얼룩말이 어떻게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지에 대해서 방송을 해주는데, 사자가 나타나니까 얼룩말들이 모두 삥 둘러싸요. 그러고 가운데에다 새끼를 놓고, 그러고 도망도 안가고 얼룩말들이 거기서 그렇게 있습니다. 저쪽에서 사자가 막 도움닫기를 하면서 뛰어옵니다. 그때 사자는 항상 한 마리를 노리고 달려온답니다. 여러 마리가 아니라. 근데 일정 거리에 오니까 누가 명령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 얼룩말들이 뒷발로 땅을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용맹스러운 사자가 쏜살같이 달려오다가 점프를 하는 동시에, 말 뒷발에 채여서 날아가는 큰 돌멩이에 왼쪽 눈두덩이를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그렇게 얻어맞더니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겁니다.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결국은 얼룩말이 사자를 이긴 것입니다.
또 한편 그림처럼 생생하게 남은 것은, 영양류의 어떤 동물인데, 이렇게 뿔이 매우 나 있는 온순한 짐승이었습니다. 사자가 나타나자 미친 듯이 도망을 갔는데, 그 빠른 사자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사자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도망가던 이 뿔 가진 짐승이 돌이켜 섰고 뿔을 들이 받았는데, 그 순간에 이 암사자였는데 이 옆구리로 뿔이 들어가서 등으로 뿔이 나오더라구요. 결국은 그 광경을 촬영하던 사람들이 끝까지 그 사자가 어떻게 되나 추적을 했는데, 두 달 뒤에 그 사자는 결국은 죽었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자하고는 상대도 할 수 없는 온순하고 연약한 짐승이었지만, 나름대로 자기를 지킬 방어기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에게는 그렇게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어떠한 기재도 없습니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그 다음에 뾰족한 이빨, 빠른 다리, 그런 거 아무것도 없고, 뿔이라고 있긴 있는데, 만두처럼 이렇게 말려서 여기에 붙어있는 것, 그 두 개밖에 없습니다. 도움이 안되는 겁니다.
성경이 이렇게 양으로 우리를 묘사하는 메시지는 아주 단순한 겁니다. 너희는 창조될 때부터 누군가의 보호를 따라서 살 수 있게 되어 있지, 혼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가 당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시고, 인간에게 그 모든 세계를 다스려서 하나님의 창조주의 신성의 영광에 충만한 것이 온 피조세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도록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혹을 받았고,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께 독립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그런 의존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길 원하시지만 그러나 그런 의존의 관계를 버리고 싶었고, 떠나고 싶었고, 하나님이 혼자서도 잘하시는 것처럼 자기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엄청난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커다란 비참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장례식에서 설교했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 설교 속에서 브레이너드의 고백을 인용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피조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는 것 말고 인생의 또 다른 삶의 길이 있을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함으로써만 그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고, 그가 정말 하나님의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더욱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에게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주님의 참 사랑을 알고 나면 우리 인간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약해집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강할 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약할 때 많이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자기 인생 지가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정말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됩니다. 아침에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저녁때 기도도 나를 도와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해주시면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자기를 향해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하면서 주님을 온전히 의지합니다. 그 때 가슴에 밀려오는 생각이 옛날에 왜 그렇게 불순종했을까? 옛날에 왜 그렇게 좋으신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분의 가슴에 불순종과 범죄로 못 박는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신 이유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오늘 그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하나님에 대해서 다양한 묘사가 나오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자기 안에 있는 죄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그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라고 하는 사실을 가장 두드러지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러면 하나님이 목자라는 사실은 또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가 하는 것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다윗은 하나님 앞에 한 마리의 양이기 이전에 이미 진짜로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치던 실제 목자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기가 양떼들을 돌보고 이끄는 것과 비슷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끌고 인도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했을 때 그 의미는 아주 심오한 것입니다.
목자들이 짐승을 이끄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목자들이 절대로 말이나 소 같은 것을 그리고 그런 짐승들을 인도할 때 앞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목자는 없습니다. 모두 뒤에서 채찍으로 때리고 총을 쏴서 겁을 주고 해서 이 소 떼와 말떼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서부영화에 보면 그 말들이 죽 흩어져 있는데 카우보이들을 총을 쏘면서 이 채찍을 휘두르면서 이제 죽 겁을 주면서 큰 원을 그리고 돌면 이제 말들이 한 떼로 모여서 도망가기 시작하고 그 포위망을 점점 좁혀서 마사로 들여보내게 하고 문을 닫음으로써 목장의 하루가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양떼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지방을 여행하고 온 어느 관광객의 경험담입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이 쪽 풀밭에서 저 쪽 풀밭으로 양떼가 건너가는데 한 일천 마리의 양이 그 도로에 걸쳐 있습니다. 그 목동이 잠깐 어디를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도로에 모든 차들이 못가고 서 있습니다. 경적을 울리고 라이트를 깜박거려도 양들은 꿈적도 안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돌아와서 피리를 부니까 양떼들이 그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서 이제 서서히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별명은 앞 서 행하시는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해 가실 때에 함부로 인도하시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먼저 앞서 행하심으로 당신이 우리 앞에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가지고 당신을 따라오게 하시는 분이 바로 목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둘이서 대화를 했습니다. 무신론자와 기독교인의 대화내용입니다. 무신론자가 말했습니다. “난 너한테 5분 안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증명할 수 있어.” “해봐!” 하나님을 향해서 막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을 했습니다. “것 봐!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잖아. 하나님이 있으면 내가 이렇게 욕했는데, 화가 나서도 가만히 있겠어? 없으니까 아무 일도 안일어나잖아.” 그랬더니 그리스도인이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너를 향해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지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목자가 어린 양을 인도하듯이 인격적인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노예의 줄로 묶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줄로 매이게 하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한 번 물어봅시다. 주일날은 어디로 와야합니까? ...확신이 안서시는군요. 주일날은 어디로 와야합니까? (교회!) 놀러가면 어떻게 됩니까? 자, 놀러가면 어떻게 될까요? 1번, 뭔 일이 일어난다. 2번, 괜찮다. 몇 번 입니까? 2번이라구요? 진짜 많이 담대해졌네요. 어떻게 성경을 가르쳤는데 그렇게 대답을 합니까? 자. 그럼 몇 번 일까요? 1번 뭔 일이 일어난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뭔 일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주일날 예배에 결석을 많이 하냐 이겁니다. 여기도 지금 지난 주에 예배 안드리던 사람들 나와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상처되게? 그럼 뭐냐. 그럼 대답이 뭐냐. 물론 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까불고 놀러갔다가 교통사고가 난다든지, 큰 일을 만나서 그 놀러 간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안일어나더라도 또 주일 안지키고 도망가고 놀러갔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막 견디기 힘든 그 무서운 마음의 이 고통을 하나님이 주시는 경우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는 어느 때냐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실 때, 그러니까 하나님이 범죄를 항상 똑같이 다루지를 않으십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죄를 한 번 더 지어도 죽 떠먹은 자리에 표 안나는 것처럼, 그냥 별일 없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을 해주시고 매우 특별한 회복의 은혜를 주실 때 그가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아주 과격하게 다루십니다. 그래서 아, 옛날에 은혜 떨어질 때는 놀러도 다니고 십일조 가지고 골프도 치러 다녔는데, 이 은혜를 딱 받고 나니까 그 다음엔 주일날 놀러 다니고 까불고 옛날처럼 해볼라 그랬더니 마음은 그게 아닌 겁니다. 어느 한순간에 두려움이 확 임하면서 막 이 그 견디기 힘든 번민 속에 빠지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다루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뭐냐면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다루고 싶어 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날 교회를 안가고 놀러 갔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여러분들이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간증은 이런 것 아닙니까? 어느 날 주일인데, 택시가 교회 앞에 붕~하고 도착을 하더니 미이라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감은 사람이 부축을 받으면서 목발을 짚고 걸어 나오는 겁니다 나사로처럼. 안내위원이 “누구십니까?” 하니까 “아~집사님! 제가 이 교회 다니는 아무개 자매입니다.” “근데 이게 왠일입니까?” “이따 간증시간에 얘기할게요.” 드디어 간증시간이 됐습니다. 이 자매가 나와서 간증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온 몸에 이렇게 붕대를 감았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사랑해주시는 박아무개 자매입니다. 지난주일일이었습니다. 늦잠을 자고 교회를 오려고 성경찬송을 챙기는데, 친구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따르르릉!
야! 너 아무개지?
어!
야~! 너 뭐하니?
나, 교회 가려고 준비하지.
교회는 무슨 교회야. 오늘 우리 친구들하고 같이 등산가기로 했잖아.
언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두 달 전에 한 약속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안돼, 나, 교회가야되.
야! 너희 하나님은 뭐 오늘만 날이냐? 다음에 가서 만나고 우리 오늘 만나자, 와라.
안돼.
그러면 너 저녁예배 가면 되지 않니?
그래도.
너 저녁예배 나가니?
아니.
그러니까 오전예배에서 놀고 저녁예배에 가면 되지. 너희 하나님은 아침에만 계시고 저녁 때는 어디 가시냐?
그래도.
아, 시끄러워! 안나오면 너 다시는 안봐.
하고 끊었어요. 그러고보니까 벌써 11시예배인데 11시 5분이 넘었어요. 한참 망설이다가 다시 등산복을 갈아입고 오늘은 일반은총 가운데 살기로 보따리를 싸서 나갔어요.
친구들하고 산을 올랐습니다. 관악산에 올라갑니다. 아~ 특별은총보다는 일반은총이 더 좋아! 교회에 가면 콩나물시루 같은데, 산소는 나온다 그러지만 닥지닥지 앉아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긴 설교. 그런데 나오니까 너무 좋은 겁니다. 앉아서 이제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어요.
야! 물 좀 줘라. 그 옆에 친구가 맥주 하나를 탁 줬습니다. 아니, 이거말고 물, 음료수 좀 줘. 그러니까, 없어. 그게 음료수야. 이게 술이지, 난 교회 다녀서 이거 먹으면 안돼. 모든 친구들이 투표를 했습니다. 맥주가 음료수인지 술인지. 모든 친구들이 만장일치로 음료수라고 투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따서 먹었더니 세상에. 예수 믿은 지 8년, 세월은 많이 흘렀는데 입맛은 하나도 안변했어. 너무 맛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먹고 쌓인 통이 아홉 통이 됐습니다.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재미있게 놀고 그리고 이제는 저녁 어스름이 돼서 내려온 겁니다. 어깨에 맨 가방 밑바닥에는 혹시 갈지도 모를 시간을 대비해서 넣어둔 성경책이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먹고 내려오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고 친구들하고 장난도 쳤는데 그 산을 거의 내려올 때 즈음에 깎아지른 듯한 계단이 아직까지도 한 2~30개 남았는데 바나나 껍질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정신을 혼절을 했는데, 눈을 떠보니까 어렴풋이 의사의 소리가 들립니다. 중얼중얼 들리는 소리가 야~ 일부러 깨질라 그래도 이렇게 못 깨지겠다. 어쩜 이렇게 골고루 부러졌냐. 계단에서 굴러서 뼈가 부스러지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깨닫게 됐습니다. 아~ 주일을 범하고 이럴 수가 있을까. 그래서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등산가서 다 주일 안지켜서 부러졌는데, 병원에서 누워있어서 주일 안지키면 지붕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아서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간증을 다 하고나서 그러므로 여러분, 저처럼 되지 말고 주일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멘!” 그런 간증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 다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 번 불순종했을 때 요절을 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범죄한 자가 어떻게 무섭게 심판받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삼으시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부흥회 때에 잘 일어납니다.
1890년대에 그 캐나다 선교의 역사를 보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심히 훼방하는 말을 집회 속에서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술집 주인이었는데 부흥이 일어나니까 술꾼들이 안오는 겁니다. 문제가 뭐냐니까, 술꾼들이 부흥회가서 회심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흥회를 없애면 술꾼들이 다시 돌아오겠지, 그러고 거기에 몰려와가지고 이제 설교시간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이상하게 그 전날부터 이 선교사가 말씀을 준비하는데 이사야의 말씀, 히스기야에게 주신 말씀이죠?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말해라.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그걸 설교하는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겁니다. 그러더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사 피를 토하고 그냥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도 다루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이, 보다 더 많은 일반적인 때에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인격적으로 다루십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불순종하고 살면, 내일 하나님이 혼내실 수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이 번쩍 나게 여러분들 들었다가 한 번 내동댕이 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불순종해도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두려움의 사슬에 매인 노예처럼 데리고 살고 싶지 않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인격적으로 인도하고 싶으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지 아니하시고 예전처럼 잘 굴러간다고 해서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면 여러분들 큰 실수를 하는 겁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한 번 혼내셔서 회개해도, 조금 잘 못 나갔을 때 회개하면 원상복구가 되는데, 워낙 잘 못된 길로 가면 회개해도 원상복구가 안됩니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다루시되 인격적으로 다루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왜 주일날 놀러 안가냐? 쥐어 터질까봐 안간다. 그게 아니라, 즐거운 곳에서 나를 오라고 해도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이제까지 살아온 내가 주일날 이 좋으신 하나님을 이 곳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없다. 그런 고백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나오길 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신앙이 성립하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됩니다. 여러분의 자식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려면 자식들과 대화가 돼야 됩니다. 맨날 야구방망이 들고 쥐어 패기만 하면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이 안됩니다. 그 아이가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는 권위에 굴복하고 쩔쩔맬지 모르지만, 좀 크면 대듭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기르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씀이 인간답게 살지 않는 부모는 사람다운 자식을 둘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교육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참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람답게 살아갈 때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인격적으로 승복해서 아버지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의 상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인격적인 방법으로 여러분들을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신앙생활하십니까? 아직까지도 주일날 두려워서 교회에 나오시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십일조 안내면 하나님이 한 방에 사업을 박살내실 것 같아서 덜덜 떨면서 진짜 피 같은 돈 봉투에 넣어서 교회에 바칩니까? 그런 신앙생활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그런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자녀가 할 일이 아니라 노예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신 것이 행복하고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된 것이 너무나 기뻐서 어디서든지 그 아버지를 자랑하는 것, 그게 전도입니다. 어디서든지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 그게 전도입니다. 어디서든지 그 하나님이 행복해서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노래하는 것, 이게 찬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나도 기쁘다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내 뜻을 버리는 것, 이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하는 것, 이게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목자라고 하는 사실은 이런 인격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인격적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막 억압을 한다고 해서 그게 교회가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거 안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집사할 사람은 신청하십시오. 안할 사람은 그냥 그만두십시오. 그랬더니 많이 신청을 안했습니다. 너무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인격적으로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 감사하고 기쁨으로 섬기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격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서도 아이들 막 이렇게 뛰어 놀지 않습니까? 물론 아이들을 가르쳐야합니다. 나무 올라가지 마라, 다친다. 유리 깨지마라. 교회 돈 아깝다, 그러지 말고, 너 다친다. 이렇게. 애들이 문에 쾅! 부딪혔는데, 가서 애를 만져야지 문을 만집니다. 이게 어디 찌그러졌나?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는 아이들을 타일러 줘야되지만, 애들이 와가지고 막 자동차에다가 동양화 그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막 성질내고 그러지 말고,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 거친 돌멩이를 가지고 자동차에 동양화를 그리느라고 얼마나 손끝마다 고생을 했을까? 그러고 이제 다독거리고 부모한테 가서 돈 받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애들도 될 수 있으면 잘 지도는 해야 되겠지만, 왜 그러냐? 그러지 마라! 그러고 막 소리 지르고 그러면 안됩니다. 잘 이렇게 다독거리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막 이렇게 억압하려고 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호소하고 감동을 주고 이렇게 해서 기쁨으로 신앙생활하게, 내가 신앙생활 잘해도 못한 사람을 위해서 섬기라고 나에게 신앙을 주신 걸로 알고 섬기고 그러는 게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성숙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이 억압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돼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또 인도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뭐냐면, 인격적인 방법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약점을 아시면서 인도 하신다 이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를 획일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머리가 좋고 이해력이 뛰어나서 지성적으로 설복당하지 않고는 도저히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 지성을 이해시켜서 설득하셔서 예수 믿게 만드십니다. 감성이 발달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어루만지셔서 먼저 믿을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심으로 신앙으로 인도하십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하고 있을 때 그 중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공부를 잘하는 청년 하나가 거기 교사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나오고 지금은 어느 대학에 교수로 가 있다고 그럽니다, 박사까지 다하고. 그런데 어느 날인데, 어느 여집사님이 구석에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집사님이 왜 그래? 그러니까, 뭘 왜 그래요 전도사님. 자기 아들 하나 있는데, 우리 교회 나오는데 죽여라 하고 하여튼 뜻을 세우고 공부를 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그걸 하소연을 하는 거지요. 또 뭐 공부를 하는 척 하더니 요새는 공부도 안하고 공부를 못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러냐. 자기네 반 애니까 그렇겠지. 알겠지, 그랬습니다. 근데 뭐라고 하냐면 뜬금없이 전도사님! 궁금한게 있습니다. 뭔데?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할까요? 그럽니다. 그래서 나는 이해가 잘 가는데. 못한대요. 그러더니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럴만합니다. 이 친구는 국민학교 때서부터 무슨 시험을 치든지 간에 하여튼 떨어져본 적이 없답니다. 운전면허도 단번에 붙더라구요. 군대도 남들은 가가지고 2년동안 고생을 하는데, 무슨 시험인가를 보더니 6개월만에 중위 달고 제대를 하더라구요. 하여튼 뭐든지 시험은 떨어져 본 적이 없답니다. 그래서 시험에 떨어질 때 기분이 어떤지를 모른답니다. 그래서 그거를 왜 나한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냐구요.
그래서 자기는 고3때 3시간자니 4시간 자니 하는데, 자기는 체질적으로 8시간 안자고는 도저히 안된답니다. 그래서 난 그것이 신문에만 나오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진짜 있는 이야기인 겁니다. 그리고 학원 안다녔답니다. 학원을 왜 다니냐는 겁니다. 책에 다 나오고 선생님이 가르쳐주고 그래도 모르면 선생님 찾아가서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데 어떻게 일부러 공부를 못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못할 수가 있냐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아이구 잘났다. 그러고 이제 헤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한달쯤 지났는데 이렇게 시무룩해져서 교회를 왔습니다. 그래서 왜그래? 그러니까, 아~! 인생 살맛이 안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속으로 아니 뭐 그렇게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 왜 인생이 살 맛이 안나? 왜 그러니까, 그 때는 테니스가 붐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마다 테니스장을 만들어놓고 했는데, 공부를 하도 하니까 몸이 너무 약해지는 것 같아서 테니스를 배우러 왔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습니다. 처음서부터 재미있게 해줘야되는데, 처음에 가면 기초가 중요하다 그러고 공도 안주고 매일 이것만 하잖습니까? 일주일동안 이러고 났는데 그 다음에 이제 코치가 공을 던져주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맞더라는 겁니다. 일주일을 하더니 일로 던져주면 절로 도망가고, 절로 던져주면 일로 도망가고 그러더니 한 이 주일을 하고 났더니 코치가 씩씩거리면서 오더랍니다. 맨 날 볼 주우러 다니다가 코치가 볼 일 못 보니까 그러더라는 겁니다. 당신 어떻게 그렇게 못하냐고. 내 여기서 7년을 가르쳤는데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 처음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못할 수 있냐? 내가 다 가르쳐주고 책에 다 나오고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는데 어쩜 그렇게 못하냐?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돈은 아깝지만 안가기로 결심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답니다. 그게 어떻게 은혜냐 그러니까. 그 때 생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아~ 공부도 이럴 수 있겠구나. 꼭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최선을 다했는데도 공이 안맞듯이 그렇게 공부를 못하는 사람의 심정도 그렇겠구나. 그리고 누가 공부 못한다 그러면 이렇게 나처럼 자존심이 상하겠구나.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복음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았구나.
이 세상에서는 항상 우리를 획일적으로 잽니다. 제가 자라면서 제일 우리 부모님들한테 듣기 싫은 소리가 그거였습니다. 야~! 뉘집에 아들 좀 봐라. 그러면 그런 아들을 낳지, 왜 나 같은 사람을 낳았냔 말입니다. 누가 날 낳으라 그랬나요? 어떤 애가 그랬답니다. 야~! 이 녀석아, 뒤통수를 때리면서 아브라함 링컨은 너만 했을 때 통나무집에서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책 밖에 몰랐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맞아요. 그러고 선생님 나이 땐 대통령 됐죠 그러더랍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획일적으로 잽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이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안재십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옛날에 제가 모시던 목사님이 계셨는데 아들이 둘이 있었나 셋이 있었나 하여튼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공부를 많이 해서 요새도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회적인 저명인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또 한 아들은 불구입니다. 벙어리입니다. 그런데 늘 이 목사님의 관심은 그 잘난 아들이 아니라, 이 못난 아들에게 가 있는 겁니다. 밥은 먹고 사나? 손주는 제대로 교육은 시키나? 부부가 화목하게 사나? 그 며느리도 벙어리였거든요. 늘 그런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참 많이 느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에휴~ 나처럼 교회에 와서 봉사도 못하는데 내가 하나님의 관심이나 끌겠어? 또 어떤 사람은 에휴~ 내가 아직까지도 죄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 상대나 해주겠어. 에휴~ 내가 교회에 바친 것도 없고, 교회 목사님이나 목회자들 그 사람들이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 일거야. 아마 관심도 없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자식들보다 그렇게 많이 사랑하는데도 그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인격적으로 승복하지도 않고, 아직까지도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몰라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회개하고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그 하나님이 목자로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사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에서 그림과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저녁때 들어와서 양 100마리를 헤아리는데 99마리였습니다. 한 마리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목자가 저녁 시간에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떠났습니다.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겠죠? 어디서 이 양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고, 또 양을 찾으러 떠나는 이 길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죠?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그래서 목자 자신이 해를 입을 수도 있었고, 돌부리에 걸려서 다리라도 삐면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더한 치료비가 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에게 양 한 마리가 얼마냐? 그 한 마리 찾는 값과 내가 이 수고하는 비용을 비교한다면 이익이 있을까. 이런 것들은 목자가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곡간에서 고기 파는 장사꾼이들이 하는 그런 계산법입니다. 그래서 너무 불쌍하니까 이 양을 찾아 나간 겁니다. 이제 그 양을 찾아 나간 겁니다.
그래서 드디어 어디선가 떨고 있는 양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상처받고 떨고 있는 양 한 마리를 발견했을 때 그 목동의 마음 속에 사무쳤던 기쁨은 우리 안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안전하게 있는 그 기쁨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왜? 그 양은 잃어버렸던 양이고, 그래서 죽은 줄 알았던 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두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오는 그 길에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온 동네에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밤에 잔치를 벌이겠다. 왜? 잃었던 양을 찾았기 때문에.
호주에 가서 양 한 마리가 도대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200불이랍니다. 거기 돈으로 약 16만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16만원 밖에 안되는 양을 찾았다고 거기서 동네 사람을 다 불러서 잔치를 하겠다는 겁니다. 설마 그 양을 잡아 주겠다는 것은 아닐 거 아닙니까? 잃어버렸다 찾았는데 그냥 우리끼리 삶아먹자, 그거는 아니라는 겁니다. 싸매고 치료해주고 어쩌면 동네 사람 잔치하기 위해서 소 한 마리 잡아야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양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 양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언젠가 어느 형제 하나가 나한테 그럽니다. 제자인데. 저 교수님. 왜? 전 요새 하나님이 너무 불쌍해요. 에이 임마,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하나님이 왜 불쌍해? 들어보세요.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으셨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를 사셨는데 과연 이문을 보실까요?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는데 여태까지 우리가 산 것을 보면 주님이 손해나는 장사였고,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잘 살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거래를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너무 불리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구원을 하신 것이 아니다. 노예를 살 때에는, 10만원을 주고 노예를 살 때에 이 노예를 뼈 빠지게 부려먹으면 십만 원어치 노동을 할까 생각을 하면서 사지만, 잃었던 자기의 혈육, 자기의 핏덩이를 다시 찾았을 때에 그 핏덩이가 자신의 품에 돌아와서 얼마나 이득을 남겨줄까 그런 거는 부모는 그런 것을 계산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도 그렇다.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인생을 살 수 있었고, 또 그렇게 살아왔지만, 하나님이 여러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마음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이미 주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부르는 이 양 떼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인하여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를 너무나 원하시고 또 한 편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또 다른 당신의 양이 있어서 그 양 떼들을 당신의 우리 속에 다시 불러서 그들도 우리와 하나 되어서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살게 하고 싶으신 마음이 목자 되신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고, 얼마나 많이 주님을 위해서 무얼 바치면서 사는가 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목자 잃은 양같이 방황하고 유리하는 양 떼들,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유리 방황하는 양떼들이 목자 되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서 사는 것, 그걸 원하십니다. 그래서 큰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양 떼와 같은 여러분들을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싫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죄가 좋아서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났던 여러분들을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제 발로 걸어서 하나님의 품에 와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 있습니까? 우리는 각기 자기의 가는 인생의 길이 좋아서 제 좋아하는 길로 걸어간 사람들이고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제 길로 걸어갈 때에도 하나님은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을 먼저 맛본 사람들을 우리 옆에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의 아름다운 복음을 듣게 하셨고, 우리 같은 죄인들을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까지 찾아 나서시는 목자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을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찢기고 상처 받으며 제 멋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당신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믿어지지 않는 이 복음이 우리의 마음에는 믿어지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죄인을 찾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그 피 흘린 형상을 보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격적으로 고백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한 과정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시급한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도사 때였는데, 수련회를 갔습니다. 마지막 날인데 하여튼 그 마지막 폐회예배를 드리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습니다. 서서 찬송을 부르는데 냉랭한 아이들은 냉랭하고, 옆에 있는 아이들이 자꾸 막 덜덜덜덜 떨면서 회개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막 쓰러지는 겁니다. 여기서 쾅! 하고 쓰러지고, 저기서 쾅! 하고 쓰러집니다. 그 중에 자매하나가 쾅! 하고 쓰러지는 겁니다. 그러더니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면서 우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라고 그러고, 그 자매를 들어서 너무 격렬하게 우니까 옆 방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눕혀놓고 가만히 지켜보니까 이게 그냥 일반적인 회개가 아닌 겁니다. 뭔가 영의 역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 대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우는 겁니다, 눈을 감고. 너 뭐 하나님 원망하는 것 있지? 갑자기 막 칼로 찔린 사람처럼 더 격렬하게 데굴데굴 구르면서 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우는 겁니다. 그래서 한 참 땀을 닦아주고 시간이 한 2~30분 흘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무래도 이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꺼내놓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야! 그러지 말고 여기 전도사님밖에 없으니까 얘기를 해봐라. 하나님도 아마 너 얘기 하는 걸 좋아하실거다. 그랬더니 얘가 하는 이야기가, 막 울면서 전도사님, 난 하나님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널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도 이해가 안되는데, 니가 뭔데 하나님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냐, 왜 그러냐? 그러면서 죽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이해가 갔습니다.
공부를 잘 못해서 고등학교 시험도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언니가 애기 낳았으니까 그 집에 가서 잠시 있으면서 애기나 좀 봐주라고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언니가 외출을 하면서 낳아 놓은 지 얼마 안되는 아이를 뭐 한 한달이나 됐을까한 아이를 보라고 그랬습니다. 뭐 두 달쯤 됐으려나, 뭐 하여튼, 그냥 아이를 눕혀놓고 기르면 되는데 아이를 뭐 또 이렇게 거꾸로 해놓고 기르는 그런 게 있다네요, 심장 튼튼해지라고. 그러다가 옆에서 이렇게 아기를 보다가 얘가 잠이 들었어요. 자기가 잠이든 겁니다. 한참자다 기분이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까 아이가 이불 위에 코를 박고 엎드려서 늘어진 겁니다. 탁 들쳐보니까 아이가 벌써 숨을 안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엎고 병원으로 막 눈물을 비 오듯 쏟으면서, 제발 이 아이를 좀 살려주세요.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주세요.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죽었습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이 아이의 마음 속에 그 때 뭐가 가슴에 콱 꽂혔냐하면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분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안들어주셨다. 이게 가슴에 꽂힌 겁니다. 그러면서 실로 몇 년 동안을 살아온 겁니다. 교회는 매주 나오면서도 마음 속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시니까 하나님이 그 빗장을 끌르시는 겁니다. 그래서 비로소 자기의 죄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주님이 내 조카를 데려간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며 살아왔던 나의 불신앙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러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약점을 아시면서 그렇게 우리를 세밀하게 인도해주시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인격적으로 결단하고 그 분을 나의 목자로 사시게끔 나의 삶을 그 분 앞에 개방하는 인격적인 수납(?)이 없이는 그 분의 목자 되심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말합니다. I shall not be in want. 내게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람의 삶은 결핍으로 가득찬 삶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거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형들에게 동생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결혼을 해서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를 아내에 의해서 이해받지 못했고, 그리고 장인어른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자객을 풀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돌면서 죽음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했습니다. 장성해서는 한 나라의 왕이 되어서 기름부음을 받고 권세를 누렸지만, 그러나 이렇게 외롭게 살아온 일생을 지나는 동안에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났고, 불행히도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연단과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몸부림치며 괴로워했고, 그리고 그 후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들이 칼부림을 하면서 자기 앞에 죽어갔습니다. 자기 딸 뱃속으로 낳은 딸이 자기 뱃속으로 나온 다른 아들에 의해서 겁탈당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했고, 그로 인해서 왕자의 난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져왔고, 그래서 반란의 적들을 무찌르고 승리한 그 날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날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슴에 한 없는 아픔을 가지고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몸부림쳤습니다.
그 인생이 어떻게 부족함이 없는 인생입니까? 정말 오히려 부족한 것으로 가득찬 인생이었고,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찬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 shall not be in want.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고백을 하는 이것은 바로 환경이 가져다주는 만족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가져다주신 신앙의 만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어디에서 옵니까? 어두운 이 세상을 빛으로 살 수 있는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옵니까? 시련과 고난의 계곡을 노래하며 통과할 수 있는 이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옵니까? 나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하는 이 고통스런 광야의 길을 행할 때에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감사의 능력이 어디에서 옵니까?
인생의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목자 되신 하나님을 붙들고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푹풍우 속에서도 주님을 노래할 수 있고, 시련 속에서도 우리 주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정말 여러분들이 인격적인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른 뼈와 같은 신앙생활들을 청산하고, 방랑자와 같이 교회 뜰을 밟는 그런 어리석은 삶을 정말 청산하고 살아계신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정말 그 분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염려를 넘어서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시23:2)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 없이 그냥 교회에 나오면 안됩니다. 그것은 교회에 나온 것은 잘한 거지만, 이제 나왔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또 어떻게 나를 인도하시는지, 내가 뭘 믿어야하는지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를 ‘야!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구나. 내가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다니. 이건 정말 행복한 것이구나.’그렇게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될 때에 그 때에 그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격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근데 1절이 만약에 총론적인 고백이라고 한다면,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에 목자인지를 설명해주는 근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에 대해서 시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 시인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푸른 초장은 그냥 풀밭일 뿐이고, 거기에서 공을 차면 잔디구장일 뿐이지만, 양들이 보면 기분 나쁩니다. 왜? 음식가지고 장난을 하니까. 거기는 자기네 밥통입니다. 이 푸른 초장이 우리에게는 그냥 풀밭이지만, 양떼들에게는 그것이 음식입니다. 꼴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은 어디나 풀밭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러한 목초지로 가득 찬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이 유리하는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해안지대 구릉을 타고 계속 유랑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서 추수감사절을 지낼 때에는 '우리는 원래 유리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돼 있던 겁니다. 유리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풀을 따라서 가축들을 거느리고 풀이 있는 곳, 그리고 물이 있는 곳을 계속 다니는 겁니다. 풀이 있는 곳에 계속 있으면 되지, 왜 또 다닐까요? 그게 한정이 있으니까. 이게 몇 일 혹은 몇 달 먹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목초지는 더 이상 양떼들에게 적당한 꼴을 공급해줄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목초지를 찾아나서는 것이 이게 바로 유목민들의 삶이었단 말입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이 바로 그렇게 양떼들을 데리고 목초지를 찾아서 다니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만약에 선한 목자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양떼들이 풀을 뜯고 먹는 동안에 그늘에 텐트나 치고 누워서 퍼질러서 잠이나 잘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이 꼴을 먹고 그 풀을 뜯는 동안에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사면을 두루 살핍니다. 사면을 두루 살피면서 이제 이 꼴을 다 먹이고 나면 어디에서 이 양떼들의 꼴을 공급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사면을 두루 살피는 겁니다. 그래서 이 꼴을 먹고 나면 다음에 양떼들이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를 자기들 스스로 고민할 필요가 없고, 목자의 인도를 따라서 가기만 하면 충분히 자신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 받으면서 살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다윗이 그런 생활을 했던 겁니다.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동안에 언덕에 올라가서 사면을 두루 살피며 그 다음 목초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았어야 됐단 말입니다. 선한 목자라면 그렇게 양떼를 인도하지, 풀을 잔뜩 먹다가 꼴이 거의 다 됐어. 목자, 이제 이거 오늘 먹으면 다 먹는데, 이제 이 다음엔 어떻게 해? 그러면 목자가 그늘에서 퍼질러 자면서 “야, 오늘 먹으면 되지, 내일이야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시인은 한 나라의 제왕이었지만 참 가난한 시절도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난한 목동으로 양을 칠 때에도 그랬지만, 왕이 되도록 기름 부음을 받고난 뒤에는 사울의 추격을 받으면서 그 긴 세월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했고, 그런 과정에서 이 왕이 되기 전에 다윗은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사정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도망을 하다가 너무나 배가 고파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은 적도 있으리만치 그렇게 배고프고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다윗은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를 일생 살면서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삶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신앙의 경험이 필요해서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싶은 신앙심들이 생겨날 때에, 생겨나는 것만큼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 인간의 약점이 뭐냐면 이렇게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데, 그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말하기를 ‘인간은 불안에 의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러한 피조물이다. 인간은 불안에 의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 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근심과 걱정, 염려 같은 것들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데도 그것을 결코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뭐 요즘 와서 뭐 미국이 좀 잘 못하는 것이 있으니까, 반대들 좀 합니다. 좀 고쳐야 됩니다. 그래도 하여튼 잘 못하는 건 잘 못하는 거고, 옛날에 신세를 진 건 사실입니다. 6.25때 다른 것도 신세를 많이 졌지만, 특히 그 고아들이 말이죠, 미군들에 의해서 많이 돌보아졌습니다. 만약에 그 때 그렇게 잘 거두지 아니하였더라면 그 아이들이 삐뚤어지게 자라서 아마 우리나라의 많은 짐을 안겨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6.25때 참전한 미국의 많은 장군 가운데, 벤플리트 장군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준장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전에 참전했던 장군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끄는 예화(?)부대가 거두어간 고아만 3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려다가 미국에서 기반을 잡게 그렇게 해줬다는 것입니다. 그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걸 가슴에 새기고 좀 이렇게 외국에 있는 고아들, 이런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우리들이 좀 해야 합니다.
근데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아이들을, 뭐 비참했습니다. 심지어는 철길에 엄마가 죽어서 누워있는데, 거기서 젖을 빨아먹는 아이가 있었다고 하니까 비참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다 걷어다가 그래서 이제 깨끗이 씻겨서 구호물자 옷을 한 벌씩 다 깨끗하게 입히고 그야말로 전쟁의 공포 없이 편안하게 군대막사에서 따뜻하게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식당에서 잘 먹고 그리고 잠이 들게 되었는데, 이 놈들이 잠을 안자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도 해주고, 찬송도 불러주고, 그래도 잠을 안자고 뒤척거립니다. 아이들이 밤에 잠을 자야 되는데, 안자니까 미군병사가 왜 안자는지 아이에게 통역을 세워서 물어보았습니다. “야 너 왜 못자냐?” “잠이 안와요.” “그래도 한 번 자봐라. 왜 잠이 안오냐.” “아저씨, 우리 내일은 뭘 먹어요.” “걱정하지 마라. 오늘 맛있게 먹었듯이 내일도 먹여주고, 모레도 먹여주고, 이제 세 밤 자면 큰 비행기가 미국에서 오는데 그거 타고 미국에 가면 이제 전쟁도 없고, 평화로운 곳에서 잘 먹고 잘 자랄 수 있게 해줄게.” “예 알았습니다.” 그러고 아이들이 잠을 그래도 잠을 못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지혜로운 이 병사가 취사반에 연락을 해서 햄버거 큰 거 머리통만한 햄버거 하나씩을 갖다가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이거 너희들 내일 아침에 먹을 거다” 그러고 주니까 그 햄버거를 품에 안고야 비로소 잠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입니다. 이렇게 강하고 잘난 것 같아도 이런 불안 속에서 매일 살아가는 것이 이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꾸 돈을 모은단 말입니다. 그러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하고. 또 지휘에 오른 김에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생각하고 해먹고 말입니다. 전부다 돈 먹은 놈들 밖에 없으니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렇게 되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세상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는데, 그런데 그걸 가지고 이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할 것 같으면 해결할 수 없다 이겁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 바로 그 담장을 마주한 집이 하나 있는데, 하여튼 엄청 큽니다 집이. 거기에다가 집을 또 아주 네모반듯한 좋은 땅인데, 삐뚜름하게 집을 지었습니다. 그게 뭐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그렇게 지었다나. 하여튼 저택에 농구코트가 있고, 시커먼 개와 경호원들이 보초를 설 정도니까 굉장한 집입니다. 여러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큰 그룹의 회장의 집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위에서 쳐다보면서 항상 그랬습니다. 야 저 집엔 근심거리가 뭐가 있겠냐. 돈이 저렇게 많고, 하여튼 오공시절에 청문회에까지 나왔으니까. 그 때 청문회에 나온 사람들은 다 대단한 사람들이거든요. 돈이 있으니까 돈을 줬단 말입니다. 거기까지 나왔을 정도니까 대단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문에 났는데 그 회장이라는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집안에서 발견됐습니다. 왜 그런고 했더니 너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괴로워서 그 부엌칼을 가지고 안방에서 자기의 몸을 난도질을 했습니다 죽으라고. 결국은 자살이 미수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는 물질이 우리의 불안을 모두 해소해주는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믿는 너희들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인데, 그렇게 안 삽니다. 안살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삶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 이 지상 대명령에 버금갈 정도의 이 커다란 명령이 시작하는 그 부분이 마태복음인데, 그 마태복음 시작 부분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땅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기거나 하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근데 왜 그렇게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고,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골머리 앓고 치열한 경쟁 관계 속에서 그렇게 고통 받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게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너희가 염려한들 너희 키를 한 자나 더 자랄 수 있게 하겠느냐. 이런 것들 보다도 너희가 더 귀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그 나라와 의를 추구하면서 살 수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약점이 항상 있습니다. 한 번 물어봅시다. 우리 인생을 가장 잘 돌보아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날이 추워서 입이 어셨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영하 4도라니 안얼 수가 없겠죠? 녹여보시고 대답을 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잘 돌보실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잘 돌보실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있어야지만 그렇게 고백을 하지,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없으니까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고백할 수가 없겠죠? 그러면 하나님 빼고 그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를 잘 돌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버지) 우리 자신입니다.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입니까? 어느 아버지가 잘 돌봅니까 그래. 자기 자신이 자기를 가장 잘 돌본다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을. 그렇다는 게 아니라. 생각을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봉사하려면 밑천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밑천이 뭡니까? 돈. 한 자입니다. 돈! 간단합니다. 돈! 그래서 머리가 돌 정도로 그 돈을 찾아서 도는 겁니다. 그냥. 오죽했으면 돈입니다. 이름이.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영어로 돈이 머니, 그렇잖습니까? 그게 뭐냐? 그래서 혈안이 되어서 그냥 물질을 모으고 쌓아둡니다. 근데 사실 물질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그래서 여러분 불편하게 살다가 냉장고라도 하나 새로 사거나, 아니면 맨날 길거리에 가다가 갈 때 보다는 설 때가 많은 그 자동차 팔아치우고 그래도 잘 가는 자동차 하나 산 다음에 하는 말이 뭡니까? 야~참 돈이 좋긴 좋구나. 돈이 참 좋은 점도 많습니다. 근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제 신앙이 어렸을 때는 돈을 참 사랑합니다. 그러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이 깊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돈을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돈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음식을 객관적으로 생각해야합니다. 음식이 있으면 다 먹는 거다 그러고 주워 먹으면 그 나온 배 감당 못합니다. 음식이 탁 올라오면 항상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서, 이게 얼마만큼 먹어야지 내 몸에 괜찮겠는가 생각하고 아무리 맛있고 비싸고 좋은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적절하게 섭취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비만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모두 돈 들여서 다 자동으로 해놓고, 그 다음에는 수동으로 돈 들여서 빼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겁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되듯이 마찬가지로 똑같이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을 많이 쌓아놓고 그 물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영혼에 군살이 붙고 비계가 낍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 참 신앙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잔뜩 허리가 나와 가지고 고무줄 바지가 아니면 입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난 후에야 그래도 말할 때는 맨날 내가 젊었을 때에는... 그러지 않습니까? 똑같이 그렇게 세상 욕심을 취해서 영적으로 비대해지고 난 다음에, 첫사랑 때에는 어땠는데, 그게 마치 처녀 때에는 어땠는데. 그러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고 오늘 현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고 나면 이 물질을 객관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사업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돈을 많이 벌게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구요? 그렇지 다 남 줘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기독교 경제생활의 원리입니다. 자기가 쓰고 그 다음에 나머지는 모두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줘야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이 맡겨 주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할 때에도 말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주님은 영접했지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지 않고 살아갈 때에는 헌금 하는 것도 정말 인색합니다. 자기 먹을 때는 펑펑 쓰고 그러면서 헌금할 때는 그렇게 인색하고, 일년 365일 가도 말입니다. 그 저 불우이웃을 위해서 그 모금함에 한 번 돈 넣는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불우이웃돕기 그러면서 ARS 한통에 천원하고 나오는 거 있지 않습니까? 근데 남의 집에 가서 그걸 누르고 있는 겁니다. 아니 자기 전화로 눌러야지 왜 남의 집에 가서 누르냐는 겁니다. 아니 자기 전화로 해야지...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게 되면 그 다음에 나의 사는 것이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근데 그 근심과 염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스스로 안 벗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어느 권사님이 꿈을 꿨는데, 여러분 옛날에 망태 기억합니까? 넝마주이들이 지고 다니던 망태. 그건 진짜 사람 한 대 여섯 명 들어갈 정도로 엄청나게 큽니다. 등나무 같은 것으로, 싸리나무 같은 것으로 해서 가벼우면서도, 대나무로도 하지만. 그래서 엄청나게 크고 이 그 넝마주이들이 줍는 집게는 특수 집게입니다. 굉장히 깁니다. 한 1미터 정도 됩니다. 그래서 몸을 굽히지 않고도 탁 집어서 휙~던지면 깡통도 들어가고, 종이도 들어가고, 심지어는 뭐 남의 집에 세숫대야도 들어가고, 막 들어갑니다. 그러면 막 쫓아가서 그거 왜 가지고 가냐 그러면, 버리는 건 줄 알았다 그럽니다. 그래서 애들이 울 때에 망태 할아버지 온다 그러면 애들이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그렇게 뭐든지 집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권사님이 꿈을 꿨는데, 자기가 그것을 지고 높은 언덕을 오르고 있더라 이 이야기입니다. 근데 앞에서 뭐 시커먼 옷을 입은, 마귀겠지요. 계속해서 시커먼 보자기를 뿌리고 지나가는데 그것을 죽어라고 집어넣는데, 나중에는 이게 너무 많이 집어 넣어가지고 도저히 그 할머니가 감당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엎어졌습니다. 엎어지니까 뒤에서 이 망태가 누를 것 아닙니까. 갈비뼈가 부러질 것같이 숨을 못 쉬겠는데도 이 손으로는 계속해서 주워 넣는 겁니다.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염려와 근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것들이 모두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면 세상 줄을 못 끊기 때문이고, 조금 더 고상한 말로 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앙이 아직 여러분 속에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좋은 대로 살고, 하나님 앞에 복이나 받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한 번 내 인생 모두가 내 수중에 있지 않고 우리 주님의 손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서 정말 소중한 존재로 만드셨지만, 내 죄 때문에 그 목적을 따라 살 수 없게 되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나 같이 더러운 죄인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해 주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우리가 우리 인생을 위해서 한 것이 쥐뿔이나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 분을 우리를 위한 화목재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제껏 까지도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돌보아 오시고 지켜오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시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런 아름다운 인격적인 신앙 때문에 그러했지만 그러나 더 깊이 왜 그렇게 인격적인 신앙이 될 수 있는지 캐들어 가보면 이렇게 물질적으로 곤고하고 어려운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임금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나라를 건설하고자할 때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은 명망 있는 세도가나 권세자들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억울하고 원한이 맺히고 배고프고 빚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들이 다시 말하면 이 사회에서 모두 소외된 사람들이 다윗의 편에 섰고, 그리고 다윗은 목동이 자기의 양떼를 사랑하듯이 상처받은 그 백성들을 끌어안고 그렇게 깊이 눈물 흘리면서 사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윗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자들을 품에 안으시고 끝까지 사랑해주실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한 표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윗은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억눌린 자들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에 맺힌 자들과 함께 눈물 흐릴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도망 다니는 사람들의 억울한 사정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는 주님을 찾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차고 늘어나는 빚과 그리고 경제적인 고통 때문에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상해있는 여러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염려와 근심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야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염려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계속 상하고 하나님의 이 염려와 근심은 모처럼 우리 안에 심겨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죽이는 독초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있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 길이 뭐냐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겁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에 어느 부인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전도를 받고 얼마나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직원들을 모아놓고 점심때는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위해서 기도해주고 이러면서 이제 기도했는데, 한 번은 이제 모두 점심시간에 모여서 처음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변화된 자기 이야기를 이제 한 마디씩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그 부인이 하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다른 사람들은 뭐가 변했다, 뭐가 변했다 그러고 이야기하는데 그 부인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전에 예수 믿기 전에는 항상 주머니에 만원이 있어야 됐답니다. 만원은 그 때 굉장히 큰 돈이었습니다. 한 달 월급이 십만 원도 안될 때였으니까, 만원이면 지금으로 따지면 한 삼십만 원쯤 될까요, 굉장히 큰 돈이었습니다. 근데 그 만원, 갈비탕 한 그릇에 오백 원정도 할 때였으니까, 큰 돈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있어야지 든든했는데, 예수님 믿고 나니까 그 다음에 버스표 한 장만 가져도 그렇게 마음이 든든하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의 단순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 그거 좋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으니까 염려는 하면서 기도는 안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근심이 많으면 이 영적, 정신적 소화불량에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영혼에 모두 이상이 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면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경험하는 경제적인 어려움, 이것은 세상 수단으로 벌고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신앙 생활을 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안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모든 일에 있어서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에 비로소 순종하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많이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물질로 섬기면서 사는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겁니다.
저도 인생을 그렇게 길게 살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참 목사 되게 하시려는지 고생길도 고생길도 그 먼 길을 걸어오면서 별 쓴 맛을 다 보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체가 한 번 절 찾아와서 “전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놀라는 게 있습니다.” “뭐냐?” 그러니까, “어쩌면 그렇게 골고루 경험을 하면서 사셨습니까?” 그래, 그렇습니다. 칭찬인지 욕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하여간 마지막에 묻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경험한 것 중에서, 뭐 경험 못하신 것이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니가 경험한 건 다 경험했고, 니가 어디로 튈 진 모르지만 그 튈 곳에 나도 다 튀어봤다. 그래서 내 손안에 있다. 어디를 튈지 난 다 안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쉽지만 그게 간단합니까?
제가 대학에 교수가 되려고 원서를 갖고 갔더니 그 과장되시는 분이 다 원서를 보고, 결국은 제가 나중에 합격을 해서 교수가 됐습니다. 그 분은 저에 비하면 새까만 선배입니다. 나이 서른셋에 교수가 됐으니까, 젊은 나이였습니다. 이력서 이렇게 보더니, “어째 김 교수는 이력서 한 칸 한 칸이 연결이 안된다.” 그래서 내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겁니다.” 사도 바울은 연결이 됩니까?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는데, 복음전하는 사도가 되고, 중간에는 연결고리가 없는데, 그런 사도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저도 그런 사람으로 봐 주십시오. 그리고 뭐 아멘 할 것 까진 없지만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죽어도 우리의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뭐냐면 이 지겨운 염려와 근심, 이 뼈를 녹이는 이 근심과 염려.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신앙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생명을 앗아갑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 될 텐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오늘 이건 분명히 알고 가십시오. 왜 그런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구김이 없는 신앙생활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주님 내 인생은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면 다 해결이 되는데, 아직까지도 내 뜻대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근심과 불안의, 염려의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전부인 것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주님이 전부인 것처럼 주님을 찾아가는 사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만큼 주님을 의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때에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막 이렇게 열을 내고 그러는 게 아니라, 설복되는 겁니다. 설복되는 것, 설복되는 겁니다. 그래서 깊이 무릎을 꿇게 되고, ‘아~ 정말 하나님이 맞습니다. 나는 모두 틀렸습니다.’ 그럴 수 있는 설복이 중요한 겁니다. 교인들이나 학생들을 가르쳐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고 이야기할 때에 잘 설복되고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렇습니다 교수님, 그렇습니다 목사님’ 하는 사람들에겐 더 많은 걸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설복이 안돼. 그럴 때에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지 재주로 어느 정도 살았지만, 예수 믿고 나면 절대 자기 재주로 못삽니다. 하나님 허락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사기도 치고, 공갈도 치고, 탈세도 하고 하면 먹혀들어갔단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건씩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를 믿고 나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하는 겁니다. 그렇게 잔재주 피우다가는 꼭 그 물에 빠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염려하고 근심하면 뭐합니까. 해결이 되면 해보라 이겁니다. 해결이 안됩니다. 주님께 맡기고, 그리고 나의 인생을 이제껏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셨다는 고백을 가져야합니다. 여러분, 누가 여러분 이제까지 먹이셨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입히셨습니까?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떨며 울고 있을때 누가 찾아와서 구해주셨으며 굶주리고 배고플 때 누가 와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주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여튼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과거가 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다른 건 몰라도 밥을 굶는다 배가 고프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난 ??도 보면 신학생들이 점심때 되면 밥을 못 먹어서 200명씩 산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산으로 올라간다. 물마시고 산으로 올라간다. 며칠 동안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좀 도와주고 싶은데 돈이 있어야죠. 그래서 월부로 도와줬습니다 월부로. 이달에 다 보내줬습니다. 그래서 엊그제도 채플 인도하러 갔는데, 야 난 딴 건 모르지만 너희들 가운데 밥 굶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밥을 먹어야지 무슨 신학을 공부하고, 그렇게 뭘 가르치지. 더군다나 주의 종 될 사람들이 밥을 굶고 이를 악물고 신학 공부를 해서 혹시 마음 속에 나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렇게 신학공부 했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 우리들이 살아온 인생길이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우리가 염려하고 가슴 태우고 하얗게 날밤을 밝힌 그 많은 염려와 고생이 우리를 살렸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살려온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벌어먹고 산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도우셨던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도움을 받았고, 그 은혜로 날마다 살아왔습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말하기를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선물로 왜 안주시겠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 신앙생활을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 풀 수 없는 고난도 주시고, 우리의 힘으로 풀 수 없는 시련도 주시고,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결핍의 한 복판을 지나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 앞에 샘물나게 하시는 하나님 의지하고 날마다 일용할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인격적인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때로는 그런 길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버리고 정말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사랑해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근데 오늘 두 번째로 성경에 보니까 나를 푸른 초장에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눕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국민 학교 일학년인가 이학년 다니는 애가 학교에서 숙제를 내줘서 해갖고 갔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휴일에 집에서 일어난 일을 그림으로 하나씩 그려오라’ 그랬더니 딴 애들은 엄마하고 아빠하고 시장 가는 것도 그리고 아빠하고 베드민턴 하는 것도 그리고 엄마하고 요리하는 것도 그렸는데, 이 녀석은 크레용으로 색칠도 안하고 흑백으로 그렸습니다. 연필로 그렸다 그 뜻입니다. 연필로 네모난 커다란 사각형을 그려놓고 그 사각형 밑에다가 발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야단을 쳤습니다. “야, 임마! 휴일날 집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라 그랬지 누가 사각형에다가 발 달아가지고 오라 그랬냐” 그랬더니, “아니예요, 선생님. 그 밑에 보면 그림의 제목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아빠의 휴일’. “이게 뭐냐.” “사각형은 이불이구요, 밑에 삐져나온 거는 아빠 발이거든요. 우리 아빠는 일요일 날은 맨 날 잠만 자요.” 그 남편이 이제 모처럼 휴일이라고 자지 않습니까. 그러고 이제 자지 않습니까. 그러면 부인들이 일요일인데, 휴일인데, 왜 그러고 있냐 그러고 발로차고, 그러죠? 그래서 일어나라고 막 그러면 더 꼬부리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잡아당기죠. 그 때 아마 확 벗겨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 후줄근한 잠옷 한 벌 걸치고, 머리는 부스스해가지고 새우처럼 꼬부리고 인상은 팍 쓰고 진짜 온 몸에 피곤이 느껴지는 그런 존재가 바로 여러분들의 가장입니다. 밥 먹여 살리느라고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아이들이 잘 때에는 참 평화롭지 않습니까? 젖먹이 아이들이 자는 것 보면 그냥 이렇게 탁 들여다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 집 아이가 뉘 집 애든지 말입니다. 참 사랑스러울 수가 없고, 난 온 인류가 잠자는 애들을 하루에 일 분씩만 쳐다보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근데 그게 유치원 다닐 때까지만 그렇고, 유치원도 강퍅한 애들은 벌써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뭐냐면 평화가 사라집니다. 이제 초등학교 일학년만 들어가면서 잠자는 모습을 보면 전혀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그 무엇이 마음이 안드는지 인상을 쓰고 꼬부리고 이럽니다. 꼭 이럽니다. 나이 들면 그 더 가관입니다. 평화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나이든 사람이 드러누워서 자는 것을 보면 인생이 얼마나 고해의 바다인가가 느껴집니다. 그렇게 얼굴의 몰골은 초췌하고, 낮에는 그래도 포장을 해서 있었는데, 밤에 잘 때는 세수하고 화장끼도 없고, 그리고 이렇게 꼭 드러누워서 잡니다. 침은 흘리죠 그 다음에 또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이빨은 왜 그렇게 갑니까? 그러면서 그 얼굴 속에서 어떠한 평화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쉼이 없이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마지막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쉼이 없습니다. 참 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말이죠, 가을철이나 봄철 되면 쉬러가지 않습니까? 들로 산으로. 그런데 관광버스가 들썩거릴 정도로 그 속에서 들고 뛰고 그럽니다. 관광버스가 유원지를 들어가는데 멀리서 보니까 이게 차고 이럽니다. 그래서 도대체 왜 그런가 했더니 거기에서 그냥 춤을 추는 겁니다. 아예 버스를 출고할 때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버스를 만든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가라오케도 넣고 뭐 막 이렇게 해가지고 사람들이 거기서 길길이 뛰는 겁니다. 나는 그게 휴식이 아니라 노동 중에 상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는 사람이 피곤하니 본인들은 얼마나 피곤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휴일이라고 놀러 갔다와서는 사람들이 더 피곤에 쩌는 겁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조용히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고 명상에 잠기고, 물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고, 그런 여유와 쉼이 없다 이겁니다. 이 세상에는 쉼이 없습니다. 영원한 죄로 말미암아 번민하기 때문에 쉼이 없고, 육체는 끊임없는 생존경쟁에 시달리면서 쉼이 없는 삶을 삽니다. 그런 쉼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오직 그 쉼은 쉬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도피성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잘못해서 사람을 죽이면 보복을 당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 때에 도망갈 곳을 도피성을 지정해놓고 그 열두 개의 도피성으로 도망을 치면 그 성에 들어가면 누구도 그 사람을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죄를 사실(?) 해서 죄가 없이 정말로 우연히 지은 일이라면 그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게 해주셨는데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이런 도피성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물질로 도망가는 사람의 쉼이 있습니까? 권력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쉼이 있습니까? 자기의 취미생활이나 세상의 쾌락을 향해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쉼이 되시기 때문에 목자 되신 예수님이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 고백했듯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어디에서도 참된 안식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마음 아프게 해드리는 삶을 살면서도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악마의 속삭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알고, 그 분의 목자되심 앞에 인격적으로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위하여, 그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될 때, 거기에 인생의 참다운 쉼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쉼을 누리면서 사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매여서 고통 하다가, 방황하다가, 오늘도 열린 신문에 보니까, 지체들의 간증이 은혜로운 간증들이 실렸더라구요. 그렇게 방황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고 정말 이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고 인격적으로 주님의 품에 안겨서 정말 그 놀라운 사랑 안에서 살면서 감사하다가 보면 그 때에 제일 먼저 경험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쉼을 주는 겁니다. 예전에는 미친 듯이 한 맺힌 사람처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그 속에서 때로는 그 경쟁심이 지나쳐서 죄도 짓고 나쁜 짓도 하고 하면서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탁하는 인격적인 신앙이 생기고 나면 아주 놀라운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입니다. 깊은 신뢰입니다. 그래서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는,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나를 잘 지키고 붙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게 바로 신앙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힘입니다. 놀라운 힘입니다. 그래서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렇게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내가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내 마음 속에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신앙이 필요한 겁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약점을 기억하시면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뒤에 보면,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그랬습니다. 이게 뭐냐면 양떼를 거느린 목자가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장면입니다. 물을 먹이는 장면입니다. 근데 이 양은 그 아주 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흐르는 물은 못 마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목동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는 잔잔하게 흐르는 물들을 풀포기나 돌멩이 같은 걸로 막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작은 댐처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물이 움직이지 않겠죠? 흐르지를 못하니까. 그 때에 물 가장자리로 데리고 가서 혀끝으로 물을 먹게 하는 겁니다. 그냥 흐르는데 데리고 가서 먹이면 왜 안됩니까? 그게 못먹으니까. 말도 먹고 소도 먹고 다 먹는데 양은 그렇게 못먹습니다. 근데 목자가 “니가 목이 덜 마르니까 그렇지. 진짜 목이 말라봐라. 여기서 소도 먹고 돼지도 먹고 갔는데, 다 배불러서 하는 짓이다.” 그리고 그늘에 가서 퍼질러 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건 선한 목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 잔잔한, 쉴만한 물가라는 것이 히브리말로 ‘매 매호노트’입니다. 직역을 하자면 정지의 물입니다. 정지한 물입니다. 정지한 물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이것을 'still waters'라고 번역을 했고, 새번역에서는 'quiet water'라고 번역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쉴만한 물이 아니라 잔잔한 물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인도하시는 도다 그겁니다. 인간의 약점과 단점이라고 하는 것은 동전의 앞뒤 면과 같은 겁니다. 약점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또 단점이 있기 때문에 강점이 있는 겁니다.
다윗은 정말 감정적으로 풍부하고, 하나님 앞에 정말로 세미한 그런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찬양할 수 있는 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 동시에 그랬기 때문에 또한 외롭기도 하고 신앙이 떨어지니까 타락의 길을 가기도한 그런 슬픈 인생의 역사를 지닌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다윗으로 알고 하나님이 잘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가 아니죠, 나무를 많이 안심었으니까 그랬습니다. 비만 오면 막 엄청난 흙탕물이 흘러내려 왔습니다. 지금도 엄청나지만 그 당시에 그저 홍수에 아무 동네도 물에 안잠겼다 그러면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그냥 늘 물에 잠기고 떠나가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시골에 내려가면 이제 장마철에 둑방에 올라가보면 뭐 그 때 구경거리도 없으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요만한 구경거리만 있으면 새까맣게 모입니다. 그래서 물난리가 나도 모두 구경거립니다. 제방에 올라가서 이렇게 보면 막 시뻘건 흙탕물이 막 떠내려갑니다. 그 때에 안타까운 게 뭐냐면 짐승들이 함께 떠내려가는 겁니다. 떠내려가면,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지금도, 그러면 초가지붕이 통째로 떠내려갑니다 초가지붕이. 막 별의별게 다 떠내려갑니다. 하여튼 뜰 수 있는 모든 건 다 떠내려갑니다. 떠내려가는데 그 중에 안타까운 건 뭐냐면 이 짐승들이 떠내려가는 겁니다. 소가 떠내려갑니다. 소 헤엄 잘 칠까요, 못 칠까요? 잘 칩니다. 그 거구가 어떻게 뜨는지 진짜 모릅니다. 잘 뜹니다. 개도 떠내려갑니다. 개는 잘 칩니다. 그러니까 오죽했으면 개헤엄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개도 잘 떠내려가고, 더 인상 깊은 건, 여러분 돼지가 수영을 잘 할 것 같습니까, 못할 것 같습니까? 못할 것 같죠? 근데 한 번 띄워보십시오. 이게 기가 막히게 수영을 합니다. 그 대신 무서워가지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모든 동물 가운데 소리가 제일 큰 소리가 납니다. 생생하게 납니다. 닭은 어떨 것 같습니까? 닭도 안가라 앉습니다. 오리는 어떻습니까? 오리는 뭐 원래 물에서 사는 거니까 절대로 문제없습니다. 떠내려갑니다. 물론 어디까지 가다가는 짐승들이 빠져서 죽습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한참 동안 그렇게 그 물을 떠내려갑니다. 동네 사람들이 막 발을 구르면서 안타까와 합니다. 근데 양은 그 수영을 하긴 하는데, 딱 하나 합니다. 잠수! 한 번 들어가면 안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털이 많으니까 그 털이 이렇게 물에 깊이 젖으면 그 자체가 잡아당겨가지고 이 양이 거기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그래서 양이 물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도 치고 말도치고, 소도치지만 다 압니다. 양은 원래 그런 짐승이라는 걸 알고,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그 앞에서 수고스럽게도 흐르는 물을 막아서 움직이지 않는 물을 만들고 그 가장자리로 조심스럽게 이끌어 가서 그들의 혀로 물을 마시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갈증을 면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당신 안에서 우리가 쉬는 것입니다. 내게로 와서 쉬어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값없이 와서 먹고 마시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미 이루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의 자녀가 됐지않습니까? 그랬으면 이제 당신의 품 안에서 한 없이 쉬는 것.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셔서 여러분을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자녀로 받아주시고 그리고 이제껏까지 인도해오셨습니다. 정직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볼 때, 이 길이 우리가 걸은 길입니까? 우리가 홀로 이어져 온 길입니까? 우리의 힘으로 살아온 길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도 우리 혼자였습니까?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 땐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의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나면, 바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때때로는 혼자 비참한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는데도 그 때도 주님이 옆에 계셨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길을 다 걸어오면서 우리의 영혼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굶주리고 배고플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를 입히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충성하지 않을 때에도 먹이셨습니다. 날마다 살아갈 힘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며 시시때때로 우리를 붙드셨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핍절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셔서 어두운 죄의 길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어디에서 이런 사랑을 또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긴 인생을 살면서 우리들이 도달한 마지막 결론입니다. 주님의 품에서 사는 그 이상으로 참된 안식이 없다 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부른 것처럼, 여러분도 그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품에서 쉼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영혼의 침체와 회복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3上)
시인이 2절에서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에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3절에서는 자신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신, 소생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소생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하야‘라고 하는 말인데 직역을 하자면 ’살게 하시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을 살게 하시며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목자로 그렇게 모시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됐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살게 하셨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언젠가는 무슨 이유 때문이든지 간에 그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은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시인의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이 된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죽은 자와 같이 된 적이 있었던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구해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 진정한 목자로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영혼에 이런 깊은 침체를 가져오는 요인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요약을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죄입니다. 죄 때문에 신자는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좀 유식한 말로 영적침체라고 부르는데,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가 상실되고, 하나님과의 풍부한 사랑의 교제도 멀어지게 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대해 둔감한 때가 오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영혼의 침체 혹은 영적침체라고 가리킵니다. 이런 침체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마음과 삶은 은혜보다는 죄가 깃들이기에 좋은 틀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영혼의 침체 속에 있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활기차고 영적으로 능력 있는 삶을 살기가 어렵게 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삶이 실제적으로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침체 속에 들지 않도록 우리가 깊이 유의해야 하는데,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을 이런 침체 속에 들어가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름뿐인 사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영혼의 침체가 오는 원인이 가장 보편적인 원인이 바로 죄 때문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는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고 영혼에 깊은 어두움을 가져옵니다. 생생하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감격하고 기뻐하던 그러한 영적인 환희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많은 어려움들을 가져오게 되는데 그 영혼의 침체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 바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죄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죄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기에 모자라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죄입니다. 그런데 주관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이 죄는 마음 속에서 하나의 강력한 세력이며 경향성입니다. 그러면 그 죄가 가지고 있는 경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르며 살게 하는 그런 경향성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죄는 객관적으로도 존재하고 또 주관적으로 우리 안에도 존재합니다. 마치 이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 객관적으로 은혜 하면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호의를 가리키지만 또 주관적으로 말하면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은혜가 있으면 항상 기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은혜가 있으면 기도가 잘 됩니다. 마음 속에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기쁘고 마음 속에 은혜가 있으면 내가 미워하던 사람들도 잘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은혜인 것처럼 죄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주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게 되면 그 죄는 금방 그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영혼과 관계된 우리의 모든 전 인격적인 기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 그러면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가는 그런 형법상의 죄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건 더 말할 나위 없이 큰 죄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죄를 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평생을 살면서 이 세상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또 하나님께 다윗처럼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우리의 생애는 아름다운 생애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의 생애는 얼마나 기쁜 생애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커다란 두 번의 범죄를 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두 죄 모두다 다윗의 영혼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그리고 인구조사를 한 죄는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 중 칠만여 명의 사람을 온역으로 죽게 만드는 큰 심판을 몰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커다란 다윗의 영혼에 어려움을 가져왔던 죄는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이 사건은 다윗의 영혼을 송두리째 파멸로 몰아넣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은 일생을 정말 외롭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리고 장성한 후로는 형들과 형제들에게 따뜻한 고임(?)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결혼을 해서는 아내와 살 붙은 그런 금슬 좋은 사이를 누리지 못하면서 그렇게 그 관계가 깨어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돼서는 자식들로부터 깊이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살지를 못했고, 자식들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투쟁하고 서로 죽임으로써 아버지인 이 다윗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일생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기는 했지만 그러나 정말 이 세상에 마음 둘 곳 없는 그런 고통스러운 일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이 사건은 단순히 끓어오르는 어떤 한 남성의 정욕, 어떤 그 성적인 탐닉에서 오는 그 단순한 욕정이라고 분류하기에는 좀 어려운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이 다윗은 깊은 사랑을 느꼈을지 모르고 또 모성애와 그리고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그 사랑에 대한 보상과 아내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보상을 아마 찾으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보면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마음의 기질이 평소에 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 때에는 이것을 능히 이기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아내로부터 받은 아픔, 자식으로부터 받은 그 고통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위로와 현재적 사랑이 그 모든 것들을 치유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능히 그렇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오히려 자기가 받는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영혼이 싫증을 내고 육체가 게으름에 빠지게 되고,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는 비로소 오랫동안 자신의 영혼 속에 죽은 것처럼 엎드려 있었던 수 많은 대적들이 일시에 부상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외로움과 부모 없는 그 처절함과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처절함과 아내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그런 모든 냉대의 마음이 일시에 살아나서 한 여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마음 속으로 꽂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그 감정의 덩어리들이 죄와 함께 뒤섞이면서 한 여자와의 사랑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동정할 여지가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것은 엄청난 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이 다윗은 그렇게 충성스러운 밧세바의 남편인 죄 없는 우리아를 정말 정교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전쟁터에서 살인합니다. 결국은 간음의 죄를 은폐해보려고 했지만 그로 말미암아서 간음에 못지않은 살인의 죄를 짓게 되는데 그 엄청난 죄를 지으면서 다윗의 영혼은 이 주님을 알고 난 이후로 가장 비참한 이 어두움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이고 죄가 얼마나 자신의 영혼을 철저히 파괴하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침체가 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죄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보면 죄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사랑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주일날 와서 이렇게 봉사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진정으로 죄에 대한 진실한 참회, 그리고 죄를 멀리하는 정결함이 없으면 그 사람의 삶이 영혼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남의 생명을 누리기에는 안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할 수 있으면 이 죄와, 죄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런 순결한 삶을 살 때에 영혼의 생명력이 보존되고 또 부득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여기에 대처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깊은 영혼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그렇게 극도로 고통하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이 시편은 이 시편 51편에서 그리고 몇 개의 흩어져 있는 참회의 시에서 이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말합니다. 다윗의 전임자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아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을 때에는 정말 비참해졌습니다. 여호와의 신을 하나님께서 걷어가시자 악신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는 미치광이가 되어서 일생을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범죄의 사건을 경험하고 나니까 다윗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그렇게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 같은 큰 위기를 느꼈고, 그 큰 위기를 느끼자 이 다윗의 영혼은 그 커다란 위기를 느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확신과 기쁨조차도 상실될 것 같은 영혼의 깊은 위기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살아있는 신앙생활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으면서 산다 라고 하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외아들을 주셔서 구해놓으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충성되게 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때에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연약하고 심지어는 죄 가운데 빠졌을 때에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이 있는데 여러분, 항상 말 잘 들을 때에만 그 자식을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성적이 떨어지거나 밖에 나가서 나쁜 짓하고 부모 속 썩이면 그것은 내 자식도 아니라고 여러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결국은 내 자식이고 가서 나쁜 짓을 하고 감옥소에 들어가도 그 자식이 내 새끼이기 때문에 찾아가서 추우면 입히고 배고프면 먹이고 하면서 돌봅니다. 그게 부모의 도리이고 또 부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나 어떤 때에나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우리들이 예수님 안 믿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안사랑하십니까?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많이 사랑하셔도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경험하지 못할 때에는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 속에 수 많은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다가도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고 깨들은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은 사라지는 겁니다. 모두 사라집니다. 모두 사라집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주관적인 그 은혜와 사랑의 경험이 약화되거나 아주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그것이 차가운 지성으로는 남는데 경험하고 느끼는 모든 체험적인 지식들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죄와 양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생생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생생한 교통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그 죄를 떠난 그런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중에서 가장 커다란 죄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죄입니다.
다윗이 간음의 죄를 짓게 되자 그것은 다윗의 영혼에 폭풍과 같은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던 그의 아름다운 육체는 정욕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변했고, 입을 열 때마다 흘러나오던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의 가락들을 토해놓을 수 있었던 그의 마음의 수금의 줄들은 모두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에 비파는 그 아름다운 가락을 더 이상 낼 수 없는 그런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죄가 몰고 온 파괴적인 영향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을 믿고 그리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도 모르고 그리고 죄가 얼마나 영혼에 깊은 파괴를 가져오는 지도 모르고 죄를 물 먹듯 마시면서 살면서 그 속에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체 그렇게 핍절한 가운데 건조한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들을 당신 앞으로 부르실 때에 그들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물과 같아서 어부가 그물을 쳐서 고기를 다 낚은 후에는 그 그물을 끌어올려서 쓸 수 있는 고기는 거둬들이지만 쓸모없는 고기를 다시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도 교회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 속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고 그리고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가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하찮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참된 신자의 특징이 아니라 거짓된 신자의 특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죄가 커다란 파멸을 몰고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영혼의 깊은 침체 가운데 있다면 우리들이, 우리들이 지은 큰 죄를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영혼의 침체가 찾아왔을 때에는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죄를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고 죄에 대해서 진실하게 참회함으로 그 죄를 토해놓을 수 있으리만치 더러웠던 그의 영혼이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온전히 새롭게 되는 역사가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충만한 경험들이 깃들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다윗이야 그런 큰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나는 간음한 적도 없고 그리고 살인죄를 지은 적도 없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할 것은 이것입니다. 죄는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죄의 질은 꼭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인이 4명이서 개울가에서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의 군인에게 명령했습니다. 가서 이 푸대자루에다가 돌멩이 50kg씩 담아갖고 와라! 그랬더니 한 병사는 큰 돌멩이 50kg짜리 하나를 주워오고, 그리고 두 번째 병사는 30kg과 20kg짜리 두 개를 주워왔습니다. 세 번째 병사는 자잘한 공깃돌을 한 천 개해서 그래서 푸대에다 지고 왔습니다. 공깃돌 진 사람이 제일 편했습니다. 돌멩이가 작으니까 이렇게 올려놓으면 곡선을 따라서 돌멩이가 잘 앉혀지니까 그래서 편안하게 들고 왔는데 그 다음 명령이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돌을 갖고 온 자리에다가 갖다 둔다, 실시! 그러니까 하나 가져온 사람은 지금도 가니까 그 가져온 것 퍼낸 자리가 있습니다. 갖다가 끼워놓으니까 딱 맞습니다. 두 개 가져온 사람도 갖다 놨는데 천 개의 공깃돌을 가져온 사람은 한 개도 갖다 둘 수가 없는 겁니다.
죄가 크기는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질이 다른 건 아닙니다. 기분 나쁜 비유지만 시내에 새벽에 가면 큰 똥차가 똥을 퍼가지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에는 그런 게 없었고 그 동네마다 똥 푸는 아저씨가 있어서 나무통으로 만든 지게에다가 그 똥을 펐습니다. 그래서 그 군인 모자 거꾸로 꽂아가지고, 막대기에다가. 그 똥간을 만들면 그 뒤에다가 똥 푸는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열고 쓱 집어넣어서 퍼서 가득 담는데, 어떤 아저씨들을 좋아하냐면 두 가지 조건입니다. 한 번 갈 때 가득가득 담아가지고 가는 아저씨하고, 똥 푸고 나서 변소를 깨끗하게 소지해주고 가는 아저씨를 제일 좋아해서 단골들이 많았습니다. 거기도 이제 불성실한 똥 푸는, 똥을 풀 때 그 지게 수에 얼마씩 이렇게 돈을 받습니다, 물지게마냥. 그러니까 딱 채워야 되는데 2/3만 퍼가지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이릅니다. 야, 너희 똥 퍼 그 사람 못쓰겠다. 꽉 채우지 않고 가져간다. 그러면 지게 수가 많이 나오고 그러면 돈이 나올 것 아니냐. 그것을 퍼서 구루마에다가 담아가지고 그 구루마를 끌고 밭에 가서 밭을 뒤엄 구덩이를 파 놓으면 거기다가 부음으로써 그 사람들 작업은 끝나는 거였습니다. 그래가지고 종종 이 똥 푸는 아저씨들이 한 번 목격한 광경인데 어느 자매가 아침에 출근을 한다고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갔는데 똥 푸는 바가지로 똥을 퍼서 담다가 그만 그 똥물에 옷에 쫙 튀었습니다. 거기서 울고불고 난리를 쳐야 똥 푸는 아저씨들이, 뭐, 그 늘 똥하고 사는 사람들이 그거 뭐 좀 남한테 튀겼다고 해서 그렇게 엎드려서 백배 사죄하고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광경을 봤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지게에다 똥을 퍼서 큰 구루마에다가 끌고 가는 것도 똥이고, 그 똥을 체로 잘 걸러서 국물만 병에 담아서 그래서 스프레이로 뿌렸다고 칩시다. 그 스프레이로 촥 뿌리면 그 작은 알갱이가 공기 중에 쫙 퍼질 것 아닙니까. 그 알갱이 하나를 채집해서 현미경으로 조사하고 성분을 분석을 해도 똥이고, 커다란 똥차가 싣고 가는 것을 스톱을 시키고 그 똥 통을 열어서 한 바가지 퍼서 성분 분석을 해도 똥이라 이겁니다. 둘 다 다 그것은 똥이다 이겁니다. 질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점도 있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뭐 아멘 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멘은 아꼈다가 좋을 때 하십시오. 진짜 아멘 할 시간에는 졸고, 똥 얘기할 때만 아멘하지 말고. 그게 동일한 본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여러분들이 먹는 밥상에 그 가운데 그 똥을 퍼서 올려놨다면 안 먹을 겁니다. 그렇지만 스프레이로 뿌리면 여러분 먹겠습니까?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그게 똥이라고 하는 본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큰 죄와 작은 죄는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주 작은 죄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 심하게 다루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면 하나님이 금방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큰 죄는 하나님이 크게 취급하십니다. 진짜 큰 죄를 지으면 뭐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주제가 바로 지난 기도학교 사경회 때 있었던 그 용서라고 하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여튼 그것은 죄이고 죄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그게 죄의 정체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마치 무엇과 같으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품고 하나님 앞에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그 자체가 모순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 할 때에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하니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면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 쌍방적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한다는 겁니다. 마음 속에 적대감을 품고 있기 때문에 안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끔 커다란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죄 때문에 겪는 고통 때문에 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만이 이런 삶에 대한 진정한 답이다 이겁니다.
어느 대학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접시처럼 납작한 그릇에다 물을 떠 놓고 밑에다가 램프에 불을 붙여서 일초에 0.02도씩만 올라가게끔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다가 논에서 잡아온 개구리 한 마리를 얹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리고 뜨듯하게 뎁혀졌더니 한 시간 20분 후에 개구리가 푹 삶아졌습니다. 만약에 물을 뜨듯한 물을 놓고 거기다가 개구리를, 펄펄 뛰는 개구리를 이 뜨듯한 물에다가 집어넣었다면 개구리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펄쩍 뛰어나옵니다. 지나 사우나 하지, 내가 언제 사우나 한다 그랬나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서서히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니까 죽음이 찾아와도 모르는 겁니다. 죽음이 찾아와도 모릅니다.
그 짐승 가운데 정말 이상한 짐승이 닭입니다. 닭인데, 제가 어렸을 때 닭을 길렀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마당에다가 닭을 길러서 팔았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나한테 사먹었습니다, 돈 주고. 그 때부터 하여튼 좀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팔아가지고 저금통장에다가 모우고 학교 갔다가 올 때는 시장에 들러가지고 배추이파리 주워가지고 오고 하여튼 그랬었습니다. 근데 그 닭을 병아리를, 병아리도 그 때는 싸구려 5원짜리 그런 것 있었습니다. 그런 거 사와가지고 길렀는데 그런데 그게 이제 10마리 사오면 5마리 죽고 5마리 살아남습니다. 근데 그 5마리 이제 잘 이렇게 기르면 그러면 이제 중병아리쯤 되면 우리 식구들이 나한테 사먹었습니다. 한 마리에 800원씩 주고 이제 사먹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까 닭이 피를 줄줄줄줄 흘리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이게 내 기업이 왜 이렇게 됐나 그러고, 그래서 어느 놈이 와서 닭을 저 꼴로 만들었나 그랬더니 아이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잡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쥐가 산 닭을 그렇게 파먹습니다. 여러분 아마 모를 겁니다. 그런데 이 쥐가 그냥 막 목을 깨물고 이러는 게 아니라 날개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병아리 모냥. 그래가지고 그걸 뜯어먹습니다. 그런데 그 바보 같은 닭이, 하긴 오죽했으면 닭대가리라고 그러겠습니까. 이 닭이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와서 쫓아줄텐데, 거 들어와가지고 날갯죽지를 다 파먹도록 가만이 있습니다. 그게 아마 무슨 수의학을 전공한 사람한테 설명은 안들었는데, 아마 그 날개 쪽 계통으로 파고 들어오면 신경계통이 무딘 모양입니다. 크 피가 뚝뚝뚝뚝 떨어져서 날갯죽지가 거의 달아날 정도로 파먹어도 그러고 가만히 피 흘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죄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그런데 인간 속에는 또 뭐가 있냐면 죄를 좋아하는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그렇게 좋아하는 성품의 날개 밑으로 파고 들어와가지고 우리의 영혼을 계속해서 파먹도록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이것이 자신의 영혼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주는데 또 한 편으로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뭐라고 그러냐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죄가 좋은 것 같아도 마지막에 그 죄가 마지막으로 파먹고 나중에 결과는 뭐냐면 우리 영혼의 파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이것이 죄이고, 이것이 영혼의 독이고, 이것이 참된 것이다 라고 가르쳐주는 정직하고 아주 이게 선명한 복음들을 싫어한다 이겁니다. 왜? 무엇인가 지금 자기가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이 삶을 그냥 인정해주고 그리고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자기를 이렇게 좀 다독거려주어서 양심의 괴로움이 없도록 그렇게 해야지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교회가 좋은 교회냐고 자꾸 인터넷에서 나한테 물어보고 그러는데, 내 이 자리를 빌어서 그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들이 여기에 열린 교회에 평생 있을 사람보다는 다른 교회 이사 가고 다닐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 때마다 어느 교회 가야되냐 그러는데, 365일 편안한 교회는 그 건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1년 52주 매주 나가는데 그냥 교회에서 너 만큼 사는 사람이 없다 너 잘났다 이러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라 이겁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가증하고 교묘한 존재인데, 우리 안에 얼마나 죄가 쉽게 깃들고 그 죄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인데 우리를 그렇게 다루어 주냐 이겁니다. 이건 아니다 이겁니다. 그래서 선명한 복음은 항상 죄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왜? 그 죄 이상으로 우리의 영혼에 파괴를 가져오는 것이 없고 만약에 그 죄가 제거되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하고 거룩해진다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그 영혼의 그 큰 생명력 있는 은혜를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니까 죄와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런 거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살인은 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간음은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작게 작게 여러분들이 용납하는 가운데 지은 많은 죄가 쌓여서 여러분들이 비록 다윗처럼 간음하지 않았고, 다윗처럼 살인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거의 단절된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의 증거도 마음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흔히 말하는 그 첫사랑의 감격도 사라지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생명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앞에서 늘 울고 감격해 하던 그 진실한 믿음의 반응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해나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업이 안되고 가정이 어렵고 그것은 다 2차적인 도구일 뿐이고 1차적으로는 여러분들 안에 있는 죄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내고 영혼을 깊은 침체 속에 데려갑니다.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낌없이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셨을 때 우리가 죄와는 상관이 없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까? 순결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시는 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한 모든 과정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샅샅이 아시는 분입니다. (아멘)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거룩한 것처럼 외식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결한 것처럼 그렇게 꾸며내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요? 누구를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사람들로부터 받을 그 명예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그 은총에 비하면 하찮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 해결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진실한 참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얼마나 재미있는 신앙의 공식이 성립되냐 하면 죄 가운데 살 때에는 참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결하게 살 때에는 늘 참회가 있습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하면 죄에 대해서 예민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비록 죄 가운데 있을 때에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언제 잘 나타나냐 하면 우리가 회개할 때 잘 나타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영혼이 파괴되고 너무 고통스러운 가운데 몸부림치면서 견디기 힘들도록 아파하고 그 무지막지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큰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괴로워하는데도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안해주시는 것 같은 겁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죄를 깊이 회개하고 진실하게 참회하니까 하나님이 놀랍게 용서해주시는 겁니다. 지은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진실하게 참회할 때 하나님이 상대해 주시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 시인이 지은 죄는 하늘을 찌를 듯한 큰 죄였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렇게 자기의 왕국을 위해서 다윗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충성스러웠던 그 우리아를 자기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죽여 버렸으니 이 사람의 죄가 얼마나 컸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다윗의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하였더라 그랬습니다. 그랬는데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죄로도 소문난 사람이 되었지만 회개로도 소문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고통 받는 사람마다 다윗을 연상하는데 죄를 행하는 일에 있어서만 다윗을 연상하지 말고 회개에 있어서 소문나는데 있어서도 다윗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닷물과 같이 끝없이 넓고 깊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그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용서해주실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용서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용서를 경험했다는 이야기는 참회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진실한 참회 속에서 용서를 경험했다는 이야기는 한 때 그들이 남다른 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인 중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라고 하는 자전적인 고백 속에서 존 번연은 말합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그래서 티끌만큼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거나 용서를 받을만한 선한 것이 없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자기의 죄로 인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크게 만났고 그 회심의 깊이 만큼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인생을 살면서 주님 믿고 나서 배운 한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에 있어서 인색한 사람들이 되지 마라. 그리고 안그런 사람도 있지만 내가 나에게 잘 못한 사람들을 마음깊이 용서해줄 때 그 사람들이 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맞서 싸우면 점점 적들이 늘어가는데, 용서해주니까 그 사람들이 나의 사람이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죄의 진실한 회개는, 그 진실한 참회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소서
깊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영혼에 놀라운 그 회복을 하나님이 가져다주십니다.
두 번째로 영혼이 깊은 침체에 들어가는 이유는 무지 때문입니다. 이 무지는 죄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 무지는 무지 때문에 영혼의 깊은 침체로 들어가게 하고 그 무지가 지식으로 밝혀지지 않는 한 회개를 해도 사실 거로한(?) 영혼의 침체로부터 벗어나기가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보여주는 예증이 시편에 나오는데, 찾지는 마시고 제가 설명을 할테니까 들어보십시오.
73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거기서 주님의 책망과 격려를 받으면서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에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까? 그리고 한 번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거역하며 사는 사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너무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그래서 짜증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기대를 걸기를 지금은 그렇게 낄낄대고 행복하게 살지만 큰 사고를 만날 것이다. 사고를 안만납니다. 죽을 때 불의의 사고로 죽을 거야. 죽을 때도 웃으면서 편안하게 죽고, 마지막에 꽃상여에 쌓여서 그렇게 장례지내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 때에 시인이 하게 되는 이야기가 뭐냐면, 나는 뭔가? 나는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깨달으면 하나님이 항상 너 왜 이렇게 사니? 좀 더 똑바로 못사니? 그것도 예수쟁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사는 거니? 집사인 주제에 그것밖에 못살아? 장로라며, 그렇게 해가지고 어디 장로 하겠어? 맨 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야단만 맞는 겁니다. 그게 나하고 뭔 상관이 있냐. 차라리 막 살아버릴 거야. 그리고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침체가 어느 한 순간에 확 밀려오고 주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행하며 살고자하는 모든 소원들이 단숨에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영혼의 깊은 침체가 오는 겁니다. 죄를 회개한다고 칩시다. 무슨 죄를 회개하겠습니까? 그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내가 왜 나도 막 살아버릴 걸 그랬던 걸 용서해주십시오 그렇게 용서를 빈다고 하더라도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안믿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저 인간들은 어떻게 저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 의문이 풀리지 않는 한 그 영혼의 침체는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회개가 아니라 지식입니다, 지식. 그래서 무지한 사람이 그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에서 사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무지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기만 하고 그러면 신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모두 다 헛된 꿈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교회 등록하고 새가족 공부 안하는 분들이 많은데, 물론 걔 중에는 사업하고 여러, 주일날 시간 낼 수가 없어서 어떻게 평일 날 와서 공부하시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바쁜 일이 몇 달 지나고 나면 이제 좀 제대로 공부를 하려고 마음 먹으신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계를 보면 이제는 공부를 안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난 너무 슬프게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여러분들을 돌보라고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돌보라는 겁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이 교회에 와서 목자 되신 주님께 맡기고 그리고 목회자인 우리에게 여러분들을 잘 돌봐달라는 의사표시를 가지고 이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러면 돌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여러분들을 돌보겠습니까? 국민 학교 사회선생님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중학교 윤리 선생님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을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곧 은혜의 말씀이 여러분들을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새가족 공부 안합니까? 왜 새가족 공부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여러분들이 교회의 한 자리를 채우고 헌금이나 많이 해서 교회 빌딩이나 세우고 주차장이나 사는데 도움을 주는 그런 존재로 여러분들을 키우는 것이 저희의 꿈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애쓰고 수고하고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직원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이 교회를 섬기는 것은 짐승 같았던 삶을 청산하고 정말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무지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겠으며, 죄악 가운데서 무지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야말로 교회이지 이게 사육장이 아닙니다. 목양을 받는 목양지이지, 그리고 최상급 포도나무를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포도원이지, 이게 들판이 아니고 사육지가 아닙니다. 새가족 공부 안했던 사람들은 깊이 회개하고 빨리 가서 공부해야 됩니다. 여러분, 12주를 공부하고 별것 아니면 교회를 떠나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어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상태에서 살아갑니까.
난 얼마 전에 그 고속도로에 가다가 휴게소에서 하도 졸음도 오고 심심해서 교역자들하고 멈춰 서서 그 저 자동차에 놓고 뭐도 팔고 그러는데 제가 잘 기웃거립니다. 사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살게 없습니다. 모자나 가끔 하나씩 살까. 그런데 적외선 망원경이 있답니다. 그래서 그것 한 번 보자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천 원 이랍니다. 그래서 천 원 낼테니까 나 보여달라 그러니까, 그것 신기하대요. 그 밤중인데 깜깜합니다.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그런데 그걸 탁 쓰니까 다 보입니다. 근데 불을 켜면 또 안보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저씨가 저 앉아가지고 자동차 밑을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자동차 밑은 더 컴컴하잖아요. 그래서 들여다보니까 자동차 바퀴 옆에 써있는 글씨까지 다 보입니다. 아, 그게 정말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 살라 그러는데 80만원을 달라고 그래서 못샀습니다. 그래서 지갑을 꺼내서 구경하는데 천원이라 그래서 천원을 꺼냈더니 그 사람이 막 웃으면서 아유~ 아저씨도 참 순진하다고, 농담으로 한 이야기인데 진짜 천원을 줄라고 그랬냐고. 그래서 천 원 벌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사람들은 꼭 뭐하고 똑같으냐하면 그 전쟁터에서 화살이 날아오기는 날아오는데 맞았다는 사실만 알지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누가 쏘는지도 모르고 화살이 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살아갑니다. 난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캄캄할 때 전투를 할 때 한 쪽은 맨 눈으로 하고, 나는 저거 하나 쓰고 만약에 전투 한다 그러면 백 명하고 싸워서 모두 이길 자신이 있겠다. 얼마나 선명하게 보이는지 대낮같이 보입니다. 약간 초록색 빛이 깃들뿐이지 얼굴의 표정까지 그대로 보입니다. 그러니 그거를 쓰고 전쟁을 한다 그러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무지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영적으로 그런 이 망원경을 씌워주는 것과 똑같은 것이, 적외선 망원경을 씌워주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말씀을 깨닫고 나면 내 원수가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하고 내가 왜 이렇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방황하고 살았는가 하는 것도 깨닫게 되고 그런 말씀의 깨달음이 오게 되면 내가 왜 이런 질병에 걸려있고, 이런 어려움이 올 때 어떻게 벗어나야 되겠는가 하는 것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 위해서 여러분보고 새가족 공부하라 그러는 겁니까? 우리 교회 교역자들만큼 그렇게 성경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교역자들이 없습니다. 내가 절제를 시키느라고 내가 요새 애를 먹습니다. 왜? 심방을 안하고 성경만 가르치니까 문제지 않습니까?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니까. 그래서 성경공부를 절제하고 그리고 성도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심방을 해라. 그래서 내년서부터 이제 각 교구마다 성경공부를 이제 몇 개씩 이렇게 하도록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쳐주는데 교리반에서 월사금을 받습니까, 새가족반에서 공납금을 받습니까? 누가 뭘 받습니까? 오며는 그냥 가르쳐주겠다는데, 그런데 왜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처럼 한 번 침체에 들면 계속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은 깨어나지 않습니다. 회개해봐야 소용없고 그런 사람 기도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도 뭐라 그러냐면 율법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기도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깨달음이 없이 기도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다. 왜? 다 저 좋은 대로 자기 욕심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이겁니다. 그 영혼의 침체에서 깊이 벗어나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면 고통입니다. 고통은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큰 죄를 통해서 죄에 대한 결과로서 자기가 뿌려놓은 씨앗을 거두는 의미에서 고난이 오기도 하는데 어떤 방면에서 고난이 왔든지 간에 그 고난을 통해서 고통을 받게 되면 영혼에 침체가 오게 됩니다. 그 땐 어떻게 하겠습니까? 죄가 있으면 회개해야 되겠고, 무지가 있으면 깨달아야 되겠지만, 회개도 했고, 깨달았는데도 고난이 계속 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하늘에서 축복이 쏟아지는 줄만 알았지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도 고난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설교하러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립 9주년을 맞으면서 지하실의 교회 시절이 그리웠다 그렇게 말 하는데, 그 때도 고생스러웠습니다, 그 때도. 지금은, 지금도 고생스럽고. 그 때도 감사한 일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정말 내가 죄 가운데 살 때는 죄 때문에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경건하게 살 때는 또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은혜 가운데 살 때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마음 아파하고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자신의 영혼의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이래저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나 죄 가운데 있을 때나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에는 적절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비밀도 함께 있지만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고통만 있고 이 은혜의 기쁨의 비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핍절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10년 가까이 교회를 하면서 달려왔지만 아직까지도 마음에 남아있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들, 또 그것을 능가하는 감사의 조건들이 있듯이 10년 후에도 마찬가지고 교인이 1만 명이 모여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이, 혹은 우리의 뿌려놓은 씨앗 때문에 혹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연단 받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욥의 고백과 같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난,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지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와 굳센 믿음.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 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일생을 살면서 목자 되신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고난도 주시고 시련도 주시고,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사명의 고난을 주시고, 죄 가운데 살 때는 죄의 고통을 주셔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축복하시고 그리고 많은 물질과 명예가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을 의지하며 목자 되신 주님의 그늘 아래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은 영원히 머물 우리의 집이 아니요, 우리에게는 두고 온 본향보다도 더 자랑스러운 또 다른 본향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해주시고 싶으신 겁니다. 알게 해주시고 싶으신 겁니다. 그래서 신자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는 없지만 영원의 침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큼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신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각자가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깊이 깨닫고 뉘우치는 그래서 목자 되신 주님을 의존하며 사는 그런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 영혼의 회복을 주심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下)
어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하나가 학교를 가면서 엄마한테 쪽지하나를 건네주고 도망치듯이 뛰어갔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그 초등학생을 학교를 보내고, 그리고 도대체 이 아들이 무슨 쪽지를 줬나 펴보니까, 엄마에게 보내는 청구서 그렇게 써있습니다. 1.애기 봐준 값 3시간 X 500원해서 1500원. 아빠 구두 닦아준 것 2번, 천 원씩 해서 2000원. 엄마대신 슈퍼에 가서 심부름한 값. 200원 X 1번. 합계 얼마. 위와 같이 청구하니 속히 지급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엄마가 그 다음날 아이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를 갔는데, 도시락 가방을 열어보니까 그 속에서 뭐가 툭하고 떨어지는데 보니까, ‘아들에게 보내는 엄마의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뭔가 하고 아이들이 모여서 야~! 그게 뭐냐? 열어보니까 아들에게 보내는 엄마의 청구서. 니 몸을 뱃속에 넣고 아홉 달이 넘도록 힘들었던 것, 공짜. 그리고 제대로 나오지도 않아서 병원에 가서 배 가른 것, 공짜. 초등학교 학생이 되도록 먹이고 재우고 입혀준 것, 공짜. 아파서 119불러서 앰뷸런스로 병원까지 날라다 준 것, 공짜. 그리고 마지막에 아들아, 엄마는 너한테 청구할게 없다. 너를 제일 사랑한단다.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같이 있는 애들이 전부다, 야~니네 엄마 정말 멋쟁이다. 근데 뭘 잘못했는지 집에 와서 그날 밤. 대판 두들겨 맞았습니다. 이 아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뭐든지 다 공짜라 그래놓고, 아들아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래놓고 왜 날 이렇게 패나? 생각했을 겁니다. 사랑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 엄마에게는 아들을 향한 기대와 계획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실망도 잘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모두 공짜로 이 아이에게 주었지만, 엄마가 이 아이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는데, 그 기대에 너무 어긋나는 삶을 살 때, 엄마는 마음 아프고 슬퍼져서 이 아이를 원래의 계획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때리기도 하고 야단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은 돈 주고 소생시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해서 소생시켜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영혼의 회복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기 위해 내민 손입니다. 그것은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 통로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해도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소생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두 값없이 거저주신 은혜가 분명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따라서 우리들이 살고 섬기고 믿음 생활 해나갈 때 은혜를 더 많이 부어주시고 예전에 알지 못했던 더 큰 사랑을 깨닫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점점 더 풍성한 삶을 살게끔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이 영혼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어제도 그렇고 오늘 아침에 이 열린 신문 1호부터 100까지 나온 것을 죽 보면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아직까지도 내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디론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보냄을 받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만 언제든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영혼에 소생함을 경험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합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며칠 동안 고생을 해서 이 책을 만든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인쇄소에 가서 이것을 맡겼는데, 도저히 이렇게 빨리 나올 수가 없는데, 인쇄소 사장 부인이 이것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실화입니다. 은혜를 받아서 교회의 지체한테 이것을 찾으러 갔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만나고 행복한 삶을 사는데, 우리 남편은 하나님을 모르니 어떻게 하면 좋냐고. 그러면서 위해서 기도 좀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적으로 만들어 주어서 이렇게 기가 막히게 싸게 나온 것입니다. 너무 예쁩니다. 빨리 가서 사십시오. 정말입니다.
근데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 역사는 정말 놀라운 감동과 감화를 우리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킬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뭐냐면 영혼의 소생함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깊이 정말 좌절하고 방황하다가 빛으로 나타나신 우리 주님을 만나고 인생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들어도 언제나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이 뭐냐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자격과는 상관없이 예전에는 죄 가운데 살았고,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무지해서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을 수 없었고 원인도 알지 못하는 고통 속에 시달리면서 영혼이 파리해져있을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 어두움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리고 그 속에서 깊은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신 이러한 모든 신앙의 간증들. 그게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신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런 회복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영혼의 침체 속에 있을 때는 얼마나 우울하고 슬픕니까? 이 세상의 쾌락이나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살면 잠시는 그것 때문에 영혼의 고통을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그 모두 아플 때 맞는 진통제 같은 것뿐입니다. 진통 효과가 떨어지고 나면 더 깊은 통증 때문에 견딜 수 없어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참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 분께로부터 오는 영혼의 참된 기쁨, 이것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축복 가운데 최고의 축복은 우리의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섭리의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지만, 이 영적인 축복은 영이신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정말 새롭게 그렇게 변화시켜 주시고 그래서 우리를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런 생활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갈망하면 하나님의 이런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걸 오래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인 겁니다. 일년 전에 그렇게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 중에서 지금도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간직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한 삼 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때에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하나님의 은혜, 내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그 하나님의 그 가슴 저미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오늘도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수시로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지만 소생된 영혼들이 금방 그 영혼의 활기를 잃어버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영혼의 침체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그 왜 그럴까? 타다만 마른 막대기와 같은 우리의 마음에 영혼에 그 부흥의 불을 한 번 지피는 것도 힘들지만, 그 지펴진 불을 계속 간직하면서 살아야지만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행복할 텐데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왜 그렇게 회복시키실까? 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그 어둠 속에서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소생의 은혜를 주셔서 다시 하나님 사랑하게 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게 하고 영혼의 생명력을 물 붓듯 부어주시는 이 은혜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그 계획이 무엇이냐 면 모든 것을 거저 주셨지만 계획이 있었는데, 그 계획이 뭐냐하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의라는 말이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그 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요구하는데 그 기준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라 고 하는 계명이 나오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서는 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그 금지의 계명도 함께 나옵니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서 살면 그 삶이 의로운 삶이 되고 그렇게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인간의 의라고 하는 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다. 맞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구원을 받으려고 할 때에는 다 쓸데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잘 살았다고 그렇게 뽐내어도 그걸 가지고 멸망 받을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구원을 받는데 사용하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무가치한 것이고 그런 점에 있어서는 의인도 없고 모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이제 그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삶으로 고백하며 사는 것이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죄인의 삶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는 의로운 성도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똑같이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여러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지금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정도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너무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래서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그 은혜를 부어주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예배드리기 위해서 나와도 아무런 하나님과의 만남도 경험하지 못하고 냉랭한 가슴으로 굳어진 가운데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드려도 깨달음이 없고,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시지 않는 같은 하늘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에도 있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어느 정도냐면 예수 믿은 다음에 의로운 길을 걸어가며 살아가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안아플 정도로 여기시고 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불의한 길을 걸어가고 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죄악된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너무 마음 아파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징계하시기도 하고 심판하시기도 하고 도저히 더 이상 이 사람을 여기에 땅에 남겨두었다가는 나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가 심히 실추되겠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의 목숨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똑같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회복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시려고 하는 의의길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의의 길은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길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그건 간단합니다. 그냥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막 사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자기마음대로 사는데 그게 모두 불의한 길이냐? 원래 이 의라고 하는 것은 판단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옳은 것은 의이고, 그 분의 마음에 기쁘지 않은 것은 불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면서 주님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교육을 받으면서 매일매일 걸어가는 그 길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로운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또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싶어 하시는지 또 무얼 만들고 싶어 하시는지 어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어떤 때 가슴 아파 하시는지 이런 것들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지 좋은 대로 걸어가면서 살면, 그 삶은 원천적으로 불의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리 교회 나오고 이래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깨닫고 또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의로운 길인지 하는 것을 알고, 또 알면 뭐합니까?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힘들을 기도와 은혜 생활 속에서 공급받을 때에 비로소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 그런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더 많이 자기를 보여주시고 더 많은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사경회를 통해서 또 무슨 기도회를 통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이렇게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를 간직하며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의의 길로 걸어가려고 하는 실제적인 삶의 순종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회복된 영혼들을 금방 또 다시 침체 속으로 데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데, 이렇게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고 그냥 시계바늘처럼 집에 돌아가고 그러면 안됩니다.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우리들이 은혜를 받아야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는지를 배워야 되는데 그것은 공부를 좀 많이 해야 됩니다. 그 새가족반에 왜 안들어가는 겁니까? 아니 헌가족이 다 돼서 이젠 누가 봐도 구 가족인데, 그 왜 새가족반에 들어가서 공부 안합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이제 일월 달부터 들어가는 분도 있겠지만 그러나 와가지고 이렇게 뒤에 앉아서 예배드리다가 축도하기 전에 슬그머니 빠져서 도망가고 그렇게 하면 천국에서 여러분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아니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버지가 나에게 어떻게 살라 그러실까? 못살 땐 못살더라도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이처럼 나를 놀라운 죄악 가운데서 구해주셨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안살 때 안살더라도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나중에는 가출을 할지라도 호적등본한 번 뒤져보고 싶은 마음 없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깨닫고 교육받으면서 의로운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의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아도 인격적인 승복을 해도 그 은혜를 간직하며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인격적으로 승복해본 적도 없고, 거칠고 그렇게 부랑아처럼 그렇게 아버지의 집에 마음을 주지 않고 그리고 제 멋대로 살려는 기질을 갖고 와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나 드리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의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겠고, 또 영혼이 회복된들, 그 소생된 은혜를 며칠이나 유지하며 살 수 있을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에 공을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 이조시대 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입니다. 성냥이 없던 시대이니까 그 불씨가 엄청 귀합니다. 그래서 대가집에서는 시집을 오면 제일먼저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불씨통입니다. 그 불씨를 꺼트리면 쫓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불씨를 저녁때 밥을 해서 다 한 다음에 그 불씨를 그 불씨통에 담아서 잘 보관했다가 그것을 그 다음날 아침에 꺼내서 쓰는 겁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물려줄 때 얘야, 이것도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만 증조할머니 때부터 생각이 나신다고 시어머니가 그랬는데 이걸 내가 너한테 물려준다. 언젠가 잡지에 보니까 오백 년 동안 그 불씨를 간직해온 집안이 서울에 아직까지도 있답니다. 할일이 없죠, 그죠? 그래서 그 부인이 하는 얘기가 자기까지는 이걸 어떻게 하는데 새로 들어올 며느리가 이 일을 할지 의문이다. 아마 지금 벌써 그 불씨가 꺼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날 은혜 달라 그러는데, 은혜주면 쓰레기통에다 쳐넣어버리고 또 은혜 달라고 그러고 또 은혜 달라고 그러고 그러면 안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의 불씨를 잘 간직해야 됩니다. 그 불씨를 여인네들이 어떻게 간직했습니까? 허공의 망태에다가 매달아놨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재를 많이 넣어서 그 속에 감추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아침까지 간단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 이 영혼의 놀라운 소생의 은혜를 의로운 삶이라고 하는 재속에 잘 묻어둘 때에 그 때에 우리의 영혼의 불씨를 보존할 수 있는 껍질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그러니까 어떻게 사는 게 의로운 삶이냐? 여러분들은 별로 모릅니다. 성경을 배워야 됩니다. 새가족반서부터, 새신자반서부터 차근차근이 배우고, 이제 우리 일월 달에 교리학교를 시작하는데 하도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세 반을 만들어서 인원을 한 65명 정도, 70명 정도 늘렸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 교리반에 들어가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 배우면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왜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그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살을 찢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을까?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 의로운 백성으로서 살기를 원하는 그 의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그러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합니다. 새가족반 들어가란 말입니다, 빨리. 연말이 오기 전에 회개하고 그리고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제가 교회의 일이 솔직히 너무 많아서 어떻게 뭐 움츠려 뛸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제가 집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저보고 어떤 교인이 하도 교회에서 담임 목사 코를 볼 수 없으니까 별명을 붙였는데, 학원 강사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왜? 와서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은혜는 주시지만 끝나고 나면 보따리 싸가지고 또 딴 데 가서 설교하고 딴 데 가서 집회하고 그러니까 섭섭한 마음에 그랬는지, 학원 강사처럼 강의를 잘한다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랬습니다. 그 때의 일입니다. 그 때도 충청도인가 어디에서 저를 불렀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학교에 이제 대학에 학생들이 한 4백여 명 모여 있었고, 거기에서 제가 아마 강연을 하게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차를 타고 갔는데, 시간을 넉넉하게 남겨놓고 갔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지체가 돼서 지방도를 들어서니까 시간이 벌써 촉박했습니다. 그래서 밟았습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한 10여년 젊었을 때니까 더 열렬했지않습니까? 그래서 운전도 더 열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쌩하고 달리는데 저기 보니까 경찰이 하나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속도를 줄이고 규정 속도로 잘 가는데, 차를 탁 세우더니, 하여튼 경찰이 인사성은 밝지않습니까? 경례를 착 하더니 면허증 좀 봅시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고 그랬더니, 속도위반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니 무슨 속도를 위반했냐? 이렇게 80km로 천천히 왔는데 왜 그러냐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위반을 안하셨는데 산너머에서 위반을 하셨다고 무전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둘이 짜고 하는 모양입니다. 탁 짜서 100km 어쩌고 통보가 왔답니다. 그래서 딱지를 끊으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내가 사실 대학의 선생인데, 이 여기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400여명이 모여서 내 강의를 기다린다. 그런데 이러저러해서 이렇게 돼서 늦을 수가 없어서 내가 막 달려가다 그랬는데, 좀 이해를 해달라. 그러니까 아 그러시냐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교수님. 싼 걸로 끊어드릴게요. 그래서 나는 뭐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탁 끊어 주길래, 받아서 햇빛가리개에다 꽂아놓고 가서 강연을 마치고 그리고 서울로 이제 올라왔습니다. 그 다음날, 제가 벌금 내는 건 참 잘 냅니다. 그래서 그걸 내러 은행엘 갔는데, 돈도 찾을 일도 있고 해서 같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려고 창구 앞에 가서 이렇게 펴보니까 너무 싼 겁니다. 지금부터 한 9년 전쯤 됐는데, 6천원인 겁니다. 그 때도 보통 위반하면 2만원쯤 됐거든요. 6천 원짜리가 어디 있어 6만 원이겠지. 그러고 보니까 그건 또 너무 비싼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틀림없이 6천원인겁니다. 납기 후에는 2주간인가 주는데, 납기 후에는 7200원을 내게 돼 있는 겁니다. 이상하다. 이렇게 싼 게...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걱정 마세요, 싼 걸로 끊어드릴게요 한 것이 생각난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이렇게 구겨진 것을 펴서 이렇게 보니까 그 범칙사실 그래놓고, 금연장소에서 담배 폈음. 그걸 내가 갖고 가서 냈으니까 망정이지 교회에 누구 직원이라도 시켰으면 아마 실족했을 겁니다. 이 목사님이 어디 가서 담배 피다가 경찰한테 걸려가지고. 세상에...어쩐지 옆에 가면 냄새가 좀 나더라. 그리고 끊는데 은행원이 이러고 날 한 번 쳐다보는 겁니다. 얼마나 창피한지 말입니다. 그리고 또 그 경찰도 웃깁니다. 그걸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까 금연장소에서 담배 폈음 이렇게 써야지만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흡연장소에서 담배 폈음. 그녀석이나 나나 똑같습니다. 아니, 흡연장소에서 담배 폈는데 왜 딱지를 뗍니까? 그 친구도 중학교나 나왔나 모르겠습니다. 그 꼬불꼬불한 글씨로 흡연장소에서 담배 폈음. 어쨌든 간에 그걸 들고 나오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뭐냐면, 아, 이게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이건 진짜 아닌 게 확실하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처음 은혜 받았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처음 은혜를 받고 특별히 결혼하고 나서 얼마 안됐을 때에 바로 그 이음새에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그 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말씀이 있었는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래서 그 성경구절을 장롱에도 붙이고 그 다음에 문에도 붙이고 책장에도 붙이고 가방에도 붙이고 그러고 다니면서 그 때 마음은 정말로 그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애지중지해서 나를 사랑해주시니까 나도 하나님을 애지중지 사랑하면서 살아야될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막살면 안되고 정말 완벽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온전한 삶을 살기를 힘써야 되겠다 그랬던 그 신앙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그랬습니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그 때는 교회가 작았으니까 운전해주는 사람도 없고 교회에 차도 없었을 때에 그 때에 이제 제 차로, 차가 다마스가 하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이제 제 차로 여전도사님하고 같이, 또 여전도사님이 면허가 없어가지고 제가 늘 모시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이제 심방을 가는데 죽 가는데, 그 유턴을 해야 되는데, 그 차가 꽉 막혀서 그리고 여기는 신호등이 들어와서 이렇게 그 이제 사람들이 저 멀리서 건너가니까 오는 차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턴을 이렇게 했습니다. 이게 해도 되나 어떻게 되나 그러다가 방해하는 게 없어서 유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분명히 안보였는데, 지하도에서 뛰어올라오는 겁니다. 왜 거기 숨어 있느냐 말입니다. 정정당당하게 하지 말입니다. 그렇게 비겁하게 말입니다. 필요할 땐 어디 가서 안보이고, 안와도 될 때는 나타나가지고 말입니다. 뛰어올라 와가지고 또 경례를 하는 겁니다. 하여튼 경찰이 경례하는 건 전 싫습니다. 경례를 하더니 면허증 좀 보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교통위반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봐라. 도로 교통법 1조에 보면 이 법은 교통소통을 원활하게 하기위한 법이라 그랬는데, 봐라. 내가 여기서 유턴하려고 이 차선에 서 있는데 이 차들이 유턴을 안하고 직진할 차들이 여기를 점령하지 않았냐. 저쪽에 불이 켜지니까 사람들이 건너가고 그러니까 내가 유턴을 해도 방해하는 차가 없어서 내가 하얀 줄은 아니지만 노란 줄이지만 발고 돌았는데 그게 잘못이냐. 한 번 다시 생각을 해봐라 그러니까. 그건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는 겁니다. 그럼 왜 저차들이 여기 이렇게 내가 돌아야될 이 차선에 직진하는 차들이 서 있냐 그러니까 그건 그 사람들 사정이고 돌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그러니까 저 차 다 나간 다음에 이 실선을 밟고 이렇게 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휴. 그 법이 어떻게 그러냐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라 그랬더니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할 수 없다. 해라 그랬더니 뭐라 그러냐면 똑같은 얘기를 하는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벌점 없고 싼 걸로 끊어드릴게요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지 마라. 너한테 그럴 권한이 어디 있냐. 법대로 해라. 그랬더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알았어요! 그러더니 막 긁더니 쫙 뜯더니 탁 던져주는 겁니다. 6만원, 벌점 10점. 그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넌 거기 서서, 뭐 이렇게 똑같이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내 마음 속으로, 그 내가 아는 교수님한 분이 캐나다 가서 낚시를 하다가 호숫가를 관리하는 순시원한테 붙잡혔답니다. 거기는 면허 없으면 낚시를 못합니다. 그래서 봐달라 그랬더니 그 사람 대답이 참 걸작입니다. 저는 적발하는 권한만 있구요. 봐주는 건 판사가 하시거든요. 거기 가서 사정하시면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딱지를 딱 끊어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똑같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넌 거기서 적발만 하면 되지, 니가 뭔데 2만원 끊어야될 걸 6천원에 해주고, 벌점도 뗐다 붙였다 맘대로 해주고 그러냐. 내가 언제 담배 폈어, 속도위반 했지. 그렇게 해가지고 끊냐. 그러면서 이제 속으로 그러면서 이제 어쨌든 6만 원짜리를 끊어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는 원칙을 딱 세웠습니다. 될 수 있으면 규정을 지킨다. 그러나 피치 못하게 법규를 위반했을 때에는 법대로 처벌을 받는다. 그러고 지금까지 법대로 처벌을 받으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 때 내가 조용히 깨달았던 게 그것입니다. 야~ 내가 이렇게 세속적인 사람으로 변했구나.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그렇게 해서 살면 그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이쪽으로 교회가 이사를 오면서 이사를 많이 왔습니다. 수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집사고 파는 취득세 문제입니다. 복덕방 영감님이 그러는 겁니다. 왜 바보같이 세금을 그렇게 다 내느냐. 가짜 계약서 쓰면 반만 내도 되는데 왜 그러냐 그러니까 그 지체가 그랬답니다. 저는 교인입니다. 그러니까 아니 너만 교인이냐. 교인들 다 그러는데. 전 열린교회 교인입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안하면 우리 목사님한테 혼납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들이 이 세상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이 역사 속에서 빛으로 충만했던 때 별로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체가 소금으로 가득했던 때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어두울 때가 훨씬 더 많았고, 그리고 썩는 냄새가 나는 적이 훨씬 더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금은 다 돌아가셨습니다만 옛날에 신학교에서 학장을 하시던 한상동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다른 사람들이야 다 뭐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를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는데 이 목사님은 뭐 그저 중학교나 마치셨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본과도 못 들어오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청강생이라고 해서 예과에 들어와서 신학공부를 하셨습니다. 근데 이제 졸업을 해야 되겠는데, 시험을 보는데 영어 시험입니다. 다른 시험이 나오면 그저 은혜로운 설교라도 한 편 쓰고 가면 설마 교수님이 낙제를 주겠습니까? 근데 이게 뭐 아무리 성령 충만하고 은혜 많이 받아도 I'm a boy.가 입력이 안됐는데 출력이 될 리가 있습니까? 그 때는 벌써 이 한상동 전도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으면서 그러고 틈틈이 시간을 내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있을 때니까 더더욱 어렵습니다. 시험지를 받아 놨는데 이게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씨라는 것 밖에 이름 석자 쓰고 나니까 답을 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주님만 부르는데, 주님이 니가 알아서 해라 그러시는 것 같이 아무 응답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 학우가 앉았는데 자꾸 옆으로 오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시험지를 자꾸 이쪽으로 이렇게 삐딱하게 앉아서 이렇게 시험지가 다 보이고 이렇게 쓰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 왜 이런 자세로 이러고 쓰나? 계속 보여주는 겁니다. 나중에 탁 보니까, 한상동 전도사가 그렇게 열심이 있는 사람인데, 개척하느라고 고달프고 근데 영어를 몰라서 주여 주여 하고 있으니까, 주님은 응답이 없으시지만 내가 보여 주마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상동 전도사가 딱 보니까 다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막 베꼈을 것 같죠? 그 자리에서 시험지를 엎어놓고 백지로 퇴장을 해서 뒷산에 올라가서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고 어떻게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아는 내 짝이 몰라서 시험지를 보여주면 그거 나 보고 쓰고 그래서 성적을 맞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비치는 내 신앙의 인격이 이정도인데 내가 어떻게 양떼를 돌보면서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했답니다. 시험지를 보여준 사람은 누군지 지금 기억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날 빵점 맞은 그 목사님이 후일 그 학교에 학장이 됐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원리입니다.
우리들은 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교회 안에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래서 은혜 많이 받은 성도들은 교회를 자주 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한 번 모이면 집에 안가려고 그러고. 그래서 막 등을 떠밀어야지만 헤어지고 말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사모하고 그럽니다. 왜? 아버지의 집이 너무 좋으니까. 그리고 은혜를 받고 나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님의 그 자비하신 사랑을 맛보아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쁩니까?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즐겁고 기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맛보고 행복해하고 그러는데 그걸 교회당 안에다만 가두어두면 안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셨을 때 우리는 늘 주님 옆에만 있고 싶죠? 그리고 그 말씀만 듣고 싶고 그래서 마치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봤던 제자들이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다 초막 셋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했던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옆에만 있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종류의 신앙생활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뭐냐면 은혜를 많이 주신 다음에는 그렇게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들을 당신 옆에만 두시려고 하는 게 아니라 세상으로 보내시는 겁니다.
제가 결혼하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그 때에 그렇게 부르기만 하면 눈물이 나던 찬송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을 저 슬픔이 많은 세상에 괴로운 세상에 하나님이 보내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거기는 행복한 세상이 아닙니다. 거기는 불의를 걷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인들은 친구라고 부르지만 의로운 길을 걷는 사람은 미워하는 핍박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소생된 영혼을 가지고 그런 삶의 한 복판에 선 사람, 그래서 거기에서 뜻없이 무릎을 꿇으며 이 세상 사람들 속에서 설탕처럼 녹아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어둡기 때문에 빛으로 살고 우리들이 맨날 잘 쓰는 말이 현실적으로,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목사님은 강단에서 설교만 하니까 세상을 알겠어? 여러분보다 더 많이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신문을 드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의로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부패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인지 수 많은 사람이 목이 터져라 예수의 사랑을 외쳐도 수만 명의 사람이 예수의 사랑을 외쳐도 한 사람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외친 그 예수의 사랑을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하여튼 신문을 보기도 싫습니다. 펼치면 들려오는 이야기가 너무 가슴 아프고 우울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신문을 볼 때마다 주님을 더 의지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게 뭡니까? 분명 예수 믿는 정치인들이고, 그 주일이면 교회 나가는 정치인들이 그 더러운 돈들 잔뜩 받아먹고 말입니다. 그걸 토해놓지도 않고 그러고 감옥에 가서도 말입니다. 무슨 엄청난 일을 한 것처럼 고개를 뻣뻣이 들고 그러고 돈 받아먹고 또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고 회개하는 이야기는 왜 신문에 나오는 겁니까? 도대체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슬픕니까? 그래서 마음속으로 신문 볼 때마다, 하나님 정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제가 바라는 바는 그렇습니다. 교회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주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진실한 시민들을 만드는 곳이 돼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 승복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그리고 어떤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이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서 영혼의 소생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일까 그걸 가르쳐주고 훈련하는 곳이 교회가 돼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놓으시고, 많은 회복의 은혜를 주신 이유는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빛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 하나가 빛으로 산다고 해서 다 캄캄한데 그게 되냐? 그리고 나 혼자 소금처럼 산다고 해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게 되냐? 그러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나는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빛들로 가득 찼던 적이 있습니까? 예수 믿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다수가 된 적이 있습니까? 이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에는 불의한 사람들이 다수였고 의로운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죄의 길을 걸어가고 그리고 악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무리지어 다녔고 그 길이 아니라고 외치며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일어나서 수 많은 배들이 풍랑을 만나 고통을 받을 때 침몰의 위험을 느낄 때 가장 빠른 길은 인근에 있는 안전한 포구로 피하는 것인데, 그 일을 위해서는 어두운 밤안개에 수 많은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먼 바다까지 한 눈에 모두 보이도록 대낮처럼 밝혀야지만 겨우 항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캄캄하고 먹구름이 가득하고 폭풍우가 몰아쳐도 불빛 하나만 선창가에서 빛나고 있으면 수 많은 배들이 그 폭우를 찾아서 피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음식물을 썩지 않게 보존하기 위해서 음식물을 소금덩이에다 묻어두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스푼의 소금이 한 통의 음식물을 썩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까지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하다고 야합하고 타협하고 그래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렇게 산다면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보여줄 수가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여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와 하십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고,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고 싶은 것은 열렬하게 두 손들고 주여 주여를 부르는 에배당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해놓으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목적대로 돌아가는 그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주님 의의심판 하시는 날
곧 가까이 임하는데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게 따라하면 안됩니다. 쉽습니다. 부정직하게 살고, 세상 사람도 잃지 않고 예수님도 잃지 않기 위해서 소금처럼 살기보다는 설탕처럼 사는 일이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원래 부패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가운데 한 분이 염전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안합니다만 옛날에 겨울에 김장하는 것이 일이었지 않습니까? 요즘은 뭐 많이 하는 집이 20포기 30포기 그러는데, 그 때는 뭐 반찬이 없으니까 김치하고 막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보통 두 접씩 그렇게 했습니다. 200포기씩, 200포기니까 반 자르면 400쪽이 되는 것이고, 네 개로 자르면 800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그걸 한 4월까지 그것만 먹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 큰 일이 뭐냐면 그 펌프 물을 틀어서 소금을 타는데, 이 소금이 잘 녹습니까? 안녹습니까? 이게 안녹습니다 잘. 이 굵은 소금 큰 게 잘 안녹습니다. 설탕은 좀 잘 녹아도 안녹고 또 물을 끓이면 설탕은 물을 끓이면 잘 녹는데 소금은 물을 끓여도 그 농도가 용해되는 정도에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염전하는 장로님이 그러는 겁니다. 햇빛이 한 창 잘 날 때면 일주일이면 그 소금밭에서 소금이 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가마에다 담습니다. 그러면 이제 염전근처에 배를 대놓고 소금을 싣는 답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어떻게 하다가, 후크로 넘기다가 잘 못 넘겨서 쑥 빠지면서 바닷물에 풍덩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말려가지고 따가운 발로 긁으면서 한 게 너무 아까워서 얼른 내려가서 건져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불과 한 이분밖에 안되는데 그냥 가마떼기만 올라온답니다. 그런데 그 분의 해석이 재미있습니다. 뭐냐면 우리 성도들은 지금 성도라고 부르지만 원래 하늘에서 내려온 성도들이 아니라 원래 이 세상에서 택하여서 온 성도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을 때에는 똘똘하게 성도 같은데 일단 세상으로 돌아가면 마치 소금이 바닷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맹물에는 안풀어져도 바닷물에 집어넣으면 금방 녹아 없어지듯이 우리가 성도라 그래도 한 번 세상으로 돌아가면 기가 막히게 세상 속에서 녹아버립니다. 그겁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근데 그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간다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너무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완전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소생된 영혼의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 바로 우리들만 받은 특별한 은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은혜를 주셨으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손해가 나더라도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을 하지 않고 그렇게 참 진리대로 살아서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정말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없지만 그러나 완전한 삶을 살기를 포기하는 것만큼 커다란 죄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인간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진리와 양심을 따라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아직까지 살아있구나. 그걸 느끼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돼야합니다. 힘들겠네. 물론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 때는 또 어떤 생각을 하냐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의로운 길을 걸어가려고 하니까 사랑받아야할 세상에서 오히려 핍박도 받고 고난도 받습니다. 그러면서 괴로울 때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왕처럼 대접받으셨습니까? 호의호식하셨습니까? 그러면서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우리처럼 사시면서 고난 당하셨겠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 정말 예수님이 죽어 가시면서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의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아무 힘이 없고 정말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거기서 깨닫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고 고난을 당할 때 주님 앞에 와서 하나님 나는 너무 약하오니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푹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뭘 주시냐면 예수님이 고난당했지만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도저히 이 세상을 이길 힘이 없는 것같이 엎드려졌던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을 주시는 겁니다. 맞아!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나의 의로운 손이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결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사람의 삶의 발자취가 하나님 보실 때에는 너무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더 많이 사랑해주십니다. 더 많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더 많은 영혼의 소생을 주십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소생된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下)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이 소생되는 축복을 주신 이유는 그렇게 소생된 영혼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놀랍게 소생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우리들이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힘들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모두 나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안주시고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천하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들로 여기시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방불했던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병들어서 아무 기력이 없었던 것과 같은 우리의 영혼에 새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들이 많지만 그 모든 축복 가운데 최상의 축복은 영적 축복입니다. 다른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축복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지만 영혼의 축복은 영이신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내려주시는 복이기 때문에 그 영혼의 축복을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풍부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크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계획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의의 길을 걸어가노라고 하면 항상 좋고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변화되었을 때에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일 수 있지만 세상이 죄로 가득 차고 완악한 죄인들이 세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마치 강하게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과 같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의 길을 걸어가면서 살려고 할 때에는 많은 박해도 받고 고난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박해와 고난을 받으면 힘들고 괴롭기만 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렇게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고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핍박을 당할 때에 아픕니다. 고통을 당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 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의 고난을 아는 지식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럴수록 주님이 당한 고난이 귀하면 귀할수록 그 당하신 고난 때문에 내가 받은 은혜가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고난에 관한 섭리를 깨닫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부활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 죽으심과 부활의 권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이런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는 고난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게 되는 이 회복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들이 영혼에 강력한 은혜를 유지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계획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계획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자기가 구원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의로운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일까?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때로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의로운 길을 걷게 하시고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도 의로운 길을 걸어가도록 그렇게 우리들을 강력하게 그렇게 주장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를 오늘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면면이 구약뿐만이 아닙니다. 신약성경 속에 면면이 흐르고 있는 이런 신앙에 대해서 우리들이 이해를 해야지만 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이 성경에 쓰여진 팔레스타인은 사실 서양문화권이 아니라 동양문화권입니다. 그래서 사실 어떻게 보면 그 이 동양권에 있는 문화의 사람들이 성경의 깊은 의미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 나오는 가족관계라든지 혹은 성경에 나오는 그 유대관계, 그 공동체 관계 같은 것들은 서양보다는 동양 사람들이 훨씬 더 이해가 깊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름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물어볼 때, 당신 아버님 이름이 뭐야 라고 물어보면 무식한 것이죠. 남의 아버지를 이야기할 때는 아버님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아들이 대답할 때 김아무개입니다 라고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 가지고는 노무현, 김영삼 그렇게 말을 해도, 씨자도 안붙입니다. 마음에 조금만 안들면 무현이가 이럽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 성함을 이야기할 때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성함은 무슨 자 무슨 자 무슨 자입니다. 그래서 여섯 글자로 대답을 합니다. 주민등록에 진짜 여섯 글자가 돼있냐 하면 아니고 그냥 세 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이어서 그러냐, 그 사람은 대통령은 자기 아버지는 통장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것과 상관이 없이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한없는 존중심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이고 그 아들이 진짜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이름이 모욕 받는 현실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아버지의 이름을 모욕하는 사람과 결판을 낼 겁니다. 이게 바로 이름신앙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름신앙은 이것보다 훨씬 더 심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뭐 이렇게 돌린다는 겁니까? 뭘 돌린다는 겁니까 도대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게 뭔 뜻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영광을 좀 거둬서 그래서 바구니에 담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자기 위에 이렇게 뿌리셔서 하나님이 영광스러워 지시는 분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생각입니다. 인간과 같은 너절한 죄인들이 긁어모은 영광이 얼마나 영광이 되겠으며, 그것을 그렇게 얻어가지고 뒤집어쓰심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스러워 지실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또 우리 흔히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아무 아무 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그런 표현 사용하지 않습니까? 뭘 가리는 겁니까 이게. 어떻게 가려집니까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은 그 영광을 인간이 영광을 보태거나 가리거나 그러실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실 뿐이고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해도, 마치 태양이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비치고 그리고 먹구름이 가득 끼어도 그 구름 너머에는 찬란한 태양이 단 한 시간도 빛을 잃어버리는 날이 없이 빛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지존하신 하나님이시고 영광이 가득하고 찬란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에 의해서 그 영광이 보태어지거나 덜어지거나 그럴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이 이야기입니다.
본체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영광스러운 분이셔서 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의해서 그렇게 영광이 감해지거나 더해지거나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럼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자.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신앙생활의 위험에 대해서 지적하는가 이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 자신과 관련돼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그 본체적인 영광은 우리가 그렇게 가릴 수 없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 무얼 두시냐하면 당신의 이름을 두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이름을 이 땅에 두셔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이름은 하나님 자신은 영광을 인간에게 더 받으실 수도 없고, 영광을 빼앗기실 수도 없는데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어떻게 사느냐, 특히 하나님과 관계를 직접적으로 맺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영광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더렵혀지거나 감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씰 때에 기도 하셨던 가장 첫 번째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다는 점에서는 인간들로부터 완전히 초월해있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이름은 이 땅에 두셨기 때문에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도 있고, 없수이 여김을 받으실 수도 있다 라는 가변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아야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원래 이 영광을 돌린다, 영광을 받는다 라고 하는 의미는 뭐냐면 인정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 인정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영어표현으로 내가 너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면 내가 너를 인정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 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잘 몰랐고 알아도 제대로 알지를 못했는데 어느 순간에 무슨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게 되자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무릎을 꿇어서 자신의 온 삶으로 인정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냥 찬송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찬송만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인정되는 게 아니라 부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이 찬양도 상당히 그 뭐라 그럴까 문화 속으로 침투해서 그래서 이 하나의 기교적이 되어가고 있는 면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대중가요도 1순위부터 10순위까지 나오지만 또 그 복음송, CCM도 이제, 현대 교회 음악도 이렇게 1순위부터 몇 위까지 나오고 그러면서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이 점점 전문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지만, 기교에 호소하는 이런 일들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예배자가 아닌 사람이 드리는 예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올리는 찬양,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 이런 모든 것들,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부 다 우스운 것들입니다. 인정한다고 하는 말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뭘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로부터 비추어 오는 그 영광의 빛 앞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의 온 삶과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서 인정하는 것,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지 않습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무엇인가 올바른 일을 하고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다가 우리의 그 모습을 보면서 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이 저 사람과 함께 하시는 구나.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믿는 사람만 돌릴 l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생명이 없는, 인간의 목숨이 없는 나무나 돌멩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우주의 세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 누구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바로 그 이름이 드높아지는 그곳에서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 이게 뭔데 이름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직접 거기에 계신 것도 아닌데, 이름을 두셨다면서, 그 이름을 가지고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고 영혼을 닮은 영적인 존재의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탁월하게 뛰어 났고,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의 성품과 지정의 모든 인격적인 요소들이 질서정연하고 가지런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온 우주세계와 삼라만상이 그들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찬란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따로 성경이 필요가 없었고, 하나님 만들어 놓으신 이 모든 세상에서 일반 은총과 특별한 은총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최대한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최고의 교통을 누렸으며,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살아계신 위대한 능력과 그 성품을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타락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인간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 성품들이 모두 상실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아름다운 빛을 발하던 자연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도 그 영광스러운 빛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찬란하게 빛나던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던 이 모든 우주의 피조물들도 빛을 잃어버리게 되고,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지만 그 빛을 인식할 수 있는 이 아담 안에 있던, 하와 안에 있던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상실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그 죄 가운데 태어난 후손들이 하나님을 인정해야 될 텐데 그게 아니라 또 다른 신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 이방의 종교들은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래서 해 달을 보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높여야 될 텐데 해 달 자체를 경배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짐승들을 보고 그것을 창조하신 경배해야 될 사람들이 짐승들을 경배하고 그리고 스스로 그 짐승의 자손이라고 생각을 하는 무지와 어리석음 가운데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죄가 들어온 다음에 사람들을 구원하셔야 될 텐데 그들을 구원하셔야 될 텐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여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 그들을 구원할 가능성이 사라진 겁니다. 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도 빛을 잃었고 그것을 보는 인간도 그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어떻게 해야 구원의 길이 있는지를 인간들이 이해하는 길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신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이 특이한 복을 주시고 그래서 그 영혼의 은혜를 가지고 의의 길을 걸어가고 그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경말씀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그런 삶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의 삶과 존재를 보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다 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구나. 그것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 나아가서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무릎을 꿇고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라 이겁니다.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모두 무질서하게 그렇게 사람들이 그 커다란 운동장에 모여서 무질서하게 웃고 떠들고 이러는데, 무슨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아닌데, 딱 한 백 명 정도가 줄을 맞춰서 군인처럼, 발을 맞춰서 착착착착 걸어서 움직인다면 여러분들은 처음에는 그 걸어가는 사람들을 볼 겁니다. 그렇지만 잠시 후에는 누가 이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을까 궁금해지지 않겠습니까? 앞에서 누가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이 혹시 지휘관인가 생각할 것이고, 그래서 발견할 수 없으면 줄을 맞춰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이 혹시 지휘관일까 그리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비유이긴 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다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전부 다 제멋대로 살아가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또 다른 거룩한 존재가 되어서 이 세상에 살아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처음에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하지만 나중에는 저 사람들을 저렇게 살아가게 만드는 궁극적인 그 주관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저렇게 방탕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던 사람을 저렇게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만든 장본인이 누구신가 그걸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나가서 열심히 전도합니까? 열린 교회 교인 수 늘리려고 전도를 합니까? 그러면 또 열심히 전도해서 다른 교회 교인 수 늘려주려고 전도를 하는 겁니까?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뭐냐?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을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계획을 따라 살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구원받은 삶을 살게 하려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지 않고는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지식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할 수도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 신앙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난과 시련가운데서 건져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위로와 새 힘을 얻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생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걸어가는 삶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탁월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는 것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고, 한 사람의 신앙의 불길이 식어버리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짓밟히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높은 지위를 누리고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또 남다른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기에는 그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가.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의 중요성을 측정하는 측정기입니다.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세상이 주목하고 또 높은 학식이나 많은 재산을 가진 것들을 이 세상 사람들은 주목을 하고 그런 것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을 VIP라고 합니다. Very Important Person이랍니다. 매우 중요한 사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VVIP라고 합니다. Very Very Important Person이라고 합니다. V자가 수십 개가 붙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이 자기를 본래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계획이 무엇일까 그대로 살아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저 황금의 면류관은 광채를 잃겠네
이 세상에서 제일 허무한 사람들이 임금들이었습니다.
최근에도 중국에서 왕의 고분들이 발견됐는데 말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왕 하나가 죽었다고 수백 명을 함께 넣어서 묻어버리는 겁니다. 왜? 왕이 다시 살아나면 왕이 직접 옷 입고 밥 해먹고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같이 살아나서 또 왕의 시중을 들어야 되니까. 왕이 타고 다닐 말도 예쁘게 만들어서, 수천 개를 만들어서 함께 묻고 그래서 역사에 보면 어떤 사람은 20년 동안을 자기 무덤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무덤의 높이만 200m라니까 미친 짓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VVIP라는 칭호를 받고 남이 못 누리는 지위와 명예를 누린다 할지라도 그가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존재한 참다운 가치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위해서 뭐라도 좀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는가 거기에 달린 겁니다. 그런 것 하나도 안하고 살다가 죽었다. 숲 속에서 짐승 한 마리가 펄펄 뛰다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도 바다 속에는 말입니다. 뭐가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마어마한 그 커다란 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고래 같은 것은 심지어 무슨 뭐 115톤씩 되는 고래가 있고, 심장 하나의 크기가 승용차만하고 핏줄이 얼마나 큰 지 어린 아이가 기어 다니면서 놀 수 있을 정도의 핏줄을 가진 그 어마어마한...한 번 고래가 소리를 내면 천 Km 바깥에서도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물 속에 살다가 한 번도 인간에게 발견 안되고 죽습니다. 오늘도 바다 속에서 120톤짜리 고래가 일곱 마리가 수명을 다해서 죽어서 그래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이겁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가치관을 분명히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장 중요한 본분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 많지 않고 높은 지위 없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정말 향기가 납니다. 그리고 거룩한 자존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그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갈 수록 교회 안에는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이 존재하게 되고 변화되지 않은 교인들이 많이 모이면 세상과 똑같은 가치관이 이 교회를 지배하고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가 교회 안에 와서 모든 사람들이 세상 밖에 있는 가치관과 똑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나아가서 세상의 자녀들처럼 살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강력하게 도전받고 또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건 잘 못된 것이다 이겁니다.
성경에 보면 이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그들의 최고의 가치를 자기의 행복에 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행복에 둔 것이 아니라 거룩에다가 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 잘 살 수 있겠느냐 그런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이 내게 주신 모든 물질과 권세 기회들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 있겠는가.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사업을 하고,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성실하게 봉사를 해서 좋은 지위를 갖고 그리고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재물을 증식시켜 갔다 이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 속에 어떤 열망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고 주님의 이름이 온전히 높아져야 되겠다 라고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살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한 때 블레셋과의 싸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스라엘의 남쪽에 있었던 이 민족이었었는데 이 족속은 아주 난폭하고 그리고 말을 잘 타는 민족이어서 수시로 북쪽으로 쳐올라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탈하고 괴롭혔습니다. 한 번은 이제 이들이 다시 쳐들어 왔고, 전쟁이 시작이 되었는데 아버지가 다윗을 보내면 형들에게 먹을 것도 갖다 주고 또 형들이 잘 있는지 가서 보고오라고 시켰습니다. 갔더니 창과 칼이 맞부딪히면서 굉음이 들리고 커다란 함성이 날 줄 알았던 전쟁터에 가보니 조용하고 그리고 양쪽의 군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도열해 서 있고 저쪽에서 키가 커다란 웬 장군 한 사람이 나와서 소리소리 치면서 고함을 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이 들어보니까 이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욕설과 더러운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군대인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습니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 뛰어나갔지만 그러나 장군들이 쓰는 그 모자와 투구 이런 것들이 그의 몸에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 집어던지고 그리고 마치 짐승을 치는 목동의 차림으로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그 승산도 없어 보이는 싸움에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온 그 거구의 장군 앞에 돌멩이 하나 들고 물매하나 들고 나아가서 한 번 붙어보겠다고 만든, 목숨을 걸게 만든 그 무모한 도전은 어디에서 비롯된 마음이었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어떻게 저 할례도 받지 못한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의 더러운 몸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그 군대를 모욕할 수 있느냐. 그가 저렇게 모욕하고 그렇게 욕을 하는 동안에, 그가 그렇게 욕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히브리서는 그것을 믿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도처에서 모욕을 받고 멸시를 받는 것을 보면서도 가슴아파할 줄 모르는 사람, 심지어는 자신도 그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에 기여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인생은 하나님 앞에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서 다윗이 뛰어 나갔습니다. 그 때 물매를 들고, 물매라고 하는 것은 가죽사이에 돌을 끼워서 돌리다가 놓으면 그 원심력에 의해서 돌멩이가 정확하게 튀어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팔레스타인 지방에 가면 그 물매를 가지고 논다고 합니다. 그런데 갔다 온 사람 이야기를 들으니까 얼마나 놀라운 지 올림픽이 있으면 그 아이들이 아마 금메달을 딸 것이라는 겁니다. 50m바깥에다가 담배 한 개피를 세워놓고 그걸 맞춘답니다. 그러니까 다윗도 그러한 물매를 던지는데 있어서 오랫동안 그 연습한 그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나아갈 때에는 자기가 그 물매 돌리는 기술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겁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그냥 믿습니다 그러면서 돈도 안벌고, 일도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그러고 시집갈 때가 됐는데 얼굴도 안가꾸고, 그건 믿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나아갈 때, 어차피 다윗이 이기는 게 아니라 누가 이기게 해주는 겁니까? (하나님)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부엌칼을 들고 나갔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이길 수 없었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이 가지고 있는 평소에 뛰어난 재능을 사용하셔서 승리를 얻게 하시는 겁니다. 정말 우리는 자기의 본 업무에 충실해야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공부해야 됩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인생을 잘 못사는 사람들이 이것을 뒤죽박죽 삽니다. 제가 신학교에 선생으로 있어봐서 압니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공부하라고 그러는데 하여튼 뺀돌 거리면서 공부 안합니다. 맨 날 기도원간다고 뛰어가고 말이지, 교회 봉사한다고 가서 맨 날 기타나 치고 엎드려서 있고 말이지 공부 안합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래도 졸업을 하고 어떻게 목사가 돼서 목회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제 목회를 해라 그러니까 그 때부터는 공부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고 말이지 교회는 병들게 내버려두고 가방 싸들고 말이지 영혼들 팽개치고 가고 말이지 심지어는 교회에 말이지 휴직하고 무슨 목회학 박사학인지 뭔지 받으러 간다고 가고 그게 뭡니까? 공부하라고 그럴 때 열심히 하지. 그 열심히 공부하라고 목회하라고 그럴 때는 목회 열심히 하고 그렇게 해야지,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고 말이 나왔으니까 이야기인데, 사업을 하려면 말이지 좀 제대로 하십시오. 돈도 못벌고 말입니다. 왜 그럽니까. 남보다 더 잘 생각하고 고민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해서, 누가 물어보면 ‘아이구, 저는 밥이나 먹고 살...’ 이게 이게 밥이나 먹고 사는 게 뭡니까. 그렇게 이기적인 게 어디 있습니까? 그 사업을 하는데 밥이나 먹고 살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까. 열심히 벌어서 딴 사람도 먹여 살려야지, 그럼 누가 이 세상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먹여 살리냐 이겁니다. 예? 이 세상을 누가 지킵니까? 독수리 5형제한테 맡길 순 없지 않습니까? (하하하) 꿈을 가져야지. ‘밥이나 먹고 살지,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면 되죠’, 풀칠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좀 큰 꿈을 가지고 공부 좀 해라. ‘아휴, 목사님 이 정도만 해도 졸업은 합니다’. 그 그렇게 후줄근하게 사냐 이겁니다. 열심히 해서. 하나님이 그걸 언제 사용하실지 아시냐는 겁니다.
다윗이 그 물매를 가지고 나가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막 던져서 퓽 하고 던졌더니, 성경엔 안나오지만 제 상상입니다. 투구를 만들 때에 예쁘게 만들려고 이렇게 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와서 맞는 겁니다. 아주 깊이 박혀서 뇌 속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칼 한 번 못써보고 죽은 겁니다. 그 다윗이 그 짐승을 쫓기 위해서 얼마나 그것을 연습을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다윗이 힘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용감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 그 양 떼를 지키면서 진짜 능력 있는 목자로서 양떼를 지켰단 말입니다. 그래서 양 떼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능력이 없는 사랑은 힘이 없습니다. 지켜줄 수 있어야합니다. 짐승들이, 이리가 와서 물어 가는데, ‘물지마, 물지마, 차라리 날 물어’ 소용이 없습니다. 능력이 동반되지 않은 사랑은 감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짐승들이 호랑이나 사자나 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 늑대 같은 것들이 와서 그 딴 집 양들은 마음대로 물어갔어도 이 다윗 양은 서로 물지 말자고 합의를 했을 것 같습니다. 걸리면 죽는다 이겁니다. 자유자재로 저 늑대 왼쪽 눈 그러고 던지면 그 눈알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다리 그러면 발목을 부러뜨려놓고 말입니다. 그게 오랫동안 연습했으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 거 하지도 않고 요새 게으름 배우고 있죠. 맨 날 퍼질러 잠이나 자고 늑대가 오면 ‘워이, 워이’ 그런 것만 했다면 그 골리앗한테 나아가서 잘하는 거라곤 그것밖에 없습니다. ‘워이, 워이’. 어떻게 됐겠냐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저의 짧은 생애를 돌아보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서 행한 것만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대충한 것은 얻는 것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사는 겁니다.
그런데 어쨌든 간에 다윗이 그렇게 그 물매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던져서 쓰러뜨렸습니다. 그 때 다윗의 마음에 불타고 있었던 것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야, 이거 기가 막힌 기회다. 내가 저 골리앗을 쓰러뜨리면 아마 백성들은 노래할거야.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영웅은 위기 때에 태어난다며. 내가 여기서 쓰러뜨리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음 대통령 선거 때에 나 찍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싸움판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그게 뭐냐면 내가 지금 살아서 여기에 있는데 내 눈에 보이고 내 귀 에 들린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그 현장에 내가 있다. 나는 도저히 그것을 지켜볼 수 없다. 그래서 골리앗과 싸운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딴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의 모욕 받는 이름을 위해서 싸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그 현실에서 가만히 있었던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인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 인생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아무 쓸모없는 더러운 죄인들을 죄악 가운데 구원하셔서 살려두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바로 이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게 하시기 위함.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많고 또 복음은 들었지만 진짜 인간의 참된 본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 제대로 된 사람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귀로만 들리는 복음을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많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해있지만 또 동시에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그들처럼 먹고 마시고 속고 속이고 그렇게 육신의 쾌락과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흉한 죄악가운데에 건져내시고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하셔서 주님의 영광과 그 은혜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알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주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그러한 일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그러한 구원의 하나님의 참 계획을 잃어버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그리고 인생의 목표 그 자체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고정되어 버린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이 아름다운 계획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았던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그리고 시대의 전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그런 뜨거운 사랑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며 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불순종과 죄 때문에, 모욕 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괴로워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모욕 받고 또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 모욕 받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이름, 그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그 곳에서 그들도 행복했고, 하나님의 이름이 없수이 여김을 받는 그 곳에서 그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주야로 눈물을 음식으로 삼으며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 하리이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주목하지 아니하고 비록 그 사람이 하찮은 일에 종사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기억해줄만한 좋은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기를 불사르도록 헌신해서라도 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찾으시는 겁니다. 이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님이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껏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20년을 좀 넘는 생애를 살았고, 어떤 사람은 40, 50, 60, 70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어느 연령 대에 있든지 간에 주님을 뵈올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 뵈었을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렸던 지위, 이 세상에 누렸던 재물, 이 세상에서 누렸던 육체의 자랑,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의미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의 가장 빛나는 자랑거리는 우리가 어느 위치에서 살았든지 간에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는가, 그것에 의해서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는 지위에 있었지만,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고, 그리고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매우 귀한 사람으로 보시고 우리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욕심을 내기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욕심을 내고, 또 그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본 받으려고 애쓰고 살아가는 삶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들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드높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는 그런 세상이 되는데 이바지하게 하시려고 지금도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의 침체된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를 불의한 길을 버려 순종함으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6.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시인이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이었고, 그리고 3절에서는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인은 4절에서 언급하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이실 수 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4절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시 말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깊은 어두움의 계곡을 지난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재앙을 만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한 지팡이와 한 막대기, 그것들이 나에게 위로가 되옵나이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사망의 혹은 깊은 어두움의 골짜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은 크게 다윗의 생애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섭리적이고 환경적인 골짜기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골짜기입니다. 섭리적이고 환경적인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예전에 왕이 되기 전에 기름부음을 받고 사울에게 핍박을 받으며 도망 다니던 때에 나타납니다. 꼭 그 때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에 많이 경험됐습니다. 다윗이 뭘 잘못한 것도 아니었고, 왕이 되려고 애를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악한 무리들에게 끊임없는 도전과 위협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환경적인 어려움 속에서 시인은 많은 고난을 겪었고 그리고 거기에는 실제적으로 눈만 뜨면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들의 위협이 있었고 그리고 시시각각 그 시련 속에서 약해지기 쉬운 마음과 영혼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그런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 때에도 이 시인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그 임마누엘의 은혜 때문에 그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쓰시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고통스러운 골짜기들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으로 하여금 배고픈 시절도 보내게 하시고, 가난한 세월도 보내게 하시고 그리고 외롭게 혼자 도망자로 다녀야하는 고독한 때도 허락하셔서 그래서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고 극한 상황 속에서도 지도자로서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뢰하는 방법들을 배워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후일에 다윗이 나라를 세울 때에 그 나라의 유력한 귀족들이나 문벌들과 손잡고 나를 세우지 않고 빚진 자 억울한 자, 병든 자, 이런 사람, 사회의 소외된 계층과 손잡고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나라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다윗의 생애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이 정말 이 그 성품적으로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때는 다윗이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되는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그런 과정을 겪어야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골짜기는 영혼의 골짜기입니다. 그 영혼의 골짜기는 바로 영적인 깊은 고통을 동반한 그러한 내면적인 골짜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지만 두 번의 뼈아픈 범죄를 하게 되는데, 한 번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인구를 조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의 인구조사는 싸움에 나갈 군인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조사였고,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이런 인구 조사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상 다른 나라와 같이 군인들 숫자나 말의 숫자를 의지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행정적으로는 인구조사가 문제가 없었지만,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않는 교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온역이 찾아오고 수 많은 백성들이 죽음의 시체로 변하게 됩니다.
이런 속에서도 잠시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죄로 말미암아서 커다란 영혼에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 간음을 은폐하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헷사람 우리아를 야비한 방법으로 죽여서 그 피를 자기의 손에 묻힌 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비참하게 이 영혼의 어두운 사망의 그늘 아래에 떨어지게 되었고 거기에서 다윗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처절한 단절감과 분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에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던, 하나님을 노래하던 아름다운 그 노래 소리는 다윗의 마음에서 그치게 되고 입은 천장에 붙어 버렸습니다. 언제든지 그의 손에 들리우면 아름다운 가락을 내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그의 수금은 현이 끊어졌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온 몸으로 찬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던 그의 육체는 정욕을 따라서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과의 일체의 교제가 끊어진 처절한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단절 속에서 경험했던 시인의 그 비통한 경험들이 참회시라고 불리워지는 일련의 시 속에 잘 묻어 나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참회시, 6편이나 혹은 51편에서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그 시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던 이 다윗의 영혼 속에 찾아온 커다란 사망의 골짜기는 이 다윗을 삼켜버리고도 남음직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주께서 자신에게서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성령을 거두시면 어떻게 된다고 하는 것을 전임자 사울의 생애의 말로를 보며 그는 뼈저리게 경험했을 텐데 바로 자기에게 부어주신 성령을 거두시고 자기의 전임자 사울처럼 미치광이가 되어서 일생을 마치는 그런 위험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범죄 했지만, 제발 성령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호소했고 그리고 구원의 기쁨을 자신에게 회복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처럼 매달리며 탄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경험 속에서 다윗은 영혼의 고통스러운 그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이 어떤 것들도 성도들의 영혼으로 하여금 이런 깊음 속으로 들어가도록 강요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런 영혼의 깊은 어두움은 대부분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 없는 처절한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하며 일생을 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오늘 육체가운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경험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영혼의 깊은 어두움을 가져오고 죽음과 방불한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한 때에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지루해서 죄를 택했지만 죄를 택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죄가 가져다준 즐거움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고통이 그 신자의 영혼 속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잃어버리고 그 말할 수 없는 친교의 달콤함을 상실해버린 이후에야 비로소 죄가 주는 기쁨과 하나님이 주는 기쁨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하나님이 주신 기쁨 속에 사는 축복이 크다 라고 하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들이 경험하는 바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부르짖어도,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할 수 없고, 말씀을 들어도 나를 사로잡는 말씀의 감화는 없고, 울부짖어도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을 것 같지 않은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와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사죄를 약속하셨지만 범죄한 양심의 가책과 율법의 참소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사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틀은 이미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데 적합해지기보다는 죄와 타협하고 죄의 낙을 즐기는데 익숙해지도록 변화돼 버렸고 그래서 우리는 손쉽게 그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린 고통 속에서 무릎으로 외로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힘든 길을 택하기 보다는 손쉽게 진통제처럼 또 다른 죄를 택해서 한 편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간절히 바라면서 또 한 편으로는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또 다시 죄를 먹고 마시는 그런 실패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러한 경험을 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습니다. 한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사람, 우리 주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청교도 존 오웬의 지적과 같이 아마 이 세상에서 특히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고,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다윗은 하나님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다윗 속에 계셨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밀월이 죄로 말미암아 끝났습니다. 그러고 이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도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참된 기쁨이 얼마나 크고 좋은 것인지를 그것을 누리고 있을 때에는 모릅니다. 이렇게 교회의 한 일원이 되어서 주일이면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고 그 안에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다지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고통 가운데서 넘치는 주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목자의 목양을 받고 그 안에서 성도다운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되고 그리고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러나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모르고 썩어질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유혹을 택하고 그리고 죄를 짓습니다. 그 때에 그 죄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줍니까? 존 오웬의 지적과 같이 신자가 죄를 짓는 그 순간, 바로 그 신자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얼굴 빛 앞에서 사는 주님의 이해를 피할 수 없는 삶이기 때문에 시인이 고백했듯이 내가 사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 주의 의로운 손이 나를 붙들리라 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눈 앞에 있는 삶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순간에 죄를 택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곧 침을 뱉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택할 때에 그 죄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기대를 주고 그것을 택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이 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때에 경험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커다란 기쁨을 우리에게 줄 것처럼 우리를 유혹하지만 막상 택하고 나면 우리의 손에는 바람을 잡는 것과 같아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수시로 하나님의 얼굴에 침 뱉고, 하나님보다는 죄를 택했습니다.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기 보다는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을 따라서 유혹이 이끄는 바를 선택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잠시 누릴 만족과 육체의 정욕을 위해서 죄를 선택했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아온 동안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던 그 놀라운 육체의 만족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아버지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형제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또 아내에게도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던 다윗이 첫 눈에 사로잡힌 사랑하는 여인, 밧세바를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그와 함께한 첫 번째 동침은 다윗의 마음 속에 거대한 환희를 안겨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끝난 직후부터 그 기쁨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다윗의 긴 세월동안 다윗의 마음 속에서 형성되었던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를 철저히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불 가운데로 지난 것 같은 치열한 고통을 통과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해야 했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면 뭘 하고 온갖 영광을 누리면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처절하도록 고통하며 그는 실로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냈습니다. 그 때에는 그랬습니다.
남들이 모두 희망차게 새해를 맞이하는 이 날에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전혀 희망도 없고, 2003년도에 죄로 허우적대던 실패들이 2004년을 다시 넘어오는 두려운 소리를 듣게 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범죄 하지 않고 매순간 죄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울한 상황이 있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말씀이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그런 고통스러운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했습니다. 그 때는 자기는 소망이 없는 것 같았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끊어진 것 같았으나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고통하던 때를 회상해보니까 그 때에도 자기를 홀로 버려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맘먹은 대로 수시로 버리고 그리고 수시로 하나님을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 택한 우리들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그 때에는 죄 때문에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속에서 살아가던 그 때에는 결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다윗은 그 죄 속에서 차라리 죽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을, 우리들에게 죄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동시에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자녀들이 고아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죄와 하나님과의 친교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인생을 살면서 섭리 속에서 자기의 죄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고난 앞에 얼마나 담대했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러고도 다윗의 집안에는 칼이 그치지 않았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다윗의 생애의 후기에 계속되었습니다. 모두 자기가 뿌린 씨앗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하나님과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이제 섭리 속에서 그 많은 고난의 골짜기들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런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이 노년의 시인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오. 왜입니까? 어째서 다윗이 그렇게 인생 말년에 다가오는 처절한 사망의 골짜기 같은 시련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기르리라
정말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기르리라.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 우리가 오늘 목자 되신 주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마음대로 불순종하며 살다가 오늘 회개하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품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우리를 괴롭게 했던 우리 주위의 여건들이 단숨에 변할 수도 있겠지만 변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십시오. 주위의 여건이 변하지 않았어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새사람이 되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한다 라는 책을 제가 95년도인가 처음 책을 썼습니다. 그 땐 정말 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책을 쓰고 저 스스로도 잘 안팔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설교자가 몇 명이나 되겠으며 또 그 사람들이 그걸 몇 사람이나 사 볼까. 일 년에 한 이천 권만 나가도 잘 나가는 거지 그러고 찍었는데, 그러고 책을 갖다 주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말입니다 책이, 한 달에 한 판씩, 3천부씩 찍히는 겁니다. 어머어마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팔려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 시중에서 목회자들이 만나면 설교자는 불꽃처럼 읽었느냐 라는 이야기가 화제가 될 정도로 그렇게 읽혀나갔고, 연말에 또 성도들이 목사님에게 그것을 선물한다고 우루루 사가서 더 많이 팔렸습니다. 그 책을 읽었던 어느 독자의 이야기입니다. 전도사님인가 강도사님인가 그런데, 이제 자동차를 타고 자기하고 자기 부인하고 아직 학교에 안들어간 일곱 살 난 아들놈이 있는데, 머리가 총명해서 한글을 다 깨쳤답니다. 가는데 갑자기 조용히 있다가 뜬금없이 그러더라는 겁니다. “아빠, 아빠 설교자 맞아?”그런데 이제 교회에서 목회를 하니까 당연히 “그럼, 아빠 설교자지.”이 놈이 물어보는 겁니다. “그럼, 아빠 불꽃처럼 타올라?”그러니까 아빠 방에 있었던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한다 그 책 표지를 본 겁니다. 그러고 이 애가 묻는 겁니다. 설교자는 마침 그렇게 대답을 했는데, 아, 그 아이가 일곱 살짜리가 ‘그럼 아빠 불꽃처럼 타올라’그러니까는 이 양반이 참 대답을 하기가 난감하더라는 겁니다. ‘그래 타오른다’하기에는 너무 자기가 초라하고, “그래, 나는 참 불꽃처럼 타오르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옆에서 계속 물 붓는 단다.’그러니까, “아빠, 아빠 왜, 누가 아빠한테 물 부어, 타오르지도 못하게.”, “너희 엄마가 맨날 바가지 긁고 물 뭇는단다.” 그 아이가 엄마를 탁 붙들더니, “엄마! 엄마!”, “왜”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아빠한테 물 붓지 말고 타오르게 내버려둬. 아빠는 설교자잖아.”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아도 환경이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그 변하지 않는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전에는 없던 능력을 부어주시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평탄할 때 신앙을 잘 지키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도 장시간동안. 잠깐은 그랬지만, 장시간동안. 인간이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때에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결단코 제 인생을 평탄한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폭풍과 시련이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시되, 그 폭풍과 시련 속에서 내 인생에 선장되신 주님을 곧게 붙들면서 동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가장 행복하고 감화가 있던 때에는 평탄하던 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고난이 겹치고 환란이 줄지어 와도, 거기서 주님과 함께 하던 때, 폭풍과 흑암을 지나면서도 주님이 임마누엘의 은총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던 때, 그 때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 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난해도 행복하던 때가 있었고, 부요해도 불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진 재물 없고 높은 지위 없고, 심지어 우리의 몸조차도 병들었을 때였지만 행복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던 때에 우리에게 없었던 그것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재산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장 큰 소유가 무엇입니까? 폭풍이 줄이어 오고, 시련의 파도가 연달아 와도 그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우리의 가장 큰 재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도다.
예수 믿고 난 후에 푸른 초장만 거닐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 아이로 이 세상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위대한 전사들로 부르셨습니다. 성도의 일생은 이런 영적 전투의 일생이기 때문에 그런 전투 속에서 살아남는 강인한 용사로 우리를 기르시기 위해서 때로는 섭리와 환경 속에서 고통스러운 골짜기를 통과하게도 하시고 죄로 말미암아 영혼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하며 죄의 허무함을 깨닫게도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나누는 친교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도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겁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언제까지 바닷가에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물장난이나 하고 한가롭게 연못 위에서 보트나 타는 유유자적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이 불의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련을 너끈히 이기는 강인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기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훈련시키시며 폭풍 속을 통과하게도 하시고 시련의 바다 한 복판을 건너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최고의 재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폭풍과 같은 어려운 인생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습니까? 불빛조차 없는 풍랑 이는 바다에서 어두운 밤중에 우리들이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수 있게 하는 이 진정한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진정한 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로부터 옵니다. 은혜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그 말씀의 감화아래에서 날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온전한 신자가 되어갈 수 있다는 것, 돌같이 굳었던 가슴 속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지 않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나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믿어지는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왜 그러셨을까? 무엇 때문에 나같이 이 쓰레기와 같고 더러운 벌레와도 같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이 예수님의 구원 사건이 내게는 믿어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얼마나 소중합니까? 다윗처럼 한 나라의 제왕은 아니고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가진 사람 아니라도 여러분들이 교회 한 모퉁이에서 참된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의 불의한 물결과 싸우며 세상 한 구석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살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주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만약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이 부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언제나 평화하고 주님의 마음의 고통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내 영혼의 아픔이 주님의 마음에 통증이 되는 그래서 주님과 완전한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이 진실하고 거룩한 삶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이라면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로부터 받고 싶어 하는 최고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얻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셔야 됩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인생의 외로운 골짜기에서도 주님이 내 인생의 전부이며 내 소망의 모두임을 고백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붙드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이 그렇게 함께 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지팡이는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그런 지팡이가 아니라, 아주 큽니다. 사람 키보다 크고 그리고 이 손잡이가 이렇게 휘어있는 지팡이입니다. 이것은 목자가 길을 걸어가면서 사용하는 지팡이이기도 하지만, 양들이 다른 길로 걸어갈 때에 그 긴 지팡이를 내밀어서 목에 걸어서 그 양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데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은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타락의 빌미가 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마음을 찌르는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어긋난 길로 가면 하나님이 단 칼에 목을 베어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마 이 세상에는 목 잘린 시체와 떨어진 목이 즐비할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릇된 길로 갈 때에 한 차례에 즉시 때리셔서 정신 차리고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오래참고 기다리시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스스로 인격적으로 감화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불순종하며 사는 가운데에 맛보는 행복보다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위해서 맛보는 고통이 훨씬 값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인격적이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은, 마음대로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억지로 하는 신앙은 잠깐은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신앙의 힘이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오늘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도 정말 이 설교가 새해를 시작하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그리고 내가 너무나 많은 세월동안 내 뜻대로 방황하면서 제 멋대로 살면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오고 그러다 괴로워지면 와서 한 번 하나님 찾고, 또 하나님 은혜 베푸시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하는 삶이었구나. 정말 이제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주님의 인격적인 부르심에 타락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되겠구나. 이렇게 회개하고 하나님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힘이 없는데 날 도와주십시오. 이게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갈 때까지 한 번 가본다. 그건 노예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그릇된 길로 가는 여러분들을 한 번에 두들겨 패서 요절을 내실 수도 있지만, 다시는 그런 짓 못하도록 엄청난 충격을 주어서 벌벌 떨게 만드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노예와 같이 당신의 집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으시는 겁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6년 만에 다시 내발로 걸어서 교회를 찾았을 때, 가을이었습니다. 좀 쌀쌀한 가을이었고, 예배당에서 한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덜거덕거리는 풍금 소리에 맞춰서 성도들이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처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향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날 전도한 사람이 없었지만 여기가 내 아버지의 집이구나. 세상이 내로라 하는 한다하는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을 편력하면서 느낄 수 없었던 형언할 수 없는 평안함.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지팡이를 가지고 여러분들을 그릇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인내와 사랑으로 인격적으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지팡이를 여러분의 목에 걸어서 불순종한 여러분의 목을 분지르고 숙이지 않는 목을 꺾는 대신에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게 하심으로 결국은 그 완악한 마음을 스스로 깨트려 무릎을 꿇게 하시기 위해서 오랜 동안을 참으시며 오랜 동안을 인내하시면서 여러분들을 설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설복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까지 주님을 기다리게 하시렵니까.
오늘 여기에 나오는 막대기는 정반대의 용도로 사용됩니다. 끝이 뾰족한 흉기입니다. 지팡이는 양을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막대기는 양을 해치는 맹수의 무리를 내어 쫓고 그들을 찔러서 때려죽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는 지팡이와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이 모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실 막대기를 함께 가지시고 여러분의 인생길을 인도해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싸움을 포기할 때에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측량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여러분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원수들을 공격하시고 무찌르시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 번 이제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 하지 말고, 인격적인 신앙생활 한 번 해봅시다. 정말. 주님을 떠날 수 없다면, 주님을 왜 믿어야하는지 배우고, 이제껏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다면 왜 내가 그 사랑을 몰랐고, 주님이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혀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단지 여러분들을 죄에서 용서만 받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위해서 불의한 자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구속을 통해 회복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그 뜻대로 사는 백성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만 가지고는 만족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도 끊임없이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그래서 생명의 길이 있고 하나님과 축복을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길이 있고, 주님과의 말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교제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롤 어둠 속에 숨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칙칙한 삶을 보시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에 건져내게 하신 것은 우리를 빛 가운데에 들어가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tm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어두움 가운데에 불러내셨는데 구속의 목적과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마귀에게 짓밟히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아파하시겠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에게는 남다른 아픔,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고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아무리 아픈들, 주님의 마음보다 아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시 간에도 여러분들이 이러한 자리에서부터 떠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하며 주님이 보시기에 말할 수 없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목자 되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노래하며 승리하며 걸어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7. 밥상 앞에서 만나는 하나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시23:5上)
노래에도 보면 절정이 있고 그리고 영화에도 보면 크라이막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가장 많이 감동을 받고 그리고 우리들이 그 영화나 음악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도 크라이막스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5절입니다. 1절이 총론적인 고백이고,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 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주님을 목자로 고백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한데, 5절은 더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래서 우리 주님을 목자로 고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시인이 뭐라고 하고 있냐면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여기에 이제 시인이 가슴 벅차게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있는 이유가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 것이었고, 두 번째는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신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앞에 것 하나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도 오랫동안 이 시편 23편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찬송가로 많이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상이라고 하는 것을 그 때까지만 해도 졸업식 때에 1등, 2등 그러면서 주는 그 상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이 다윗에게 어떤 큰 상을 주셨고, 그래서 그 상 때문에 아마 뽐 낼 수 있었던 그 경험을 적었나보다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고 히브리말로 ‘슐칸’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슐칸’은 영어에서 table로 번역이 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table은 dining table, 혹은 eating table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식탁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식사할 때 옆으로 좀 비스듬히 기대어서 나즈막한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식탁이 바로 ‘슐칸’이고 그것을 여기에서 상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 설명을 듣고 나면 굉장히 썰렁해집니다. 왜냐하면 아니, 상을 베푸셔서 감격했다하면 그 이해는 가지 않습니까. 특히 상을 여태까지 초등학교때부터 한 번도 못받아보신 분들은 그런 분들은 그 상하나 받으면 정말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식탁을 받았는데 그렇게 가슴이 터질 듯이 감격을 하느냐.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성경에 나오는 이 식사와 신앙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어야지만 충분한 이해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이 팔레스타인, 성경에 쓰여진 곳은 사실 서양이 아니라 동양 문화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서양하고 보다는 동양하고 통하는 사고가 굉장히 많습니다. 꼭 획일적으로 나눌 순 없지만, 서구를 지배한 문명과 정신사는 헬레니즘입니다. 그 그리스를 중심으로한 헬레니즘이고, 동양은 오히려 헤브라이즘에 의해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서구는 헬레니즘만 영향을 받고, 동양은 헤브라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속에 함께 헤브라이즘이 묻어가면서 그러면서 이게 서구의 합리적인 사상과 함께 구라파쪽으로 이렇게 전달됐고 그렇게 해서 또 우리도 서구의 영향을 받고 동양의 본질적인 문화를 동시에 영향받으면서 살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상당히 유사한게 많다 이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양반이 얼어 죽어도 뭘 안한다구요? 곁불을 쬐지 않는다. 그 곁불이라는게 뭐냐면 벼의 겨로 땐 불입니다. 열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양반은 뭘 해도 제대로 누린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 말고도 또 있습니다. 뭐냐면 양반이 상민과 구별되는데, 그런데 구별될 수 없이 함께 같이 생활해야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잠은 같이 잘 수 있습니다. 세불여이해서 그래서 주막 같은 데서 자게 될 때에 양반이 상민과 함께 잠은 잘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는 안됩니까? 밥은 같이 먹는 법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큰, 그래도 한 이십여 명 되고 어느 정도 가세가 있는 양반집의 가풍이 있는 곳에서 자라신 분들은 지금 하는 설명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실 겁니다. 그 한 가족이 많으면 이십 명도 넘지 않습니까? 대가족 사회니까. 같이 밥을 먹을만한 장소가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옛날에 또 방은 얼마나 크게 만들었습니까? 아이들이 뛰어다녀도, 운동장만하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렇게 큰 방도 있고, 돈이 있으니까 상을 사서 주욱 구내식당처럼 붙여놓으면 한 이십 명 앉아서 밥 먹는 건 일도 아닌데 절대로 그렇게 식사를 안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면, 안방에 상이 차려집니다. 상도 벌써 고급상이고, 올라가는 반찬도 다릅니다. 거기엔 누가 계시냐면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정도. 우리 어머니도 거긴 못 올라갑니다. 그렇게 식사를 하시고 혹시 아주 어린 손자는 거기에 뭣도 모르고 가서 끼어 앉아서 귀여움을 받으면서 할아버지가 떠넣어주는 몇 숟갈의 밥을 얻어먹고 생선이라도 가시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근데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안방에 그렇게 차리고 그 다음에 이제 건넌방에 차려집니다. 거기엔 이제 우리 엄마, 그 다음에 나, 우리 집사람도 거긴 못 갑니다. 그리고 삼촌 등등 이렇게 앉아서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마루 쯤 내려가면 거기엔 우리 집사람, 그 다음에 삼촌과 같은 레벨이긴 하지만 그러나 고모. 왜? 여자니까. 그렇게 해서 또 마루에서 먹고. 그 다음에 마당에서 머슴이나 품꾼들이 밥을 먹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차려지고 그 식탁마다 반찬도 차이가 납니다. 품꾼을 주거나 아니면 민며느리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냥 누룽밥에다 먹는 겁니다. 누룽지에다가. 그런데 그러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거기에 올라가시고, 우리 집사람은 건넌방에서 먹고 나는 안방으로 승진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같이 식탁을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그 어른들 상을 그렇게 아이들하고 같이 차려서 먹는게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같이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이 어른들은 다르다. 이런 게 나눠져 있는 겁니다. 더군다나 품꾼이나 머슴하고 같이 밥을 먹는 법은 없다 이겁니다. 이게 엄격하게 지켜져 내려온 겁니다.
제가 대학에 있을 때 선교역사를 전공하신 선생님인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은 언어가 많이 글자로 만들어져서 언어를 연구하는데 많은 발전을 보게 됐는데 한 백 년 전만 하더라도 말은 있는데 글은 없는 민족들이 많았습니다. 그럴 경우엔 선교를 가려고 해도 그 언어를 미리 배우고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아갖고 와가지고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면 그냥 무조건 가는 겁니다. 가서 손짓발짓하면서 body language로 의사소통을 하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는 겁니다. 5년 내지 6년정도 살면 말을 익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글자를 만들어서 성경을 번역해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까지 하는데 빨라도 10년이상, 15년이상, 길면 25년까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제 선교사가 갑니다. 그래서 중국의 어느 소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이제 코도 크고 얼굴도 하얀 사람이 들어오니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제 손짓발짓하면서 자기네가 멀리서 왔는데 이 예수님을 전하고 싶고 우리는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당신들하고 같이 살고 싶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의사소통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회의가 열리는 겁니다. 실제적인 마을의 권한이 촌장들에게 있으니까, 수염이 긴 할아버지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회당에 모여서 하루종일 토론을 하고 그리고 한 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람들이 아주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이 선교사들에게 걸어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은 안통하지만 뭔가 일이 잘 됐구나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손짓발짓하면서 여기서 같이 살면서 당신들이 예수님도 전하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생활하자. 합의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는 필연적으로 어디로 가느냐면 식당으로 가는 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마을회관 같은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막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고 저쪽에서 불을 떼고 음식을 하고 막 이렇게 된단말입니다. 아 그런데 이제 식탁이 차려졌는데 이 도대체 서양에서는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메뉴가 나오는 겁니다.
지금은 하도 여러 번 가서 별로 충격을 안 받는데 처음 중국 갔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게 뭐냐면 식당이었습니다. 제가 중국음식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갔는데 그 음식점이 아니라 동물원인 겁니다. 음식점은 항상 이층에 있고, 일층은 동물원입니다. 생선 수족관부터 시작해서, 그런 건 사실 우리 한국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건 괜찮은데 좀 더 지나가면 별게 다 있습니다. 거북이, 자라, 뱀, 하얀뱀, 빨간뱀, 고양이, 고슴도치까지 있습니다. 그게 다 써붙여져 있습니다. 한 근에 얼마 이렇게. 원숭이도 있고, 쥐도 있습니다. 침을 삼킵니까? 그 사람들끼리 먹게 두십시오. 두 번이나 삼킵니까? 아니 그런 짐승들이 말입니다, 어떤 것은 생전 보지도 못한 도마뱀같이 생긴 이런 것, 그런 게 죽 동물원처럼 있습니다. 그리고 써붙여 놨습니다. 한 근에 얼마 이렇게 써붙여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고양이 한 마리에서 한 근에 만원 그러면 고양이를 이렇게 달아봅니다. 이게 다섯 근짜리다 그러면 오만 원 내면 요리하는 비용까지 다 포함되는 겁니다. 그 속에. 그런 정도가 아니라, 오소리 같은 것도 있고 하여튼 보도듣도 못한 게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속설이 뭐냐면 날아다니는 짐승 중에서는 비행기 빼놓고 다 먹고, 물 속에 있는 고기들 가운데는 잠수함 빼놓고 다먹는 답니다. 그러니까 먹지 말아라 하는 것 빼놓고는 다 먹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한테 너무 충격적일지 모르지만 중국에 고서에 들어가 보면 몇 세기쯤 됩니까? 세기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상당히 오래전입니다. 보며는 인육을 요리한 법이 죽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인육이 부위별로 다 이름이 붙어 있고, 그리고 나이별로 고기 이름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조리사들이 제일 좋아하는 인육이 삼사 세 정도된. 그러니까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먹지 않고는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하느냐는 겁니다. 허기는 그렇게 그 광범위한 것들을 먹거리로 지정을 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부지하고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겠죠. 그것을 도덕성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고. 하나의 문화겠죠. 그렇게 해준 겁니다. 지금도 만주쪽에 가면 말입니다. 결혼식 때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게, 이 한국으로 말하자면 국수 같은 것이겠습니다. 결혼식때 국수가 꼭 나오지 않습니까. 이게 나오는 게 뭐냐면 뱀국입니다. 뱀국을 어떻게 끓이느냐하면 커다란 가마솥에다가 장작을 땝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잘한 뱀이 아니라 굵은 큰 뱀을 이렇게 푹푹 동태 끊듯이 끊습니다. 그리고 집어넣고 무하고 넣고 푹 끓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답니다. 먹어보진 않았습니다. 그런 눈빛으로 날 보진 마십시오. 그게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답니다. 우리는 과년한 처녀보고 ‘야, 너 어떻게, 내년엔 국수 좀 먹냐?’ 이렇게 물어보지만 거기는 ‘야, 저 다 큰게. 뱀국을 언제 먹을래나.’ 우리 교회도 지금 뱀국 먹을 사람들이 많아서 기도 제목입니다. 올해는 좀 기도를 좀 해주십시오. 그래서 올해는 좀 시집 좀 가게. 그 참 큰일이지 않습니까. 얼른 가야지, 무슨 독신에 소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시집가게 해달라고 기도 좀 해주십시오. 그런데 또 아무데나 가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 갈 수 있게끔 기도 좀 해주십시오. 당사자들 아멘 해보십시오. (아멘) 아니 왜 할머니가 아멘 하십니까? (폭소)
이래서 어쨌든 그렇게 식사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식사를 하는데 그 음식이 나왔는데, 이게 뭐 살아있는 구더기, 무슨 그런 거, 그렇지 않으면 뭐 그 뱀요리 뭐 이런 거. 이게 서양 사람들로서는 상상해보지도 못한 메뉴인 겁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못 먹는 겁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차갑게 식으면서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끌고 가는 겁니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죽는 순간에도 그 사람은 자기가 왜 죽는지 잘 모르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문화의 차이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식사를 제공한 자체는 뭐냐면 이제 너희가 여기 와서 살겠다하니까 그러니까 그럼 우리가 한 가족이 되는 거다 그러고 형제됨, brotherhood를 보여주는, 형제됨의 맹약입니다 이것이. 맹세라는 겁니다. 이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거절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하면 같이 살고는 싶은데 너희들 하고 죽어도 형제는 될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건 스파이입니다. 간첩인 겁니다. 그러니까 살려둘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고 그것은 엄청난 실례입니다.
그 불란서 사람 같은 경우는 말입니다. 요리에 초대를 받아서, 이제 그 집에 식사에 초대를 받아서 가면 하여튼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고 껌뻑 죽는 시늉을 해야지 그게 기본 예의입니다. 갔는데 뭐 이렇게 툭툭 밀어놓고 그러고 지나가는 말로 맛이 있다고는 할까 그냥 이렇게 하면 다시 그 인간관계가 깨질 정도로 그렇게 사이가 나빠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똑같이 이, 그 같이는 살고 싶은데 그 식탁은 안받겠다. 그 얘긴 뭐냐면 형제되지 않겠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이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이게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 여러분 잘 알고 있는 그 설렁탕이라고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원래 저기 제기동에 가면 거기에 선농단이라고 있었습니다. 비가 안오면 왕이 거기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는 겁니다. 기우제를 지낼 때 소를 잡습니다. 그리고는 큰 가마솥을 걸고 거기에다가 집어넣고 끓입니다. 결국 끓여서 기우제를 다 지낸 다음에 거기에 온 사람들을 국과 밥을 퍼주는 겁니다. 그게 선농탕입니다. 설렁탕의 유래입니다. 그 때에 한 솥에서 먹으면서 함께 즐거워하면서 함께 신들에게 비 주시기를 비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의 공동체 의식과 관계가 있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도 거의 같은 문화가 되풀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와서 생활할 때 절기가 되면 화목제의 경우에 그렇게 제사를 드리고 온 백성들이 함께 식탁을 나누면서 즐거워하면서 우리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너희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맨 날 그 죄인들하고 같이 밥을 먹느냐? 왜 그것이 비난의 이유가 되냐면 너희 선생님은 그렇게 죄인들하고 함께 밥을 먹는 것을 보니까 죄인이구나. 한통속이구나. 그렇게 본 겁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는 법이 없는데 그렇게 죄인들하고 밥을 먹는구나. 그 한통속이라는 얘기 아니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것을 해석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함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노라. 그게 동문서답 같지만 무슨 뜻이냐면 나는 이들에게 와서, 이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섬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그것의 의미는 나는 이들의 형제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굉장히 놀라운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식사와 신앙입니다. 식사와 신앙이라 이겁니다.
이것이 조금 전에 본 영상물이 그게 바로 두 개의 모닥불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모닥불은 예수님 부인할 때 가야바의 뜰에 피웠던 그 모닥불이고, 하나는 예수님이 오셔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주신 그 갈릴리 바다에 피운 새벽의 모닥불이었지 않습니까? 두 번째 것은 예수님이 직접 피우신 것이고 앞에 것은 사람들이 피워놓았는데 두 번째 것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모닥불이었고, 앞에 것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피워놓은 모닥불이었지 않습니까? 근데 그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비난을 받으셨는데 그 비난이 오히려 예수님에게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친히 오셔서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눈 사실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들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그 죄인들에게 오셔서 죄인들에게 당신의 구원을 보이시고 싶어 했는지 그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게 뭐 밤새도록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그 나누신 마지막 작별이 뭐였습니까?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때는 성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식사였습니다. 그래서 포도주와 그 다음에 빵을 가지고 함께 나누는 그 식탁의 자리를 이용해서 내 몸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이 떡은 내 몸이다. 그리고 내 피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다. 그것을 설명을 하신 것이지 원래 식사 자리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예수님이 항상 제자들과 한 가족이고, 한 형제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회화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많지만 마지막 하나만 더 하면 계시록 3장에 가면, 라오디기아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덥든지 차든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토해 내치리라. 그러시면서 마지막에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는 내게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기아 교회는 영적으로 깊이 침체되어 있어서 그들의 모든 영적 생활이나 삶에 있어서 예수님이 실제적으로는 그 교회의 주인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서 예수님이 떠나가신 것으로 묘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문은 잠겨있고 그래서 예수님이 두드리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장면 그림 보신 적 있지 않습니까? 그 잘 보면 밖에서는 문을 거는 것이 없고 안쪽에서 걸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리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이 우리 교회를 떠나셨구나. 주님이 내 마음에 안계시는구나. 다시 주님을 모셔드려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결단을 하고 주님을 모셔드리는 것은 굉장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면 뭐 무슨 뭐 출세하게 해준다든지, 땅을 많이 준다든지, 자식들을 좋은 학교 들어가게 해준다든지 뭐 무슨 이야기가 있어야 될텐데 그런 건 없고 그냥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근데 이것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성경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뭐냐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겁니다. 어떤 관계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어서 그 언약이 실현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과 상관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족관계가 되는 것. 그것이 이 지상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한 이 약속이 성경 최대의 언약이고 그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말씀을 준비하러 갔었는데 한 주간 내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바로 이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할 때에 그것은 ??원수들은 다윗보다 항상 강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원수들에게 위험을 받고 박해를 받고 도망을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원수를 누를 수 없고, 대적할 수 없는데 아주 빈번하게 하나님이 그 원수와는 함께 하시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또 이 다윗과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때마다 이 다윗은 견딜 수 없으리만치 가슴이 벅차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걸 경험한 겁니다.
수유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의사가 당직을 서는데 새벽에 사람을 하나 싣고 온 겁니다. 금방 쓰러졌는데 빨리 좀 봐달라 그러는데 진찰해보니까 벌써 죽었습니다. 심장마비로 죽은 겁니다. 어떻게 됐냐 그랬더니 장사 집에서 밤을 새웠는데 새벽에 갑자기 쓰러지더라는 겁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시체실에다가 넣었습니다. 한 한 시간 있으니까 가족들이 달려온 겁니다. 뭐 울고불고. 생떼같은(?) 남편이 죽었느니 생떼같은 아빠가 죽었으니 애들하고 그 아내하고 뭐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울부짖는 겁니다. 그런데 뭐 의사야 안됐긴 했지만, 자기 형제도 아니고 하니까 딴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다. 의사 생활을 오래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죽을 때 두 손을 다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죽는 폼이 기묘하게 죽은 겁니다. 이러고 죽은 겁니다. 한 손은 쥐고 한 손은 펴고. 그래서 의사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런 시체는 참 처음 본다. 그러고 이제 가족들이 진정을 하고 물러간 후에, 도대체 저 속에 뭐가 있었을까. 이 주먹에. 그래서 그걸 까본 겁니다 이렇게. 그러니까 투두둑하고 떨어지는데, 화투 두 장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뒤집어 보니까 38광땡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서야 생각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갑자기 쓰러졌다 그러는데 왜 쓰러졌나 했더니 이게 화투 두 장하고 관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읽고 말입니다, 저는 사실 화투를 못합니다. 못하는데, 근데 이게 도대체 그 38광땡이 뭔데 죽나 사람이. 그래서 내가 교회 어떤 지체한테 그 38광땡이 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지체가 설명을 해주는데 고 순간에 깜빡 그 자기가 교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놀던 그게 전문가적 기질이 쫙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견해는 뭐든지 모르는 걸 물어볼 때는 전문가하고 의논을 해야 다는 것입니다. 마침 전문가를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설명을 하는데, 여러분 중에 상당히 많은 수야, 아니 그 뭐 뻔히 아는 거, 늘 하는 거 뭐 또 그걸 설명을 합니까 그럴지 모르지만, 그래도 소수는 진실한 신자도 있지 않습니까, 저처럼. 그게 이제 이렇게 된다고 그럽니다. 화투를 뭐 다섯 장도 나눠주고 두 장도 주고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두 장 이더군요. 두 장을 가지고 하는데, 그게 이렇게 랭킹이 다 있다는 겁니다. 일등서부터 시작해서 저 꼴등까지 다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그거를 뭐 이렇게 1, 2, 3, 4부터 12까지 있는 건 여러분 알죠, 기초적으로. 그런데 그런 것도 급수가 다 있어서 똑같은 게 두 개씩 있으면 높고 그게 또 합친 게 많으면 더 높고 뭐 이렇게 되는 거랍니다. (아니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하하하) 그런데 맨 꼭대기에 일등도 아닌 특등이 뭐냐면 38광땡이라는 겁니다. 3자하고 8자하고 밑에 光자 이렇게 써져 있는 것, 그게 이렇게 있는 겁니다. 근데 그게 그럼 왜 그렇게 졸도할, 심장마비 일으킬 정도로 좋은 거냐 그랬더니, 예를 들자면 이렇게 되는 거랍니다. 열 명이 모여서 화투를 하는데, 이제 쭉 나눠주고, 아니 나눠주기 전에 이제 배팅을 하는 겁니다. 만원씩 대면 십만원 아닙니까? 그럼 대개 세우기 나름인데 세 번 정도까지는 자기가 베팅을 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쭉 나눠줬더니 다 펴보는 겁니다. 이 정도면 내가 한 번 해볼만하다 그러면 자기가 만 원을 더 넣는 겁니다. 딴 사람이 아무도 호응을 안하면 펴볼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이 가져가는 거랍니다. 그런데 열 명이 했는데, 세 명은 아이고 난 이거 가지고 해봐야 안되겠어 그러면 항복하는 겁니다. 일곱 명이 다시 만원씩 대면 십만 원이 십칠만 원이 되는 겁니다. 한 번 그 사람이 ‘그래? 난 한 번 더 할래.’ 그러고 만원을 더 내면 일곱 사람이 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는 일등은 안될 것 같애. 그래서 두 사람이 포기하고 다섯 명이 만원을 걸었으면 이십이만 원입니다. 계산 맞지요? 이십이만 원입니다. 이십이만 원인데, 펴는 겁니다. 폈는데 자기가 평범한 일등이면 그 이십이만 원만 가져가는데, 광땡이 나오면 그 정하기 나름인데, 여기에 댄 사람들이 각기 추가로 여태까지 자기가 여기에 낸 돈의 세 배에서 다섯 배까지 내놔야 된답니다. 그러면 세 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육십육만 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장사 집에 가가지고 누가 죽었는지는 관심이 없고 밤새도록 화투를 쳤는데 돈을 거의 다 잃은 겁니다. 새벽에 끝발이 붙기 시작을 해서 막판에 돈이 수북히 쌓였는데, 설마 그러고 딱 펴보니까 이 비둘기가 날라가는 겁니다. 이게 8자입니다. 다시 밑을 열어보니까 꽃이 폈습니다. 이게 3자입니다. 그리고 밑에 光자가 있는 겁니다. 그러고 사람들이 나는 뭐야, 뭐야, 뭐야 그러니까 ‘넌 뭔데?’ 그러니까. ‘나! 나! 나! 3..3..3...’그러다가 숨을 거둔겁니다. 실화입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죽은 사람은 걱정이 안되는데, 이미 죽었으니까 할 수 없죠. 그런데 그 애들이 참 곤란하겠더라구요. ‘너희 아버지 어떻게 돌아가셨냐?’ ‘화투판에서 순직하셨습니다.’ ‘38광땡 붙들고 3...3...3...그러시다가 죽었다’고. ‘아빠, 우리 할아버지 어떻게 돌아가셨어?’ 그 때 뭐라고 얘기를 하겠습니까? 근데 그러고 혼자서 뱃살을 잡고 하여튼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러고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눈물이 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니, 비둘기하나 날라가고 꽃 핀 거 그 그림 두 장을 들고 3...3...3...하다가 장사 집에서 죽은 그 사람이나, 땅문서 몇 개 붙들고 땅, 땅, 땅 그러다 죽는 사람이나, 통장 몇 개 붙들고 돈, 돈, 돈 그러다 죽는 사람이나, 아니 그림의 크기가 차이가 날 뿐이지 뭐가, 종이의 크기가 차이가 날 뿐이지 무슨 차이가 나느냐는 겁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납니까. 정말 ??한 거라는 겁니다.
시인의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어려서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고, 형제들의 고임도 받지 못했고, 결혼해서는 아내와 깊은 연합을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자객을 풀어놓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장인의 집요한 추격을 받아야만 했고, 어디에 가든지 그는 도망자의 신세였고, 외톨박이였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왕이 되었고, 그렇지만 그는 항상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외로움 속에서 한 눈에 반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영혼의 밑바닥에, 지옥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영혼의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식들은 끊임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었고, 반란군이 일어났는데, 토벌되었고, 평정되었다라고 하는 승리의 소식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고 하는 비보와 함께 전해졌습니다. 아마 더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한 정말 상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온 이 시인에게 단 하나의 위로가 있었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시는 것. 그리고 자기를 변함없이 가족으로 생각해주시고 변함없이 핏줄처럼 대해주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께로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생긴 상처도 치유되었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고 고통을 받았던 상처도 치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 그래도 이 남쪽 전라도 지방으로 내려가야지만 음식이 풍성합니다.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말입니다. 한 십년 전에 이 시편 23편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정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감격했습니다. 그게 뭐냐면 ‘베푸시고’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이 ‘베푸시고’라고 하는 이 단어가 바로 히브리말로 ‘아라크’라는 단어인데, 이건 원래 군대들의 용어로 잘 쓰였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 좌우로 대열을 벌이는 것을 가리켜서 ‘아라크’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히브리어 성경대로 직역을 하자면 ‘원수들이 보는 면전에서 나를 위하여 한 상을 차려놓으시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상을 차렸다’ 그러는 것은 컵라면에다 물 하나 붓고 젓가락 꽂은 것을 가리켜서 상을 차렸다고 말 안합니다.
전라도 얘기 아까 나왔는데 말입니다. 거기 내려가면 말입니다. 오래됐습니다. 한 7, 8년 전인데, 집회를 내려갔는데 강사를 점심을 대접하겠다 그래서 어느 한식집엘 데리고 갔습니다. 한정식집인데, 근데 여덟 명인가 갔는데, 네 명씩 네 명씩 이렇게 상을 앉았는데, 상이 얼마나 큰 지 이 쪽에서 저 쪽이 사정거리가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여종업원이 왔다갔다 하면서 이렇게 뭐, 뭐도 썰어주고 이렇게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차려놨는데 하여튼 끝없이 반찬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일찍 밥을 먹고, 다른 사람들은 참 많이 계속 먹더라구요. 거기서 셌습니다, 그릇이 몇 개나 되나. 한 상에 밥사발 물 잔까지 다 이렇게 해서 200개가 나왔습니다, 200개가. 그러며는 어휴, 그 뭐 엄청나겠다. 그렇지 않고, 그 때 돈으로 한 만 오천 원 정도? 그것도 싼 건 아니지만. 그렇게 뭐 맨 날 누가 먹습니까? 그런 때나 사줘야지 한 번 먹지. 만 오천 원 정도 하는데, 근데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그릇이 전부다 사기 그릇인 겁니다. 밥 먹고 나서 걱정이 되는 겁니다. 어휴, 저걸 설거지를 어떻게 하나? 플라스틱 그릇 같으면 갖다놓고 그냥 막 돌려버리면 되지만, 저걸 하나하나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나. 한 사람이 누구네 집에 손님으로 온다고 그럴 때 그 손님이 그 집에 어느 정도 중요성이 있는 손님인가 하는 것은 뭘 보면 잘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왜 그 상도 찌그러지고 깨진 상들로만 밥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가난해서 그랬겠습니다만.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근데 이제 친정에를 온 겁니다. 시집 간 지 얼마 안돼서. ‘엄마, 내일 박 서방하고 같이 집에 갈테니까, 엄마, 집에 계세요.’ ‘그래, 알았다.’ ‘아! 참, 우리 점심 안먹고 갈 건데, 밥이나 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러고 이제 그 다음날 약속을 해서 남편하고 같이 시집 온지 처음으로 이제 친정집을 방문을 했는데, ‘띵동!’하고 누르니까, ‘누구세요?’ 하고 게슴츠레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나야, 엄마.’그러니까 ‘그래.’그러고 나오시는데 잠옷 바람으로 나오시는 겁니다. ‘왠일이야?’그럽니다. ‘어제 온다 그랬잖아.’ ‘그랬던가?’ 그러고 가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점심 먹었니?’그러니까 ‘안먹었지.’ ‘그래?’ 그러고 이제 남편하고 앉아서 씨암탉이 나오나 하고 기다리는데 어머니가 상을 가지고 오는데, 3분만에 상을 차려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상은 깨트려진 소반에 어제 흘린 국국물도 말라붙은 그 상에 그걸 가지고 나오는데, 옛날에 이게 그 사발이 있지 않습니까? 사발에, 지금이야 좀 남으면 다 버리고 아니면 밥통이 있어서 언제든지 따뜻하게 퍼먹지만, 아침에 밥해서 밥 퍼놓으면 남으면 그냥 찬장에 넣어놓지 않습니까? 찬장도 뭐 이렇게 유리 달려서 문 딱 닫은 찬장 가진 집이 많았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대개 궤짝 같은 것 죽 엎어놓고 거기다가 그저 하얀 천으로 이렇게 해놓든지 그것도 살 처지가 안되면 그냥 내버려두면 파리도 와서 좀 먹고, 사람도 좀 먹고, 그렇게 하면서, 파리가 먹으면 또 얼마나 먹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이제 쓰는데, 그 밥을 차려갖고 왔는데, 아, 그 사발에 한 2/3쯤 먹은 겁니다. 먹다가 반찬도 묻혔고, 고추장도 이렇게 묻어있고 그럽니다. 그걸 갖고 가더니 펌프를 틀어서, 펌프 물을 칙! 하고 받아서 젯밥 꽂듯이 거기다 숟갈을 콱 꽂고 그리고 고추장을 탁 올려놨는데, 그 고추장도 금방 퍼서 얌전하게 담은 고추장이 아니라 몇 사람이 찌르고 지나간 고추장인 겁니다. 그 밥풀까지 남겨놓고 지나갔습니다. 그걸 ‘들게.’ 그러고 남편 앞에 탁 갖다 놨을 때 그 딸이 동의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데 우리 남편을 뭘로 보고 하는 건가 말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아. 진짜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귀합니다. 그러면 사위 온다고 몇 일 전서부터 청소하고 시장까지 보는 겁니다. 그래서 ‘왔니?’ 그러더니 갑자기 조금 있더니 ‘기다려라.’ 네 사람이서 교잣상을 들고 오는 겁니다. 그러고 딱 갖다놨는데 이 쪽 끝에서 저 쪽까지 이게 사정거리가 벗어나는 겁니다. 왼쪽에 탁 앉아서 그래서 ‘먹고 싶다’ 그러는 것을 이렇게 준다 이겁니다. 그렇게 수십 가지 반찬이 쫙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벌써 그 사람의 중요성이 그 집안에 있어서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받았던 그 밥상은 아까 그 찌그러진 밥상에다가 그 찬밥에 펌프 물 부어서 숟가락 꽂고 수많은 파헤치고 지나간 그 고추장이 아니라 이 ‘아라크’의 밥상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걸 그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주께서 원수들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푸시고.’ 이렇게 번역하면 일등 번역입니다. 그래서 큰 ...??을 ??...하는 겁니다. 그걸 딱 보는 겁니다. 원수들이 보는 순간에 이 하나님 앞에서 받는 그 성대한 밥상을 보면서 이 사람이, 이 사람 하나만으로는 하찮은 사람이지만, 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도저히 이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지나고 마음에 상처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고통과 상처가 여러분들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긴 세상을 살면서 상처 받은 적도 없고, 고통하고 괴로운 적도 없었다고 하면 그것이 신문에 날 일입니다. 고통의 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어찌 그런 행복이 인간에게 존재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시인의 생애도 그런 많은 고통을 먹고 마시며 거기에 에워싸여서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주님을 만난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는 원수들이 보는 면전 앞에서 베풀어 주시는 그 큰 진수성찬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유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이 얼마나 큰 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이 시인이 경험한 겁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날마다 고난을 당하고 시인의 살아온 인생은 한 나라의 제왕이었지만, 가시밭길을 헤치며 살아온 슬픔이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마음 둘 곳이 없고, 사랑할 사람이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걸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부모님도 위로가 안되었고, 형제들도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 때는 사랑했던 아내도 궁극적인 위로가 될 수 없었고, 불륜의 관계 속에서 뜨겁게 타올랐던 밧세바의 사랑도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이 시인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원수의 목전에서 인격적으로 무릎을 꿇는 자신에게 큰 진수성찬을 베푸시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여전히 이 시인 자신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실 때, 그 때에 이 시인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가도 신앙의 원리는 항상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 만족을 누려보기 위해서 이런 저런 좋은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또 그걸 얻기 위해서 불철주야 애를 쓰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완전하고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완전한 행복과 기쁨은 오직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타락해서 이탈해버린 우리 인간들의 불행한 것을 차마보실 수 없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사는 것, 그 이외에는 인생에 있어서 참되고 영원한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이 시인이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에게 상을 베푸신 그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감격하고 그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뻐합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돈에서 나옵니까? 곤궁한 영혼에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우리의 지위나 세상의 환경에서 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멸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멸하는 것들을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멸하는 것이 신앙이 없이 불멸의 것을 위해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고, 한 걸음만 더 내민다면 벼랑일 뿐이다. 어떤 때는 남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죄의식 때문에 벼랑 끝에 서기도 하고, 혹은 생활의 염려와 근심으로 벼랑 끝에 서기도 하고,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밀어닥친 환경적인 시련 때문에 그 벼랑 끝에 서서 눈을 뜰 수도 없고, 입을 열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극한 적인 상황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들이 이제껏 나를 지켜 주리라고 믿었던 세상의 물질이나 지위,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근데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가진 것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환경이 어렵고, 극단적으로 고통이 계속 되고, 걱정이 많으니까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주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합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한 번만 커다란 식탁을 받으면 거기서 어떤 것을 깨닫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비인격적인 신앙생활로 주님을 대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깊이 깨닫는 겁니다.
오늘 이 시인이 바로 그런 교훈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들이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상처와 고통, 그리고 시련과 견딜 수 없는 환란을 이길 수 있는 힘들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환경이 우리를 평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평안은 그를 영혼의 파멸로 인도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 앞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이 관계의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말씀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그런 하나님과의 사랑, 그런 관계를 깊이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가 섬기고 있는 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정말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챨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설교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을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의 제왕이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아닙니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기에도 바쁜 사람이다’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식적이고 주일날 교회나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런 감격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참사랑과 은혜를 알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원수들이 웅웅거리는 함성 앞에서 상을 베푸시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내어주시고, 우리를 주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불붙는 사랑을 ...?가 알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이 믿어질 수 없고, 그리고 인격적인 승복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란의 비바람이 불고, 시련의 칼바람이 불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깊은 은혜의 세계 속에서 죄인을 어루만지시고 베풀어 주신 그 놀라운 은혜의 식탁, 그 영광스러운 그 은혜의 밥상을 대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동안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뭘 달라고 하십니까?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신 주님. 이루어놓으신 그 임마누엘의 은혜의 샘에서 먹고 마시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인격적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며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사는 그런 자녀들이 되도록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8. 내잔을 넘치게하는 하나님
‘주께서 내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下)
지난 시간에는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신 그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시인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 이 성경 23편 5절에서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원수의 목전에서 ‘아라크’의 밥상을 차려주신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기름으로 자신의 머리에 바른 사건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시인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잔칫집 분위기입니다. 신랑 신부가 백년가약을 맺고 그 부모와 하객들이 잔에 넘치도록 오래된 질 좋은 포도주를 붓고 함께 기뻐하며 마시는 중입니다. 시집 장가를 가는 당사자나 그들을 보내는 부모나 그들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모든 하객들 중에 누구도 우울하거나 불쾌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들의 마음에 넘치는 기쁨은 넘쳐 흐르는 그 잔의 포도주만큼이나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잊고 살아가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기쁨, 희열 그런 단어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물질 문명을 누리면서 살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삶의 질의 향상을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만물의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 없고, 그리고 어디서도 우리는 참된 기쁨과 그리고 진정한 희열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슴 벅찬 그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충만히 받지 못해서 이런 기쁨과 희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감으로 믿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도 저희들의 삶에 도움이 안되는가 보다 이런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잔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 채워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잔을 말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고, 통증이 가속화되면 우리는 진통제를 복용하거나 주사를 맞습니다. 수술을 하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쯤 될 때에 견디기 힘들게 사지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플 때, 진통제 한 방 맞으면 신기하게, 그렇게 입술을 깨물도록 통증을 느끼던 환자가 얼굴을 펴고 편안하게 잠잡니다. 그러나 그 진통제의 효과가 가시고 나면 그 후에 밀려오는 그 육신의 통증은 더 잔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하나님 없이 세상 살아가는 이 실증을 정말 인간들이 이길 수가 없으니까 그 다음에 인간들이 이것을 무언가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리고 찾는 것이 뭐냐면 세상일에 몰두하거나 극단적인 쾌락에 빠지는 겁니다.
한 20년 전에 미국의 오렌지카운티라고 하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 미국의 신문을 통해서 우리나라까지 흘러들어왔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전 직접 그 마을을 방문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마는 미국에 사는 사람들한테 얘기를 들어보면 아주 소득이 높고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렇게 우리나라까지 거기서 전해오는 작은 동네의 소식을 들으면서 깜짝 놀라느냐. 그저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그저 넉넉한 사람들이 모여 살다가 하도 심심하다가 동네 남자 열 몇 명이 모여서 우리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따분하고 심심하니까 우리 하룻저녁에 한 번씩 우리 마누라를 바꾸자. 그렇게 동네가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한 번씩 부부가 되어 보는 겁니다. 그게 제가 알기는 스와핑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20년이 지났는데, 이제는 그 스와핑이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보편화되어 가고 있고, 보편화된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보편화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고, 그리고 이제는 그 단어가 10대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들에게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단어이고, 인터넷이나 이런 사이트들을 통해서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현장들이 뉴스거리로 심심치 않게 전파되고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 만물의 피곤함과 싫증을 어디에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인간의 역사이래로 모두 되어 나오는 그 똑같이 되풀이 되는 인간타락의 역사입니다.
저는 그 봄페이와 그 곳의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어떤 문화적 결론을 하나 내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진화하지 않는구나. 진화할 필요도 없이 한 시대에 일어나서 한 세대가 다 가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큼 충만하게 꽃피고,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 다시 또 꽃피고 하면서 타락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3000년 전에 있었던 도시로부터 발굴된 것들을 보면 그 때의 타락이 지금보다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망하게 하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많은 고고학자들이, 많은 학자들이 그건 허구라고 생각했지만, 그 후에 발굴이 되면서 사실은 그 소돔과 고모라 성의 옛 성토들이 사해 밑바닥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천사들이 이 땅의 해괴(패괴?)함을 보기 위해서 내려왔고, 아마 남성의 모습으로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 때에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있었던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천사가 들어간 그 롯의 대문을 부실 듯이 몰려들면서 노인들에부터 어린 아이까지 문을 쪼갤드시 들이밀면서 그 천사들을 내 놓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했으니 히브리말로 그 상관이라는 말은 야다인데 그것은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벌써 소위 계단이라고 읽혀지는 그 남색하는 것들이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 있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타락이 온 지면에 가득해야했던 이유도 결국은 어떻게 보면 질병적 현상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병적 현상으로 여겨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 안에 두신 그 잔이 하늘의 신령한 자원으로 채워져야지만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참사랑과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참사랑, 거기로부터 오는 진정한 영혼의 아름다운 자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많은 세월동안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진정한 만족을 얻는 대신에 세상적인 방식으로 그 더러운 쾌락에 빠지는 질병적인 현상들에 몰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극단적인 쾌락으로 치닫는 개인이나 이 세상을 보면서 그것을 비판하고 욕하기 전에 그들의 영혼 속에 있는 그 진정한 그 신령한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방안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고 그러한 세상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안타까워하시는데 하물며 영혼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늘자원을 힘입어서 살 수 있는지를 모두 알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채울 진정한 자원을 하나님 앞에 얻기 보다는 이 세상에 있는 쾌락과 탐욕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정욕으로 그 목마름을 대신하고자 할 때에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있는 불산자들은 아버지가 없고(높고?),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지만 이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고, 또 아버지를 모두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썩어질 것들과 바꾸고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지금부터 십 한 오년 됐을까요? 이 용산 쪽에서 강남으로 건너가려면 반포대교를 지나야합니다. 거기에 차들이 멈춰 서서 사람들이 그 다리위에 내려와서 뛰어다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뭔 일인가 했더니, 하늘에서 돈 비가 내린 겁니다. 만 원짜리 지폐가, 그 다리니까 또 바람이 좀 붑니까. 만 원짜리 지폐가 막 날아다녀서 차 유리창에도 달라붙고, 와이퍼에도 달라붙고. 뛰어내려가지고 사람들이 그것 줍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다. 그 뭐 한 댓장만 주워도 일당이 되니까 말입니다. 웬 하늘에 돈 비가 내렸냐. 인생사는 게 하도 시시하게 느껴진 어떤 사람이 자가용을 타고 가면서 ‘야, 이 자식들이 이거나 쳐먹어라’ 그러고 공중에다가 백만 원짜리 다발 두 개를 뿌렸습니다. 그러니까 기분이 좋아서 뿌렸는지, 성질이 나서 뿌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근데 그 백만원 다발 두개가 확 흩어지니까 사람들이 차타고 가다가 뛰어내려가지고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그것을 주우려고 뛰어다니는 겁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유유히, 경찰이 그것을 찾았지만, 발견했지만 그러나 유유히 88고속도로로 해서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야~ 세상사는 게 얼마나 시시했으면 그럴까.
저희 교회에 다니던 교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안들었더라면 아마 안그랬을텐데, 그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달이 지났는데,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주일날 이제 성경찬송을 들고 막 교회를 오려고 그러는데,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하늘에서 만 원짜리가 막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그러겠죠? 나는 아무리 교회에 와도 그런 거 안떨어지던데...막 떨어집니다, 막. 주울까요, 안주울까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주워서 그래도 십일조는 해야지요. (하하하) 그런데 사연이 뭔고 했더니 어느 건축업자가 돈을 잘 건축주가 안주니까 돈 준 것을 가지고 5층인가 꼭대기에 올라가서, ‘야, 이 자식아! 이것도 돈이라고 주냐!’ 그러고 거기서 확 뿌려버린 겁니다. 그랬더니 그 만 원짜리가 막 비처럼 내리는 겁니다. 애들이 주워가고, 어른도 주워가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이 열린 교회 교인은 머리로 떨어지는 걸 탁 털고, 누가 이 거리에다 이런 오물을 투척을 하느냐고. 그 정도는 돼야되지 않습니까? 얼마나 사는 게 시시하면 그렇겠습니까? 만물의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 없고, 돈이 많으면 행복한 것 같아도 그건 돈 없을 때 이야기지, 실제 돈이 많아도 사람들은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행복하다면 다른 이유 때문이지, 절대 돈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하면 말발이 서지만, 돈도 없는 목사님이 그 얘기 해봐야 어떻게 그 말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재벌이 되어 본 적도 없고, 돈을 많이 소유해서 피곤할 정도로 돈을 많이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어느 지체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 목사님은, 예수 믿고 은혜 받고 조금 있다가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셨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죄에 대해서 잘 아세요?’ 그런데 그 눈빛이 아주 심상치 않은 눈빛인 겁니다. 마치 너 다 저질러봤지, 그런 눈빛입니다. 그래서 내가 또 눈치는 빠르지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내가 이런 비유를 해줄게. 들어봐라, 그랬습니다. 그 외국에 가면 와인감별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빛깔과 냄새, 그리고 심지어 통에 담긴 술에서 나는 소리를 보고 이 포도주의 질을 분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코나 혀가 보험에 들어있습니다. 거액의 보험에. 그래서 그 사람들은 뜨거운 것도 안먹고, 스킨로션같은 것도 안바르면서 이 자기의 후각과 미각을 간직했다가 맛을 보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눈감고 포도주 맛을 봐도 이것은 몇 년산 무슨 브랜드일 것 같다. 이것은 포도 농사가 아주 잘 된, 미국 남부 지역의 포도주 같다. 이런 정도를 어느 정도 분별해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포도주 하나를 한 십여 종류의 포도주를 놓고 한 종류의 포도주를 한 바가지씩 퍼 먹어서 곤드레가 돼도 마지막에 가서 뭐라 그러냐면 다 그 맛이 그 맛 같네. 그럴 것 아닙니까. 여러분, 많이 맛을 본다고 해서 맛을 아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젠 알겠습니까? 예. 그렇게 나는 돈이 너무 많아서 피곤할 정도로 소유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소유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빚은 져 본적 있습니다. 피곤할 정도로, 요즘도 교회 짓느라고 빚도 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피곤할 정도로 빚은 져 본 적이 있지만, 돈은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끝장을 본다고 해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지혜로운 우리 어머니들은 된장에 빛깔만 보면서도 끓이면 무슨 맛이 날지 아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맛보지 않아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은혜를 받으면 그 죄와 유혹의 결과가 어떠할지, 그리고 인간에게 있는 말할 수 없는 허망함과 이 싫증의 결국이 어떠할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이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들이 무엇을 하든지 항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사물에 그 외관과 형식뿐 아니라 실제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는 영적인 통찰을 갖고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시인은 잔이 넘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내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도 아니었고 자식으로부터 받는 효도나 넓혀진 왕국의 영토를 통해서 지삭(?)충성하는 부하들의 헌신적인 충성심에 의해서 채워진 잔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채워진 잔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들로 채워진 그 희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하기를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고 시련의 벌판을 지났지만, 시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식탁을 자신에게 베풀어 주심으로 자기를 가족으로 받아주시고, 그 식탁을 아라크의 밥상이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집에 품꾼이 아니라 존귀한 자녀라는 사실을 자기를 괴롭힌 원수들 앞에 보여주실 때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이 비록 아무 것도 아닌 연약한 존재였지만 그러나 자기와 생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그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때문에 기뻐하고 감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다운 만족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일생 얼마 되지 않는 신앙의 생활을 돌아보더라도 이것이 정말 진짜입니다. 부할 때에 반드시 기쁜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좋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들이 반드시 가슴 벅찬 희열 속에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가진 재물 없고, 높은 지위 없어도 때로는 이 세상의 질병에 시달리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라도 목자 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실 때, 그 하나님이 우리와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셨을 때, 광야와 같은 세상을 곤고하게 지날 때에 아침마다 베풀어 주시는 그 거한 말씀의 밥상 앞에서 우리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님의 성품을 말씀을 통해 눈 떠 갈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경험이고, 우리의 경험을 이미 벌써 3천년 전에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써는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태어난 거듭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무엇으로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질 수 있는 지를 맛 본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식어졌을 때에 그 희망이 침체에 빠졌을 때에는 그런 하나님의 참된 뜻을 모르고 신앙의 침체에 깊이 빠졌을 때에는 잠시 영혼의 입맛이 변해서 그래서 자기 좋은 대로 선택을 하지만, 그러나 은혜가 다시 돌아오고 나면 진정한 만족이 오직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살아가다가 자원이 모자라니까 예수를 믿고 땅의 자원을 예수님 덕분에 더 많이 누리게 되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 걸려있는 이 영혼으로는 땅의 자원만 가지고는 참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했을 때에는 누릴 수 없었던 하늘 자원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내가 없으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없어도 내 아버지는 많이 갖고 계십니다. 그 내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면 이제 나는 그 분의 집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이 세상의 불행에 둘러싸이면 우리는 꼼짝도 못하면 불행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게 하늘로부터 공급되어오는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전체적인 정신에 놓고 보면 우리가 예수님를 믿는 것은 뭔가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떠났던 자식이 젊어서는 객기를 부리고 젋음의 정욕도 있기 때문에 고향 생각안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이제 젊은 날이 지나고 나고, 인생의 참 맛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워지고 고향이 그리워져서 자기 살던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자기 집을 떠나서 타향에서 살던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집에는 도시보다도 더 큰 빌딩이 있기 때문에 돌아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도시보다도 더 안락할 삶이 있어서 시골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왜입니까? 그 집에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부모님이 계십니다. 보고 싶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 아버지, 얼마나 많이 늙으셨을까? 우리 어머니, 늘 내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우리 어머니 눈 가에 주름은 얼마나 많이 졌을까? 좀 있지 않습니까, 설교에서 좀 빗나가긴 했지만, 효심을 좀 가지십시오. 효심을. 그래서 이렇게 명절 때 같은 때 됐을 때, 그 효심을 가지고, 그래서 정말 그 부모님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동기간들을 그리워서 깊이 끌어안고 그리고 모든 갈등과 이런 것들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러면서 사랑으로 대해줄 때 가정복음화가 이루어질 겁 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줄 모르고 방탕한 길을 떠났다가 명절이 되어서 부모에게로 돌아가는 그것이 신앙입니다. 좋은 빌딩이 있고, 큰 유산이 있고, 안락한 삶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향에 가는 길에 돌 하나, 풀 한 포기 새롭습니다. 그리고 동네 어귀 들어서면, 그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게 귀향길입니다. 그게 신앙길입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돌아가서 뿐만 아니라 돌아가서, 그 아버지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종들 서너 명이 들고 들어와야 되는 거대한 밥상을 차려놓으신 것을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에 이처럼 자신을 후대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이 영혼의 빈 잔이 가득차는 것을 경험했고, 잔칫집에 잘 익은 포도주가 잔에 넘쳐흐르는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이 이시인의 가슴 속에 차고 흘러넘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아주 기뻐합니다. 그러한 복락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면합니다. 우리의 참된 만족은 마셔도 마셔도 가라앉지 않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안되는 우리의 신앙생활이지만, 언제 우리들이 가장 행복했고 복된 삶을 살았는지를 한 번 회고해 보십시오. 언제 우리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언제였습니까? 돈 많고, 그리고 사업 잘 되던 때였습니까? 아닙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돈 많이 없고, 사업이 어렵고 자녀들 마음 고생 시켜서 심정 둘 곳이 없어도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할 때 그래서 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을 때 그 때 우리는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로 갈함을 면하려고 하였던 우리의 그 꿈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들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마십시오. 제가 서른네 살에 처음 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참 은혜를 많이 부어주셨습니다. 난생 처음 내 방이라고 말하던 그 교수실에서 은혜를 받은 다음에 참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러고는 책상 앞에 그렇게 써붙였습니다. 언제든지 떠날 사람처럼 그러나 영원히 있을 사람처럼 그렇게 살자. 복음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니까 정말 이 세상에 있는 지휘나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명성 같은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우리의 눈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빛나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참다운 만족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영혼을 가득 차게 만들어 주는 그 거룩한 희열의 원천이 또 한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름으로 시인의 머리에 바르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름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던 세 가지 직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왕이었고, 또 하나는 선지자였고, 또 하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각 세 직분에 속한 사람을 세울 때에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알려주셨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그 직분으로 그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왕은 통치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반영하는 실제적인 다스림을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 시대를 향해서 주시고 깊은 계시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와서 담대하게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그와 반대로 더러운 죄인들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지 길을 보여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세 직분이 세 솥발과 같이 섬기고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봉사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특별히 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일생동안 그는 세 번의 기름부음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중에 이 사람의 일생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기름부음의 경험은 바로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이새의 집에 사무엘이 사울을 이어 세울 왕에게 기름 부으라는 명령을 받잡고 왔을 때 아버지 이새의 눈에는 다윗은 보이지 않았고 허우대 좋고 잘 생긴 앞에 있는 많은 아들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불리움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기름 부을 때마다 사람을 외모를 취하지 말라. 그 사람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가 기억을 더듬어서 다시 남은 한 아들을 찾아낸 것이 다윗이었으니 다윗은 아버지 이새 마음에 별로 없었던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시각이었고, 하나님은 이새의 집에서도 이름도 없고, 빛도 없었던 어린 이 다윗을 마음에 두셨으니 이를 가리켜서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가 저를 통해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쓰시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세상에서는 아무런 특징도 없고,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사람을 택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다윗을 불러서 처음 기름 부어줄 때에 그에게는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특이한 경험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서 그 성령이 그에게 지혜와 권능을 충만하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역사상 다시 없는 아름다운 임금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다윗이 그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은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는 도구였고 그래서 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던 방식과 신약에서 역사하시던 방식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일한 성령이시지만 구약에서는 지금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일에 처럼 보편적으로 이렇게 편만하게 임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오히려 성령께서 무엇인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는 사람에게 오셔서 그 일을 감당하는 동안에 함께 하시고 떠나기도 하시는 그러한 역사를 가지고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라고 부르지 않지만 오늘 신약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니,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고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고정적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범죄하고 그리고 부패한 가운데 살면 그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경험들을 거두어가시고 우리가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성결한 삶을 살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더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행복,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성결의 은혜를 덧입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1975년도 11월에 추수감사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세상에서 정말 그 상처받은 마음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던 낙심한 젊은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때에 제 마음을 괴롭혔던 것은, 도대체 인간이 왜 사나 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간이 정말 가치 있게 살 수 있을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면서 저는 정말 치도근한 젊은 날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착실한 모범생으로 열심히 공부하기 보다는 문학서적을 즐겨 읽고, 철학서들과 사상서들을 넘나들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괴로워하고 힘든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진정한 안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정말 멋있다 라고 박수치게 해주는 사상가들은 있었지만 잠시 박수를 치고 나면 다시 그 때에 순간적인 기쁨과는 비교될 수 없는 영혼의 고달픔들이 밀려왔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저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기 위해서 어떠한 만족도 세상에서 못 얻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사상가들을 편력하면서 어떠한 만족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읽게 된 몇 사람의 사상가들의 책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마음에 문이 열리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또렷하게 전해주는 사람 없었지만, 스스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어느 날 한 2,30명 모여서 예배드리는 진짜 가난하기 짝이 없는 한 서울 변두리의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수요일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비닐 장판 한 가운데 톱밥 난로가 타고 있었고, 한 20여명의 성도들이 삐그덕 거리는 풍금 소리에 맞춰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를 들어서는 순간 이 먼 타향살이에서 떠나서 자신의 고향집으로 돌아온 것과 같은 그런 야릇한 평안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 삐그덕 거리는 풍금소리가 기억이 납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해 가을에 세례를 받게 됐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처럼 세례를 까다롭게 줬더라면 틀림없이 떨어졌을텐데 그 할아버지 목사님은 마음씨가 참 좋으셨습니다. “이제 다 컸는데 어려서 교회는 많이 다녔는데 학습은 무슨 얼어 죽을 학습이냐. 교인들 몇 안되는데 그냥 세례 받아라.” “어떻게 준비를 해야 됩니까?” “아 그냥 이거 하나 가서 읽고 와.” 열심히 읽고 외웠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예수 잘 믿어야돼, 알았지? 목사님 시키는 대로 하고?” “예.” “통과.” 그러고 나서 11월이었습니다. 근데 참 가난했습니다. 집에 가서 옷을 이렇게 들춰봐도 세례 받을 때 마땅히 입고 갈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그래도 만만한 옷이 하나 있는데 하얀 추리닝이 있었습니다. 그걸 깨끗이 빨아서 그래서 그거를 아래는 양복바지 입고, 위에는 추리닝 윗도리를 입고 그리고 이제 세례 받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례 받을 사람 저 한 구석에, 한 너 댓사람. 할아버지 목사님이 사발에다 물을 떠가지고 오셔서 나에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물을 찍어서 머리에 바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는데, 그 손이 그 할아버지 손이 닿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이 위로부터 뜨거운 그 불이 온 몸에 확 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그렇게 건조하고 메마른 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쪽박을 찬 거지처럼 이 사상가에게서 한 술 밥을 구하고, 저 철학가에서 또 한 술 밥을 구하고 그러면서 편력하였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추위와 배고픔. 거리의 고아처럼 내동댕이쳐진 자신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기독교에 대해서 많이 모르지만 그런 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을 편력할 때 느낄 수 없었던 그 무엇인가 놀라운 것을 느꼈습니다. 나에게 사상을 가르쳐주고 그리고 지식의 찬밥을 던져주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목마름으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나를 뜨겁게 안아주신 분은 하나님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만난적도 없고 본 적도 없지만 나는 나를 용서하셔서 이렇게 당신 아래에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품에 안겼으니 이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없이 눈물을 흘렸고 추운 초겨울의 햇살이 낡은 교회당 창문에 비쳐서 본당 바닥에 떨어질 때에 그 햇살을 받으면서 오직 소원은 한 가지였습니다. 무엇으로 이 사랑을 갚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일생을 살면서 내가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흐른 뒤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참 안타까운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장 다닐 때인데 새벽이면 항상 집 가까운 교회에 나가서 새벽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날도 새벽 기도를 나갔는데 끝나고 사람들은 다가고 빈 예배당에 혼자 앉았는데, 11월 한 15에서 20일경쯤 됐기 때문에 꽤 추웠습니다. 돈이 없어서 교회가 유리창도 못하고 비닐로 창문을 만들어 막았는데, 거기에 서리가 끼었을 정도니까 꽤 추웠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기도 제목이 있어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그 추운 예배당에서 혼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편한 의자에 이러고 앉아서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대답을 안해주시지. 저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불쌍해서라도 그래도 응답을 해주시지 않을까.’ 바닥은 도끼다시도 아니고 그냥 콘크리트 세멘으로 발라놓은 바닥이었습니다. 잠깐 앉아있는데도 찬 기운이 바닥에서 치곧아 오는데 거기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손을 땅에다 대고 그 손위에다 얼굴을 묻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나중에는 추운 건지, 다리가 아픈 건지 모르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런데도 그 때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꼭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가야 되겠다.’ 그러면서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고개를 땅에다가 묻고 있는데 이상하게 강대가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크기가 핸드볼 공만 할까, 그 보다 약간 작을까. 시뻘겋게 불붙은 마치 실을 뭉쳐놓은 공같이 그렇게 불붙은 그 하나가 빨리도 아니고 천천히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생전처음 경험이니까 가만히 있었는데, 내 앞에 오더니 머리에 탁! 하고 만나는 순간에 아 이건 지난 번 세례 받을 때 몇 년 전의 경험한 것하곤 정도에 있어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 때에 포근하고 따뜻했다면 이번에는 펄펄 끓게 그렇게 다가와서 머리부터 시작을 해서 온 몸을 그렇게 불같이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생전해보지도 않은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혼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동일하게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럽고 불결한 죄인인가 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이 버러지와 같은 인간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그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엎드려서 시멘트바닥에 눈물이 흥건히 고이도록 기도했고, 등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직장 갈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애써 기도를 진정하고 눈을 떴을 때 예배당은 고요하고 그리고 그 찢어진 유리창 사이로 그 서리에 비치는 그 빛을 뿜으면서 아침의 붉은 햇살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일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 이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경험했는데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서 주님께 이 사랑을 갚을 수 있을까.’ 주님이 만약에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마음에 안든다면 칼로 잘라내 버리고 싶었고 뼈 중의 하나가 마음에 안든다면 깎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싶었습니다. 전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때보다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딱 두 번만 경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도 많이 경험했지만 그러나 정도에 있어서 크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 두 경험은 제 신앙에 있어서 초기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생각하면 세상에 붙은 욕심을 떨어내게 하고 그리고 정말 내 영혼의 진정한 만족이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행복과 만족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 앞에 용납받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빈 영혼의 잔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외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야했고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용납되게 하기 위해 당신은 하나님 앞에 거절당하셨습니다.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부요하신 그 분은 우리를 위해 거렁뱅이처럼 낮아지셨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마셔도 마셔도 갈증밖에는 돌아오는 것이 없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열렬해지고 그렇게 병든 영혼을 찾아오셔서 고치시고 어루만지시며 영혼을 소생시켜 주셔서 우리의 빈 영혼의 잔에 유일한 만족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싫증을 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아닙니까? 그래서 만족을 얻었습니까? 그래서 유익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습니까? 곤고한 사람들은 더 곤고해졌고, 시련중에 있는 사람들은 더 큰 시련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참다운 만족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에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가진 것이 없고 그리고 죄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라도 주님을 전심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을 너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참된 만족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물질이나 지휘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고,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은혜의 경험에서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구해야할 최대의 선물은 하나님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 다윗이 이 깊은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한 나라의 제왕이 되었고 나라의 모든 소유가 자기의 것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신하들의 충성과 넓은 영토, 부귀와 영화로 채워질 수 있는 것들은 시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만족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잠시 스쳐가는 것들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은 이러저러한 환경 때문에 여러분들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러저러한 여건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전히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어떠한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도 당신을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당신의 보좌를 응시하는 그 눈빛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스쳐지나가는 것들이고,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인하여 행복해하고 주님을 인하여 만족케 하는 것들을 연습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의 수고가 끝나고 주님 앞에 마주했을 때, 그 때에 영혼에 넘치는 그 잔의 그 충만함의 비결을 배우고 무궁토록 그 충만함을 누리며 살도록 그리스도께서 구속해주신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은혜 안에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9.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5절에서 하늘로 솟아올라 장렬하듯이 터진 불꽃이 찬란히 빛을 내면서 6절에서 포물선을 그어 떨어집니다. 1절이 총론적인 고백이라면 2절서부터 5절까지는 왜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한 이유이고, 마지막의 6절은 그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입은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미래에 대해 확신하고 또 살 것인가 하는 그 각오와 결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토막은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 확신은 바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 속에서 미래의 삶에 대한 결단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이제 이 의미들을 하나씩 파악함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시편 23편 마지막 절에 대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선 여기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 시인이 미래의 삶이 어떻게 될지 은혜를 아무리 많이 받은 시인이라도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은 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아마 인간은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속한 일은 일초 뒤의 일이라도 인간이 알 수 없게끔 하나님께서 막으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은 우리 인간의 과거부터 미래까지 한 번에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감추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냐 하면 현재의 삶을 바로 잡기 위해서, 현재의 믿음을 공고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미래를 보여주시는 것이지 미래를 위해서 미래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겁니다. 그런 원리에서 보면서 이제 이 시인이 가보지 않은 미래, 알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자신의 더 노년에는 어떠한 인생이 펼쳐질지, 어떠한 환란과 먹구름이 깃들지, 고난과 어떤 시련이 자기를 찾아오게 될지 시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르지만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내가 환란을 만나든지, 평탄한 길을 걷게 되든지, 어떠한 환경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즉 기필코 나를 따라 오고야 말리라 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여기서 따르리니 라는 이 말은 원래 히브리어로 축약하다 그런 뜻입니다. 마치 비행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데 미사일을 발사하니까 비행기가 가면 가는대로 그 미사일이 춤을 추면서 그 비행기를 따라가서 결국은 그 비행기를 맞추듯이 이 시인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끝까지 추격을 해서 결국은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덕을 보도록 만들어줄 것이라고 하는 강력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미래에 가보지 않았고, 미래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은 아직 모르지만 그러나 이 시인은 그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끝까지 자기를 추적해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덕을 보게끔 만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선하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창세기 1장에 제일 먼저 나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심에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토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시고 그것을 보시면서 좋았더라 할 때 쓰여진 그 단어입니다.
어떤 사람이 손수 설계를 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야~ 정말 좋다. 그리고 더 이상 좋을 순 없다. 그리고 자기가 지은 집에 대해서 감탄을 했을 때에는 그 빌딩이 전 세계에서 제일 큰 빌딩이라든지 가장 화려한 빌딩이라든지 가장 값비싸게 돈을 받을 수 있는 빌딩을 지었다라고 하는 의미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을 생각을 머릿속에 그렸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했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땅 파는 사람이 와서 땅을 파고 가니까 콘크리트 붓는 사람이 와서 콘크리트를 붓고 가고 철근 세우는 사람이 철근을 세우고 조적공이 와서 벽돌을 쌓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문 해다는 사람이 와서 문틀을 매달고 가고, 그 사람이 가고 나니까 유리업자가 와서 유리를 끼워줬습니다. 인테리어 업자가 와서 벽을 인테리어하고 천장을 만지고 가고 그랬더니 칠하는 업자가 와서 깨끗이 칠을 하고 안팎으로 도장 공사를 끝냈습니다. 카페트 업자가 와서 바닥을 깔고 갔고, 가구 하는 사람이 와서 온갖 가구를 넣어주었습니다. 조경 회사에서 와서 나무를 심어주고 잔디를 깔아주고 갔고 그리고 마지막 청소하는 회사에서 와서 깨끗이 청소를 하고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각자 각자가 했을 때에는 이것이 자기 일이니까 하니 전체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 올 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수 백 명의 사람이 몇 달 동안 일하고 가버렸는데 마지막에 만들어진 작품을 보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좋다! 그 얘기는 그 집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이라든지 제일 큰 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뭡니까? 자기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계획대로 됐다. 조금도 아쉬운 것이 없이 머릿속에 그렸을 때 그 때에 가지고 있었던 계획대로 딱 맞게 됐다. 아~! 너무 좋다. 그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심심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죠?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우연히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또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예수님 믿게 만드셔서 새 사람으로 여러분들을 다시 빚으셨습니다. 왜?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리고 그 후손으로 나 같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모르고 이 세상에서 허망하게 살던 나를 불러서 복음을 알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을까? 왜 그러셨을까? 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드셨을까, 생각해야합니다. 왜 그러셨을까? 그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우리를 구원해놓으시면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 그대로 우리 인생이 집처럼 지어져 가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악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계획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 인생의 집이 지어져 갈 때, 그 때에 악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선하게 집을 지어놓은 사람은 그 집이 지어놓은 의도대로 사용될 때에 주인 마음이 기쁜 겁니다. 비유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집을 그렇게 예쁘게 아주 선하게 지어놨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한테 그걸 그냥 빌려줬습니다. 그래서 이 집에서 살아라 그랬더니 이 사람도 맨 처음에 와서 너무 좋다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주인이 가보니까 경악을 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정원을 예쁘게 그 만들어서 그래서 나무를 심고 잔디를 심고 꽃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들어서 그 좋은 물고기까지 넣었는데 전부다 망가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예쁘게 만들어놓은 주방의 싱크대에다가는 똥을 넣어놓고 그러고, 그렇게 예쁘게 깔아놓은 마루는 전부다 신발을 신고 들어와서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어놓은 거실에는 개를 비롯해서 짐승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더렵혀 놓은 겁니다. 그 때에 그 주인의 마음에는 이게 아깝다 라는 생각보다도 분노가 치미는 겁니다. 당장 그 사람을 내어 쫓지 않겠습니까? 주인의 마음에는 그 상황이 악한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영원한 찬송제목이었습니다. 주 여호와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지니라. 그런데 하나님의 그 선하심을 그렇게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목적을 자신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항상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느껴집니까? (예)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느껴질 때도 있지만, 왜 이렇게 하나님이 내 인생에 딴죽을 거실까, 그럴 때도 있지 않습니까? 하는 일 마다 되는 게 없네. 왜 하나님이 나를 좀 팍팍 밀어주시지 않는 걸까? 최소한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이 선하시게 느껴지기는커녕 좀 죄송하지마는 하나님이 참견 안하고 내버려두시면 난 혼자서 잘 할 수 있는데, 누가 그럽니까? 전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방해만 안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항상 방해를 하십니다. 성경적입니다. 가는 길에 하나님이 가시울타리를 놓으시고, 고난의 길을 예비하셔서 못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선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악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악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계획과 하나님이 그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인생의 계획이 충돌을 일으킬 때 그 때에 그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자기의 뜻을 버리고 자기를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어두움 가운데서 주님도 모르고 살던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 믿게 하셨을까? 하나님 믿으면서도 핏기 없이 살아가던 나를 왜 은혜를 주셔서 내 영혼을 살리셨을까? 은혜를 주셔서 왜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있게 하셨을까? 그것을 깊이 찬송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선하다 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마음이 좋다 라는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그 계획에 맞게끔 그 사람이 존재하고 살아갈 때 그 때 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tm포트 라이트를 받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인생이 아닙니다. 정말 아름다운 인생은 하나님의 그 선하신 계획을 따라 사는 삶, 거기에 있을 때 그 사람이 가장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자리에 있을 때 그 사람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선, 아름다움, 탁월함 이 세 가지는 거의 같은 단어입니다. Goodness, Beauty, Excellence(목사님께서는 Excellency 라고 하셨는데, 사전에는 ‘각하’이고 그냥 Excellence자체로 ‘탁월’이라는 뜻이 있어 이렇게 표기했습니다. 참고바랍니다) 이 세 단어가 거의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끔 그 자리에 있을 때 그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시인이 인생을 살면서 고난도 겪고, 시련도 체험했습니다. 너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길도 오랫동안 걸어왔고 죽은 자와 방불하게 된 자신의 영혼을 살리시는 은혜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배고프고 허기진 세월도 보내면서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도 맛보았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맛보고 은혜를 경험하면서 이 시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선을 맛볼 수가 있었던 겁니다. 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붙드니까 나를 포기하고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나 자신의 인생을 향한 계획보다 훨씬 멋지다 그렇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했더니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선하심을 맛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복 많이 받은 사람이 하나님 찬송하는 게 아닙니다. 복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워준 자리에 있는 사람. 그가 그 순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겁니다. 가진 재물 없고 높은 지위 없어도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 있는 사람,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 그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놓여있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만을 명심하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둘째는 그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깨달으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바뀌신 것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자기가 회개하고, 자신의 인생의 계획을 따라서 사는 일들이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버리고 주님의 계획을 붙드는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밀려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21살 때 회심을 했습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세상에, 이 세상에 나 같이 불행한 사람이 없는 겁니다. 왜 우리 엄마 아빠는 돈도 없고, 왜 내가 돈 좀 쓸 때 되니까 쫄딱 망하셨을까? 거기부터 시작을 해서 하여튼 모든 게 그렇게 불만스럽고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1살 때, 회심하고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가 걸어온 과거의 길이 일목요연하게 죽 나타나면서 바로 내 인생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이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 만나게 해주시려고 나를 데려오셨구나. 그것을 생각하고 나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무슨 복권을 맞아서 돈을 몇 천만 원 받게 됐다든지, 무슨 좋은 여자친구를 만나서 사랑에 푹 빠지게 됐다든지, 그런 거는 아닙니다. 가난하던 집은 계속 가난하고, 그리고 고통은 고통대로 남아있어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미래의 염려가 없습니다. 왜? 내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그 계획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내 인생에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나를 지켜 주시고, 그리고 인도하시고 하나님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이 시인의 마음 속에 불타고 있었던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인자하심. 히브리말로 헤세드 인데, 이것을 히랍어로 번역하면 아가페입니다, 아가페. 그러니까 아가페의 사랑은 조건을 가지고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조건 없이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사랑에 겨워서 베푸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서 얼마나 덕을 보시겠습니까? 불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보면 사실 우리를 구원해 놓고 주님은 속만 썩어오면서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좀 낫게 살려고 노력을 하지만 마지막 우리가 눈을 감을 때에도 ‘나처럼 하나님께 효도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러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시고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한 사람들에게 또 다시 은혜를 베푸시면서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는 그 놀라운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조건 없는 사랑 때문에 그러신 겁니다. 신앙을 멀리 떠난 사람을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오십시오. 그러니까, 창피해서 못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니까, 잘 될 때는 지 혼자 세상에서 잘 살다가, 자기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을 만나니까 예수님 찾으면서 가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낯짝이 뜨거워서 못나가겠습니다. 좀 잘 살게 되면 떳떳이 주님 앞에 가서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싶습니다. 언제 그렇게 될 건데? 개구리 뒷다리 날 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그래서 부르시는 겁니다. 자기 발로 걸어와서 회개하고 하나님 잘 못했습니다. 내가 너무나 긴 세월동안 하나님 없이 불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하나님이 그래 참 착하다. 이제는 순종하며 잘 살아라. 그랬더니 그 다음에 자기 발로 난 하나님이 싫어, 그러고 또 가는 겁니다. 가서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 다 생고생하다가 다시 또 그 ‘손들고 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또 옵니다. 또 잘 못했습니다. 또 봐 줍니다. 계속 반복하면서 삽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희롱하는 죄인들을 향해서 분노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시인이 평탄한 길만 걸어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항상 칭찬만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간음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크게 혼나고 그리고 칠흙과 같은 어두움 속에서 살인의 죄까지 저지르면서 그렇게 어둡고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고 고통으로 가득 찬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시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눈뜨고 자기와 같이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이 시인은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그 사랑과 그 자비, 그 선하심을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그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에, 그 분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삶의 목적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악함에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깊이 뉘우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나니까 수 많은 원수들이 나를 에워싸고 그리고 내 인생에 앞길에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고 고난과 역경의 가시밭길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끝까지 나를 따라와서 결국은 나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영향을 벗어날 수 없도록 지켜줄 것이다 라고 하는 확신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겁니다. 이겁니다. 우리가 내일이면 무슨 일을 만날 수 있을지, 그리고 다음 달이면 어떠한 환란을 만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처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불행의 요인과 그리고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환란의 폭풍우의 먹구름들이 드리워있는 길이 바로 인생의 길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양이라 부르신 이유도 바로, 우리를 처음 창조해놓으실 때부터 우리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셔서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짐승 가운데 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목자를 떠난 양은 죽음에 가깝고, 양떼를 떠난 그 양은 맹수의 공격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양 떼가 양 떼들 안에 있을 때만 안전하고 목자의 목양 아래에 있을 때만 안전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환란과 시련도 겪었고, 고난과 핍박의 세월도 보냈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나니까 이제 목자 되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그 확신을 이 시인이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우리에게는 모두 비밀로 되어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섭리를 따라 살아가는 그 인생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고 동행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굳센 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인생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 살아도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하면서 그 하나님을 기대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불안과 고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것을 경험한 겁니다.
어느 아이가 버스를 타고 밤에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도 생각이 나는데, 초등학교 다녔을 때에 강원도가 집이어서 버스를 타고 가면 뭐, 오대산 아래까지 가는데, 거의 10시간 가까이 걸립니다. 그러면 한 번 집에 갔다 오면 몇일씩 가위에 눌립니다, 그 어린 나이에. ??? 무섭습니다. 이 밑에는 막 깎아지른 절벽이고 저기는 시퍼런 강이 흐르고, 여기에 차가 달리는 데 그 때 무슨 아스팔트가 있어요, 뭐가 있습니다. 그냥 신작로고 그리고 그 차도 또 지금 차야 좋지만, 옛날에는 서면 조수가 내려 가가지고 그걸 돌려야지만 가는 차였습니다. 가다가 부속이라도 망가지면 오는 차한테 서울 가서 올라올 때 부속 가져오라 그러고 거기서 언제가 될지 기다리는 그런 처지였는데, 강원도 다니는 운전수들은 또 새파란 젊은이들인데, 얼마나 와일드한지 하여튼 팔도에서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그 고물차를 그 덜컹거리는 길에 들입다 밟는 겁니다, 휘파람 불면서. 이게 길도 말입니다, 산이 이렇게 됐으면 강이 이쪽이면, 이렇게 길을 만들어서 배수로를 파고 차가 이렇게 커브를 돌더라도 이 원심력에 의해서 이탈하지 않도록 도로가 돼야 되는데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냥 달려가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잘 굴러 떨어지게끔. (하하하) 일 년이면 몇 번씩 그 버스가 그리로 다이빙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그것도 겨울에 한 25cm, 30cm된 얼음을 뚫고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모조리 죽는 겁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장마철에는 그냥 지나가다가 길이 뚫어진 것도 모르고 가다가 쳐박히거나 아니면 죽 지나가다가 위에서 낙석이 떨어져가지고 깔리는 겁니다. 요새는 그래도 ‘낙석주의’ 그거라도 써붙여 놨지만, 어떻게 주의하라는 건지 난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 땐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막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이가 토하니까 항상 앞자리에 앉는데, 그 앞자리에 앉으니까 더 무서운 겁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 가가지고 몇 일 씩 밤에 꿈을 꾸는데 낭떠러지 위를 죽 떨어지는 꿈입니다. 목숨 걸고 사실은 귀향을 하는 겁니다. 그 아이도 그렇게 그런 차를 타고 가는데 사람들은 전부다 불안해하는 겁니다. 근데 이 아이는 노래 부르면서 가는 겁니다. 왜? 그 운전수가 자기 아빠인 겁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자기를 저기다 쳐박지는 않을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언제 한 번 ? 인천에서 살 때인데, 신촌에서 너무 늦으니까 이제 택시를 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가 총알택시 정류장이었습니다. 차를 탔는데, 넷이 탔는데, 야~ 출발하면서 130km로 시작을 하는데, 옆에 사람이 친구랑 둘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야! 야! 야! 빨리 달려야지 돈을 벌고 그러지.” “아~! 야! 내가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 엊그제 있지, 내가 총알택시 떴거든, 커브를 풍~도니까 있지, 야~ 이쪽 바퀴가 쫙 들리더니 탁~ 내려가더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코를 골면서 자! 근데 나는 하나도 잠이 하나도 안오는 겁니다. 진짜 주님을 외치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이 아이는 안심하는 겁니다. 왜? 우리 아버지가 운전수니까. 다른 사람은 다 가슴을 졸여도 이 아이는 그 엔진 앞자리에 앉아서 노래 부르면서 가는 겁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등 뒤에서 호박씨 까면서 재미 보는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담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면전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 눈길 앞에서 사는 즐거움이 무엇인가 하는 이해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그 행복을 아는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신뢰하는 삶을 살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죽음의 파도를 넘어, 시련의 폭풍우를 지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 하시는 것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인생을 여러분들이 사셔야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성전 신앙을 생각해야합니다. 물론 다윗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아직까지도 성막이었고 그리고 성전은 아들 대에, 솔로몬 대에 지어지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성소라고 불리는 이 곳은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성전을 지을 것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성전은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이제 멈춰야 될 때가 되면 구름 기둥 혹은 불기둥이 서고 그리고 거기에서 텐트를 치면 그 텐트는 여호와의 집이 되고, 그 여호와의 집을 중심으로 열두지파가 자리를 잡으면서 300만 명가량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서 야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하늘위에서 내려다보면 하나님의 집이 정중앙에 있고 그 다음에 그 집을 중심으로 열두지파, 300만 명 가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거기에 지파별로 그 다음에 족속별로 가족별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성소신앙, 혹은 이 후로 이어지는 성전신앙, 여호와의 집 신앙은 무엇이었냐 하면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고백한 대로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할 수 없거든, 하물며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작은 집에 어떻게 지존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실 수 있겠습니까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니은 성전보다 뛰어난 분이시고 그리고 창조된 세계보다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어디든지 주님이 안계신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입장 사절이라고 써붙여도 하나님은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그 만남의 장소를 만드시고 거기에서는 특별한 만남을 주시기로, 언제나 자주 만나주시기로 약속까지 베풀어주십니다. 거기가 바로 교회이고 성전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성막이고 성소였습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자주 찾아오셔서 거기서 그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당신을 찾을 때에 하나님이 가장 잘 만나주시기로 약속한 곳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성전이요, 교회 성소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역사를 보면 나라의 위급한 일이 있어도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주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여러분들은 믿음의 사람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미 한 나라의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누구든지 왕 이외에 다른 신들에게 절하거나 무엇을 구하면 그를 사자굴 속에 던져 넣겠다 라고 하는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동쪽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랬던 겁니다. 요나 선지자는 불순종해서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니느웨로 안가고 다시스로 도망친 배신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가 그를 삼켰을 때에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면서 그 물고기 속에서 고통을 하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때에 이 요나가 그 물고기 속에서 탄식하며 회개할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을 바라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한나가 여호와의 집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던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해서 첩에게 당하는 설움을 면하기 위해서 아들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상처 받은 마음을 부여안고 하나님의 집을 찾았고 거기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으로 가고 그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내려오고 그 하나님의 집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시편42편에서 다윗과 함께 망명의 길에 올랐던 시인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목 마릅니다 라고 고백을 하면서 추억했던 사실,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성일에는 많은 무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지금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는 곳에 내동댕이 쳐져있습니다 라며 눈물짓던 이유도 바로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신앙이, 보이는 하나님의 집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정말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 그리고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바로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짐승과 방불하게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창조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위탁하신 그 진리를 보여줌으로써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어떻게 여기 살아있으며,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래서 그로 하여금 어두운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곳,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끔 살고, 그래서 그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그 인생을 탁월하게 만들어주는 그 일을 섬기는 하나님의 도구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그래서 교회는 예수 믿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족을 누리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이 교회는 어두운 이 세상을 섬기는 주님의 손이고 주님의 발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데가볼리로 요단강 건너편으로 사마리아로 유다로 다니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 모든 곳에 세워놓으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셨더라면 세상을 위해서 섬기셨을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워놓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에게는 항상, 주님을 만난 성도들에게는 항상 주님을 만나게 해준 하나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베풀어주신 말씀의 은혜가 있고, 자기와 같이 막돼먹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수고했는지 자기는 모릅니다. 애들이 키워놓으면 저 잘나서 큰 줄을 알듯이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겼던 수 많은 사람들의 눈물어린 희생과 그리고 헌신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갔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앉아서 예배드리는 편안한 공간을 위해서 노후의 염려를 마다하지 않고 힘에 넘치도록 헌금한 성도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캄캄해서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지도 모르던 캄캄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여러분들의 그 어두움을 찢고 한 줄기 진리의 빛이 들어와서 나라는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하나님이 왜 내 인생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지 깨닫고 미력이나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 라는 소원을 갖게끔 신앙이 들어가게 될 때까지 주님이 그 일을 하셨지만, 그 일의 도구가 되었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의 섬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애달픈 헌신,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멀게는 한 장의 휴지를 집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가깝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꼴로 먹여주던 목양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빚을 진 가운데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 중 누구도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을 그 사람들이 섬겼지만, 그 사람들은 사람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던 짐승과 방불한 그 비참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감격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섬긴 것입니다.
그럼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훌륭하게 존재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모두가 이 어두운 세상에 나아가서 한 사람, 한 사람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 어떤 힘과 능력을 공급해주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그러한 역사가 나타나서 어둠 가운데 있던 영혼들이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 어느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 그것을 알고 싶지만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진리를 통해 알고, 또 그 길은 알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이 곳에 와서 그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은 누구 한 사람의 힘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치는 기도와 수 많은 사람들의 몸을 드리는 헌신과 수 많은 사람들의 물질을 바치는 희생과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그 순종하는 삶의 모든 총체가 어우러져서 하나님이 한 교회를 보시면서 기뻐하시기도 하고 마음 아파하시기도 하고 슬퍼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면 교회 자체가 커다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놓는 겁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어두움 속에서 그렇게 슬피 울며 방황하고 고집대로 영 죽을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갔을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변화되어서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 지 이제야 아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그렇게 어둠 속에 살던 사람, 여러분 하나가 변화되어서 나를 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는지를 알고,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렇게 선한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값을, 그 값어치를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이 여러분 인생만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안에도 회심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인생도 여러분들의 인생만큼 소중합니다. 그러니 그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섬기고 그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고 그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울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투자하고. 뿐만이 아닙니다. 눈을 들어서 희어져 추수하게 된 세상, 얼마나 많은 지. 우리도 주님을 몰랐더라면 저렇게 허망하게 살다가 허망하게 죽었을 터인데, 어둠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빛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가 어디로부터 났고, 그리고 우리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 세상에 먹고 입고 마실 것들을 추구하며 땅의 자원을 빼앗으며 일생을 악하게 살다가 죽을 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진짜 마음을 까서 여러분들에게 버선목처럼 한 번 보여주고 싶습니다. 큰 교회를 해야 되겠다는 꿈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교인이 반으로 줄면 나는 교회 땅 반 잘라서 선교에 쓰겠습니다. 그 왜 아깝게 남겨놓습니까, 다른 사람 주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재미가 없습니다. 복도에서 만나 인사를 해도 저 사람이 누군지, 무슨 사연을 안고 우리 교회에 왔는지 모르는 가운데 그렇다가 사랑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수하고 반갑지만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래도 교회 한 구석에 와서 말씀을 듣고 진리의 빛을 보고 예전에는 하나님이 왜 자기를 창조하셨는지 죄악 된 세상에서 사자와 이리에게 뜯기면서도 왜 자신의 영혼이 공격을 받는지 몰랐습니다. 깨달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품에 깃들어서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가라고 하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나아가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말하지만 여러분들이 직접 세상에 나아가서 몇 명의 영혼을 건져서 그 사람의 인생에 여러분과 같은 빛을 갖다 주었습니까? 그런데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마당을 쓰는 것도 결국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화장실을 한 번 청소하는 것도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낸 헌금을 가지고 전도지 찍고 선교사 보내고 목회자들이 그 돈 가지고 자동차에다가 휘발유 넣고 돌아다니면서 여러분들이 갈 수 없는 영혼들에 나아가서 예수의 사랑전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더군다나 나는 말입니다. 그대로 젊었을 때는 조금 낫습니다. 그런데 머리 허옇고 나이 많이 먹어서 그래서 정해진 교회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왜? 이제 인생의 남은 날들이 없지 않습니까? 이제 한 곳에서 주님이 깊이 내게 주신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 교회를 사랑하고 그 목자를 사랑하고, 말씀의 가르침의 떡을 떼고 그리고 전부 자기처럼 연약한 성도이지 않습니까? 누가 위대한 용사가 우리들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상한 갈대와 같이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모두 길 잃은 양이었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서, 약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로 기대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고통 받는 자에게 위로를 주고 곤궁한 자에게 내가 있는 물질을 나눠주고 그리고 우는 자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고 그러면서 서로 기대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경쟁 관계나 갈등 관계가 있어서는 안되는 겁니다. 모두 한 아버지 아래에서 한 자녀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나의 물질의 섬김을 받은 다른 지체가 선교사가 되어서 가서 내가 못전하는 예수의 사랑 전하고 그리고 나는 도저히 지혜가 부족해서 가르쳐서 다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없는 굳어진 지체들을 위해서 내가 무릎을 꿇고 섬기는 기도의 힘을 받아서 교역자들이 가서 나를 대신해서 울어주고 나를 대신해서 그를 ?원해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는 모두 한 몸이 되어서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실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보이는 교회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말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두 번째 불행한 사람들은 뭐냐면 사랑할 교회가 없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는 한 두 사람 때문에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자기네들끼리 일어난 작은 갈등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접는 사람들은 형제끼리 싸우고 아버지 얼굴에다가 뺨을 때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삶이 복될 수가 있겠습니까? 들판에 여름날에 무성하게 자란 풀, 낫으로 잘라서 옆에다가 눕혀놓으면 금방은 벤 풀과 자라나는 풀이 같이 보이지만 두 세 시간 햇볕을 쬐고 나면 벤 풀은 속히 마르고 베어지지 않은 풀은 더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5년 전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라도에 있는 어느 기독교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이 예배실에 모여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헌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도 울고 간호사들도 울고, 그 옆에 있는 어느 집사님도 울고 직원들도 울고. 사연인즉슨 어느 시골에 교회가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너무 가난하고 교인이 열 명도 안모이니까 목사님을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비극은 참 우리 대에 없어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있고 하니까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계시다가 떠나가고 어쨌든 없습니다. 장로님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장로님도 없어서 할 수 없이 이 오십 줄에 들어선 집사님이 낮에는 날품을 팔고 일을 하고 그리고 저녁때는 교회에 와서 저녁 예배를 인도하고 할 수 없이 이 목사님 저 목사님 모셔다가 설교를 듣기도 하고 없으면 자기가 설교를 해야 되는 그런 기묘한 상황이 됐습니다. 이 교회당을 보면서 늘 가슴이 아픈 겁니다. 그게 뭐냐면 판자대기 같은 걸로 해서 이 텐트 쳐놓은 것같이 초라한 겁니다. 그래서 몇 사람 안되는 교인이지만 기도하고 그 가난한 교인들이 애를 써서 일 끝나고 오면 밤에 가서 시내에 가서 모래를 퍼다가 그 교인들의 애타는 돈을 모아서 시멘을 몇 포대씩 사서 그걸 짖이겨서 밤중이면 몰래 그 벽돌을 만들어서, 살 돈이 없으니까 그래서 교회를 다시 지었습니다. 블록을 쌓아서 교회를 짓고 그 함석지붕이라도 얹어가지고 그렇게 예배당을 저 도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꼴적지만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감격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도 참 무심하시지 그 지어 놓은 지 얼마 안돼가지고 진짜 몇 십 년 만에 유래 없는 태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 건축적인 고려를 하면서 지은 것도 아니고 그냥 벽돌 저금저금 올려놓고 한 것이니 그냥 비가 오면서 그러면서 태풍이 불어오니까 지붕은 날아가 버리고 교회당은 그야말로 폭격 맞은 것처럼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안타까와 하면서 그 벽돌을 주워내고 다시 텐트를 씌워놓으니까 옛날 모양보다 더 초라하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남편이 부인보고 잠자리에 누워서 물어보는 겁니다. 여보. 왜? 내가 만약에 눈 하나 없는 장애인이 돼도 안버리고 나 데리고 살거야? 그럼 그래도 남편인데 눈 하나 없다고 안데리고 살어, 당연하지. 정말이지? 그럼. 몇 일 있더니 심각하게 부인한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보, 나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 좀 들어줘라. 그래 뭐냐. 내 눈을 좀 팔아야 되겠다. 그래서 신문을 내놓는데 보니까 ‘눈을 삽니다’ 이렇게 써있는 겁니다. 뭐냐 그랬더니, 이 병원에다 연락해보니까 눈을 사겠다는데 안구를 기증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겠다 그러는데 내 눈을 팔아서 이 교회를, 무너진 교회를 다시 지어야 되겠다 그랬더니 부인이 하는 이야기가, 내 건축헌금이라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건축눈깔이라는 얘기는 처음 들어봤다는 겁니다. 돈이 있으면 하는 거지, 빚을 내서 헌금을 한다는 얘기는 내 들어봤는데 눈을 팔아서 헌금을 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난 못한다. 그렇게 해서 눈이 없어진 남편하고 내가 어떻게 사냐. 밤마다 밤마다 이 남편이 부인을 조르는 겁니다. 조르다 안되니까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면서 드러누워서 잠자리에 드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너무 심경이 괴로워서 기도를 했더니 이상하게 평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신 뜻대로 하라 그랬습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서 이 사람이 그 병원을 찾아가서 원장님을 만났습니다. 더도 필요 없고 난 오십 만원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내 눈을 오십 만원에 사시오. 이유가 뭐냐? 이유를 알기 전에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장기를 매매할 수 없다. 그러면서 마지못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병원의 원장님이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 집사님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랬습니다. 나는 장로가 된지 이 긴 세월이 지났어도 한 번도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해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은 나만도 못한 집사로 네 몸의 일부를 떼어서 팔아서 교회를 지을 생각을 했느냐.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죄송해서 한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고는 방송을 해서 점심시간에 직원들을 올라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돈을 몇 배가 나왔습니다. 아내는 이제 눈 빠지고 돌아오는 신랑 기다리는데 두 눈을 멀쩡하게 달고 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교회가 지금도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속히 지나가는 건지 모릅니다. 전 시간이 나면 금요일마다 제가 어릴 적 자란 고향에 가서 설교 준비를 하고 옵니다. 한 주도 그냥 지나칠 때가 없습니다. 어쩜 그렇게 세월이 빠릅니까. 45년 전에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서 안간다고 몸부림 치면서 가서 이빨을 뽑던 병원도 그 자리에 있고 어렸을 적에 다니던 유치원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걸어 다니며 학교 올라가던 길도 거기에 있고 집은 많이 들어섰지만 흐르는 개울도 예전의 그 개울 그대로입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얼어붙은 개울에서 형들하고 얼음을 지치고 팽이를 치던 그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를 하고 연을 날리는 형들 옆에서 언 손을 호호 불며 구경하던 일들이 불과 이삼 주 전의 일 같은데, 4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마룻바닥에서 알록달록한 색깔로 만든 나무 블록을 가지고 놀 때에 우리를 챙겨 주시던 그 선생님. 얼굴은 기억이 안나지만 아리따운 처녀였던 그 선생님들은 아마 지금쯤 모두 고인이 되셨을 것입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신작로, 그 풀섶, 지나가는 버스 소리, 장날이면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4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나온 세월만 그렇게 빨리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빨리 가고 있고, 앞에 있는 세월도 그렇게 빨리 갈 겁니다. 고향 길을 지나가면서 언제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잠깐입니다. 남은 생애 동안에 여러분들이 무얼 이 세상에 남기고 가시렵니까? 하나님을 위해 역사할 수 있는 교회.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며 저 성전돌 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예수 크신 복음을 만백성 듣게 하옵소서. 교회다운 교회를 남겨놓고 우리의 영혼을 울려 퍼졌던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았던 주 예수 크신 복음을 후대에 수 많은 우리 자손들이 듣고 이 땅의 어두운 세상에 있는 예전의 우리처럼 희망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교회가 되기까지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헌신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다가 고난이 오면 인내하고 기도하고 부지런히 성도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죄를 이기고 투쟁하고 싸우고 그렇게 온전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러다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는 겁니다. 그러다가 죽는 겁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에 죽는 겁니다. 무슨 특별한 것이 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 그 때에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 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회에서 목자의 품에 안겨서 임종을 한 후에 그 곳에서 영결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사랑하는 후손들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리는 그 무리들을 빠져나가서 나팔소리와 함께 부활할 때까지 잠시 누워있어야할 매장지를 찾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기쁨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날에 주님을 위해서 신실하게 섬겼던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서 만나서 우리를 구원하신 어린 양 예수를 찬양하고 이 땅에 남겨놓은 열린 교회와 또 다른 조국의 교회를 위해서 주님 앞에 열심히 우리는 거기서도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크신 복음이 교회를 통해 울려 퍼지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주도록 그게 성도의 인생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아름다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이겁니다. 얼마나 가슴 떨리고 복된 축복이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고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서 그래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희생하고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그렇게 살다갈 때 사람은 몰라줄 수 있어도 그러나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모두 기억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인생을 살다가 주님께 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23편 강해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