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에 가까이 오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시 69: 18)
17절에 이은 계속되는 탄원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앞에 자신의 영혼에 가까이 해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사실 여기에 영혼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영혼일 수도 있고 혹은 목숨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 이것을 의미 할 수 있죠. 그래서 아마도 육체의 생명이 영혼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어느 번역이든지 좋은데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소서 생명도 어울리는 것 같해요. 자신의 생명이 지금 이 원수들에게 애워쌓여 있어서 위급한 가운데 있으니깐,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에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래서 자기를 구속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뒤에 나오는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라고하는 것은 결국은 같은 단어의 병행법적인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원래 이 구속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출해 내시는 그런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약에서는 우리를 외적이고 환경적인데서 견져 주시는 것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것으로 계시가 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으로서 그것들이 밖같으로 드러나면서 그 증거로서 우리의 외적이고 환경적인 것들을 구원해 주시는 이러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제 구약과 신약이 차이가 있는 복의 개념과 아주 유사하다 이렇게 생각 하시면 됩니다. 내 영혼에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라고 했으니깐, 자신이 원수들에게 싸이고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가 아니며는 벗어 날 수 없는 속박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속박은 자기자신의 내부로부터 올 수 도 있고, 혹은 밖으로부터 올 수 도 있습니다. 어떤 속박은 있는 것을 없애버려야 지만, 속박이 해방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속박은 없는 것을 공급 받아야지만,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물질적인 가난이나 이런 고통은 공급해 줌으로써 속박에서 벗어 날 수가 있죠. 반대로 자신에게 죄가 있다든지 아니며는 원수들로부터 고통을 받는 다든지 할 때에는 은혜로 죄를 제거해 주시고 또, 외적인 환경속에서 언약백성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을 처벌 하심으로서 그들을 구속하시는 것이죠.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 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구속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죠.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시인이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과정을 거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시인은 이제 자신의 영혼을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라고 노래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가까이 하시는 것과 멀어지시는 것 사이에 의미를 충분히 체득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깐,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멀어 지셨을 때에 그때에 자신의 마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은혜로 부터 멀어 질 때에 자신의 삶에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 가하는 것들을 너무나 잘 깨달았던 것이죠. 그런 깊은 고통과 괴로움을 충분히 경험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까이 하사라고 하는 이것은 굉장히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의 삶이 모든 질서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주권을 보여 주는 가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질서들을 우리의 영혼과 가까이 하시는 그 모든 친교를 통해서 그 질서들을 재편하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 자신을 앙망하는 자에게 주님 자신이 우리의 영혼에 은밀한 일을 행하시는 역사를 통해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에 많은 질서들을 움직이시는 그 모든 변화의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거룩한 뜻들을 보여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역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변화들이 그분의 능력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죠. 그래서 삶이 모두 평안하고 많은 질서들이 자기가 원하는 어떤 상태에 있다가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그 모든 질서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파괴되는 거죠. 그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비로서 이 모든 질서가 자기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죠. 그래서 눈에 보이는 수많은 삶의 질서들 자신의 육체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그러한 현실적인 그 질서 보다도 오히려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깊이 두려워하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것 들이 또다른 가치관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니깐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 그의 마음과 그다음에 그의 신앙의 상태가 미래의 그의 삶이 어떻게 형성되어 질지를 보여주는 이미 나침판이 되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고 붙들고 계시다고 하는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죠. 그래서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이 가까이 한 것이 었고 가장 큰 재앙은 주님이 자신에게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은 다윗에게만 있었던 사상이 아니였습니다. 또 다른 시인들도 자주 언급한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 것이 자신의 복이라 는 고백도 바로 그런 고백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에 가까이 계실 때 그때에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내실 수 있고. 자기의 원수들 즉 자기를 미워하는 수많은 대적들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속량해 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속량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값을 지불하고 대신 그것을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만약에 자신이 그런 어려움속에 있게 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었다면,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래서 나를 그런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 내시는 거죠. 마치 자기의 아들이나 노예가 잘 못된 일을 해서 손해배상의 책임을 지고 누군가에게 억류 되어 있을 때에 주인이나 아버지가 와서 대신 돈을 물고 그를 건져 내는 것처럼 그렇게 해 주는 거죠. 무엇 때문이죠! 사랑스런 아버지가 아들이 커다란 사고를 쳐서 엄청난 배상의 의무를 지고 있을 때에 그것을 버려두고 있지 않고 자신의 재산의 손실을 각오 하면서도 그 아들에게 다가가서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정당하게 배상을 하고 아들을 찾아오는 이유, 혹은 너그러운 상전이 그 종을 그렇게 구해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재물의 엄청난 손상을 보면서도 그를 다시 건져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관계 때문이에요. 관계! 그 사람과 자녀와, 종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 그것 때문에 그 관계에 대해서 헌신하면서 희생을 감수 하고 사오는 것이에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 그 차체는 끊임없이 관계에 집착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그 관계를 함부로 하고 무시하는 거에요. 당신이 내 아내라도 내 남편이라고 이렇게 하면 어때? 그 관계를 무시하는 거에요. 자식이라도 부모라도 맘대로 하면 어때? 그리고 내가 내 맘대로 하는 데, 이것 때문에 당신이 나와의 관계가 나빠져서 우리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불편함이 생겨도 나는 상관이 없다! 이런 것이 바로 이기심이고 사랑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그래서 의지적이에요. 그래서 사람을 의지한다 이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의지적 이라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성품 때문에 계속해서 발현되는 사랑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 할수록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리 많이 사랑하셔도 우리를 의지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사랑의 아름다움의 원인이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모든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열성의 원천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면 기도를 많이 하게 되요. 왜냐하면 주님을 많이 의지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최고의 표현이 기도에요. 그러니깐 기도를 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연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에 이 기도는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감정에 비례하게 되는 거에요. 도덕적으로 떳떳하고 올바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기도를 더 잘하는 거에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세인과 세리의 비유가 그 사실을 아주 적실하게 말해주고 있잖아요. 누가 보더라도 바리세인은 떳떳하고 흠잡을 때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죠. 그러나 주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이 사람이 훨씬 강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어도 역설 적이죠. 기도하게 되는 거에요. 물론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거에요. 죄를 지었을 때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언재나 교만하기 때문에 모든 외적인 삶과 형편들이 내 맘대로 되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넉넉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그래서 사실은 역경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 역경을 통해서 우리자신도 모르는 그 마음도 알게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거에요.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그 하나님을 만나는 최고의 자리가 손 바닥 만큼도 안되는 우리의 마음이에요. 그리고 그 마음의 가난함과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의존 그 안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거에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믿음 생활 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를 구속하시고 속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데,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때 까지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멀리 떠나고 버리신 것처럼 우리를 나두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싫어 버리신 것 이라기 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향한 의존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갖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외적인 삶에 아무리 복을 주셔서 그래서 모자란 것이 없는 삶을 산다고 할 지라도 그렇다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의존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바라는 거에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축복들을 인해서 우리가 걸려 넘어지거나 혹은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더 집중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을 하나님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보시는 거에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