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석이요 산성이신 하나님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시71:3)
녹취자:장형주
팔레스타인에는 바위산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위에는 구멍들이 나 있어서 침식작용이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동굴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 동굴이나 아니면 움푹 파인 곳에 숨게 되면 사람들이 알아볼 수도 없거니와 설령 먼 곳에서 알아본다고 할지라도 화살을 쏴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바위가 사람을 보호해 줍니다. 그런 바위가 암시하는 건 뭐냐하면 자신에 대한 완전한 보호 그리고 은신, 은신처, 보호처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그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냐하면 시인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쫓기는 삶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수시로 이렇게 피하여 숨고 피할 바위가 하나님이 되어주십사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그런 바위에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전쟁과 같은 상황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떠해야 하는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삶은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할 마땅한 본분만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던 그 생애를 통해서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당신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신 것을 보면서 ‘만약에 우리가 참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그 믿음을 지키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런 동일한 환난과 시련을 우리도 당하게 된다’ 라고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시련과 고난을 수시로 당하면서 살면서 불안정한 삶속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의뢰하셨던 것처럼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그것이 우리 인생의 마땅한 길이라는 것을 시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요 산성이시니이다’ 성경에서 보면 누구에게 나를 구원하라 하셨는지 불명확합니다. 이렇게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에 보면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없게 나옵니다. ‘주께서 누구누구에게’ 라는 것은 없고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제 생각에는 간접목적어가 생략되어있지만 그러나 아마도 여기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할 때 이것은 천사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피조물을 염두해 두고 아마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종종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 나를 치료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목적어가 되는 경우고 있고 천사가 목적어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 말씀이나 천사나 이런 대상에게 명령을 하셨다라는 그런 의미라고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시인이 시련과 고난을 만나면서도 굳게 붙들었던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라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확실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이 시인이 가지고 있었던 아주 강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명하셨는데 그 명령이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이미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라고 하는 것을 그 요동치는 삶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수시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그 일은 인간이 아무리 그에게 거스르게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 이 시인의 주권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를 구원하는 그것이 나의 뜻이나 생각이 아니라 내가 나를 구원하는 이것 자체가 구원받으려고 몸부림치는 이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을 받드는 일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인은 어떠한 원수들이 자기들을 에워 싼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인간에게 있어서 이 절망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든지 인간이든지 간에 누구를 향한 그 원망의 마지막 끝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떠한 삶의 상황속에서도 원망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향해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든지 원망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인간의 본분은 이것을 조용히 당하고 견뎌야 한다’ 라고 생각을 하면 믿어야 이것을 이기고 견디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게 필요하고 두 번째는 무엇이냐 햐면 그것만 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없고 또 하나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자신이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더 나은 상태가 되기를 갈망해야 됩니다. 물론 그것은 신앙적인 견지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그러는 그 마지막 끝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 그것이 전부 다 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결국 뭘 보여주냐면 전쟁의 문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할 때 군사의 수도 문제가 되지만 어느 지형, 지물을 이용하고 전쟁하느냐에 따라서 평지에서 싸우면 질 수 밖에 없는 군대들이 유리한 고지에 있으면 지지 않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적군에게 계속 손해를 입힐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여기 가까이에 있는 남한산성을 보면은 ?를 올라가서 보면 정말 100명이 공격을 해도 1명이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아주 천해의 지형, 지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전쟁 그것이 바로 나의 산성이십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며 살아도 그것이 어떠한 시련과 고난도 안 만난다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게 아닙니다. 끊임없이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어도 그것들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면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 똑같이 시련과 고난의 길을 걸어도 전에는 혼자 몸부림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을 견기고 소망을 가질 수 없는 비참한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면서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이고 믿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