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찬양할 때 1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를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 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시 71:22~23)
녹취자 : 한지인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 탄원을 모두 올린 후에 이 시인은 이 시 전체의 마지막을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두절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앞절에서는 우리에게 찬송의 제목을 가르쳐주고 뒷절에서는 그렇게 찬송할 때에 찬양하는 이 시인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구치고 감격으로 떠오르게 됩니까? 남이 찬송을 부르자고 시킨다고 해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찬양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찬양에는, 우리가 찬양하고 싶을 정도로 충분히 우리 마음이 정돈되지 않았어도 찬양을 함으로써 흩어졌던 마음을 집중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정돈이 일어나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고유한 의미에서 살펴본다면, 제일 먼저 우리에게 찬양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일들이 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정돈되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우리의 심령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그런 경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인이 이렇게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기도하는 이 모든 간구와 회상의 과정을 통해서 이 시인의 마음속에 깊이 다가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성실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토대로 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속성의 또 다른 적용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진리에 합치하여 당신 자신에게 모순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어떤 때에는 미덕이 되지만 어떤 때에는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악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진리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고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고 계시다는 증거들을 내 마음속에 성령으로써 인 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며 살기에는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신념을 견지하고 이 신념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등져야하고 믿었던 사람들과 관계가 깨뜨려지기도 하고 혹은 시련과 핍박에 직면해야하는 일도 있고 그 신념을 포기했다면 칭찬받을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생겨나게 된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과 부합하도록 일관성 있는 삶을 살게 될 때에 그것은 아주 덕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의 지조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불굴의 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참스러운 사랑에서 이탈하게 되었을 때, 우리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왜곡된 것이라면 자신에게 충실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악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첫 번째가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처럼 진리의 빛 아래에 있을 때에는 우리 자신과 합치하는 삶이 덕스러운 삶이고, 진리의 빛 바깥에 있을 때에는 우리의 온갖 사욕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충실하게 합치한 삶을 사는 것은 진리와의 정합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고 당신 자신이 그 진리에 모순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합치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성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이 맺으신 피조물들, 특별히 인간에 대해서 당신 자신이 진리이고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이 당신 자신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일관되게 피조물들에 대해서 같은 진실성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성실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가 어떻게 살던지 똑같은 태도로 대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모가 인격이 진중하고 성품이 진실하다면 자식들을 대할 때도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의 삶이 일관성이 없을 때,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내일은 유격대로 살다가 모레는 방탕하다가 글피는 다시 회개하고 말씀으로 돌아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부모가 이런 진실성을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을수록 그 태도는 아주 뚜렷하게 변화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가운데 자식이 거하면 사랑하고 칭찬하고 좋은 것을 주고, 그 다음에 그것을 버리고 방탕한 길로 가면 회초리로 때리고 야단을 칠 것이고, 돌아오면 용서해 줄 것이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예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식처럼 방탕한 인간이 되어서 인간의 입장에서 그 부모를 들여다보면 아주 요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오늘은 예뻐하고 내일은 때리고 모레는 용서하고 글피는 다시 사랑하고 그 다음날은 다시 또 두들겨 패니까 아주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변덕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부모 자신이 변덕을 부리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진실성의 표지 때문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내 자식을 이끌겠다라고 하는 그것이 아주 분명하다라고 하는 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햇빛이 언제나 우리에게 비추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좋은 것들, 좋은 대로만 대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진실성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말하자면 성실성입니다. 그 한 예가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다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유다가 망한다고 외쳤으나 듣지 않았고 시위대의 뜰에 가두고 죽을 고생을 시켰습니다. 결국 그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망했습니다. 일어나서 보니 예루살렘은 겁탈당한 부녀자처럼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방인들의 말발굽아래 짓밟혀 완전히 파멸된 그 성을 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노래했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무엇이 성실합니까.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고 예루살렘이 다 파괴되었는데. 그러나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렇게 산산이 무너진 예루살렘을 보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은 성실하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이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직까지도 이 백성들과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성실하심 때문에 이 시인의 가슴이 벅차며 하나님을 찬송할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고 합시다. 아주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연주를 안하시는데 언젠가 한번 김영옥씨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중계방송을 봤는데, 연주를 하는데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객석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많이 회개했습니다. 저렇게 작은 악기 하나를 연주해서 거기에 어떤 진리에 대한 메시지가 있겠습니까. 물론 헤겔이 말한 것처럼 조화와 비율 그 가락들 속에 또 하나의 어떤 진리에 대한 감각 경험이 있겠지만, 저 작은 악기 하나로 저렇게 땀을 흘리며 연주하고 저 많은 사람들이 들리는 소리 언어하나 없어도 가락을 느끼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뛰어난 기량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활을 가지고 현을 마구 오가면서 현란한 연주를 하는 그런 탁월한 재능이 있어도 만약에 누군가 줄이 없는 바이올린을 가져다주면 소리를 내어 연주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모든 환경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연주하실 수 있는 바이올린의 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에 들린 그 활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리고 하나님이 작성하신 거룩한 뜻의 악보로 연주될 때, 그 때 거기에서 온갖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 활에 쓸리는 현은 아프겠지만, 그 아픈 현의 마찰을 통해서 아름다운 곡이 그 통에 울려 퍼지고 그것이 공연장에 울려 퍼져 객석에까지 들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다양한 환경은 모두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여주는 곡조를 연주하는 도구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이 곡조가 들립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련이 계속되는 환경 속에서는 그 줄을 울리면서 들리는 가락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알게 되고 또,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는 그것을 줄로 하여 울려 퍼지는 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가 무엇일까요?
(찬양)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할 이유가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지, 이유 없이 사랑할 순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앎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앎입니다. 그리고 그 속성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한 앎이 우리의 마음에 울려 퍼질 때 우리가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울려 퍼진다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들이 처한 환경들을 모두 사용하셔서 당신의 속성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정말 마음 둘 곳 없는 요동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수많은 악인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아마 살면서 많은 배신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 많은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 오히려 요동쳤기 때문에 성실하신 하나님,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하나님의 성실하심. 우리 인간의 성실함은 시종일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실함은 그렇지 않고 아침마다 새로운 성실하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날마다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빛줄기 하나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커다란 지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이것들이 울려 퍼지면서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하나님의 큰 뜻입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때에는 주의 성실하심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찼을 때였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 성실하심을 보이나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은 성실하시지만, 성실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 성실하신 성품에 어울리게 사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에게 하나님은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사랑하고 내일은 때리시고 모레는 어루만지시고 글피는 용서해주시니까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세상은 신실하지 않고 늘 요동칩니다. 그 속에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면서 주님 말씀을 따라 일관된 삶을 살려고 애를 쓸 때 우리는 도처에서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친구들이 나를 버릴 때에도,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이 나를 속일 때에라도 그때라도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 신앙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