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시는 왕의 통치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시 72:12-14)
녹취자: 박지성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판단력과 주의 의를 왕과 왕의 아들에게 주면 그 왕들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 그리고 주의 판단력과 의를 구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 구절에는 ‘건진다’, 다시 말하면 ‘구원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후 이 세상에 하나의 기관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가정입니다. 창조한 이후로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셨고 그것이 곧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는 적극적으로 세우셨던 것을 보면 타락하지 않았어도 교회는 존재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형태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극적으로 허용하여 세우신 제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와 교회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려가는 두 개의 아주 중요한 기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국가로는 우리의 외적인 생활을 관장하게 하셨고 교회로는 우리의 내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을 관장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올바른 공의,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러한 공의의 시행을 보며 타락한 죄인들은 이웃에 대해서 함부로 죄를 지으려는 욕구를 억제하고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렇게 국가가 올바르게 하나님의 정의에 맞게끔 공정한 사회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 국가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타락의 상태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국가의 공정한 통치 속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며 온 마음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실한 사랑을 부어주어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착하고 신실한 내적인 경건을 실재 나라가 이 백성들을 통치하는 법에 맞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의 법을 지킨 결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지킨 결과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를 온전히 다스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국가와 교회를 세워 놓으신 두 뜻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그 고유한 일에 충실해야지 교회로 하여금 국가의 권력을 업고 자신에게 좋은 어떤 일들을 도모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을 이용한다든지, 아니면 국가가 자기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교회와 결탁해 교회를 세력화해서 힘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는 이렇게 미묘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국가가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국가는 어차피 타락한 죄인들에 의해서 타락한 죄인들을 위해서 다스리므로 흠결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공평과 정의를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공평과 정의에 따라서 백성들을 통치해야 될 국가가 현저하게 그 원리를 위반합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억울하게 박해하고 정의의 원리에 현저히 어긋나게 행동할 때 이 때는 국민은 그 국가에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유명한 저항권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권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굽게 하는 통치를 실현하고자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은 현저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이때 국민은 분연히 일어나 이러한 정권을 타도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러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이러한 정의의 원리에 입각해 백성들을 다스리고 또 한편으로는 외적의 침입에서 국가를 보호하고 백성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국가는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것보다는 올바르게 살게 하는데 존립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국가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을 통하여 선과 악이 무엇이고 그 선과 악에 대해서 당연한 귀결과 보상이 있고 갚음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잘못할수록 사회에는 부패와 더러움이 넘치게 됩니다. 이런 모든 나라들의 부패와 더러운 상황이 궁극적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 시대의 왕 한사람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왕 한사람이 정말 정의롭고 공정하게 하나님 앞에 깨끗한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가능합니다.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국가가 못할 때 백성들은 국정권에 복종해야할 의무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바로 이런 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판단과 의가 국가의 고유한 임무를 감당해 나가는데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건 간에 궁핍하고 도울 이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압제와 박해의 대상이었고 약탈과 수탈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권력과 무력, 힘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을 집행하는 나라의 행정부도 중요하지만 입법부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법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입법부에 있는 사람들이 법을 온전히 만들지 않고 잘못 만드는 것은 커다란 불공평과 죄악을 온 나라에 허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법은 길과 같아서 길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다녀도 소수가 다니고 또 다니는 사람이 가책을 느끼면서 다니지만 길을 만들어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왕래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법을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원칙에서 어긋날 때 그 법은 사실상 백성들에게 복종을 강조할 수 없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죽으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 믿는 철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후대에 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서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유신시대에 사회 교과서에 이런 일들을 잔뜩 집어넣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무엇을 보여 주느냐하면 당시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라고 하는 작은 국가를 이루었는데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폴리스는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수천만 명, 수억만 명의 국민들이 나라를 이루고 자유롭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폴리스에서 태어나 그곳의 시민이 되어서 한 씨족처럼 가족처럼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나라가 씨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 가장 개념 없는 행동을 한 자기의 종씨에게 내리는 최고의 무거운 형벌이 ‘우리 마을을 떠나라.’였습니다. 이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법을 만든다는 것은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법부입니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만들어 놓은 법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거나 법을 집행한 정부를 재판합니다. 이렇게 재판을 하는 사법부는 법을 집행하므로 공동체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법의 정신에 따라서 올바르게 사건을 판단하고 그 판결의 결과가 이 세상에 올바를 법을 세우는데 이바지 하도록 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금권과 뇌물 같은 것들로 얼룩져서 재판을 굽게 하고 사실의 판단을 굽게 하여 정의와 공평에 어긋난 판결을 내리는 것이 보편화 될 때 이것은 세 부서가 짓는 죄 중에 가장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돈이 있으면 무죄이지만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 그러합니다. 이런 현실들은 잘못된 것이고 자본주의의 논리가 법질서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현저히 국가의 목적을 위반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다시 말해서 불완전한 정부의 불공평과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할 신자의 의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주님의 권고, 그리고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라’는 신약의 명령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우리들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경의 가르침의 빛에 우리자신의 삶을 두어야 합니다.
어쨌든 이 왕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의 판단과 의를 주셔야만 하나님의 종들인 왕이 궁핍하고 도움이 없는 자들을 건져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국가에서 정의를 베푸는 동기 자체가 백성들에 대한 긍휼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국가권력에 더 잘 복종하게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아주 엄격한 정의를 요구하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형벌하는 것은 정의를 구현해가는 올바른 동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시편의 맥락으로 보면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마음, 왕의 마음 안에 긍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백성들을 향해 백성들의 비참한 형편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슬픈 마음입니다. 이것이 정의를 수행하는 동기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수행하는 동기를 통제하고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를 수행하되 동기가 서슬 시퍼런 통치를 통해서 왕권을 가진 자기를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돼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자신은 정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정의로운 삶을 강요하는 것들은 현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더욱이 국가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자본을 증식하기 위해 혹은 손해 보지 않을 목적이 동기가 되어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불공평한 것이 뻔한데도 그런 법을 만들거나 집행하거나 폐기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아주 최악의 정치 형태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일반섭리 속에서도 반드시 국가 전체의 이익에 현저히 위배되는 불행한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왕은 하나님 앞에 판단력과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 안에는 원한을 품고 억울한 사람들이 없어야합니다. 사람이 다스리는 사회이기 때문에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원한을 품고 억울하게 억눌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 이런 사람들을 남겨놓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부를 누리면서 사는 사회를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이것은 모순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세상을 이길 것인가?’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 불공평하고 현저히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서 일그러진 이 사회에 순응하고 적응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이 개혁주의적인 원리를 따르는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것과 함께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이 자원을 가지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구현해 나가도록 변화되는 데 이바지 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고 깊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아주 깊은 엄숙함을 느껴야 합니다.
조국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큰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60~80년대까지 조국교회에 주셨던 큰 은혜들을 쓸모없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교회들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가지고 큰 교회를 짓고 수양관을 짓고 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자원들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헌신들을 현저히 굽게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은혜들을 가지고 정부가 올바른 법을 제정하지 않고 굽게 사용할 때 저항하고 또 한편으로는 국가가 그 일들을 감당하지 못할 때 긍휼히 여겨야하고 불쌍히 여겨야할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자비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바지하며 살아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미 있는 세상에 뜻 없이 무릎을 꿇고 쉽게쉽게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서 그 은혜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모두 자족주의적인 영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는 자유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가치를 느낀 사람들로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의 통치 속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하고 주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의 자원들을 이렇게 굽은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쓰도록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