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스라 강해
녹취자: 이병두
에스라서의 신앙 부흥 운동을 살피기 위해서는 9장과 10장을 연구하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가운데 타락을 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을 8장을 배경으로 해서, 9장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어떻게 에스라가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중보자적인 탄원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신앙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는가? 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9장에서부터 많은 원리들이 새롭게 떠오를 수 있습니다. 9장과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미루어 살펴보면 창세기 35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부분의 묘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점에서 에스라의 신앙부흥 운동은 창세기에서 볼 수 있었던 신앙 부흥과는 좀 틀립니다.
우선 첫째는 창세기 35장의 하나의 가족적인 신앙부흥은 엄밀하게 말하면, 야곱 개인의 신앙부흥이었다고 말한다면 에스라의 이것은 어떻게 그러한 원리가 장엄하게 민족전체로 확산 될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민족 전체로 확산될 수 있는 그런 신앙부흥의 규모가 커다란 확대화의 가능성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 나타났던 하나의 개인적인 신앙의 부흥이 과연 커다란 차원으로 확대되어 나타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즉, 더 직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어떤 신앙의 부분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체험한 영적인 각성들 이런 것들이 민족적으로 전 교회적으로 이렇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것들이 가능하다라고 하는 한 면모를 이 에스라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히려 창세기의 신앙부흥보다 이 에스라에 나타난 신앙부흥을 대할 때 훨씬 마음이 더 뜨거워지고 훨씬 마음이 더 넓어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렇게 개인적인 신앙부흥이 민족적으로 거족적으로 확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일례는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민족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4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들 속에서 얼마나 야훼를 향한 신앙들이 지켜져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의문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을 단숨에 깨워서 출애굽을 하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도 역시 민족적인 커다란 부흥이라고 말 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섰던 남자만 60만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떠날 수 있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떠날 수 있었던 분명한 이유는 애굽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이 행하신 10대 재앙이 바로 이 사람들에게 부흥을 일으키는 하나의 커다란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역시 거기에도 이적만이 수단이 된 것이 아니라, 이 이적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리고 억압하고 있는 애굽의 바로와 그 군중들에게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하나의 수단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앙의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신앙 부흥을 생각하는 것이 참 어렵다라고 하는 하나의 이유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교회사에 보면 설교자도 없고 전파자도 없는데,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는 경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이라든지, 무엇인가 복음적인 메시지를 깊이 깨닫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 앞에 각성되는 군중들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성령의 역사나 부흥에 있어서 하나의 구성 요소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창세기 신앙부흥하고 구별되는 것은 야곱의 경우에는 기도의 중요성이 그렇게 많이 부각되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오셔서 각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각성되어지고 그 각성되어진 야곱이 벧엘로 올라갈 때 하나님이 나타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에서 만큼 기도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부흥에 있어서 기도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에스라의 신앙부흥을 연구하는 것이 대단히 유익할 것이고, 기도 중에서도 특별히 이것은 부흥을 구하는 사람들의 기도 세계가 어떠해야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중보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째든 이 에스라의 신앙부흥의 출발은 에스라의 가슴을 찢는 중보기도로부터 시작이 되어진다는 점에서 기도와 그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아주 명백하게 드러내는 신앙부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창세기의 신앙부흥과 구별되는 것은 창세기의 신앙부흥에서는 야곱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신앙부흥을 강의 하면서 보니까 밑에 보면 서모와 통간하는 장면이 바로 그 밑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집안이 그 각성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이렇게 보는데, 사실은 35장에 일어났던 각성과 영적부흥은 얼마 동안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볼 때 야곱의 그 부분은 상당히 많이 그 초점이 야곱 자신을 신앙부흥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야곱 한사람을 놓고 거기에다 집중적으로 각성과 영적인 부흥을 보내시는 그러한 어떤 혜택자의 입장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에스라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은 그 야곱과는 달리 에스라 한사람을 통해서 에스라는 이미 거룩하고 경건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 에스라 한사람을 통해서 신앙부흥이 확산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혜택을 입기 보다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 신앙부흥의 혜택을 그 시대의 수 많은 민족들에게 확산시키는 하나의 발화점과 같은 모습으로 부각 된다는 점에서 창세기 신앙부흥 하고는 상당히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에스라에 신앙부흥에 나타나는 하나의 귀한 특징중에 하나는 여기에서 처럼 참된 공동체가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한 하나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에스라서 9장과 10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지체의 개념을 과연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고상한 지체의식과 아주 고상한 그 지체됨의 비밀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이야기하는 지체 개념에 대해서 잘 이해가 안갔었는데, 이 에스라서를 읽으면서 참된 지체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참된 하나됨, 영적인 하나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굉장히 많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지체됨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이 연합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의 지체라고 하는 의식을 갖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영적인 커다란 각성과 변화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이 그 변화 속에서 자신들이 참된 하나님의 지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서 그것이 삶을 통해서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끊임없이 지체됨을 이야기 하면서 약한 부분을 짊어지고, 그 다음에 서로의 짐을 짊어지는 이야기들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이 에스라의 신앙부흥을 통해서 각성된 사람들도 각성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에스라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영혼의 그런 특성은 사람들의 죄와 자기의 죄를 분리할 수 없을 정도의 아이덴티티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모든 죄와 연약한 것을 자기의 것처럼 짊어지는 것인데 에스라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에스라는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세금을 거두고 형벌할 수 있는 권한을 다 위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그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에스라에게는 어떤 선지자적인 대담함이나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대신에 흐느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여기에서 이야기 했던 참된 신앙부흥은 외치는 고함소리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흐는끼는 것으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에스라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에스라의 신앙부흥은 창세기의 신앙부흥하고는 좀 구별이 된다고 보여집니다.
또 하나는 신앙부흥의 결과들이 이 에스라처럼 근본적인 개혁을 가져다 준 것도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창세기의 신앙부흥에서는 신상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고 그리고 자신을 정결케하는 이런 변화들이 일어났지만, 여기에선 정말로 끊기 어려운 죄악의 고리들을 끊으면서 근본적인 큰 리포메이션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에스라서를 통해서 리바이벌과 리포메이션의 관계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타입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라의 신앙부흥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었을 그때에 잡혼으로 이루어진 관계 즉, 잡혼으로 이루어진 가족관계들을 근본적으로 청산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가만히 묵상을 해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장면에서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단숨에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들과의 관계들 그 다음에 아내와의 관계들을 전부 다 대담하게 정리함으로써 가정을 차갑게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작은 어떤 식으로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론적으로는 한가족이 되었고, 혈육이 되어져 있는데 그 케케묵은 율법에 비춰서 율법이 그렇게 허락을 안했기 때문에 끊어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신앙부흥의 개혁을 가져오는 참된 능력을 신앙부흥에 공급해 주는 그런 장엄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저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되는 것이 구약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성령에 대한 풍부한 언급들이 잘 안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종말론적인 선교의 사명이라는 것들과 깊이 연결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면에서, 조금은 우리가 아쉬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역사상에 장엄하게 일어났던 현장을 보면서, 우리들은 그러한 대단한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에스라의 신앙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나는 것이 마지막 느헤미야가 3차 포로귀환을 했을 때, 수문 앞 광장에서 율법을 낭독할 때 그 어마어마한 큰 회개가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신앙부흥과 그 다음에 두 번째 포로귀환하고는 대략 한 20년 정도 차이가 있었는데, 그때가 벌써 이렇게 영적으로 기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을 참 잘 감당했다라고하는 면에서 개인적으로 받는 큰 도전은 제사장처럼 흐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선지자처럼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면, 제사장처럼 흐느끼는 사람만이 선지자처럼 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들은 둘 중에 하나만 감당할려고 해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진정함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고 그럴 수 있다고 하는 면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사장과 선지자가 신약시대의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사실은 엄연히 ‘우리는 선지자의 후예다’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기가막히고 절묘하게 하나 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의 경우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이었다면, 제사장들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직무상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하나님의 시각보다는 전통에 가까이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제사장이라면 그는 마땅히 그 제사의 직무상 백성들을 향한 그 진정한 사랑, 이것들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그 제사장적인 요소와 선지자적인 요소를 다 합해서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 하더라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영혼들을 위해서 탄식하며 통곡하며 기도한다라고 하는 것, 이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부분에 있어서 제사장적인 기능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하는 부분에 있어서 심히 의심스럽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에스라서가 우리에게 시사하고 보여주는 바는 굉장히 크고 장엄하고, 어떤 의미에서 창세기 신앙부흥은 많은 해석을 거쳐야지만 적용이 가능했지만, 이 부분은 장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적용 될 수 있는 하나의 그 연속성이고,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에스라의 신앙부흥은 대단히 깊이가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선 에스라가 두 번째 귀환해서 일으켰던 부흥을 이야기 하기 전에 1장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이 신앙부흥을 경험하게 됐는데, 그것에서도 우리가 많은 시사를 받지 않습니까? 포로가 되서 다 흩어져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일이었는데 올라오게 된 사람들 그들에 대해서 좀 공부를 하고 그 다음 시간부터 9장부터 본격적인 강의를 한번 해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절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우선 이것을 한절 한절 다 강의를 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좀 어려운 일이고 일단 에스라의 신앙부흥이 놓여있는 그 자리가 포로귀환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주목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고 그 포로귀환이 역사적으로 무슨 사건이고 무슨 의미를 갖는가하는 문제들, 그리고 그것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같이 고려를 해야 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처음 우리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1장 1절에서 그런 문제와 관련된 하나의 답을 주고 있습니다. 즉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여기에서 보면 고레스에 대해서 ‘내종’이라고 성경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레스가 정말 여호와의 종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구약 성경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야훼의 종’은 고레스 하고는 좀 틀린 종입니다. 그러니까 고레스는 거듭나지 못 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도구로 쓰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쓰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레스의 경우에는 자기가 이렇게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주욱 이야기 하고 있지만, 분명히 이사야서 42장, 43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야훼의 종들’의 의식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야훼의 종들’의 가장 중요한 조건 하나는 투철한 소명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사의 하늘의 하나님이 내게 주셨고 등등하는 이런 고백은 사실 애굽의 바로 같은 사람들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실은 그런 것 하나를 가지고 구약시대에 일반적으로 투철한 사명의식 속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야훼의 종들’과 같은 선상에서 본다고 하는 것은 좀 무리가 많은 것입니다.
그 문제는 그렇게 하고, 우선 이 포로귀환이 결국은 예례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응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주목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부흥이 놓여진 자리는 포로귀환이고, 그 포로귀환은 포로시대를 자리하고 있고, 그 포로시대에서 포로의 귀환은 다시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예언은 반드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에 의하여 위탁된 그 하나님의 말씀은 허공 중에 흩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역사의 한마당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인 것 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의 신앙을 가질 때 소위 이야기하는 복음의 진리를 비역사화하는 그런 방식들은 첨단 성경연구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바로 이러한 것을 가지고 예언을 하면서, 그들은 자기가 아직은 바라보지 못하는 역사의 지평 속에서 자기가 예언하는 것들이 이루어 질 것을 확실하게 믿고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의 선자자로서의 중요한 영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약간 곁가지로 나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되어 질 수 있겠느냐, 쉽게 이야기하면 영적인 체험,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깊은 경험,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는 기독교의 다양한 진리들이 문자가 아니라 어떤 삶의 어떤 생명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때에 반드시 역사의 공감을 뛰어넘는 어떤 실제로서 우리들이 의식하게 된다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종말론적인 신앙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종말이 아주 임박했음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을 살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습니다. 구원사역은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비평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들이 그것이 하나의 신앙적인 착각이었느냐? 그래서 바울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 바울서신들을 통해서 임박한 장래에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라든지, 심판이라든지, 부활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 일어나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화하고 재해석하는 결과가 바울서신이였냐고 말할 때, 우리들이 선 듯 동의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워낙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영적인 경험, 그런 것들이 풍성하니까 미래에 갈 지옥도 심지어 눈앞에 다가오고,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에 대한 심판들도 현재의 삶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경험의 요소로 다가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임박한 장래에 대한 소망들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 되어집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는 사람들도 역시 이렇게 자기가 설교하는 내용들이 ‘역사의 현장 속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는 이런 기대, 이런 확신, 그리고 이러한 신념,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용 자체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어야 하는 그런 내용이어야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설교는 이론적인 통찰이 반드시 겸비되어야 하고, 이렇게 예레미야가 핍박을 받으며 예언할 때에 그 일들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을 안했지만, 그러나 분명히 그 이후에는 바사시대 고레스왕 원년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시대와 장소와 때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결국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라의 신앙부흥 운동도 에스라의 포로귀환도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여호와께서 이미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대신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라는 사실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시는 방법이 ‘선지자의 입이요. 설교자들의 입술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조금 오해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은 미래에 대한 예언은 점쟁이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은 본문 안에 있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설교자는 역사를 보는 확실한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 요구된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예언할 수 있었고, 그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응하게 되어졌던 것처럼 하나님이 설교자들에게 설교를 준비한다든지 또는 설교자들이 말씀을 준비하는 것도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달라져야 됩니다. 그리니까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는 것과 사실 똑같이 일치 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함에 있어서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엄청나게 틀리고, 사람들 마음 가운데 주께서 조명하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이런 성령의 내재하심이 있고, 또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렇게 획일화 시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 하나는 설교준비는 논문을 쓰고 여러 가지 지식들을 모으는 것과는 분명히 틀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준비는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강하게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정말 그에게 말씀을 주시는 그런 성경의 진리를 새롭게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경험이 성경 속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것 없이 설교를 한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고 말할 때, 그런 하나님의 장엄한 뜻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는 것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고 볼 때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여호와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들의 행복도 아니고, 심지어는 선택된 백성들의 구원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이 계획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계획한 그 뜻은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아의 입으로 포로로 끌려가라고 자꾸 권하고 바벨론을 대항하지 말고 순순히 포로되어 가라고 그렇게 권면을 선지자를 통해서 하시는데, 그런 것들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냐?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신 더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선택된 백성들을 향한 그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개념의 인자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엇그제 시편 107편을 읽으면서 그런 장면을 봤습니다. 나중에 한번 107편을 읽어보십시오. 107편은 작자가 미상인데 시작이 찬송시로 시작이 됩니다. ‘백성들을 향한 주의 인자하심이 참 크고 넓다’라고 하는 그런 찬양으로 시작이 되는데, 시인이 그 노래를 찬미가로 쓰게 된 배경이 하나님이 선택된 백성들을 향한 그 자비하심과 그 인자하심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었고, 그분의 그 성실하심이 대단한 것이었다라고 하는 것을 고백 한 것 입니다. 107편을 주욱 읽어보면 반드시 좋은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왜 흑암과 캄캄한 어둠가운데 거하게 됐는가? ‘여호와의 율법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 함으로 인간이 그렇게 된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하는 소리를 오히려 듣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위난 가운데 처하게 된다’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다양한 하나님의 역사를 스치고 지나갔던 커다란 심판의 손길들, 그리고 버린자와 같이 내던지시는 그 하나님의 심판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경험한 후에 시인은 ‘주는 실로 인자하시도다’라고 말하는데, 거기에서 저는 하나의 깊은 한계를 느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땅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데, 이 시인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늘에서 인자라고 하는 그 kindness라고 하는 경험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내게 좋게 해 주시는 하나님, 결국은 내게 좋게 해주시고 나를 위로하시고 또 내가 원하는데로 해주시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좋게 해주시는 그 하나님, 나에게 선한 것이 되시는 하나님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이 시인은 심판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자와 같이 버려두시는 그런 버려둠도 경험하고, 그러는 가운데 마지막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는데, 그 인자하심은 인생들을 향하여 선만을 행하시고, 좋은 것만을 행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가 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신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 앞에서 불순종했던 사람들을 사망의 골짜기 가운데 두시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신다’라고 하는 그것 때문에 주님을 인자하다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주의 말씀을 떠났는데도 그들은 부르짖을 기회가 있고,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찿아 오시는데, 그 관계가 바로 언약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그를 향한 관계를 끊으려고 해도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아니하는 이것, 이것은 단순한 knidness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인자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땅에서 해석한 인자, 자비의 개념을 이야기 하고, 원색적인 말로 하자면 그 시인은 ‘구약의 복음적인 인자와 자비를 이야기 한다’라는 면에서 그 뒤에 나오는 시편 108편을 보면, ‘내가 만민 중에 주께 감사하며 그 다음에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주의 진리는 궁창에 미치나이다’ 이러면서 주욱 나옵니다.
이 사람이 발견하고 만났던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시길래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 입니까? 땅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증거함에 있어서나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대개 우리의 땅의 일들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내 마음을 위로하셨네, 아니면 주님이 지금도 내 친구들을 건지시네, 주님 내 마음에 들어오시려 하네, 주님이 우리 교회를 도우시네, 그러니까 전부다 땅에 묶여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날개 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그 찬양이 주욱 그리고 그것은 전부 다 자기의 이땅에서의 지상의 삶과 관련된 속에서 얻어진 경험에 대한 찬양인데, 이 시인은 날개를 타고 나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늘과 궁창과 그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계위에 높아지는 것, 그리고 주님의 진리 혹은 주님의 신실하심이라고 말하는데 페이스플리스, 주님의 그 신실하심이 나의 삶을 통해 발견되는게 아니라 ‘주의 궁창에 까지 미치기를 원한다’라고 하면서 찬양이 우주적인 시야로 확대되는 것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하나의 깊은 좌절이라 그럴까요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야! 이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도대체 정말 어느 정도 길래.... 나는 아무래도 이 땅에 계신 하나님 밖에 못 만난 것 같은데,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 우주적입니다. 전 세계에 높아지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바라고 그리고 그의 영광을 주목하는 시인의 시야였다는 점에서 굉장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이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관심은 이땅의 백성들을 향한 행복 주심도 아니고, 심지어 선택된 백성들을 향한 은혜 베푸심도 아니고, 철저하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그토록 사랑하는 모세도 가나안에 안들어 가는 결단을 하나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내리시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지자들도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라마에서 슬피우는 소리에 대한 예언을 이행하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그때에 수 많은 어린 영혼들이 제물로 드려지는 이런 것도 서슴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향한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얄팍한 ‘하나님의 사랑이 지속된다’라고 그렇게 말하기 보다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된다’라고 하는 면에서, 우리가 인자함을 봐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언약입니다.
(질문) “이것 때문에 신앙부흥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그 고통과 어려움을 경험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이 신앙부흥에까지 관심을 갖다가도 뒤로 후퇴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경험되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휴! 자신 없어! 절망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신앙부흥에서도 보면, 영적부흥을 전제로 해서 신앙부흥이 가능하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니까 야곱도 창세기 32장에서의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35장을 경험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런 단계적인 어떤 순서가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는 견해가 좀 틀리는데, ‘로이드 존스’는 항상 무엇을 강조하는냐 하면 머리가 정복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 분의 의사 생활하고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적인 직업이었고, 그 분의 설교는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지배당하지 않고는 가슴이 지배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머리부터 정복되어 들어가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부흥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설교들을 보면, 머리를 정복하며 들어오는 것들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머리가 정복되고 가슴이 정복된다’라고 하는 선후순위라기 보다는 한꺼번에 전인격적으로 밀려가서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때를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것은 무슨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회개하라’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사이의 그 논리의 고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저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명제 자체가 같이 설 수 없는 명제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 천국이 지금 자기네 속에 안있고 밖에 있다는 이야기인데 유대인들에게 그런 개념은 없습니다. 자기는 이미 천국의 바운더리 안에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설교 같은 것도 ‘논리적인 설교였다’라기 보다는 고백적인 설교였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런 면에서 볼 때, 과연 설교자가 그렇게 그것들을 서차적으로 구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그렇게 밀려가면서 지정의와 전 인격을 뒤엎으면서, 이것이 머리통이 뒤바뀌고, 가슴이 뒤집어지고, 그 다음에 땅을 치면서 결단하는 것들이 동시에 일어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설교이 힘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설교에 있어서 무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설교 속에는 논리와 직관이 같이 깃들여져야 됩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렇게 추론해서 보여주는 것과 함께 논리의 노선을 따라 가다가 활짝 활짝 성경을 보여 줄 수가 있는 그런 것들이 되어야 됩니다.
제가 이런 비유를 한번 들었지만, 오늘 아침에도 제가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새벽기도가서 설교를 주욱 듣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성경의 확실한 것 하나는 닫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의 명백성’에 대한 도전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성경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구원의 길은 제시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이야기하는 선포를 위한 영적인 경험도 설교자로서 서기 위해서는 회심의 경험가지고 안된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있어서도, 그렇게 구원 받기에 필요한 명료성 정도를 발견하는 정도의 성경에 대한 인식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성경이 닫혀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묵상하면서 정말 닫혀있다. 그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닫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저는 닫혀있을 때와 ‘지금 열려있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닫혀있을 때가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엇그제도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라오디게아 본문을 주욱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목은 ‘신앙과 나’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부분은 제가 묵상도 많이 했고, 설교도 많이 했기 때문에 얼마나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오나 보자. ‘신앙과 나’ 그것은 하나의 장엄한 스토리인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에 나오는 그것은 하나의 책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기독교의 그 근본적인 진리들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신앙과 나’의 요점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가 도움이 되는가? 그러면, 방해가 된다. 자기를 죽이자.’ 이 이야기를 일반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하고 이렇게 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그런 비유를 제가 많이 했습니다만 천정에 비유를 한다면, 설교자들은 누구냐하면 천정에다가 진리의 말씀을 좌악 펼쳐서 진리의 말씀이 어떤 것이라고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가서 거기다 칼을 대고 캄캄하던 그 천정을 비집을 때에 진리의 빗줄기가 캄캄한 어둠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좌악 비춰서 말하자면, 말씀을 문자적인 말씀 속에 깃들여져 있는 장엄한 진리의 광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말씀에 대한 새로운 접근들을 우리들이 가져와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말씀만이 우리의 갈 길입니다.”그런데 이것 가지고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아! 그 말씀 그러면서 그것이 확 다가와서 그 말씀이 한없이 달고 오묘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까지로 갔는데,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보면, 하나님은 집요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마시려고 하는 여기에 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나 신앙인이나 교회나 역사나 동일하게 관심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되겠다라는데에 같은 관심을 가지면 추구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신앙부흥은 무엇이냐 하면, 하늘의 큰 능력을 땅아래 끌어당기는 이런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도 그런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역사를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들을 동일하게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이 소망하는 것들을 동일하게 소망하고, 주님이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것들을 나도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앙부흥의 추구를 이해하지 않고 ‘나라와 의를 구한다’라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제 하나님이 역사와 개인과 교회를 향해서 갖는 가장 커다란 뜻이 예레미아에게 응한 하나님 말씀인데, 비록 그것을 전달한 것은 예레미야라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 입에 말씀을 실어보낸 것은 하나님 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로 그 입을 통해서 나온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죽고 예레미야의 역사도 사라졌고, 예레미야의 시대도 아니고 이미 70년이나 흘러버린 그 후에도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도 거의 다 잊어버리고 있었을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그것을 잊지 않고 집요하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70년 전에 내보내신 그 뜻을 이루어지기 위해서 주께서 친히 착수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포로귀환 사건이라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역사와 교회와 인생들을 향해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당신의 뜻들을 이루시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여기에 사람들이 같은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역사를 해석하고 민족을 이끌어가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들이 이어져간다면, 하나님이 역사를 이루어가는 그 구도들이 뜻밖에 다가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만큼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이 전혀 이상한 사건이 아니었고, 바벨론과 애굽이 붙어가지고 결국 애굽이 박살나는 사건이 예레미야에게 있어서는 전혀 뜻밖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관심이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생존을 유지하고, 정치권을 보위하고 생존을 유지하고 하는 것인 경우에는 그런 비젼과 시각이 하나님과 동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영적인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의 포로사건도 결국은 원인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기 보다는 자기네들이 의지하던 애굽이 깨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정치적인 해석이 다 돼버린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장엄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로 보면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으로 내신 그 말씀을 이루시는데, 이루시는 것들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는데 이 이루시는 방법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하고 기교하고 절묘한 방법을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치하에 있으면서 선지자의 명을 어기고 애굽에다 걸었을 때에는 애굽이 그래도 전통이 있는 막강한 왕조요 군사력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모든 것으로 볼 때에 바벨론을 이기고야 말것이다라고 하는 것으로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는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뭘 꾸짖었느냐 하면 애굽을 의지하고 바벨론을 대항하는 것을 책망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정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쉽게 말하면 ‘바사왕 고레스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누구도 꿈 꿀 수 없는 역사 속에서의 아이러니였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콘스탄틴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받게 하는 거와 유사한 논리입니다. 역사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정치적인 하나의 정책으로서 기독교를 인정한 결과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커다란 하나의 장을 열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신앙부흥을 이야기 할 때에 신앙부흥의 자리가 바벨론 포로 귀환이었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바벨론 포로귀환은 이미 포로로 끌려간 것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 이것들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이 역사적인 사건 뒤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예언과 계획이 있었다는 것, 역사의 사건이 펼쳐지고 마무리되어 지고 전개되어 지는 그 모든 과정들을 결국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으로 위탁하셨고 주님이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포로로 귀환한 민족들을 신앙부흥이 일어난 이것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신앙부흥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드러내지 않는 부흥은 참 부흥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흥이 아니고, 그냥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참된 부흥은 성령의 역사보다는 훨씬 큰 경험입니다.
이제 두 번째 보면, 5절을 좀 보려고 합니다. 5절에 보면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 ” 주욱 나옵니다. 이 5절을 볼 때 우리는 신앙부흥을 주목하기 전에 신앙부흥을 경험하게 된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 사람들을 먼저 주목하여 보고 신앙부흥으로 들어가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1차 포로귀환 때 올라간 사람이 4만 9천명, 약 오만명 가량되는 사람들이 올라갔습니다. 노비들을 포함해서 그 5만명의 숫자는 순수한 사람의 숫자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짐승들까지 같이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축복성, 특권성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어마어마한 민족이 이동을 했고 수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 갔는데, 그 영광스러운 포로귀환 후에 첫 번째에 영광스러운 신앙 부흥의 현장에 있을 수 있었던 이 사람들의 영적인 축복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봤던 사람들도 있고 안봤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본 사람이든 못본 사람이든 아무튼 이후에 7장에서 보면 신앙부흥을 깊이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의 축복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러니까 쉽게 얘기를 하면, 조금 전에 머리 이야기를 하다 말았는데, 계속해서 그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지 신앙부흥의 개념을 깨달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커다란 영적인 변화 없이도 얼마든지 깊이 읽어가는 가운데 ‘아! 맞다! 이것이 참 기독교인거 같다. 이것이 참 기독교의 진수인거 같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신앙의 본질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반드시 영적인 경험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사실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런 견해에 들어선 것 자체가 큰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머리의 구조가 정돈이 된 다음에 비로소 어디로 달려가야 될지를 아니까 그렇게 계속해서 추구를 하다가 보면, 자기들이 개념만으로 보아왔던 신앙부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전부다 리바이블리스트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로이드 존스가 아주 예리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청교도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그의 문헌을 들먹거리는 것으로 쾌감만 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전기를 쓰면서도 걱정되는게 무엇인가 하면, ‘아! 멋있다. 이야! 참 미인이다.’ 그러고 끝난다면 이것은 참 문제가 많는 것입니다. 하나의 어떤 영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그런 어떤 유희 밖에는 되지 않습니까? 거룩한 고민을 사람들에게 불러 일으켜줘야 합니다. 신앙의 인물을 보면서 저는 언제나 그를 닮고 싶습니다. 그렇게만 말해서는 안됩니다.
엇그제 어떤 부흥사는 바울은 안중에도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 때문에 예수가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바울아! 넌 비켜라. 내가 예수께로 간다.” 이것입니다. 그 분은 바로 성경 본문을 안읽고 설교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이해를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바울의 세계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의 머리만 갖추어진 그런 리바이블리스트는 진정한 의미의 리바이블리스트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깊은 영적인 경험 없이도 십자가만 중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고 목회자의 삶은 이래야 된다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흐느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탄성으로부터 시작된 부흥입니다.
좋은 비유를 3개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니까 흐느낌으로부터 시작된 부흥이 아니라 “와~ 야~ 오우~ 굉장하다.~ ”이런 탄성으로 시작된 부흥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면에서 볼때 이 사람들이 현장에서 흐느꼈고, 현장에서 그 에스라의 기도를 들었고, 현장에서 성전 그 문사이에 거꾸로져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있는 에스라, 이것이 아닙니까? 에스라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전 문앞에서 통곡하는 에스라를 부축해서 끌어 올렸던 그 사람들은 그 현장에서 그 영광스러운 것을 다 보았고, 그들이 가족을 내어보내겠다고 결단 했으니까 그들은 단지 멀리서 하나의 그 관망자가 되어서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영혼이 느꼈고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축복성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본 적이 없냐는 것입니다.
저는 시편을 읽을 때 시편의 기자가 주는 메시지만 읽지말고 이것을 토해 낼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신약 성경을 읽을 때도 바울을 읽을 때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나와 버린 메시지만 읽지 말고, 이것을 토해 낼 수 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영혼과 영적인 깊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바울아! 비켜라.”라고 쉽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그 말씀을 붙잡고 몸부림을 쳐야 되는데, 성도들이 다 잃어버린 그것만 가지고 이야기해서야 되겠는냐는 것입니다.
(예화) 바둑을 좋아하십니까? 바둑에 보면 전승되어 내려오는 기보가 있습니다. ‘토혈국’이라고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가 너무 원통하니까 바둑을 두다가 그 자리에서 탁 엎어져서 바둑판에 피를 확 쏟고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토혈국’입니다. 이름은 생각이 안나는데, 최선을 다해서 몸부림 치다가 안되니까는 너무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죽은 것입니다. 바둑을 두는데 그 한판 지면 어디가 어떻게 됩니까?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심혈을 거기에다 온통 기울이니까 그것은 당신의 성질이 아니라 전 존재적인 애통함이 피를 통해서 좌악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지만, 한편의 설교는 마치 한사발의 피를 토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어야 된다 그 때 비로소 설교자가 무릎을 꿇고 ‘내 설교 위에 성령이 역사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장난처럼 강단에 올라가서 어떻게 놀라운 성령이 역사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절실한 절망감을 느낍니다. 자기 영혼에 대한 자기 능력에 대한 절망감 없이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영적인 절망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내가 의지할 곳이 있고, 가진 것이 있으면 절망을 안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안가진 것 처럼 절망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에스라의 부흥도 마찬가지고 창세기의 신앙부흥도 마찬가지인데 창세기에서도 디나가 강간 당했다고 해서 야곱의 재물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누가 지금 현상수배를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 그대로 있었습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의식이 확 바뀌니까 하나도 눈에 안들어 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세겜 사람들하고 무역을 하고 관계를 하고 재산을 축적을 하고 그런 것들이 관심사였었는데, 어는 한순간에 그것이 지푸라기 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물론 은혜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영적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장엄한 각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들을 좀 예리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에스라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라를 몇 번째 읽으면서 이해가 안갔던 것이 있었습니다. 에스라에게 모든 권세를 다 줬습니다. 재판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모든 가산을 정벌할 수 권한도 줬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이방여인을 얻은 자 중에서 다 취소 안하는 자들은 재산을 전부다 뺏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집회에 안나오는 자를 그렇게 하겠다.” 그랬고, 그래서 깊은 각성이 일어나고, 자기가 기도하고 그 회개가 확산되고 두령들이 나오고 두목들이 나오고, 그리고 그 뒤에 많은 백성들이 나오고, 남녀노소가 나와서 통곡하고 회개한 다음에 그들이 그를 잡아서 일으킬 그 때에 다시 한번 기도하며 결단하면서 내린 것이 바로 영적인 고뇌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또 신앙부흥에 있어서 흐느낌으로 시작하지만 쉼없이 흐느끼고 있는 지도자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약함 속에서 눈물을 씻고는 담대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면모는 흐느끼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싹 씻더니 일어나서 준엄한 포고령을 발동하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3일내에 빨리올라오라. 안올라오면 전부다 다 몰수해 버리고 가산을 풍비박산 내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 입니다. 사람들이 다 모일 때 다시 영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에스라는 더 드라마틱합니다. 창세기 신앙부흥보다 훨씬 더 입체적입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한번 보십시오. 감동을 받고 사람들이 결단하고 일어났습니다. 똑같이 그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을 감동으로 받았는데, 이전에 말씀하신대로 아! 좋다하고 머무르는 사람이 있고, 분연히 일어나서 결단하고 하나님을 쫒은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감동을 받고 눈물도 흘리고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는 만났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 충분한 만남이었는가 하는 것은 또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부흥을 이야기 하면 어떤 사람은 ‘아! 맞다.’ 처음서부터 고개를 끄떡거리고 다 알고, 자기가 다 맞다고, 나도 옛날에 다 겪어 봤다고 말 합니다. ‘진정으로 만나면 일어설 수 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만났는데 일어선 사람들도 있고 못일어선 사람이 있다는 것 보다도, 그 만남이 참으로 진실되면 뭐 세상에 사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