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없는 악인을 만날 때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시73:4-5)
녹취자: 박은희
경건한 이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았더니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현실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이 악인의 형통함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악인의 평안함이었습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안녕’ 그 정도의 뜻이겠죠? 악인이 분명한데 그 사람들이 평안하고 형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저희들이 저렇게 평안하지만, 형통한 것 같지만 오래 안 갈 거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모두 자기의 죄 값을 치룰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마지막 죽음의 광경까지 지켜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리고 힘이 강건하다” 그랬는데 이것은 저희들이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그 힘이 아주 강건하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서 힘이 모두 소진되어서 죽는 것은 비참한 죽음입니다. 그래서 어느 의사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죽을 나이가 된 사람에게 질병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무슨 뜻이냐?” 그랬더니 의학적으로 아무 질병이 없이 기력이 다해서 죽는 것은 어느 순간에 불현 듯 찾아오는 게 아니라 아주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젊어서 녹용 인삼해가지고 보약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 죽을 때 힘들게 죽는다.” 그런 말이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자면 죽을 나이가 되었는데 아직은 기력이 남아있는데 심장쇼크로 죽는다든지 저녁에 인사하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죽는다든지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오히려 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악인들이 그렇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어떻게 보면 복된 죽음인데 그들이 한일을 보면 그들은 모질게 고난을 당하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어야지만, 이전에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서도 평안했던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리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 법이 통용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겪습니다. 특별히 의롭고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은 수시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그러한 고통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주저앉을 정도로 낙심하게 만들었던 대목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세상과 적절하게 구별된 채 경건한 환경 속에서 자랐던 이 시인에게는 도저히 용납하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저앉게 되었는데 그렇게 주저앉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악인들이 형통하더라.’ 이 이야기입니다. 이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종종 이렇게 모두 풀리지 않는 모순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부인하는데 앞장섰던 임마누엘 칸트같은 사람도 그래서 결국은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돼야 한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겪는 악인의 형통함,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보수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이 모순들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선 이 대목만을 가지고 보자면 이 시인은 어떤 생각의 잘못이 있었을까요? 우선 제일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인간의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모든 완전한 대가가 지상의 생애 안에 모두 나타나야 된다고 보는 이 시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 사람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죽음 이후에 또 다른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 사실에 눈뜨면서 이 현실의 모든 모순을 극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우리가 선하고 악하게 사는 그것에 대한 규결을 물론 이 세상에서 받게 하시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것이 모든 사람이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고 공평하게 그러한 선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모든 일들이 인간이 살아있는 이 지상생애 속에서 모두 이루어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상생애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시기에는 영원한 인간존재의 한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하고 불멸하도록 영혼과 육체를 아울려 창조하셨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필멸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필멸하는 인간의 육체는 언젠가 부활의 영광을 덧입어서 다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맨 처음 하나님 앞에 창조되기 이전, 하나님의 생각 속에 인간창조의 대한 개념이 있을 그 때부터 시작을 해서 영원히 완전히 구원받은 존재가 되어서 다시 영생 불사하는 존재가 되는 그 영원까지 이르르면 인간이 유한한 몸을 입고 살아가는 이것은 하나님이 그 영원한 인간에 대한 생각 중에서 한 시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기 안에 모든 일들이 다 갚아지고 이루어져야 될 이유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원한 심판, 영원한 하나님의 복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은 대단히 좁은 시야를 가진 신앙의 익숙한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고통이 없고 그 다음에 고난이 없다.” 라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둘째로 이 시인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고통의 여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여부, 혹은 반대로 고통의 여부가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여부를 보여주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오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 보십시다. 악인에게 낙심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악인에게 낙심이라는 것이 있느냐고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찌니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이라” 악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이제 선한 목표를 찾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러나 수시로 낙심합니다. 좌절합니다. 그러니까 악인이 악을 행하는 일을 하다가 실패한 것을 우리는 좌절이라고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만 좌절한다, 낙심한다, 이런 것들은 선한 일을 도모하다가 어려움을 만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선한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하면 끊임없는 좌절과 낙심과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파멸할지언정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는 그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이 선택한 자의 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과 낙심, 좌절,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선한목표를 찾아서 간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질병은 산자가 걸리는 것이지 죽은 자가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패는 좋은 것에 기생하는 것이지 나쁜 것에 기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수시로 낙심하고 고통 하지만,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타락한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이 시인은 과소평가 하거나 잘 몰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인간자신이 부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자체에 죄의 비참한 결과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되면 인간자신을 보나 그 다음에 세계를 보나 영적으로 보나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이 질서롭게 통치하는 것과는 모순된 그 무엇이 이 모든 영역에서 나타날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악인이 형통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이 고난이 없는 이런 모순들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결국은 타락하고 망가진 세상의 부조화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그런 점에서 이 시인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고 아주 유아기적인 판단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악하게 살면서도 고난이 없고 어떠한 고통도 없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악 된 이 세상을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다스리셔서 모순처럼 보이는 이 악과 악인의 평안이라고 하는 이러한 모순된 현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장 시인이 만약에 이러한 모순을 발견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신정론에 있어서 과연 성소에 들어갈 때에 저희의 결국을 깨닫고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 하신다는 것과 저희들이 잠시 형통한 것 같으나 사후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어서 당신의 공의를 충족시키신다라고 하는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73편시인 자신에게 이런 모순된 현실은 이 사람의 지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의 눈을 뜨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잖습니까?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신비에 싸여있고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 모든 일과 작정들을 우리 인간세상, 육체의 생명이 영혼과 함께 결탁되어있는 이 시간에만 모든 문제들을 해결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순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통치자로서 우리들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경륜 속에서 이 세계를 당신의 정의와 공평에 맞게끔 통치하셔서 그래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것도 하나님의 정의를 피해갈 수 없고 주님의 자비를 비껴갈 수 없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온전히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다 해명할 수 없는 어떤 사실을 사실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굳게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이고 그리고 바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사, 어떻게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서 모순처럼 보일 그때에,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을 더 신실하게 의지하고 믿어야 할 시간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의 성향이고 믿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의존의 성향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들은 세상이 해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그때에도 오히려 그때에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므로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우리의 인생의 처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거룩하고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순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문에 의지해야 할 분이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