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슬픔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79:1-3)
녹취자: 김유진
시편 79편은 탄원시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탄원은 단순한 탄원이 아니라 참회가 섞여있는 탄원이고 그것도 개인의 참회와 탄원이 아닌, 공동체의 참회와 탄원이 섞여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아마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었던 주전 605년경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인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것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황폐된 것은 크게 두 가지 부분입니다. 하나는 성전이 더럽힌 것은,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이 초토화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예루살렘’의 의미는 아마도 ‘평화의 도성’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평화’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평화가 모든 사람들 사이에 구현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셨던 바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평화의 도성, 예루살렘의 심장부에는 -왕권이 아니라- 성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화목이 핵심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전체에 성소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또한 공동체적으로 위기와 시련이 있으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국가의 커다란 대사뿐 아니라 개인의 소소한 일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거나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은총을 입었습니다. 종교적인 평화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평화를 왕권으로 구체적으로 구현해 나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열왕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관계의 충실함으로 그 평화를 유지하고 증진하도록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공경이 이 세상에서의 공의와 인자함으로 나타나도록 촉구한 사람들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능들이 철저하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때의 이스라엘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지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나라로서의 특성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종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러한 위기에 경고를 보내시고 그들을 성심으로 가르쳐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도록 당신의 종들을 파송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로 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눈의 가시와 같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보다는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거듭된 하나님의 경고와 기회는 이들의 악한 불순종으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경고한 바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어찌 이스라엘을 이렇게 비참하도록 심판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실 뿐 아니라 당신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의 명예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인자와 긍휼은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만이 실제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은 개인적인 것과 공동체적인 것을 함께 고려하며 생각해야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영적 이스라엘은 하나의 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몸에 심각한 질병이 든다면, 어느 부분에 고통이 주어지더라도 치료하지 않겠습니까? 살이 썩으면 그 환부를 도려내고서라도 몸의 온전함을 보존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은 하나의 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몸을 구성하며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현해 나가야했습니다. 그러면 만약 그 몸이 심각하게 병들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그루터기를 보존하기 위해 일부를 심판함으로 정결케하사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보존하십니다.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읽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커다란 심판을 당하게 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은 신약으로 말하면 곧,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듯이, 후에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예표(豫表)합니다. 그런데 이 기업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이 이미 져버렸으되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조상들은 그들이 우상숭배(偶像崇拜)하였을 때, ‘내가 내 사자를 보내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니, 사자와 함께 올라가라 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 했던 것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조상들이 과거를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누리며 그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 만족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을 주신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은, 그들이 기업을 누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지식과 구원을 이루는 지식을 열방에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기업을 주실 때-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대로 사용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기업을 이방 나라에 빼앗기게 하였습니다. 이방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왔고 주의 성전은 더렵혀졌습니다. ‘더럽혀졌다’는 것은 자격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없이 성전에 들어와서 짓밟은 것입니다. 성전의 금은 기명들을 모두 뜯어가고 성전은 완전히 더럽혀졌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들은 전쟁과 약탈로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평화를 알려주어야 하는 도시였으며 성전은 평화를 유지하며 살게 하는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이 성전이 더럽혀지고 파괴되어 버렸을 때, 이것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불순종하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깊이 공경할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백성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만약 예루살렘 선정만 온전하였어도 거기에서 제사하는 백성들이 진실하게 참회하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된 제사를 돌려 그들이 변화될 수 있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만일 제사장들이 그 모든 제사예법들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거룩하심에 합당하게 살아야할 언약백성들의 도리를 굽히지 않고 선포하여 이 모든 종교적인 의식들이 그들에게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바지했다면, 이스라엘은 저토록 타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물론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유입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이 세상과 접촉하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을 들이마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존재라는 의식이 없이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그 속에 탐닉하다가 온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어찌 언약백성들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 세상의 물결과 싸우지만 여전히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물들을 마십니다. 수영하는 아이들이 수영장물을 먹겠다는 의지는 추호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입과 코로 들어가 소량의 물을 마시게 되는 것처럼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언제나 탄핵을 받고 비판을 받아 교회에 온 사람들이 그 가치가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가치이나 교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서 돌아갈 때, 교회는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은 같아짐으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격차를 가짐으로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제(본인이)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저와는 다른 것이 있고, 저와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기에 인생의 벼랑 끝에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역할들을 교회가 할 수 없을 때, 교회의 외연(外緣)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그 외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전체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2-3절은 교회의 비참함에 대해 구체적으로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이 시체가 공중의 새의 밥으로 성도의 육체가 땅의 짐승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을 도륙했을 때, 시치를 치울 수 없었기 때문에 짐승들이 와서 시체를 먹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피는 예루살렘 사방에 물같이 흘렀지만,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침공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항했고, 저항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입성 후에 처참한 복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 기록된 이야기와 같이, 그들이 피가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시체들이 길가에 즐비했으나 품위를 갖추어 매장해줄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예루살렘 위에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의미, 구원과 함께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어떻게 구현시킬 수 있을지 상고(詳考)하여야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야할지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서 교회의 한지체가 삼으시고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신 그 큰 영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는 구원하신 소명을 따라 살 때, 가장 잘 보존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회심의 은혜는 회심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 때 가장 잘 보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이 사용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이바지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겸손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도 주님이 내게 주신 축복과 은총 때문에 교만해지는 일이 없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