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한 이스라엘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 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시78:59-62)
녹취자: 김유진
어제는 배반한 이스라엘 이었다면, 오늘은 배반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손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배반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은 이스라엘에게 크게 분내어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 인간처럼 정통되는 분이실까? 가령 어떤 것을 보면 새로운 마음이 들고, 더러운 것을 보면 혐오의 감정이 일어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은 변화가 하나님에게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이런 변화가 하나님께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보면서 예전에 몰랐던 듯이 새롭게 깨닫고 예전에 없던 감정들이 생겨난다면, 그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 되신다면, 그런 게 없다면 부족하신 하나님이 되시고 그런 게 있다면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 완전성에 위배될 때,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정동되는 것, 우리에게도 그것이 영적으로 경험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이것은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이 되는 문제입니다. 물론 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정리를 해서 답을 해봅시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예전에 없던 것들이 생겨나거나 모르던 것을 아시게 되거나 없던 정서를 새롭게 겪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본질에서는 그렇지만, 만일 그렇기만 하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어 이 세상 만물을 돌보시며 기뻐하시고 아파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일은 추호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없는 분과 마찬가지이고, 인간을 교화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부모인데 자식에게 말을 하는 법도 없고 새로운 것을 느끼는 것도 없고 자식이 어떻게 행하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없다면, 불상이나 돌멩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하나님이지만, 관계적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그에 합당한 반응을 가지신 분처럼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면 본질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분이 어떻게 느끼게 하실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순수한 인식에 관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작용을 거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나 사물이라면 지금 본질적으로는 변함이 없으면서 관계적으로는 변한다는 것이 납득이 안되지만 영원하고 무한하사 어떠한 존재의 유비도 이 세상에 가지고 계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추론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이고 성경에서 발견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에서 생각하길, 하나님이 우리의 교화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변화하시는 것처럼, 겪으시는 것처럼, 움직이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인간처럼 표현하는 신인동형론적 표현이 나오지만 이것은 관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는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하신다는 분입니다. 이 두 개의 신앙고백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고 언약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내시고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였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그들을 관계적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바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제가 요즘 신앙이 식어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혹은 ‘여러 해동안 주님을 떠나 세상 연락(宴樂)을 즐겼습니다.’ 이 말처럼 말이 안 되고 엉터리 같은 말이 없습니다.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존재입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온화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지만 불순종하면 진노하는 하나님을 대면할 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다만 하나님을 순종하며 대하다가,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대해서, 예전에는 자신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마났지만, 지금은 진노하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붇드시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중동지역에 이스라엘마저도 지역신의 개념, 곧 Local God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땅의 구획마다 그 땅을 주관하는 신들이 있어서 그 신들에게 밉보이면 그 관할 구역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조차도 애굽과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구역이지만, 가나안에 입성하고 나면 -하나님도 힘을 쓰지만- 가나안 신일 그 터에 대한 고유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도 못 버리고 바알신도 못 버리는 혼합주의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있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도 하나님의 관할 구역에서 이탈하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큰 폭풍을 만나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해 충격적으로 눈을 뜨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 것을 깨달은 시인이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붇드시나이다"라고 하는 표현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분내고 미워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세 개의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떠나시고 붙이시고 넘기시고’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슬퍼하시자 ‘떠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실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입성한 후에 처음 장막을 쳤던 장소로 거기에 법궤를 놓였습니다. 그분의 임재의 장소였던 실로는 미래의 이뤄질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장차 이뤄질 교회를 바라보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망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서 떠나가셨다는 것은 언약을 파괴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미음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주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과 위엄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의 관계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그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임마누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대적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이것은 뒷부분은 명확한데 앞부분이 불분명합니다. 그 능력을 포로에게 넘긴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겠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당신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기셨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력할 때, 전쟁을 해서 포로 잡아온 대적들보다 능력이 뛰어났는데 하나님이 그 능력을 대적에게 넘겨주셔서 이스라엘은 약하게 되고 그들은 강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보다 더 가능성 있는 두 번째 해석은 포로를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었다고 한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비꼬는 표현 즉 cynicism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실로를 떠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할 자가 없어 대적의 손에 끌려감을 비꼬는 표현입니다. 두 가지 해석 중에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큰 능력이 사라지고 그들은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대적에게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존귀함과 두드러짐,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했던 것을 대적에 손에 넘겨주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던 이스라엘은 넘어뜨리다니 바벨론은 대단해.’라고 말하는 식으로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 여기서 소유라는 표현은 불분명합니다. 히브리말로 ‘나할라’인데 옛날 성경에 기업이라고 번역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은 땅입니다. 기업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물려주는 것이 기업이라고 합니다. 대대로 그것을 운명처럼 물려받아 그것을 토대로 번영을 이루며 집안이 영위되는 것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소유는 번역이 좀 어색한 것 같습니다.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적인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지만 영적인 기업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도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업이 필요 없는 분인데, 무슨 뜻입니까?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세상의 창조세계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사 이 기업을 통해 이 세상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데 토벌대장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기업이라고 부르십니다. 그의 기업 때문에 분내사 이스라엘을 칼에 넘겼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기업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화나게 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in with’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속속들이 맺어진 깊은 연합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분노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말하자면, 아주 친하게 사랑을 나누던 사람들이 갈등이 생겨 싸우게 될 때, 뼈 속까지 사무친 사랑이 변해 뼈 속까지 미워지는 것을 문학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전치사가 이런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가 그의 소유였던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 마음에 대못을 박았는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백성들이 칼에 넘겼습니다. 칼은 아수르나 바벨론 같은 나라의 칼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렇게 변하지 않고 사랑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미워하시다니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배반은 물론 잘못이지만, 떠나지 않겠다고 하시던 분이 떠나시고 보호하겠다고 하셨던 분이 대적에 손에 붙이시고 지켜주시겠다고 하신 분이 원수의 칼에 넘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과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것은 이렇게 해석해야합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이렇게 망하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을 강대국을 만드는 것이 그들을 향한 경륜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씨눈처럼 심어놓은 영적인 이스라엘이 잉태하여 그것이 활짝 꽃피우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일관성과 신실성은 변함없이 입증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의 위를 영원토록 보존하셔서 오늘까지 이르렀고 이것이 바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영적인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