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의 영광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녹취자 : 김세나
시인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고백했고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9절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히브리어로 쉠()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초월하셔서 그래서 하늘에 계시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 그 모든 만물위에 초월한 하나님은 초월하시기 때문에 이 땅에 없으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도 계신데, 이 땅에 계신 그 증거가 당신의 이름을 두심으로써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보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들이 볼 수 없지만, 보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말이나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산다는 말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과 그 다음, 그 이름이 지시하는 실체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데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피조물들이기 때문에 한계를 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을 지은 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 피조물과 이름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아버지, 그러한 뜻인데 열국의 아버지라고 합시다. 그가 항상 열국의 아비답게 산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이름이 주어져도 항상 사람이 그 이름에 온전히 합치하는 삶을 살거나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봅시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전의 설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회개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을 이겼다라고 하는 이름의 뜻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얍복강가의 사건이 있은 이후로 항상 그렇게 참예하는 삶을 살아서 주님의 마음을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본체와 이름 사이에 추어의 간격이 없습니다. 혹시 그러한 것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느껴지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그것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 사이에는 불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위에 뛰어나셔서 아무대도 계신 곳이 없지만 어떻게 보면 아무 대도 계신 곳이 없습니다. 계시다, 계시지 않다고 하는 기준을 우리들이 무엇으로 생각하는 가입니다. 흙이나 물이나 바람이나 공기나 인간의 영혼처럼 하나님이 계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데나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라고 하였는데 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행사되는 것입니다. 행사라고 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실행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 줄을 사람들이 알아서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을 향하여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그 이름 때문에 그 이름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신념과 사상이 그리고 그들의 실제적인 윤리가 재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영광스러운 행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지금 하나님의 심판, 징계를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멸망하고 나라가 산산이 짓밟힌 이때에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라가 망했고 우리는 비참하게 되었고 먹을 것도 없고, 길거리를 유리 하고 있습니다. 불편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우리를 빨리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탄원이 아닙니다. 그 탄원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더 순위에 있어서 뒤에 있는 것이고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치셨지만 많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실 수 없는 힘없는 신이다. 혹은 뒤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 이야기는 예전에 계셨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그 뜻이 아니라 너희 혹시 원래 없는 하나님을 그렇게 섬긴 것이 아니냐는 조롱이 담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이방과 나라 가운데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주님의 이름이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하자면 비참한 형편이었습니다. 이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그 때에 이 시인은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다시 영광스럽게 행사되도록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높아질 수도 없는 분이고 낮아질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이 땅에서 낮아질 수도 있고 높아질 수도 있고 존귀하게 될 수도 있고 발아래 짓밟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여김을 받느냐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그 분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소명을 가진 백성들이었고,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유리하고 방황하던 이 아람족속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나안땅에 들여보냅니다. 큰 민족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역사 속에서 정반대의 상황이 대두된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된 상황에서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 세 가지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명령형의 동사로 나타나고 있는데 도우소서. 건지소서. 사하소서. 세 가지 동사로 나타납니다. 그 모든 도우심, 건지심, 사하심,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주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가 무엇인지를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라고 말합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 증거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법정에서의 사실에 대한 입증입니다.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증거를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하는 것은 십계명에서도 금지된 아주 커다란 죄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 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커다란 죄이고, 이것은 다른 많은 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증거는 사실에 입각해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한 정확한 책임 있는 증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증언은 누구에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은 재판장에서 들려주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재판장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태도를 바꾸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증언입니다.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이름의 행사를 주님의 이름의 증거라고 보았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 모든 삶과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모든 피고인들인 이 열방과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에 관한 증언입니다. 그 증언을 듣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열방들이 인식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고치게 하는 것이 이 증거의 목적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기 위하여 증인들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셨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위대한 증거입니다. 바로 그 증인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증인은 사실에 입각하여 증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거짓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참된 것을 증거하는데 바로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범죄하고 타락하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이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 이름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증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슨 증거입니까. 아,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구나. 우리의 조상의 많은 죄와 우리의 악이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왔구나 라고 자신들이 증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시인이 뼈저리게 하나님 앞에 공동체의 죄악을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해 주셔야 합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이것은 현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본질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점층법을 구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돕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군대용어로로 많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응원군을 보내시며 라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전쟁이 팽팽하다가 적군이 확 강해지면서 전세가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전투현장에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저 지평선에서 우레와 같은 말발굽 같은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며 지원군들이 오면 지고 있던 군인들은 사기가 솟구치기 시작하고 공격하던 적군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움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이미 역사의 현실 속에서 지고 있으니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건져달라는 이야기는 난관이나 어려움과 관련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민족의 말발굽아래 짓밟혀서 예루살렘까지 훼파가 되었고 성전이 다 부수어졌습니다. 거기에서 자신들을 건져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파괴와 이민족의 약탈, 이스라엘을 향한 이방민족의 승리가 결국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우리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하며 이 죄를 하나로 보고 이 죄의 소유자가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의 일체 의식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두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심지어 조상들이 짓고 조상들이 죽어버려도 그 조상들의 죄 조차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짊어질 죄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하는 공동체의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죄도 다루시지만 공동체 전체의 죄를 다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로서의 그 죄가 남의 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시인은 간절히 자신들을 도우시고 건지시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들을 위하여 드리는 주님의 이름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이 여김을 받도록 하나님 앞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