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대적이 깃발을 세울 때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시 74 :4-5)
녹취자: 이병두
여기에서 시인은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모임 가운데 와서 어떻게 훼방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인은 ‘주의 대적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복수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그 원수들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합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훤화한다’는 말은 우리말로는 ‘떠든다’ 이런 뜻입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일어나다’ 혹은 ‘으르렁거리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회중에서 소리를 지르며 자기 기준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자기의 기준들’ 또는 ‘자기의 표준들’을 상징으로, 또는 표적으로 세웠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사실은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했고, 그들이 악을 자행하였고, 누구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회중인데도 거기에서 소리를 지르고, 거기에서 이전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름대로의 삶의 기준들을 훼파하고, 거기에 자기의 기준들을 세우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인 것처럼 표준들을 세우고 그것으로서 표적을 삼았다라고 하는 뜻이라고 생됩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등등한지 오늘 시인은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습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무들이 서있고 나무를 하는 사람들은 도끼를 들고 올라 갑니다. 혼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보면, 원수들이 복수이니 많은 사람들이 벌목을 하러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힘차게 그 도끼를 내리찍습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에서 오랫동안 그 산을 지키고 있었던 나무들이 꺾어지면서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벌떼같이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무를 찍으며, 그 무성하던 숲을 황폐하게 하나씩 하나씩 나무를 쓰러뜨리며 그 산림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염두에 두고 이 묘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끼를 들고 자기를 베어버리려고 하는 벌목꾼들에게 나무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저항 할 힘이 없는 나무들은 서 있는 것 같지만, 도끼에 찍히며 무참하게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분질러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 광경이 마치 이스라엘이 아무 대책도 없이 원수들에게 꺾어지는 것과 아주 유사했기 때문에 시인이 이러한 비유로 묘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역사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대적들이 주의 회중에서 소리를 지르고, 자기의 표준을 세워 표적을 삼았습니다.’ 이름은 교회이고 모임은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이고 교회인데, 그 안에 세속의 가치가 성경의 진리보다 높이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것은 누가 세운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운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대적들이 주의 회중에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대적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적인 원수들은 사람의 도움과 섬김 없이는 결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성도들을 유혹하고 설득하고 특히 성령의 진리로 말미암아 영혼의 깨우침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입술로는 하나님을 신앙고백 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가치를 따르고 기준을 따르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고 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모양은 교회이고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지만 그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소명 대신에,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자기의 이름을 내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이세상의 표준을 교회에 도입하고, 그것으로 표적을 삼아서 결국, 모양은 교회이지만 교회가 원래 가지고 있는 소명에 충실한 대신, 오히려 교회가 이 세상의 가치관들을 교인들에게 확산 시키고, 이 세상과 교회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설득함으로써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고 봉사해야 할 기관이 아니라, 이 세상 나라와 똑같은 가치를 추구함으로 모양은 종교의 모양을 가졌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회도 이 세상 나라의 일부가 되게 하려는 것이 바로 악한 세력들의 궤계입니다.
시인이 오래전에 이스라엘을 침략한 원수들에 의해서 이런 악이 행해지는 것을 보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누구도 대놓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교회를 침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단을 두려워하고 이단을 경계하지만, 이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세상의 정욕이고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이것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을 더럽히고, 어지럽힌 후에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교회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서지 못하도록 현저하게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 우리의 사역,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고 전도하는 우리의 모든 섬김과 봉사,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 선교하는 우리의 모든 목회적인 사역, 이것들은 결코 육적인 사역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사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인 사역들이 계속될 때에, 이것을 막아서고 방해하는 것은 육적인 세력들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의 진리에 입각한 가치관을 세속에 입각한 가치관으로 바꾸고, 성경에 입각한 우리의 믿음의 규칙들을, 이 세상의 영향을 받은 규칙들로 변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아야 할 우리의 이 굳센 삶의 교훈들을, 이 세상에 있는 규칙들로 제시하기 시작할 때, 교회는 종교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이미 그 영적인 힘들은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의 삶 속에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소위 ‘아디아포라’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엇 하나를 고집하지 말고, 아주 넉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디아포라’라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견해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도 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견해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와 다른 다양한 생각들을 용납하고 이해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하나님이 주신 자유이지만, 이것이 주님을 올바로 믿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전히 나의 이 견해가 다른 사람의 견해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입장에서 그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을 존중한다’ 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관한한 성경이 명백하게 우리가 제시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아주 쉽게 바꾸는데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이고 불변하여야 할 것들은 아주 너그럽게 포기하고 상대방과 섞이고, 아무래도 괜찮은 것들은 고집을 부리고, 자기의 견해를 강하게 고집하므로 교회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서로 반목과 질시를 일삼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의 가까운 이웃이 성경 말씀을 거슬러 사는 것이 나에게 분노를 일으킵니까? 아니면 내 인생과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살 때 분노를 일으킵니까?” 전자가 아니라 대부분 후자입니다. 그래서 내가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안 지킬 때에는 성경의 십계명 중 하나를 범한 것 보다 나를 더 분노하게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성입니다. 물론 ‘약속을 지키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가치가 있는 덕목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보다 더 커다란 것이겠습니까? 자기의 인생관과 거스를 때는 분노하고, 자기의 인생관과 어울릴 때는 아주 친구가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를 때에는 그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 이 너그러움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질서를 세우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웃들이 행동하고, 또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끊임없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깊은 성찰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가치관과 표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로부터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살면 이 모든 표준들이 분명해지지만, 이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 표준들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올바로 알거나 깊이 알지 못하면, 불변하는 성경의 표준과 변할 수 있는 사람의 견해를 혼돈하게 되거나, 혹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개인적인 생각을 절대화해서 성경의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는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하는 지성의 분투와 그것이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준이고 그 기준들이 어떻게 우리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주 쉽게 나는 진리를 알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 우리가 믿는 모든 내용들, 그리고 우리 가운데 통용되고 있는 모든 습관과 생활의 방식들은 아주 엄정한 방식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의해서 검증되고 확증되고, 그 모든 것들이 확인되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신앙과 부합한 삶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치열하게 이 진리에 의해서 검증되고 연단되고 예전에 발견되지 못했던 것들을 우리들이 그 진리로부터 어긋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면, 정직하게 우리의 잘못을 돌이키고 정결하고 순수하게 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이 순환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그 진리에 굴복하고 그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 주님이 원하시는 표준들을 우리의 삶속에 그 정신과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님 백성의 모든 힘은 그들의 육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든 힘은 그들이 붙들고 있는 진리의 표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가 진리를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겨울철의 과일은 우리의 몸을 이롭게 하고, 먹는 순간에도 기쁨이 있지만, 치통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과는 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밝은 빛은 우리에게 매우 좋은 것이나 안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둠속에 있는 편이 훨씬 편안합니다. 진리를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그 진리를 마음에 띠고 그 진리를 표준으로 세우고, 그 표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하는 면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기뻐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건강하게 하나님을 향해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에 하나님이 외적인 번영을 주시고, 모든 것들이 평안하고 모든 것들이 부족함이 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도 이러한 영적인 시야를 가지고 바라보면서, 정말 우리 가운데 진리의 표준들이 표적이 되고 있는지, 이 세상의 표준들이 표적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믿음의 표준들이 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의 삶과 믿음이 그 표준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며 살아가는 삶인지 깊이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이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