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시 74:16-17)
녹취자: 박은희
출애굽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자연세계 전체 이 땅에 있는 만민들이 경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나라의 통치에 대해서 갑자기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이것은 이제 가고 오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낮과 밤, 빛과 해,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낮과 밤을 대조시킨 것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우선 시편 19편에서 보는바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가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하면서 온 천하에 가득한 하나님의 통치의 증거를 어느 우주의 한구석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대리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 낮과 밤은 특히 시편에서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이 될 때에 이게 결국은 선과 악의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흔히 우리들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행하는 그 악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났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인간의 악을 바라보는 관점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있고 멀리서 바라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관접은 그것은 정말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인간에게 일어나는 인간의 충동적이고 자의적인 그러한 그 악들입니다. 그러나 먼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아주 놀라운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한 수단과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 없으면 하나님이 그 일을 못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지혜가 자유 속에서 행해진 인간의 악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더 큰 지혜를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론 속에서 “사람들이 왜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지 참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신도 한때는 악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 만약에 그 악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악이 없게끔 완전하게 창조하지 못하셨을까? 그리고 그것이 자연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약에 주신 것이라면 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선하게 만드셨는데 그 악을 주셨을까? 악이 보태어짐으로써 모자라는 선을 보태기 위함이었던가?’ 막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인간에게로부터 악이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선으로 바꾸실 수 없다면 그분이 어찌 하나님이실 수 있겠는가? 하면서 이제 악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악의 문제는 아주 신비합니다. 그래서 잘 연구하면 이게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다라고하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빈 프랜틴가라고 하는 철학자가 “왜 인간세상이 악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이게 종교적인 질문이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 라고 반박을 합니다. 상당히 성공적인 반론이었다고 그렇게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선만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악도 주관하신다 하는 의미도 이 안에 묻어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이것을 출애굽 당시와 연관시켜서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 애굽의 초태생을 죽이시기 직전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큰 형벌중 하나가 그 어두움이 온 땅에 임하는 것이잖습니까? 그것은 애굽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재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심이 라아신이라고 해서 태양신이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자신들이 믿는 그런 그 태양신, 라아신을 섬기면서 이제 바로는 바로 그 라아의 아들이라 이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동양으로 말하자면 천자쯤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태양이 빛을 잃으며 흑암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이 요동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이 시인이 회상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성소가 더렵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린당하고 있는 역사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바로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회상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주 놀라운, 말하자면 경건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런 것도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러면서 고난을 당할 때 눈을 들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게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그 자연 속에서 논리를 찾고, 그 논리 속에서 신앙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고난당하는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늘 있는 그런 흔한 그런 경건의 기법이었습니다.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이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이 땅의 경계는 민족들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나라와 나라사이에 그 경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생긴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인간들이라고 하더라도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지키며 그러면서 그 경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각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또 하나의 훌륭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오면 이렇게 나라의 경계에 대한 분쟁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나라와 나라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의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면서 전쟁으로 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마지막 때가 되면 기근과 전쟁이 임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계를 정하셔서 서로 침범할 수 없게 하시고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이것은 노아 홍수이후에 하나님이 인간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사시와 연한과 그 다음에 추위와 더위, 심음과 거둠, 이 모든 것들을 질서롭게 주겠노라고 다짐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노아의 언약의 핵심적인 사항 가운데 하나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제 인간의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다시는 홍수로 이 세상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다짐하시고 맹세하시고 인간에게 축복으로서 이렇게 여름과 겨울에 뚜렷한 사시에 연한 표지, 이런 것들을 인간에게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이 시인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고 또 원수들에게 짓밟혀 성소를 유린당하였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이 역사적인 상황을 온전히 지켜보고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사속에 일어나는 이 모든 일에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자신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보면 나쁜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나쁜 일, 좋은 일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좋아 보이는 일도 우리가 잘못 사용하면 나쁜 일이 되고 나빠 보이는 일도 잘 사용하면 좋은 일이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좋은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셉이 자기의 형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을 나를 해하려고 악을 행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갚으셨나이다.”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때로는 나빠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도 모르는 우리자신을 하나님이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가 유린당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처소가 짓밟혀 백성들이 고통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까지도 이스라엘 속에서는 두 개의 신앙이 대립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신앙을 뭐냐 하면 우리가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라는 선지자들의 신앙입니다. 또 한쪽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나쁘게 못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라고 하는 은총을 하나님을 섭리의 창살에 가두는 구실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당하고 끌려가면서 그러면서 후자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힘쓰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을 인간들이 들을 때에, 우리 인간들은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또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의지가 무엇인지 그런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아! 하나님 생각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이런 뜻을 가지고 계시구나.’ 해서 나의 생각은 그분의 생각에, 나의 뜻은 그분의 의지에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지극히 크신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으로 인도하신다고 해서 어떠한 어려움도 당하지 않는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하셔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길이 때로는 역경과 시련, 형통함과 불통함, 이런 것들을 다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도 인생이 향하여 가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일생을 다 살고 도착해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올바르게 하나님의 생각대로 그 길을 따라서 가려고 하는 순간순간의 몸부림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당신의 뜻들이 아주 작은 부분에서 계속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가고자하는 사람은 다 산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고자 하는 그 모든 몸부림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안에서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인간의 가장 커다란 그 행복의 비결은, 하나님의 그 뜻을 알고 그 의지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불안전한 요인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자신을 잘 모릅니다. 남은 잘 들여다보고 판단할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세우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는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진리의 빛을 받는 분량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진리의 빛을 받지 아니하면 불공평하게 자신의 육체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고 한 것처럼 진리의 빛을 찬란하게 받을 때,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보고 사랑할 자기와 사랑하지 말고 미워해야할 자신을 공정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빛이 사람 속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에게 사실 이 진리의 빛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또 가르쳐 줄때는 마음이 굽어서 그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네. 빛은 좋은 것이지만 안질이 걸린 사람들에게는 자지러지듯이 괴로워서 어둠속으로 피해야 하는 것이잖습니까?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공정히 못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진리가 있든지 없든지 물은 물이고, 꽃은 꽃이고, 산은 산이고, 바다는 바다입니다. 보는 대로 안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진리에 처해 있어도 배고픈 것은 배고픈 것이고 진리를 멀리 떠나도 배고픈 것은 배고픈 것입니다. 목마른 것은 나의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이 없이 육체가 목마르면 언제나 물을 먹고 싶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없어도 잘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한 육체적인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우리자신을 그 육체 앞에 세워서 육체의 환경과 처지, 내게 일어난 상황들을 통해서 이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나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보면 하나님 앞에 악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선하신 분이시다라고 하는 표지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보십시다. 불길이 막 솟아오르면 거기에다가 구리, 철사, 플라스틱, 종이 막 던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막 각양 색깔을 내면서 타오르지 않습니까? 그것이 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불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불길이 원래 있었는데 잘 안 보였는데 태울 것을 집어넣어버리니까 그 불꽃이 각양 색깔을 내면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선하게 대우해주시는 분이지만, 이 선은 우리관점에서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선을 거슬리려고 행동을 하거나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것을 확 태우셔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고통을 주시는 것, 그 자체를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신다, 나만 미워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피해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이 당신의 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스르면 우리가 고통을 당하게 해서라도 선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계속 드러납니다. 크고 작은 우리의 삶의 상황, 내가 만나는 시련과 역경, 혹을 좋은 일과 나쁜 일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묻어있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라도 너의 마음이 어떠한 줄 알아라하면서 우리자신을 우리 앞에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는 회피하고 변명할 수 있었는데, 우리자신을 우리 앞에 세우시는 그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우리 스스로의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리고, 수치심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의 고백으로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때로는 가혹해 보이는 하나님의 이 섭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였든지 간에 당신의 음성을 듣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성소가 유린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밟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의 한 장을 지나면서, 자기의 힘으로 금방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지나면서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민족들과 사시와 연한을 구분 짓고 그들로 시간 속에서 영영히 이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를 묵상했습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기가 택한 백성들 하나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나는 쓰라린 일, 우리에게 발생한 회상하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들이 당시로서는 뼈저리게 아픈 악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시고 당신 앞에 병든 우리를 고치게 하기위해서 세우시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