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에스라 강해
녹취자; 김은정
지난 시간에 이야기 된 것들은 2시간에 걸쳤나 3시간에 걸쳐서 쭉 9장 1절-6절까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지난시간에 다루었던 것이 5절, 6절이지요? 한사람의 회개를 통해서 4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힌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5절서 부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서의 개인적 탄원이 계속됩니다.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쭉 이야기가 나옵니다. 6절에서 보면 에스라의 고민은 결국은 무엇이었습니까? 백성들의 죄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죄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이 정수리 넘치고 우리의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하면서 그 백성들의 죄, 그것들로 인해서 인제 고통하는 에스라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보면 확실히 이것은 하나의 운동은 아닙니다. 운동이 아닌 것이 여기서도 벌써 드러납니다. 에스라의 머릿속에는 포로귀환에서 돌아온 그 수많은 자기의 동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방들의 여인과 잡혼을 하고 말하자면 율법에 어긋나는 범죄를 했다라고 하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에스라의 고민은 이렇게 해서 어떻게 어떻게 일을 꾸려나가서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겠다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개혁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우선 개혁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대책회의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으니까 비상 대책회의 위원회를 구성을 해서 대책회의를 하고 그다음에 이러한 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를 토론하고 아마 프로그램들을 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누구와 의논하지도 않고 누구와 함께 고민하지도 않고 그는 홀로 자기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너무나 많이 동떨어져 있는 그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에스라는 깊이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너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에스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는 구체적인 개혁의 프램보다는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교통할 수 있고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기뻐하는 "너희가 주 하나님을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의 길을 인도하시리라." 구약의 성도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섬기는 큰 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요리 문답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이 그 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기뻐한다. 하나님 자신을 기뻐한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죄로 말미암아 막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프램도 아무런 계획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순수한 부흥을 향한 하나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참된 부흥에 대한 열망은 뭔가를 추구하는 직면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기서도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율법의 완전한 자여 그 하나님의 율법에 능하고 율법에 완전한 자,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 그것은 7장에서 6절에 나오고 그 다음에 왕께 도움을 입은 자, 율법에 완전한 학사 이것은 7장 12절에 나옵니다. 그렇게 율법에 완전한 학사, 율법에 능한 사람, 모세 율법에 완전한 사람, 이러한 사람 에스라가 어떠한 심령이었는가? 그리고 그 사람의 존재, 그 사람이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 그의 심령이 정말 율법에 매여 있고 그리고 그의 마음이 거룩한 하나님에 깊이 붙들려 있기 때문에 그런 시대의 죄악상들을 보면서 이제 이렇게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죄에 대한 설교를 해야지만 부흥이 온다 사실 그 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죄에 대한 설교를 해야겠다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설교자가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것은 설교자의 마음 속에 그 백성들에 대한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인 번민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무엇이냐면 교회의 변화문제, 무슨 갱신의 문제, 수없이 많이 떠들어야 설교자의 문제입니다.
엊그제 제가 횃불회관에서 설교를 하면서도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아직 설교를 다 못했습니다만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렇게 나옵니다. 그러면서 에베소 교회에 대한 평가가 쭉 나옵니다. 결국은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 요한에게 주어졌던 교회에 대한 평가가 담긴 계시를 받은 사람은 단수였습니다. "교회의 사자"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이냐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은 당신에 관한 뜻을 모든 성도들이 한꺼번에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알리기에 앞서서 그저 당신의 교회를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 뜻을 알려주기를 기뻐하셨다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아모스서 3장 7절에도 나옵니다. "내 비밀의 일들을 나의 종 선지자에게 알리지 않고는 결코 행함이 없느니라" 하는 말씀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평신도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평신도의 문제가 어떻게 생각하면 생각보다 빨리 고쳐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항도 없지 않지만 이렇게 에스라 한 사람을 통해서 민족적인 커다란 회개와 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결국은 무엇이냐면 그러한 잘못된 선포와 잘못된 교훈 속에서 굳어져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책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속에서 자기의 할 바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깊이 반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아가면 이 에스라의 마음 속에는 내 백성들의 죄악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설교 속에서도 죄를 다룰 때 정말 성도들의 죄를 돌을 던지는 것 같은 식으로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과연 그것이 자기의 죄악인 것처럼 그렇게 느끼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게 느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녕 9장 1절에서 이야기한 그 시대의 풍조에 물들지 않았던 방백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 이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 않습니까? 분명한 것은 에스라가 이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하기 전에 그 속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포로시대에 돌아와서 사람들이 이방의 여인과 잡혼을 하고 그렇게 율법을 어긴 삶을 살 때에 뭔가 잘못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겠습니까?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그런 상황 속에서 목소리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가 오고가고 그런 문제들이 지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근본적인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에스라가 모든 일들을 자기의 죄악처럼 동일시하고 그러면서 깊이 애통하는 일들이, 자기의 죄로 삼고 애통하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에 그때에 비로소 변화가 일어났다는 그런 일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7절 한절은 심판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 7절입니다. 역시 과연 에스라는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말하자면 깊은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하는 것들이 여기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벌써 망한지가 70년이 지났단 말입니다. 역사 속에 일어난 일들은 바로 진짜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우리와 우리 왕들과 제사장들과 열방의 손에 붙잡혀서 칼에 죽고 노략을 당하고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제 유다가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망하게 된 원인이 어디 있었습니까?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안 망할텐데.. 신흥 바벨론에게 굴복하도록 예레미야가 예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세력인 애굽을 의지한 것입니다. 애굽하고 바벨론하고 한판 붙는데 거기서 결국은 바벨론이 애굽을 꺽으면서 결국은 망해가는 애굽의 편에 붙었던 말하자면 유다에 대해서 완전히 쑥밭을 만들어버리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그런 것을 세속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조정의 판단착오였다. 국제무대에서 외교를 잘못했다. 정치적으로 잘못되었다. 등등 왕권이 나약했다. 말하자면 군사정책이 잘못되었다. 등등"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역시 이 사람은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모든 우리와 우리의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이 이방사람의 압박을 받고 붙잡혀 가서 칼에 죽고 하는 것들이 선택된 백성으로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모든 배경은 결국은 무엇이냐면 죄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지도자는 이런 시각을 가지고서 역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독특한 영적인 시각에서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이런 것들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엇입니까? 6절에서 에스라가 이렇게 죄의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심하게 고통하고 막 전율하는 이유를 우리는 7절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역사를 해석할 때에 민족이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던 그 비참한 바벨론 포로 70년을 경험한 것이 바로 오늘 내 눈앞에 재현되고 있는 이것 때문에 바로 그런 비참한 역사를 당했는데 오늘날 또 이와 같은 죄악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만연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학사 에스라는 비통한 심정을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이해가 됩니까? 왜 7절을 읽지 않고는 우리들이 왜 5절과 6절에서 그토록 에스라가 죄악의 문제를 가지고 몸 소리치면서 치를 떠는지를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뜸 6절이 끝나고 7절에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무엇이었냐면 우리는 지금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선택된 백성으로써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짓고 이렇게 살게 되었는데 결국은 그 비참한 눈물로 비참하게 보냈던 그 70년의 그 어두운 시절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 눈앞에 재현되고 있는 이와같은 죄악들 때문이었는데 지금 아직도 우리 눈 앞에 재현되고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심령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전에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죄를 인하여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우리들을 칼에 붙이시고 심지어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들을 칼에 죽게 하시고 또 주께서 택하여 세우신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들을 죽임을 당하게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면 오늘도 역시 변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이 모든 심각한 죄를 인하여서 우리를 심판하시지 아니하겠는가 하는 하나의 죄를 짓게됨으로 말미암아 애석하다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서 임박한 위기를 다시한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라의 7절에 나와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좀더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그랬습니다. 재미있지요?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에스라가 만나지도 못한 사람, 조상, 에스라가 만나지도 못한 조상, 에스라가 만나지도 못한 선조, 거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까지 하나로 묶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로 묶고 있는 장면 속에서 선조들이 지은 죄까지도 우리의 죄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구약적 언어로 말하면 언약적 연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후로 그의 선택된 백성들과 하나되시는 언약적 연대, 신약적 개념으로 말하면 지체 개념입니다. 우리 신명기 29장을 보십시오 신명기 29장 13절에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14절 시작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 까지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자신들이 그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하나님과 맺는데 그러한 하나님과의 언약은 여기에 서 있는 자기들과만 맺으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지도 아니한 자 후손들과도 이렇게 맺게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언약적인 연대입니다. 그런데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9장 7절에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 여기서 몇 가지 보여주는데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다음에 우리 왕과 우리 제사장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 이 사람들이 모두가 다 무엇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선지자가 안나온 것은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3요소 있지 않습니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이렇게 다 나와야 하는데 선지자는 여기에서 빠졌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스라의 눈에는 엉터리 선지자는 선지자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선지자 직이라고 하는 것은 독특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왕과 제사장들 다 결국은 열방의 왕들에 손에 붙이사 한두 왕이 아니라 많은 왕들에게 붙잡혀서 거기에서 곤혹을 치르는 장면을 쭉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런 죄들이 결국은 전 민족적으로 쫙 퍼져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죄는 교회와 무관하지 않고 교회의 죄는 민족과 단절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같으니이다"그런 것을 보니까 결국은 무엇입니까? 오늘날도 그 죄에 대한 심판이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입니까? 안되었다는 것입니까?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 죄 값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 죄 값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0장을 한번 찾아보시겠습니까? 40장 2절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회복,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 지불한 이후에 비로소 회복이 있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모든 댓가를 다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에스라에게 뭐가 제일 큰 문제였냐면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죄를 지었음으로 심판하셔서 그래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그래서 이지경이 되었는데 이전에 죄 값도 다 치르지 못했는데 아직도 그 심판이 있게 했던 그 죄들이 고개를 들고 만연해 오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이 죄에 대한 빚도 다 못 갚았는데 또 이런 죄가 우리에게 가해질 때에 이전에 우리가 받았던 심판과는 비교가 안되는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찾아올텐데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말하자면 깊은 절망, 위기 그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영적인 지도자들은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지은 죄를 인하여서 이렇게 깊이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8절에 보니까 두 번째 단락이 됩니다.
두 번째 단락이 8절서부터 9절까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회상함. 은혜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그나마도 이렇게 돌아와서 고토에 돌아와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좀 있었다라고 한다면 이렇게 죄를 지은 것이 조금 정당화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왜 그러냐면 주님이 우리에게 이전에 베풀어주신 회복이 마땅히 주님이 우리에게 해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회복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좀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다시 고토로 돌아와서 감격가운데 하나님 앞에 성전을 짓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게된 이것은 결국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 왜 그러냐면 죄는 그렇게 해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역시 죄의 문제는 안끝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너희는 하나님이 완전히 회복해주시기에 적합할 만큼 그렇게 하나님의 복수의 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렇게 돌려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고토를 밟게하신 것, 70년 만에 고토에 돌아오게 하신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면서 아마 에스라에게는 주마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받은 은혜를 어떤 것이었습니까? 1장 5절에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그러니까 70년 동안 살았던 외국의 땅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교수님이 외국에서 15년을 살았는데 "이제 고국에 돌아와서 봉사를 하시죠?" 그러니까 선교사가 되는 결단을 해야된다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 문화에서 다 컸고 여기에 들어오면 반에서 꼴등합니다. 재산이나 무엇이나 다 거기에 있고 인간관계도 다 있고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온다는 것은 선교사가 되는 결단을 해야만 고국에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15년도 그런데 70년의 세월입니다. 이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올라오는 사람의 명 수를 제한한 것도 아닌데 결국은 그 많은 사람이 흩어졌는데 결국은 올라온 사람이 5만명 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신앙의 감동을 주셔서 "나는 이것이 필요없다. 내 평생에 소원은 오직 이것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주님을 노래하는 것" 그러면서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올라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신앙의 감동을 주어서 그런 감동을 받고 올라왔던 그런 사람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올라오게해 주셨던 큰 은혜 주심 이런 것들과 백성들의 죄악이 교차를 하면서 에스라의 마음은 더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이제 8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사장은 일방적으로 백성의 편에만 서서 그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주고 백성들을 변호하는 것이다. 사실을 그런 개념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강의를 해도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은 참된 제사장과 참된 선지자 그들의 선포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참된 제사장과 참된 선지자 사이에는 충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참되지 않으니까 선지자가 참될 경우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제사장이 참되지 않고 선지자가 참되지 않으면 그들 사이에 충돌이 없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이 참되지 않고 선지자가 참되지 않으면 그들 사이에 또 충돌이 없는 것입니다. 미가시대의 선지자들처럼 말입니다. 아합 왕이 좋은 것만 예언해주길 바랬습니다. 이야기할 때 그들 사이에 그들에게서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어떻게 그릇된 제사장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충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참된 선지자들의 경우에는 그 선포를 받아야 하는 백성들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깊은 연민이 있었습니다. "애가" 같은 것이 말하자면 그런 것이 아닙니까? 히브리어도 "애가"하고 시작합니다. "에카" 아이구 아이구! 하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그러면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또 제사장도 참된 제사장일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뿐 아니라 이렇게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믿는 바로는 그런 것입니다. 참된 제사장과 참된 선지자는 악수했을 것이다. 결코 그들 사이에 현대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갈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메시지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사람의 마음이 선지자로 말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다음에 "잠깐 은혜를 베푸셨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마땅히 갚으셔야 했던 그것이 다 끝나지 않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이 은혜는 이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례적이다. 일상적으로 얻기 어려운 그런 은혜요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안죽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음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가고 그런 비참한 생활을 하는데 그 속에서 살리심을 받았던 자기네들이 받은 그 은총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거국한 처소"는 사람들의 성전, 성막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박힌 못과 같게 하셨다"는 것은 단단히 박혀서 누가 뺄 수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곳에 있으니까 누구도 쉽게 침범하게 할 수 없게끔 그렇게 하나님이 견고하게 하시고 보호해주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로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성하게 하셨나이다." 거기에 보면 각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라는 말이 점점 더 축소되어서 들어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우리는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에스라의 뒤를 따라서 함께 그 고난을 무릅쓰고 본토로 들어온 사람들, 그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조금 소성하게 하셨나이다." "우리의 눈을 밝히사" 그리고 두 번째 소성이 나옵니다. 영적인 소성과 각성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눈을 밝히셨다." 에스라를 따라서 이스라엘로 올라왔던 종들, 그 하나님의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이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을 밝힌 사람들이었다. 무엇입니까? 그렇게 이방의 땅에서 안정되게 사는 것 보다는 고난이 기다리는,, 나중에 보면 알지만 느헤미야 때 보면 거기서 성곽을 건축하는데 수많은 박해를 받지 않습니까? 박해와 도전과 전투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그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이 눈을 밝히신 결과였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들에게 "악인의 궁정에 거하는 것보다 여호와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으니이다." 라는 그런 고백을 하게 했기 때문에 이 에스라의 뒤를 따라서 귀환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장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이 된다고 하면 여기에서 땅을 가지고 잘살던 사람들이 이북 땅,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것 같습니까? 간단하지 않습니다. 못가니까 감상적인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이지 탁 열어놓고 다 팔아서 올라가라고 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에겐 "바로 하나님이 눈을 밝히사 우리로 종노릇 하는 중에 조금 소성하게 하셨나이다." 이런 각성을 주신 후에 여전히 형편은 비참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종노릇을 하고 그런 비참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노예가 계속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소성을 주심으로 소망을 안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라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뭔가를 쭉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심판을 하셨는데 그럼에도 잠깐 은혜를 베푸신 것이 무엇이냐? 얼마를 남겨두었고, 박힌 못과 같이 하셨고, 우리의 눈을 각성시키셨고, 그다음에 소성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작은 것이 아님을 쭉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에 배역하는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복역하는 중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형편은 비록 노예가 된 형편이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복역하는 중에"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죄수가 죄를 짓고 옥살이를 하는 것 같은 표현입니다. "복역하는 중에" 죄 값을 치르는 중에도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스라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당할지라도 무엇이 계속된다는 것입니까? 그들과 맺은 언약은 계속되고 그 언약이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간섭은 계속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사 열왕 앞에서 우리로 긍휼히 여김을 입고 소성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에 세우게 하시며 그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을 주셨나이다." 울을 무엇입니까? 울타리입니다.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거기까지가 은혜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또 무엇을 회상하냐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도저히 이방의 민족들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여호와를 믿는 종교를 갖고 그리고 그 신앙의 고백을 따라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 불가능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역시 에스라서 1장 2절에 보면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러한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게 그런 마음을 만드셔서 그래서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여기서 재미있는 원리가 나옵니다.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다시 세우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생시키시는 이것이 히야, 부흥입니다. 점점 살아나게 하다, 확 살아나게 하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의 원래 단어는 "소생하게 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우리를 부흥케하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러니까 이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전, 무너진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슬퍼하고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이 삶의 근거지를 다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70년 동안 살았으니까 본토와 같은 땅을 떠나더라도 그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전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겠다라고 하는 깊은 내적인 헌신을 불러 일으킨 것이 결국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소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한 예가 학개서에 나타납니다. 성전을 짓다가 그 다음에 성전이 박해를 받아서 공사가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하는 말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 때가 아닌데 자기들은 집이 판벽한 집에 살면서 "때가 아니다 때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지어지지 못한 성전을 보면서 맨날 하는 말이 "때가 안됐다 때가 안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말하자면, 신앙의 모습이 소생되었던 모습이 다시 소실되어 가서 잃어버려서 안일한 신앙으로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흥하고 있는가? 참다운 부흥 속에서 살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교회를 보면 아는 것입니다. 소생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교회는 반드시 소생한 모습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교회가 사람들로 충만해지고 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언제가 제가 목회를 하면 교회의 켓치 프레이지로 걸려고 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사람으로 충만한 교회,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
소생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셨다는 그것은 만고불변의 원리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소생되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무엇이냐면 만고불변의 원리입니다.
사역자들에게 끊임없이 여러분들이 과연 주를 만났는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요새 교회에서 계속 그 설교를 했더니 몇 사람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당신이 과연 하나님을 만났는가 생각해 보라! 했더니 나는 옛날에 은혜도 받고 방언도 체험하고 다 했는데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는데 2번 3번 이야기를 하고 계속 이야기하고 6개월 7개월째 이야기 하니까 마지막에 자기는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또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된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니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에서 방황 중인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는 정말 깊은 부흥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성전을 세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에스라를 따라 올라온 사람들을 자꾸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저 사람들이 참 보통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보통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이런 죄악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또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선교사로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70년 동안 적어도 20살에 아이를 낳는다고 치면 거기서 3대 4대가 넘는 기간 동안 거기서 뿌리를 박고 살아오고 거기에 생활기반과 근거와 모든 것들이 다 있었던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버려두고 지금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와라 그러고 거기에 공터를 남겨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지배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참소하고 거기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특별 혜택을 받는 것 아닙니까? 특별혜택을 받아서 자기네 나름대로의 바벨론의 지배하에 살면서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종교들이 있었는데 거기서 유일신 종교를 일으키고 거기에 성전을 세우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할 때 이방인의 사람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이미 다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벨론에서 참다운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얼마나 박해와 눈총을 받으면서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본질적으로 확 하고 확산되어 질 때에 고레스 왕이나 아닥사스 왕이 있다고 하지만 법은 먼 것입니다. 주먹은 가깝고.. 나중에 다시 중단되지 않습니까?
출애굽 당시 그들도 그런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느냐고 할 때 10가지 재앙을 보면서 상천하지의 여호와 밖에는 참 신이 없음을 이스라엘 백성도 보았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일어났던 10대 재앙은 사실 내가 보기에는 이방인들에게 여호와가 이런 분이니까 너네 겁나지 내 백성을 놔 줘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렇게 10가지 재앙이 일어난 것이 불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동안에 그들의 마음을 확 움직여서 길이 어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 약속의 땅으로 간다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결국은 민족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신앙의 부흥입니다. 고래로 영적으로 넘어서는 교회를 선교지에 세운다는 것은 고래로 불가능했습니다. 지금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교회는 60년대 유일하게 선교에 전초기지였습니다. 여러분 아시죠? 코리아 인터네셔널 미션 그 본부 건물이 우리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영향을 받아서 선교영향을 받아서 선교나간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늘 옷 소매를 붙잡습니다. 그것 가지고 안된다. 정말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그러니까 선교지로 보내면 동남아로 보내면 필리핀, 필리핀으로 보내면 마닐라, 마닐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나중에 LA에서 싸움박질 하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뭔가 하나님을 만난 증표가 보이고 영혼들을 향한 그 뜨거운 열망이 보이지 않으면 소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선교지에 가서 피부색이 틀리고 문화가 다르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만 그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누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깊은 소생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에스라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번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여기는 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떤 신앙의 감동을 받았길래 그 고난으로 얼룩질 고국의 성전의 귀한의 길에 동참을 하고, 그 사람들이 얼마안남은 시간동안에 이런 끔찍한 죄에 다시 떨어지는구나! 그런데서 우리는 2번 깊이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소생함이 없이 결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질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질 수 없다면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전을 세워지는 일에 헌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여기서도 하나의 원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뭐라고 하냐면 소생하여, 영적인 깊은 소생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러니까 소생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전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지금 교회를 세운다는 것과는 많이 틀렸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여호와의 전은 정말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그런 신앙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전에 대한 관심은 100%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다분 목표지향적인 성격이 많이 있고 그런데 교회 건축도 제대로 잘 신앙과 연결시켜서 되며 오히려 건축과 함께 신앙의 큰 부흥을 경험하는 사례들을 보여주면 좋지 않겠는가? 늘 빚지고 쪽지 나눠주고 돈을 써내라고 하고..
그렇게 소생하여 하나님의 전을 하나님의 전이라는 의미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깊은 관심, 하나님의 전을 세우면 거기에 하나님이 임하실 것 아닙니까? 거기서 하나님께로 다스림을 받고 싶어하는.. 소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소생한 상태에서는 뭐가 어렵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운다라고 하는 의미는 예배의 처소만 마련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배한다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성전을 중심으로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개념, 소위 이야기하는 왕권의 개념입니다. 신적인 왕권의 개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백성을 다스려 주시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소생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무너진 것들을 볼 수 있는 통찰, 잘못된 것들이 고쳐야 할 것으로 눈에 띄게 되는 이러한 것들이 소생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 우리에게 울을 주셨나이다. 언약의 도성이 있는 유다, 예루살렘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0절 그 앞에 9절에 예루살렘에서 좋은 원리를 보여주고, 또 좋은 원리일 뿐 아니라 에스라가 역사 속에 실제로 경험했던 원리입니다. 소생, 하나님의 전을 세움,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함, 이 모든 일들이 소생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에스라가 소생의 이야기를 하면서 흐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소생을 죽어가게 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지금 오늘 에스라고 하여금 눈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백성들 앞에 일어난 이 끔찍한 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