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함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시75:9)
녹취자: 백지영
9절과 10절은 이 시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고 찬양할 것이라는 자신의 결의를 하나님께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고 알린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단지 설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삶의 모든 것들이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을 선포하고 알린다는 뜻입니다. 말로 들을 수 있도록, 직접 눈으로 보고 이해하고 느낄 수 있도록, 언어로, 시로, 글로, 실존하는 삶으로, 윤리적인 모습으로,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선포의 도구가 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이미 시인이 큰 시련과 환난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을 향해 재편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인데, 하나님을 높인다고 하는 것이 사실상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충분히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찬양의 목적은 기도와 마찬가지로, 그 어떠한 효과를 찬양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불러 일으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고 구속하신 의도와 목적을 따라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높임, 하나님을 향한 찬송,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결심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찬송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며, 우리의 감각으로 접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선포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맺으신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매우 비슷한 유비(類比)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반성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반성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의 반성은 짐승도 합니다. 같은 곳으로 계속 먹이를 찾으러 갔다가 실패하면 다시 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어떤 것을 먹잇감으로 알고 덤벼들었다가 몇 번 실패하면 자신이 맞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포기합니다. 이것이 짐승에게 있는 일종의 반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반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도덕적인 반성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그 도덕적인 반성의 궁극적인 대상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 자체를 직접 들여다보지는 못하기 때문에, 하루를 산 다음에 그 날에 일어난 일을 반성하게 됩니다. 자신이 행동하고 경험했던 일들을 시작점으로 해서 나의 어떤 마음이 이런 행동을 가져왔을까 하고 추론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 안에 있는 자기만의 독특한 경향, 그리고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구조나 성향 같은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진리의 틀 위에 올려놓고 재보는 것입니다. 나의 이런 성향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모눈종이 위에 놓듯이 올려놓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질서들이 보이게 되고,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서에서 이탈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매우 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거기에서 반성은 회개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어떤 사물의 추함이 주변의 질서가 아주 정연한 가운데 있을 때 그 추악함은 증진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 혹은 추함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식과 존재 사이를 걸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가끔 드는 예이지만, 가족들과 야유회를 갔을 때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랑새는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배시간에, 이 예배당 안에 파랑새가 20 여 마리가 들어와서 날아다닌다면 우리는 예배를 중지하고 그것부터 쫓아내든지 잡을 것입니다. 도저히 쫓아내거나 잡을 수가 없다면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추하기 때문입니다. 푸른 풀밭과 아름다운 나무들, 시냇물이 흐르고 꽃들은 활짝 피고, 파랑새가 노래하며 하늘을 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날아다니는 파랑새와 예배드리는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말씀인즉, 추함이라는 것은 주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어떤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는 그 올바르지 않음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눈종이와 같이 질서정연한 규격 위에 올려놓고 볼 때 그 추악함은 크게 증진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직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와 그리고 다른 이웃과 교회와 그리스도와 천사와 악마와 이 모든 피조물들과 맺은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마음 안의 성향과 경향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발견이며, 그 속성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찬양이기도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고 당연한 것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찬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어떤 변화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의 찬양은 당연히 하나님께 기쁘실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선포하고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하나님을 한정하고 있는데,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야곱은 이스라엘의 족장 중 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언어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삭의 하나님’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또한 많이 표현됩니다. 특히 선지서를 보면 ‘야곱’ 자체가 이스라엘에 대한 애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명쾌한 해설은 제가 못 만났지만,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는 ‘야곱의 하나님’은 곧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관계’에 대한 강조라는 점에서는 합의를 합니다. 그러면 왜 이삭은 제외하고 야곱에게서 언약관계에 대한 강조가 나타날까요? 이 점에 대해서 저는 이런 해석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두 다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많이 돋보이는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처음서부터 사기꾼적인 기질이 있었고,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 뭔가를 한번 결심하면 굳세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회주의자였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으로 하자면, 정말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적인 본성에 있어서도 너그럽고 다투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이를 악 물고 악착같이 남을 눌러 이기려고 하는 육욕적 승부의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은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방이 제일 캄캄했기 때문에 등불이 더 환하게 빛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곧 거룩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불순종하고 패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해 주실 때 나타났습니다. 진리의 참되고 눈부신 불빛은 오류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식되었습니다. 우리는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빛의 찬연함을 드라마틱하게 경험하려고 어둠 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고, 오류가 좋아서 그리로 간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크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저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게 좋아서 상처를 내고 상처를 받으며 상처의 길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기 위해서 비참해 진 것이 아니라, 죄와 불순종의 대가로 자기 학대에 빠져서 비참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마지막 악한 것들까지 사용하셔서 선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다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고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