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에스라 강해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녹취자: 유 혁
아래에서 우리들이 또 하나 보게 되는 것이 네 번째인가 그렇습니까? 아까 하던 설명을 좀 더 하는 겁니다. 그는 이제 연약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한 영적인 지도자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움직이시는 방법, 거기에 대표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일들을 이끌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굳이 아모스서 2장에 “내 종에게 보이기 전에는 비밀스러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라고 한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민수기 12장에서는 모세를 향해서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그 당시 모세와 같이 예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미리암, 아론 등등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수준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너희들에게는 꿈과 이상으로 말하였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대면하여 말하였다.” 나의 뜻을 face to face로 보여주었다. 그런데서 무슨 권위가 틀린 것입니다. 이후로도 이어지는 것도 결국은 말하자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보여주신 것을 말했는가 아니면 자기 상식을 가지고 말했는가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라는 말이 보여주는 의미는 에스라가 연약한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도자였음을 보여주고 이것은 하나님이 지도자들을 사용하시는 원리들을 주님이 보여주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다면 적용을 하자면 말입니다. 이 시대에 소망을 우리들이 어떻게 두어야 될 것인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지도자가 깊이 각성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계속 하다가 보니까 강의를 한다든지 얘기를 한다든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문제는 어디로 부딪치는가 하면 영적 지도자의 문제, 그리고 특별히 설교자의 문제로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면 또 계속 듣는 사람들은 어떤 교만이 생기는가 하면 설교라고 하는 것들, 영적 지도자, 설교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상이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높이 올라가면 나머지는 설교가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고 그런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 그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말도 안 되는 교훈인데 은혜 받는 사람은 나옵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
(답변)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너무 자기중심적인 해석인 것 같습니다.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설교 내용도 동의할 수 없고 근데 은혜를 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제 너무 지금 신앙부흥의 시각에 서있으니까 그런데 좋은 평가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인데, 그런데 보면 어쨌든 사람들이 말씀에 감화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장엄하게 주를 만났다 그렇게 말할 순 없어도 눈을 열어서 땅만 쳐다보던 신앙이 눈을 확 열어서 하늘의 영광의 주를 봤다 이렇게는 말을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문제를 해결 받았고 때로는 병 고침도 받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회개도 하고, 진심일 것이란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을 은혜라고 우리들이 표현한다면 그런 일들이 말도 안 되는 부흥회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질문)
(답변) 그러면 굳이 좋은 강사 모실 필요도 없고 아무나 불러다가 굿거리하면 되겠네요? 믿음에서 지, 정, 의를 항상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항상 지적인 부분과 정적인 부분을 분리해서 봅니다. 믿음 자체도 지적인 것이 먼저 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반적인 그런 것들을 봤을 때는 지적인 것들을 거의 무시하고 정적인 부분만 강조하고 거기에 어떤 느낌을 받고 그러면 그것이 은혜라고 하는....지가 선행이 안 되면 참다운 믿음이라고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런데 그것은 본인 생각에만 그렇지 그 사람들이 아무 것도 왜 우냐고 물어보면 몰라 그럴 사람이 어디있겠냐는 것입니다. 왜 우냐고 물어보면 강사님이 ‘자기 주일을 잘 못 지내는 그 부분에 대해서 꾸짖어 주셨는데 그것을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까 지난날 내가 참 잘못했더라’ 지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회중: 강사가 훌륭했거나 훌륭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거나 이런 동한 동기가 자라고 있는 자에게는 은혜를 끼칠수가....) 상당히 가까이 가셨는데 근데 문제는 지금 얘기하는 것은 잘났다 못났다 그것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말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말씀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말씀이 어떻게 이렇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게 어떻게 이렇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등 용납이 안 된다. 교인들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라든지 그런 것들을 볼 때에 용납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런 일들이 생겨납니다. 물론 아무리 사람이 못났어도 말씀이 선포되서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시비를 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하시는 것이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저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일까?’ 그러는데도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될 것인가 하면 혹시 그런 가운데 사람들이 변화를 받고 그리고 아까 우리 김중기 형제 이야기 한 것처럼 사실은 은혜가 아니고 감정적인 충동에 그치는 것인데 은혜인줄 잘못 안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해놓고라도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정말 신앙적인 변화가 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가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항상 모든 설교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부분 속에도 진리의 요소가 약간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들이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니까 우리는 애쓸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예를 들면 사람의 마음을 찌르기 위해서 비수와 같은 칼을 택하기 원하는데 사람이 갖다놓은 칼이 도끼와 같은 것밖에는 준비가 안 되었다면 성령이 그것밖에 사용을 못하실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그러니까 아까 에스라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그 이야기가 반복돼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잘 지적으로 준비되어야 될 필요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성령에 민감해서 주님이 이 회중들에게 어떤 말씀을 원하시는가 그럴 때에 그 회중을 위해서 사용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성령의 검을 주님이 ‘얘야 이번엔 예리한 칼이다’, ‘Yes, Sir’, 그러면서 성경에서 예리한 검을 말씀으로 촤악 갖다가 주님의 손에 쥐어드리거나 아니면 ‘이번에는 사브레다 휘두르는 칼이다’ 그럴 때 그렇게 준비해드릴 수 있는 이런 능수능란함이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잘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영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주님이 이런 위대한 신앙부흥을 이루실 때에 소수를 통해서 이루시고 또 영적인 지도자를 통해서 이루신다. 만약에 영적인 지도자가 도무지 이런 영적인 신앙부흥의 도구로 쓰일 수 없을 때 주님은 폐하십니다.
주님이 일으키시려고 하면 폐하시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세우셔서, 보세요. ?????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설교의 역사에 나오는 그 신앙 부흥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주님이 지도자를 세우십니다. 왜? 그를 통해서 꼭 하나님이 역사하시고자 할 때에 세우십니다. 제임스 글랜드닝도 연약한 병자였습니다. 그러나 올드스톤 집회에서 설교자로 세우십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영적인 지도자들을 각성해서 사용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그런 일들이 되지 않을 때에는 각성된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단체나 얼마나 큰 직책가운데 지도자가 되는가 그것은 별개입니다. 서너 명이 모인 기도 모임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한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 규모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한 공동체를 각성코자 하실 때에 그런 일들을 얼마든지 사용하시고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신앙 부흥의 확산이 견고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 아까도 말씀하신 가운데서 진리적인 요소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느끼는 상태는 두 가지 경우가 잘못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오히려 그 경험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 부흥으로 나가는 그 길을 막는 장애요소로도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또 하나는 그 단계를 거쳐서 또 신앙의 부흥을 경험해보는 그런 두 가지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두 가지가 잘 구분이 안 되면 그러면 지금 현재 우리가 신앙 부흥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예민성,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에 의한 은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상당히 구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그 부흥과 우리가 말하는 신앙 부흥과 개인의 체험을 일반적인 그런 체험과 동일시로 놓았을 때에 그게 신앙 부흥과 오히려 더 큰 거리가 멀어질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답변) 이 경우는 좀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아까 전자에서 얘기한 그런 경우에는 어떤 심오하고 깊은 체험이라는 것이 힘듭니다. 힘들고, 심오하고 깊은 체험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신비의 정도가 지나치다 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신비의 정도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성품과 관계되지 않고서 신비의 정도가 더 깊이 이해됐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 경험한 사람은 그 상황을 자기가 경험한 상황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최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 부흥의 길로 접어들지 못하는....)
(답변) 그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그런 성향의 체험과의 가장 뚜렷한 차이 하나가 주님 자신의 성품에 대한 인식입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지울 수 없는 인상은 집회가 일어났고 사람이 깊은 신앙 경험을 했다라고 말했을 때 그 시선이 시야가 얼마나 확장되느냐 그것에 따라서 그것이 하나의 단순한 신비 체험이었는가 아니면 신앙 부흥에서 이야기 하는 그런 하나님의 거룩함의 체험인가 그런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고가 그냥 평면적입니다. 주님이 그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친구나 동료정도로 생각되어지고 하나님의 신비체험에 압도당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압도당하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주님이 나타나셔서 마지막 날에 대해 이런 말씀 하실 때 요한이 말하기를 내가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졌던 그러한 말하자면 압도당함,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결핍되어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참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말미암은 체험으로 볼 수 있겠는가?
(질문) 오늘날 은혜와 그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들을 그런 인식을 낳게 하는...
(답변) 그런데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런 인식을 낳는다기보다도 그 강조되는 사랑과 은혜가 말하자면 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마르틴 루터가... 딱 좋은 얘기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그 거룩한 분노 앞에서 이제는 절망이다 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그런 것들을 느낀 사람, 그런 것들을 경험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 종교개혁자들과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에게 있어서는 속죄라고 하는 개념이 그렇게 크고 그리고 주께서, 사도바울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다 라고 하는 것들이 어마어마한 해당???의 선언으로 다가오는데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기본 서비스 아닙니까? 술집에 들어갔을 때 기본서비스처럼, 마치 식당에 들어갔을 때 밥 먹기 전에 보리차 내오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감격해하는 사람이 없듯이 그런 정도로 구원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다시 좀 정리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저도 지금 생각이 났는데,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나니, 그것으로 끝인데 우리는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어서오세요하고 내미는 물컵 정도로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main dish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main dish, 뭔가 본격적인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축복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명예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심지어는 영적인 우월주의일 수 있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어느 정도 입니까? 그 처음 나오는 물컵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 다음의 것들은 그 빛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결국은 우리들의 심령이 어떤 심령인가 그 사죄의 은총이 과연 우리가 먹어도 되고 안 마셔도 되는 그 물컵을 받아 마시는 그런 상태였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죽었던 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히 죽었던 사람들을 주님이 살려놓으셨는데 그런 것들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왜 크게 다가오지 않느냐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사람들에게 호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 부흥이 있었던 시대에 죄에 대한 설교가 끔찍할 정도로 행해졌던 이유가 이제 이해가 됩니다.
결국 무엇이냐 하면 자신들이 영적으로 너무나 처참하고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이다 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느끼지 않고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 이것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 것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을 갖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 크다고 여겨지지 않는데 그 다른 것들이 어떻게 그들에게 크게 느껴질 수 있겠으며 크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느낌일 따름이지 일단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주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사건을 반추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너무나 큰 사건이니까 그것을 얘기하지 않고는 무슨 신앙의 교훈을 얘기하든지 그것을 얘기하지 않고는 진전을 못하겠는 것이고 그것을 얘기하려고 하다보면 십자가가 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그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그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람들이 절망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설교하면서 참담한 느낌을 받았는데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서는 수시로 낙심합니다. 하나님 앞에 강한 사람들이 사람 앞에서는 또 한 없이 약합니다. 조금만 하면 상처받았다고 하고 교회 떠난다고 맨날 이러고, 사람 앞에 강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약한데 이런 것들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아주 본질적인 문제이면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진전을 합시다. 에스라가 그 이후에도 더 있겠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그림들을 봤는데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그랬는데 어디 엎드렸습니까? 에스라가? 에스라가 엎드려진 것이 누구 앞에 엎드려졌습니까? 하나님의 전 앞에,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졌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회중: 하나님 외에는 해결해 주실 분이 없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전이라고 할 때에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하고는 엄청나게 틀린 차원입니다. 그것을 한 번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봅시다.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어떤 생각입니까? 전도사님, 교회라 그럴 때 그냥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수준에서 말고 평신도들이 교회를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까? (회중: 예배드리는 장소)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기껏해야 예배드리는 장소, 그리고 신앙적인 친목을 나누는 집합장소, 기타 무엇이 있습니까? 선교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선교의 전진기지,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무엇이 있습니까? 기도하는 집, 글쎄요. 교회를 요즘 세상에 교회를 기도하는 것을 제외하곤 내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집,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회중: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 무엇인가 될 것 같은...) 저는 그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아주 신앙이 탁월하신 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지금 이야기가 가장 적절한 이야기 입니다.
교회 그럴 때에 예배드리는 집합 장소, 또 신앙적인 모임을 갖기 위한 건물, 좀 더 전진해서 이야기하면 기독교활동이 이루어지는 센터,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아마 그리고 좀 더 높여 말하면 선교를 하는 집, 기도하는 집 등등 좋은 얘기가 나오지만 그러나 뒤로 내려갈수록 점점 희박한 이야기고 앞으로 나온 것들이 아마 가장 일반적인 것들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건물, 그 다음 신앙적인 모임을 갖기 위한 집합장소, 아니면 기독교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센터 이런 식입니다. 그것을 끌고 구약의 성전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해놓고 일반적으로 그들이 성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신앙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금만 90조 원어치가 들어갔다고 하니까 그것은 사실 국운을 건, 성전 건축은 국운을 건 사업이었다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다윗이 그토록 전쟁을 많이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모을 수 있겠습니까? 80트럭 2.5톤 타이탄 트럭으로 80트럭, 박영선 목사님은 또 어떻게 그런 것을 계산하고 계신지, 어쨌든지 간에 맞을 것입니다. 90조는 우리가 계산 했습니다. 강의실에서 어느 교수님과 같이 계산해보니까 5만으로 쳐서 90조원이 나왔습니다. 여하튼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성전을 지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시편에서도 종종 성전이 보여 지는 경우에, 시편에 나타나는 성전의 개념들은 대개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문제가 많던 영혼들이 시온에 올라오고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온을 보는 것을 하나님을 뵙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심지어는 더 극단적인 신앙은 주의 목전에서 쫓아내실 지라도 나는 시온을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라고 할 때, 이 하나님의 전 앞에 라고 하는 말은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 앞에 라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그런 말이라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 전 앞에 엎드린 그런 상황이 에스라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겠는가 할 때에 전 앞에 엎드렸을 때에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는 것 같은, 그래서 성전 앞에 엎드려 있을 때에 성전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이 동일시하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전은 누구의 전이었습니까? 그 전은 하나님의 전 이었다 여기서 무언가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전 이었다,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회중: 하나님이 계시는 곳) 물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왜 여기서 지금 하나님의 전에 타락이 아니라 민족적인 타락입니다. 그리고 민족적인 영적인 위기입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민족사적인 위기인데 그 때에 그 에스라가 중심인물로, 에스라에게 초점이 모아지면서 그 에스라는 지금 있는 그 무대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전 앞에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보여주는 가장 중심적인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주님의, 영적인 각성 이런 것들, 세상 부패한 세상 심지어는 타락한 세상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변화시키셔서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이 장엄한 신앙 부흥의 물결들이 결국은 교회와 관계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크게 클로즈업되지 않습니까? 저는 생각할 때 그렇게 크게 클로즈업 되는데 그러니까 그 큰 역사라고 하는 엄청난 멍석이 있다 라면 그 한 가운데 에스라가 있고 에스라 앞에는 성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재밌지 않습니까? 각성된 사람, 교회, 그리고 그 교회 밖에 세상, 그러니까 제가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앞둔 도성 그 속에는 잠들어 있는 교회가 있고 그 안에는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각성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각성된 사람, 하나님의 교회, 세상 이렇게 역순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똑같은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전 앞에 엎드려 있을 때 , 이 전 앞에 엎드릴 때 에스라에게 무슨 (끊김!!!!!!!!!!)
그러니까 잠자는 교회 그 속에 잠자는 지도자, 그것이 잠자는 세상이 아니라 심판을 앞둔 세상, 자 그럼 묵상을 전개합시다. 잘 들어보세요. 자 상상을 동원해봅시다. 묵상을 해봅시다. 에스라가 성전으로 갔습니다. 성전으로 갔는데 이미 에스라에게 무엇이 들렸습니까? 방백과 두령과 이런 사람들이 다 타락했다고 할 때 그 시대에 마지막 신앙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누구? 선지자는 없던 시대이니까 (회중: 제사장) 그것이 사실은 에스라에게 자신도 제사장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죄악보다도 그것이 더 심각하게 마음에 다가왔을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갔는데 하나님의 전 앞에 딱 갔는데 엎드렸는데 결국 그 전은 뭐하는 곳입니까? (회중: 제사) 여태까지 드린 제사가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제사가 드려졌었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럼 거기에서 그 성전에 엎드려 있을 때에 이 에스라의 마음속에 무엇이 교차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고 지극히 거룩한 지존자의 거하시는 곳이라는 것과 그 다음에 그 더럽혀진 제사와 그 제사를 수행하던 더럽혀진 제사장 거기에 이 에스라가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의 일차적인 절망은 무엇을 향한 절망입니까?
교회를 향한 절망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참다운 사회 변혁을 위한 영적인 각성이라면 교회를 향한 절망이 수반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절망, 그런 것들이 참 영적이겠는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확실히 깊은 뜻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뭔가 깊은 도전을 받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문자 이상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있을 때에 그 에스라의 마음, 여기 지금 전 앞에 엎드렸다 그런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전 속으로 지금 들어가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스타프 도래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그렇게 그렸습니다. 성전의 문에 엎드려 있는 그 장면으로 (그렸습니다). 이렇게 그렸습니다. 이것이 에스라인데 이렇게 엎드려있는 장면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 이야기를 진전시키자면 어떤 것들을 지금 절망을 느끼는 것인가 하면 하나님은 민족이 이렇게 타락하고 비참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소망은 하나님께 있는데, 그 앞에서도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주님 밖에는 소망이 없음을 고백을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소망을 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들의 타락입니다. 성전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면 그때 우리가 9장하면서도 봤지만 에스라의 기도 가운데 주님 어떻게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라는 간구의 이야기가 안 나오고 계속 과거적인 고백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범죄했고 잘못했다라고 하는 그런 것들, 에스라의 믿음이 없어서라기 보다도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그 거룩한 성품들이 자기들이 지금 처하고 있는 이 죄악된 상황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가 하는 것들을 참 처참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에스라가 라는 말 뒤에 하나님의 전 앞에 라고 하는 말은 하여튼 확실히 우리에게 그 신앙 부흥의 한 원리가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그 뒤의 밑그림은 교회의 타락, 성전의 그 유린 그런 것들이 반드시 밑그림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전 앞에서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도전이 어떤 것들 입니까? (회중: 안들림) 그렇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중: 죄인.......) 물론 그것은 엎드린다는 말에서 나오고 앞에 라는 말에서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자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임박해있고 그리고 주님 앞에 간구해야 될텐데 성전은 더럽혀졌고, 그러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자신을 느끼는 것입니다. 같은 제사장으로서, 지도자로서. 그리고 그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설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짜 진퇴양난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입니까? 그 자리에 앉아서 그냥 울 수밖에 없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중: 절망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습니다. 에스라는 지금 절망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에스라 자신이 그렇게 깊은 절망을 여기서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회중: 지금까지 드려진 모든 제사가 헛된 것이었다 라는....) 그런데에 대한 깊은 각성입니다. (회중: 이사야서 1장에서 그 말씀이.....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겠다....)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왜 절망을 안할까 그것만을 가지고 말하는데, 그 자신이 이런 설교자가 말하자면 이런 것을 잘?????? 오늘날 우리가운데에는 개념적인 부흥론자들 너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이야기를 입에 오르내리기를 즐겨하고 그러는데 사실 그것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깊이 자신들이 이런 절망감을 느끼는 그런 하나님의 성소는 유린당했고, 그리고 백성들은 심판을 눈앞에 두고 있고, 주님의 칼날이 그들 앞에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깨닫게 하고자 해도 그들은 듣지 아니하고 그런 속에서 자기도 그 더러운 때가 묻은 더러운 지체로서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거기에 엎드려서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이런 마음이 바로 그 역사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눈물이 없는 사역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눈물이 별로 없다 물론 그런 이야기도 통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이 각성시키시고 지나갈 때 모든 사람들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없이 죄에 대한 지적이 얼마나 깊은 효과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향하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소망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 논리를 초월해서 그냥 무조건 불쌍하다 안됬다 이렇게 해주시는 것 그것 밖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거기까지만 합시다. 너무 지루하니까. 엎드려 그랬습니다.
엎드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비참함, 그런 것도 있고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완전히 자신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surrender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 내어 맡기는 것, 엎드리는 것, 엎드려진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울같은 경우도 엎드려졌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계시록에서 사도요한도 엎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엎드려지는 개념이 좀 틀립니다. 이것은 영광을 봤기 때문에 엎드려지는 것이고, 이것은 절망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이 찌끼와 같이 되어져서 주님의 그 티끌만한 은총이라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 부흥에 대해서 각성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확고히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펠라기우스파, 그 다음에 신인협력설의 구원 교리를 가지고 있는 캐톨릭파, 거기서는 신앙 부흥이 안 일어났습니다.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 부흥이 일어날 때에 가장 확고하게 섰던 교리가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Total Depravity 완전한 타락, 인간의 완전한 타락이고 주님의 은총에 대한 강조, 그런 것들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회중: 그것이 구원론과 연결되어져서....)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신앙 부흥이 일어났던 곳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정통교리가 입증되었습니다. 진리인 것으로, 확고하게 붙들었습니다. 정통교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들, 그리스도의 충족성, 성경의 절대적인 계시성 이런 것들이 장엄하게 떠올랐던 것입니다.
찰스 피니같은 경우에는 알미니안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역시 원죄는 안 믿었지만 인간이 깊이 타락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 아무튼 부흥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칼빈의 신학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우상화하고 싶은 그런 마음은 전혀 없지만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알아보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칼빈 당신이 만난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하나님이었는가? 그러니까 사람들은 신학자들은 지난번에 ‘개신교 신앙사상사’인가 상당히 잘된 책으로 많이 꼽히는 책인데 어떻게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평가하는가, 루터의 신학은 인간에 치우쳤고 그것에 반동으로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께 치우쳤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리고 궁극적으로 두 신학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루터는 그만큼 관심이 구원에 있었기 때문에 구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 인간의 측면을 서술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을 뿐이지 그도 역시 동일하게 그러나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함으로서 인간의 도리를 깨닫게 된 사람들은 인간에 관해서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번뜩번뜩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점들이 여기에 있는 것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야기 하다 이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엎드린다는 이야기하다 나왔습니까? 전적인 순복, 에스라의 전적인 순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말의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의 절망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있다라고 하는 말에, 그러니까 하나님한테 밖에는 소망이 없는데 그 성전도 더렵혀졌다라고 하는 그런 것에서 오는 깊은 절망, 완전한 항복, 승복, 완전한 복종, 그리고 결국은 거기에 복종되어있고 엎드러져있는 인간이 이러한 영적인 상황의 타계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소망을 하나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을 지금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좀 더 나가보면 울며 라고 그랬습니다. 울며 라는 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울며 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울며 라고 하는 것, hk'B'(바카)가 맞을 것입니다. 네, hk,Bo(보케) 분사입니다. 계속 울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울고 있는 것인데, 이 hk'B'(바카)는 헬라어로 말하면 e;klausen(에클라우센) 입니다. 엉엉 우는 것입니다. 엉엉 우는 것인데, 하여튼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운다는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괜히 왜 이 운다는 것들이 중요한가 하면 울어야 할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 이 운다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회중: 에클라우센.....예수님이.....) 그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 단어로 옮기면 그것이 hk'B'(바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성의 때에 보면 그 울부짖음이 특이합니다. 벌써 흑흑 흐느껴 우는 정도가 아니라 엉엉 우는 것이라곤 말할 수 없습니다. 울음이 울음 자체가 기도가 되어서 쫘악 뻗어나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언어가 없어도 그것이 기도의 울음, 그 울음이 주님은 아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인 의문이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 하시는가 입니다. 무엇을 기도할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기도할 때 그 울음이 기도가 담기지 않은 울음인지 기도가 담긴 울음인지, 지붕을 찢고 하늘로 뻗어나가는 듯한 울부짖음, 그것이 모든 신앙 부흥이 일어났던 곳에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어디든지, everywhere.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자 이러면 안 됩니다. (회중: 성령이 시키면?????) 이 세상에 있는 소리 가운데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있겠습니까? 마치 무엇처럼 들리는가 하면 밤하늘에 빛나는 보석의 광채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꼭 두 번을 봤습니다. 우는 이유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섰기 때문에 자신의 참담함을 보고 주 앞에 우는 울음소리는 그 불만족으로 인해서 인간들이 흔히 경험하는 그런 울음소리와도 다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영적으로 깊이 감동될 때에 평소에 나오지 않았던 그 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찬양도 굉장히 그 평소에 나오지 않았던, 예를 들어서 음치였던 사람이 마리아 칼라스처럼 노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법칙에 너무 어긋나니까. 그러나 뛰어날 정도로 촤악 뻗어나가는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마찬가지로 울음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나서 89년도에 한 번 그런 집회를 경험했고, 두 번을 딱 경험했는데 그 이후론 못했습니다. 물론 울음소리가 그것보다 큰 집회는 있었지만 그러나 말할 수 없습니다. 6월 말인가 경험을 했는데 끝나고 나서 7시의 집회가 시작이 되서 1시가 넘었는데도, 그런데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온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끝나고 나서 가서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고 저는 올라가 버렸고 완전히 퍼졌는데, 한참 자고 일어났는데 그 산혈을 찢으면서 정말 높은 곳으로 사무치는 것입니다 울부짖음 소리가.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그런데 시간을 보니까 1시입니다. 그러니까 1시까지 사회자도 없이 인도자도 없이 그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앙 부흥이 일어났던 모든 시기에 공통적으로, 그런데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하는 것이 미안하지만 천사들의 합창소리같이 촤악 뻗어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이제 얽매인 영혼들의 해방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향한 진정한 영혼의 찬양이 그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찬양을 하면서 해결 받으려는 얄팍한 생각들은 앞뒤가 전도된 것입니다. 우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이 크게 감동하셨을 때에 사람의 기질에 상관없이 그렇게 우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울지 않습니까? 계시록 5장에서 왜 웁니까? 인봉을 뗄 자가 없다라고 그러니까 거기서 e;klausen(에클라우센), hk'B'(바카) 입니다. 통곡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보기 원하는 갈망에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이야기했듯이 골수에 사무치는데 어떻게 안 울 수 있겠는가? 또 울 땐 울어도 웃을 땐 웃어야 되는데 너무 또 웃음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괜히 또 실실대고 웃어도 안 되고 참 어렵습니다 이것이. 집사람이 만날 저한테 ‘당신은 웃음이 너무 없어. 세상의 모든 짐을 혼자 진 것 같아.’ 그래서 교인이 모이겠냐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 입니다.
hk'B'(바카)의 뜻입니다. 엎드린 채로 울며, 울며 라는 말이 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많을 것입니다. 물어보면 거기에 많은 뜻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해봐야지 알게 됩니다. 안 해보면 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회중: 기뻐서...) 기뻐서 울 때도 있습니다. 여기 지금 기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회중: 죄의 고백을...) 엎드려서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서 우는데, 이 우는 것은 결국은 목적이 있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인간이 완전히 절망된 상태에서 부르짖는 그 울부짖음입니다. 이런 것은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에스라가 왜 이 상황이 될 때까지 몰랐을까? 미리 좀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도 그것이 숙제입니다.
(회중: 신앙 부흥은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서 일어났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절망적인 상태에 나갈 때까지 하나님이, (회중: 이 에스라가 이것들을 알게 된 것이 지금 귀환해서 불과 얼마 안 돼서 지금 시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에스라 귀환이 8장에서 거의 마무리되고, 끝에 부분에서 자기가 귀환했으므로 그것에 대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마치고 나서 9장으로 들어가서 방백들이 자기에게 나와서 이런 죄가 있다로 시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것은 그 이전에 상당히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뿌리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장에 보면 이럴 때는 이런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9장 1절입니다. (회중: 6장에서 1차 귀환자들이 성전 건축을 완성하고 그래서 이제 신앙이 어느 정도 부흥하고.....)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회중: 아닥사스다 7년인가 그 때에 에스라가 귀환하는데 그때까지 60년인가 몇 년의 기간이....그 동안 신앙이 다시 타락한 그 때 에스라가 2차 귀환하면서 다시 신앙 부흥시키고 그리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다시 타락할 때 ?????성벽재건을....) 9장 1절을 보니까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나에게 나아왔다’, hL,aiI twOlk;k.W(우 케칼로트 엘레) 복수 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있었던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가 오고 나서 그 이전서부터 깊은 뿌리가 있었는데 어쨌든 에스라는 그 와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이 모든 것들을 깨닫게 된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런 것들을 볼 때에 에스라는 이런 것들을 미리 예견을 하고 미리 방책을 가지고 올라오고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와가지고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 사람에게 와 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 시간에 올 때 1장서부터 마지막장까지 chronology를 해서 그 다음에 느헤미야서와 chronology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을 가져와서 다음 시간에 발표하십시오. 그 다음에 이제 하여튼 이렇게 울면서 그 다음에 이제 마지막에 그렇게 울면서, 그렇게 운다라고 하는 그 말에 결국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기억해주시고, 기도하여 그것이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결국은 완전한 절망 속에서 주님 앞에 부르짖을 만한 자격도 없고, 주님이 이젠 어떻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라는 모든 소망도 다 끊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 현실적으로는 주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주 멋있는 표현입니다. 무엇이라고 번역이 되어있는가 하면 ‘에스라가 울며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집 면전을 향하여 스스로 내동댕이 쳐진 상태로 되어있었다.’ lPiIn:t.mi(미트나펠)입니다. lp;n*:(나팔) 떨어지다의 히트파엘 분사형 재귀형입니다. 그러니까 내동댕이 쳐진 것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