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에스라 강해
녹취자: 김경애
지지난 시간에는 ‘울며’ 까지 하다가 끝났고 지난시간에는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하며,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며,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복습을 해보면 운다는 그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기도한다는 말,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신앙의 부흥에 대한 생각들 그런 것들이 결국은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결국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신앙부흥에 관한 것들도 반짝이는 것들이 다 금이 아닌 것처럼 신앙부흥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귀한데 그러나 이제 여러 가지로 급수가 나눠집니다. 우선은 머리가 정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것들이 기독교의 참 신앙이 아니라 아마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정복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먼저 정복되어서 정리가 되어야합니다. 오늘날 보면 제일 큰 문제는 뭐냐 하면 교인들이 이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항상 안개가 쌓인 것처럼 뿌옇게 되어서 이것인지 저것인지 그럽니다. 머리부터 정돈되어서 말끔해져야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선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전도사님도 그렇습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보면 딱 잘라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학적으로 모자라는 사람이고 항상 마지막에 안개를 좀 뿌리는 사람이 그 사람이 학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도 명쾌한 논리로 책을 쓴 사람은 항상 과격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그리고 항상 불가지론이 약간 섞여서 안개가 모호해야지만 깊이가 있고 뭔가 이 사람에 대해서 더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이 드는데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머리가 먼저 정리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조금 빗나간 이야기가 되지만 기독교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신앙에 있어서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것은 단순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단순성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를 안 합니다. 단순성입니다. 벌써 개념이 무수하게 떠오르고 복잡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단계로 들어가지 못한 것들을 입증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다른 개념들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그렇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마지막에 죽을 때 자기의 묘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결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죽을 때에 그것을 묘비에 새겨달라고 그렇게 주문하고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다른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한 가지 사실이 너무 크니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늘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구속 못 받으면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비참함을 전혀 못 느끼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구속하시는 것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이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기독교의 신앙은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십자가만 확실히 선포되어지고 사람들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만 깊이 깨닫게 된다면 그러면 뒤틀린 기독교 신앙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매일 이해가 피상적인 것입니다. 피상적이니까 신앙도 피상적이 되고 늘 그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드느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알고 기독교에 대해서 기본 진리를 깊이 알면 알수록 설교는 폭이 좁아지는 것 같은 생각을 자꾸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누구 말마따나 치우치기는 것인데 누구 말이 아니라 내 말입니다. 치우치긴 치우치는데 그것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치우쳤고 나는 치우칠 것입니다. 그런데 치우치는데 이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치우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심적인 문제가 기본적으로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다 뒤틀린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중심에 충실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그러한 복음에 대한 불붙는 마음 없이는 참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고 또 기독교를 참되게 이해했다면 사실은 그 복음의 내용에 가장 불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울며 기도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보고자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이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했다고 그랬는데 신앙부흥을 이야기를 해도 머리가 정복되고 끝난 사람들은 결코 기도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나아가야합니다. 기도로 나아가야하는데 결국은 기도로 나아간다는 말은 신앙부흥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을 하는데 기도를 많이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공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으로 공감할 뿐이지 어느 한 순간에 말하자면 그 사람이 신앙부흥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신앙부흥의 사람이라면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런 자기에게 밀려온 신앙부흥에 대한 생각들이 그것이 참된 생각이라면 가슴으로 밀려와야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극단에 치우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지적으로 하나님 앞에 정복을 당해야합니다. 지적으로만 동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적으로 동의를 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정복되고 이제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다른 이야기와 다른 성경의 진술에 대해서 마음이 열리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만 변화되고 그 다음에는 기도로 안 나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라와 같이 이렇게 기도를 하게 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적인 깨달음이 없이 감정적으로 밀려오는 그 무엇, 그러니까 결국 참된 신앙부흥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열광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물론 열광주의입니다. 열광주의지만 사실은 그 열광은 인간적인 열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뜨겁지 않다는 것은 굉장히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인이면서 눈물이 없다, 감격이 없다는 것, 감격과 눈물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만난 신앙이고 진리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라면 어떻게 눈물이 없고 그렇게 메마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세기의 신앙의 부흥을 보니까 나옵니다. 마을에 신앙부흥이 쓸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논쟁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 사람들은 주님이 명하신 삶을 실제로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단순한 이야기입니까? 결코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복잡한 것들이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오늘도 여러분들이 참된 신앙부흥에 대한 것들이 여러분들의 수위가 머리에서 그쳤느냐? 가슴까지 내려왔느냐? 가슴에서 영혼으로 내려왔느냐? 나는 그런 구호를 항상 생각하는데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영혼으로’ 영혼으로 내려간다는 이야기는 진짜 하나님과 만나는 부흥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애끊는 탄원, 그런 깊은 눈물, 그런 기도, 그런 것이 없다면 사실 우리들은 청교도의 이름이나 신앙부흥을 이루었던 위대한 영적인 거인들을 100미터 밖에서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전혀 그런 삶을 살 생각이 없고 그 헌신적이고 고상한 삶을 산 사람들을 보면 왠지 존경스럽고 그냥 기분 좋아 보이는 그건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고 그런 삶을 살기를 늘 그리워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뭐냐 하면 그에게 미친 신앙부흥이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가슴으로 내려가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같은 사람은 주석을 써내려가다가 중간에 멈추면서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로이드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막 설교를 하다가 ‘아, 하나님! 이 비참하고 타락한 이 세상을 어찌하시렵니까?’ 그렇게 나옵니다.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도 쭉 설교를 하다가 기도가 막 터져 나옵니다. 기도를 하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그리고 내 마음이. 우리가 매일 설교를 할 때 설교를 한 내용에 내 마음이 녹아들 수 있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 마음이 있고 설교할 내용이 있으면 설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마음과 설교내용이 딱 부착되어 있어서 같이 흘러가야합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같이 흘러가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기도를 하는 것이나 언제나 스위치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깊은 감동하심 속에서 같이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더 이상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흘러가니까 언제든지 스위치 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과 말씀을 설교하는 마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늘 그렇게 기도가 쏟아져 나왔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탄식과 기원 그런 것들이 결국은 뭡니까? 자기는 이런 높은 신앙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데 세상은 모릅니다. 사실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믿어줍니까? 안 믿어줍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왔다고 이야기해도 안 믿는단 말입니다. 왜 이렇게 의심하느냐고 그래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냉담하고 어떤 사람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이겠습니까? 보좌 앞에서 하나님 앞에 ‘어찌하오리까?’ 부르짖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감히 우리가 신앙적 숙명론자라고 마음대로 이야기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정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가 지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성전 앞에 엎드려졌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가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넘치도록 살기를 원하면서도 그가 무엇인가를 하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이런 모든 상황에서 결국 하나님 자신이 이 문제에 간섭하시는 것 밖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나의 현실 도피처로 삼았던 그런 것들이 없었다고 우리들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신앙부흥을 추구하고 경험했던 사람들의 그런 기도의 세계는 우리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물밀듯이 특정한 개인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거룩한 슬픔이 말하자면 가슴속에 한없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커다란 노을처럼 밀려드는데 그런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라가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어떻게 이 백성들을 지금 회개시킬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느끼는 절대 절망, 그리고 주님이 긍휼을 베풀 수 있다면 자기의 목숨까지도 담보할 수 있는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죽었던 너희를 내가 살렸으니까 너희는 산자처럼 그렇게 살다가 그럴 때 그러면서 살기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죽으라.’ 제자의 도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뭐 현란한 말로 복잡하게 이야기를 빙빙 돌려 이야기할 것이 없이 너희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에 죽었던 너희를 살렸으니 너희는 나를 위해 살다가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누가 남는 장사냐? 너희가 남는 장사다. 그래도 너희가 남는 장사다. 그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뭡니까?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자기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니까 늘 하나님 앞에 계산하는 것입니다. 수지타산을 맞추는 것에 그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사실 아주 기가 막힌 것입니다. 정확한 비유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여러분 얼마인지 아십니까? 어느 정도 되는지 아십니까? 계산을 해보지는 않았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입니다. 1980년도의 화폐가치로 일 달란트가 9백 6십만 원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만달란트면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일백 데나리온이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져서 4백만 원쯤 되니까 일만 달란트하고는 게임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 액수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에 중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했다’ 고 나옵니다. 설교 한마디가 없어도 에스라가 왜 우는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입니다.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모인지라.’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큰 무리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몇몇 방백이 와서 이야기하는 그때에 비하니까 큰 무리라는 것이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비하면 이 큰 무리라는 것은 진짜 미미한 아주 미미한 무리에 불과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백성의 남자와 여자가 상관없고 그 다음에 ‘어린아이들의 큰 무리가 모인지라.’ 남자, 여자 노소 장유할 것 없이 하나님의 각성이라는 것은 모든 계층에 편만하게 미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절에서 4절을 보겠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견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그럼 보십시오. 우선 엘람 자손 중에서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라는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달리 다른 곳에 나오는 것이 없고 엘람 자손이라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이 사람이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왔지만 원래 그 씨는 전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개방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재미있습니다. 혈통 상으로 정통유대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사람이 대표자인데 대표자로서 울며 통곡하는 에스라 앞에 모여 있는 모든 무리를 대표해서 말하자면 자신이 나아갈 길, 민족이 나아갈 길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정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엘람 자손이었단 말입니다. 그 엘람 자손이었는데 엘람은 팔레스타인에서 서쪽으로 요단강 건너편 중원에 있는 곳입니다. 엘람에 대한 이야기가 롯이 사로잡혀 가는 중에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해주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에 싸움을 벌였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엘람 왕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먼 곳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어서 이스라엘 회중 속으로 들어왔는데 일단 신앙을 고백하고 이스라엘 회중 속으로 들어오면 주님이 차별대접을 안하셨습니다. 동일하게 대접하시고 그래서 이 사람이 이곳에 있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로 미루어봐서 이 사람이 이름까지 기록된 것으로 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무슨 백성의 장로였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그저 엘람 자손 중에 씨로써 그리고 여히엘의 아들인데 이스라엘 백성 회중 가운데 들어온 사람이 정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는 것이 첫째 고백이었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율법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4절에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서 우리가 도우리이다.’ 말하자면 부흥의 시대에 에스라의 영적인 지도권을 인정해주고 그리고 도와주는 장면을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씩 차례차례 생각해봅시다. 우선 엘람 자손 중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결국은 에스라가 무슨 방안을 강구해낸 것이 아니라 에스라가 그렇게 회개를 하니까 사람들이 그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회개하게 될 때에 그들이 그런 민족적인 영적인 위기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의 개혁의 방안들도 이런 식으로 도출이 되어야합니다. 그 과정을 보십시오. 얼마나 영적입니까? 오늘날처럼 이렇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면 그저 음식을 차려놓고 조찬기도회를 하고 심포지엄을 하고 해서 다수결로 결론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영적입니다. 그런데 그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말했는데 우선 누구에게 이야기했습니까? 에스라에게 일러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 라고 그랬으면 되었지 에스라에게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확연하게 에스라의 지도권이 확립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 아니면 영적 권위가 상실되었다고 하는데 영적 권위가 상실된 시대에서 영적 권위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권위를 회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권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은 영적인 권위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권위가 어떻게 얻어지겠습니까? 야곱이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권위를 회복한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변화를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참으로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우리 교회에서 교역자를 뽑는데 설교를 들어보고 ‘설교 한번을 들어보고 어떻게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는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맞는 것 같지만 엄밀하게 생각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틀린 이야기입니다. 설교 한편을 들어보고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교회가 설교를 해서 교역자를 뽑을 필요가 있느냐고 그러는데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설교를 하고 기도를 시켜보면 그것을 시험하려고 시켜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스치고 지나갔다면 그 입김이 어떻게 설교 중에 안 나오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도 중에 어떻게 그가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인지, 하나님 앞에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냉담한 사람인지, 단지 지식으로만 주님을 아는지, 하나님을 마음 깊이 느끼면서 그분을 사랑하는지 왜 모르겠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얼마나 유능하게 잘하느냐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을 살피기 위해서도 설교가 중요하겠지만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한편의 설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그런 지도력이 깊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무엇이냐 하면 설교를 잘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런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설교를 잘하고 싶다는 그런 욕망을 가지면 그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막 해야겠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늘 설교를 잘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될 때에 빠지기 쉬운 함정은 어떤 것이냐 하면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어떤 영적인 권위, 그런 것들로 무장되기보다도 스스로 사람들에게 과시함으로써 그렇게 뭔가 자신을 채우려고 하는 어리석음 속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는 이야기지만 설교를 이렇게 보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깊이만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설교는 참 신비한 것이 회중에 의해서도 달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집회를 가면 숨이 탁 막혀서 설교를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강사가 와서 다같이
문제는 여기에서 우리들이 살펴보고자하는 바는 어쨌든 에스라에게 일렀습니다.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 앞에 모인 것입니다. 에스라 앞에 모였고 또 그 에스라를 향하여 말하는 것을 볼 때에 이런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에는 굉장히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파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시간이 턱없이 길다든지 아니면 기도회를 3시까지라고 그랬는데 6시까지 계속 했다든지 그런 파격은 있을 수 있지만 굉장히 질서롭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스럽게 세우신 지도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 앞에 나와서 이제 이야기하기를 2절 하반절의 이야기를 쭉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똑같이 회개를 경험하고 똑같이 그런 하나님 앞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회개하고 그러는 입장에 서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확실한 지도자를 영적인 분깃 가운데, 영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사람을, 영적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기가 막힌 신학을 가진 사람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 하나님을 먼저 만났느냐 입니다. 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선지자처럼 말하고 제사장처럼 통곡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하나님이 평신도들을 들어서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존 번연이 안수를 안 받았습니다. 평생을 평신도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존 번연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었는지 모릅니다. 누굽니까? 당대의 석학 존 오웬이 존 번연은 땜질하러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그 땜장이 설교를 들으러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아니 박사님 같은 석학이 어떻게 거기에 가서 설교를 들으십니까?’ 그러는데 존 오웬이 ‘내가 만약에 그 땜장이와 같이 설교할 수 있다면 내가 이 박사학위를 다 버리겠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평신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옥한흠 목사님 같은 분이 평신도들도 설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강단의 독특성에 대해서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데 그것은 맞습니다. 그것은 맞는데 그 평신도는 보통 평신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이야기하시고 이야기해야지요. 그럼!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그 이야기를 듣고 오늘날의 이 보통 평신도들이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그것은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사실은 안수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우셨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안수도 교회에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다고 하면서 평신도들도 설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평신도를 깨운다. 라는 책을 쓰셨는데 그 책의 초반부에서 제가 그 책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읽었습니다. 초반부에서 하는 이야기가 교회론에 대한 정통적인 것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강단사역에 대해서 그런 것들을 깨뜨리면서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다고 하는데 맞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을 누가 평신도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안수를 안 받았을 뿐입니다. 보통 평신도가 아니면 할 수 있다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물론입니다. 그래서 벽촌 같은데 있으면서 집사로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탁월한 설교능력이 있고 그런 부르심이 있고 그리고 그 사람이 생업을 가지고 먹고 산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생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업을 가지고는 있는데 그 사람이 언제든지 그 말씀의 사역을 하는 일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인지 누가 바울을 가지고 이중직을 가졌기 때문에 사도의 직분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다고 그래야지 무조건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놓으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워낙 담대하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이 오히려 역사를 보면 평신도 같지 않은 평신도들도 많았고 오늘날에는 평신도 같은 설교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대학생들이 밑에 앉아서 경건한 학생들은 자기가 골방에서 QT할 때는 그래도 성경을 따라서 QT를 했는데 설교는 성경을 따라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단에 대해서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선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 우선 성경 본문을 살펴서 본문을 해설하면서 나가야하는데 그것을 안 합니다. 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냥 주제 하나를 잡아서 회개 그러면 회개 하나를 잡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입니까? 그러나 대학생들이 QT를 할 때는 본문을 보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본문을 보면서 하니까 본문에서 교훈을 찾고 그래도 비교적 본문적입니다. Textual합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식상한 것입니다. 안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인들의 태도가 그렇게 설교를 해도 들어야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그런 속에서도 설교에 진리의 요소가 조금씩 있습니다. 하워해리스 같은 경우에도 광고하는 것을 듣다가 회개를 합니다. 광고 말입니다. 웨일즈의 부흥을 가져오는데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다고 합니다. 예배시간에 실컷 졸다가 광고시간에 ‘개떡같이 산 사람들은 다음 주 성찬식에 참석하지 마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졸다가 벌떡 일어나서 종탑에 올라가서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요즘에는 이런 맛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설교냐? 설교도 아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러는데 그렇게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거기에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답답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가 정말 예배를 이렇게 드릴 수밖에 없는가 하고 답답해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진리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듣는 태도는 늘 겸손해야합니다. 그러나 비판적인 시각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저럴까? 본문을 따라가면서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에스라는 이렇게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큰 무리가 그 사람 앞에 모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에스라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부흥에 있어서 지도자가 되었고 이제는 그 모든 문제를 떠맡고 이끌어나가야 할 지도자의 자리에 필연적으로 앉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도가가 된다는 것이 사실은 이렇게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그러면서 엘람 자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것이 첫 번째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러니까 이 사람도 에스라가 가지고 있던 시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에스라의 시각이 어디에 나옵니까? 9장에 6절에 나옵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보면 그 모든 문제들의 정치적인 문제나 환경적인 문제로 보지 아니하고 이 에스라가 생각한 것은 백성들 가운데 있는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라는 것을 심각하게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런 설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한 사람의 각성은 또 다른 사람들의 각성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비로소 그 문제가 죄악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여기 말로는 이렇게 쉽게 나왔지만 그 시대에 유행하고 있는 것들을 문제로 계속해서 느끼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 앞에 커다랗고 심각한 죄라고 느끼는 그것이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것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느끼면서 그가 한 고백을 다시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가’ 라는 말에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그렇죠. 언약적인 연대입니다. 신약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지체적인 결속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언젠가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지체의식에 대한 것들이 확연히 결핍된 것들에 대한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를 보면 우리가 지체적인 결속이 무너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지체적인 결속은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항상 ‘내가’, ‘나는’ 이렇게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모든 것들을 버리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드러내야할 ‘우리를’ 생각하느냐하는 것은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참된 지체적인 결속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2장에 보면 성령 충만이 일어난 다음에 사람들이 모여서 떡을 떼고 교제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참된 지체의 결속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부흥의 비결이 아니라 부흥이 일어난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람들은 모이고 싶어 했습니다. 모이고 싶어 했고 그리고 참다운 사랑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 그런 것을 설교할 때 이렇게 하면 부흥이 온다고 설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두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교회에 있고 거기서 찬송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런 일에 몰두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참다운 지체적인 결속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시들해지면서 6장에 가면 불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헬라파 과부들, 히브리파 과부들 그러면서 공궤하는데 우리가 빠진다고 그러는데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결속은 신앙부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속을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이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약에 나타난 참된 지체의 결속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결속으로 돌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나누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지체적인 결속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하나님 앞에 크게 각성하고 나니까 우선 뭐냐 하면 지체로서의 결속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씩 보겠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라는 말에서 무엇을 느끼느냐하면 지체적인 결속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언약적인 연대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의 의로움은 설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나의 의로움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만드실 때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거기에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골라서 불의한 사람만 죽이셨겠습니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성이 망할 때 수많은 백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가 죽음을 당했는데 거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 의로운 사람이고 죽은 사람들은 전부 다 악한 사람만 족집게처럼 골라서 죽었느냐하면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 속에 태어나면 공동체 즉 하이데거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가 던져진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그냥 이 땅에 태어났고 이 민족의 교회와 결탁되어있고 그리고 이 세계적인 교회와 결탁되어있고 더 넓게는 천상의 모든 교회와 결탁되어 있고 그 안에서 성도로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태어나서 이 공동체 속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피할 수 없이 ‘우리가’ 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답게 신앙의 각성이 일어난 다음에 사람들이 그 시대와 그 다음에 그 마을, 교회 심지어는 조국의 문제에 대해서
‘아내를 삼았으나’ 그 전반부는 이방여자를 취했다고 하는 것은 이제 율법을 짓밟았고 그 율법을 어겼고 간음죄 이전에 율법을 하찮게 여기는 완전히 율법을 ‘율법아노미아’ 불법을 행한 말하자면 그런 무법한 자들의 행실에 기초해서 일어나는 일이 왜 그런 무법한 자의 행실이 난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공경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경과 그분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무법한 행실들이 행하여지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방 여자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은 간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이어서 이제 아내를 삼았다는 것은 가정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제를 스스로 지적해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이스라엘에게는 누구입니까? ‘우리, 우리’ 그러다가 이스라엘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전체를 다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굳이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생겨난 이름입니다. 언약을 좀 더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우리, 우리, 이스라엘’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의 관계에 있고 그리고 특별한 언약 아래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임을 우리가 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좀 더 묵상해보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우리’ 하다가 이스라엘을 쳐든 이유는 이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기들은 언약관계에 신실치 못했거니와 우리가 신실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언약관계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불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분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다. 왜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느냐 그러면 ‘이스라엘을 봐라.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다.’ 우리는 큰 죄악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없거니와 그분은 우리를 향해 신실하시지 않느냐? 거기에 소망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신실하시다는 이야기가 항상 쓰다듬어 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발로 찰 수도 있고 아니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는데 싹 쓸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에 대해서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언약에 대해서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늘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지금 무슨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까? 에스라는 지금 절망하고 있는데 무슨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완전히 다 쑥밭이 되고 에스라는 지금 절망 속에서 통곡하며 기도하는데 감히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소망입니까?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결국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그랬는데 그 소망이 있다는 그것이 상황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스가냐 조차도 자신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볼 때는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있나니’ 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상황을 보고 소망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갈 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이런 깊은 잠이 들어있는 교회, 그런 개인에게 있어서 참된 소망이 무엇입니까?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같이 모호한 것이 영적인 어두움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안다면 그것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알고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떠한 문제도 치룰 수 있다는 가치가 있다면 그는 이미 탈출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르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나니’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앞을 좀 더 보면 무엇과 연관이 되느냐하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것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또 무슨 약속을 동일하게 주고 계십니까? 그러나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겸비하여져서 그분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고 너희들을 고칠 것이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에게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굉장히 가슴을 뛰게 하는 말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딱 한줄기의 빛을 발견한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딱 한줄기 빛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누구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참다운 신앙의 부흥에 눈뜬 사람들이 늘 절망하지만 그러나 절대적으로 절망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안연해하고 더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소망의 길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소망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하면서 우리가 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어디로 가느냐? 우리 교회가 당회장도 없는데 어디로 가느냐? 갈 데로 갑니다. 무엇을 걱정하느냐? 우리의 목회 사역이 어디로 가느냐? 갈 곳으로 간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겠는가? 갈 곳으로 다 갑니다. 미래에 대해서 우리들이 너무나 염려하고 그것에 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갈 곳으로 가게 하십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그런데 그 소망은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하는 소망,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노의 심판을 어떻게든 피해야하는데 그런 생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단순한 개념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이키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그런 소망, 그 이전에 무엇입니까? 문제 해결의 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흑암과 같은 죄악이 관영한 이런 세상 속에서 말하자면 이러한 문제의 모든 원인이 우리가 결국은 이 세상 속에서 단순히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가 범죄를 했고 우리가 상황과 씨름하고 그런 세속적인 상황에 물들어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잊힌바 되었다. 그것들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깊이 슬퍼하면서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알려진바 되었고 이 모든 일의 모든 문제가 결국은 하나님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이제는 우리가 어디에 서야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 많은 고통을 지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무지합니까? 오죽했으면 시인이 그랬겠습니까? 각성하고 나서 ‘우리는 주 앞에서 짐승입니다.’ 오죽했으면 요즘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돼지이오니 개만도 못하오니’ 그 이야기입니다.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이런 단순한 각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에스라가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다 진액을 쏟아놓는 것과 같은 이런 헌신의 잔을 하나님 앞에 채우는 것입니다.
나는 이 10장 6절이 오늘 아침에도 세수하면서 그림과 같이 다가옵니다. 뭐냐 하면 비디오로 보면 많은 문제에 둘러싸여서 이방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율법이 짓밟히고 자녀들을 낳고 가정이 엉망이고 나라가 뒤틀리고 개판이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먹구름은 다가오는데 짠하고 바뀌어서 화면에 나오는데 에스라 한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엎드려서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화면이 나오다가 딱 한 사람을 비춰주면 거기에 뭔가 지금 해결의 열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쫙 비추면서 클로즈업되는데 에스라의 통곡하는 소리가 점점점점 커지고 무리들이 생겨나고 해결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엎드려있는 에스라가 그냥 에스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준비된 에스라인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나니’ 라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지금 모두 절망하는 속에서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비전은 자기가 발견한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차이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이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면 가난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부요해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요즘은 어떻습니까? 교회의 상황은 아무리 이렇게 어려워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제자훈련이면 된다. 노래 부르면 된다. 이런 대안들을 내놓으니까 이 사람이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그러면서 우리가 이런 언약을 세우자고 이야기했을 때 백성들의 하나님 앞에 무너지는 것과 같았던 그런 마음이 ‘아 이것이 길이다.’라고 탈출구는 발견했을지언정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더 이상 매달리고 통곡하며 죄를 회개해야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갖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이러한 계시적인 비전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반드시 영적인 사람, 그리고 영적인 상황, 영적인 회중, 그리고 각성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제시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한줄기 빛과 같았겠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그러면서 제시하면서 비전을 이야기하는데 그 비전 때문에 백성들이 앞에 회개했던 마음들이, 가난해졌던 마음들이 부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시할 때에 자신들이 더 비참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말해보겠습니다.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그럴 때 사람들이 무엇이 생각났겠습니까? ‘아 우리는 주의 교훈을 짓밟고 버렸도다.’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우습게 여겼도다.’ 언약을 세우고 ‘언약을 다 깨뜨렸구나!’ 율법대로 행할 것이다. ‘율법! 언제 들었던 말이더냐?’ 새카맣게 잊혔던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우리에게도 그 비전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앞에 더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신앙부흥을 쓰면서 내가 이야기한 것이 그것입니다. 또 하나의 대안을 내놓는 이 어리석음이 그치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라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에 빠지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검불만도 못한 것을 실험해보면 다 근본적으로 뒤틀린 그릇된 기독교 신앙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다시 돌려놓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설교 없는 예배를 연구 중이랍니다. 한국교회에 또 바람이 불게 생겼습니다. 우리 동창이 그 주역입니다. 미국에 가서 배워서 말입니다. 경배와 찬양이 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그것의 기선을 잡지 못한 것을 못내 후회한답니다. 그러니까 요번에는 아무에게도 안 빼앗기고 해보겠다고 합니다. 드라마 예배를 드린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우습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뭐 동요는 사용하시지 않습니까? 어거스틴을 회개시킬 때 하나님이 동요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그것 때문에 뭐든지 해도 좋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엊그제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물론 필요하겠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어떤 상황을 변화시켜주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10장 2절입니다. 여기에 빠진 것이 있습니다. 원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였다.’ 우리가 강조용법으로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이 땅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였다. 이 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위한 한 소망이 있다.’ 이렇게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이 빠졌습니다. 삼았다. 그런데 ‘이 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다.’ 3절을 보겠습니다.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거기에 동그라미 치십시오.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두 번째는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세 번째는 율법대로 행한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씩 보십시다.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여기서 갑자기 ‘내 주’가 됩니다. 의논인데 사람들의 의논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의논은 복잡합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두 번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그 다음에 ‘준행하는 자’ 묘하지 않습니까? 자 여러분 질문해봅시다. 인간들이 뭔가 의논을 하고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들이 뭔가를 깊이 의논하고 위기상황에서 궁리를 하고 뭔가 결론을 끌어내는 것들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생각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고, 율법 어기기를 밥 먹듯이 하고, 주님의 명령에 떨지도 않고 방자히 행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머리를 맞대고 장시간 토론을 하고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슨 기구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장로교 제도가 신학계에 원동력을 회복할 때에는 최상의 정치제도인데 그것이 빠져나가면 최악의 정치제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릅니다. 장로를 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곧 내 주의 교훈을 좆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의논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앞으로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까? 시간적으로 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사람들이 해결방안을 내놓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결방안은 정해졌습니다. 율법대로 행하고 그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이런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지혜를 모아서 그것을 따라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실행의 방식,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런 사람들의 의논을 좇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잘 보십시오. 궁극적으로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모든 절망 속에서 헤쳐 나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게 누가 들으면 화나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지금 무엇입니까? 이제 지금 이 사람의 눈에는 제사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백성의 두목들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뭐냐 하면 사람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니까 하나님의 일꾼에 대한 견해가 확 바뀌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제사장의 가운 하나 가지고 폼 잡던 그런 시대는 각성한 회중들 앞에서는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위주의가 설치던 시대에는 영적인 암흑시대에나 그것이 가능한 일이지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고 성도들이 헤아릴 수 있는 영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는 대접받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세속적이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들을 굉장히 중시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의 지도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 지도를 받는데 자기들이 그런 신앙적인 지도를 받아야할 일꾼들의 자격을 이야기하는데 파격적입니다. 무슨 가문이어야 한다. 제사를 폼 나게 드려야한다. 방백이어야 한다. 가족 중에 누가 두목이어야 한다. 그런 뚱딴지같은 이야기는 다 들어갔고 하나님 앞에 각성되었던 시대에는 그런 인간이 세운 권위, 인간이 세운 그런 것들이 전부 지푸라기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부흥의 시대에 총회장, 노회장을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후배목사들이 찾아가서 해달라고 사정사정 하면 그냥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몇 억씩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하여튼 하나님의 일꾼을 보는 시각이 확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 적용해봅시다. 교역자를 뽑을 때 MD학위가 있느냐? PH학위가 있느냐? 당회장을 모실 때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느냐? 회화는 할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지금 10장 이전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치리될 때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기준들을 자꾸 교회에서 만들어 놓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것입니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이 사람뿐만 아니라 그 모든 사람의 대표로서의 신앙고백입니다. 그것이 확 바뀝니다. 일꾼에 대한 견해, 소망에 대한 입장 이 모든 것들이 다 뒤바뀌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이내믹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사람의 사고방식들이 졸지에 뒤바뀔 수 있느냐는 것입니까? 담대하게 말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에 돌을 맞지 않고 사람들이 내 말이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에스라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런 신도들을 만났으니 말입니다. 스가냐 같은 사람 댓 사람만 있으면 선교회를 해도 괜찮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나니’ 가 9장입니다. 그 ‘소망이 없나니’ 를 한참하면 10장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나니’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소망이 없나니’ 를 해야 되는데 늘 ‘소망이 있나니’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줄 알고 들어보면 늘 그이야기가 그이야기란 말입니다. 하여튼 참 다이내믹합니다.
부흥의 물결이 벌써 회중 속에 들어와서 쓸고 지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1장에 나와 있듯이 사람의 기본적인 틀들을 뽑으며 파괴하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듯 뒤집어지고 깨뜨려지고 사고방식들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너지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스가냐가 정통 유대인도 아니면서 그 모든 사람들의 대표로 나서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나니’ 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역시 지도를 필요로 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났던 시대에는 하나님의 일꾼들에 대한 예의 이런 것들이 깍듯했습니다. 교회에도 가보면 그까짓 물 한잔 그것을 먹어서 맛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이유가 되어서 말씀을 전하러 다닌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겠지만 그런데 확실히 그렇습니다. 경건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청종하는 교회는 확실히 교역자를 대하는 태도들이 다릅니다. 말씀의 깊은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은 늘 선이 있습니다. 아무리 교역자가 잘해주어도 선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부흥이 쓸고 지나가니까 하루아침에 제사장의 가운, 방백의 두건, 두목의 폼 잡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지푸라기처럼 느껴지고 우리가 그들의 의논을 좇아서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라고 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레위인도 아니고 유대족속도 아니고 정통 히브리인도 아니고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떠나가면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이것이 그들이 인정하는 지도자의 첫 번째 자격이었습니다. 좀 더 살펴봅시다. 우선 ‘내 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갑자기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우리, 우리 그러다가 ‘내’ 로 들어갑니다. 일관성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하나 또 말해주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서 Lordship을 확실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라는 것이 말하자면 표현이 충분치 않은 것입니다. 내 주 내가 알게 된, 그리고 내가 Lordship을 인정하게 되는 그 분의 교훈을 따라야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그분의 교훈을 좇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어그러진 세대 가운데서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그러지지 않은 사람들, 주의 교훈을 멸시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의 교훈을 좇는 사람들, 그러니까 좇을 마음이 자기들에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도들이 말씀에 관심이 있을 때 말씀의 사역자라고 그렇게 불러주고 대접을 해주지 말씀에 관심이 없을 때에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고통을 나눠주는 그런 사람들을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진전하면 두 번째 또 우리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전체를 향해서 지금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렇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미 여기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개인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가 구분이 안 되고 한 배로 유동체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명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체의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을 짓밟은 것에 대한 후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의논이라는 말이 예상했던 대로 ‘야차’입니다. 시편 1편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할 때’ 그 꾀입니다. ‘그의 명령안에서 두려워하는 자’, ‘준행하는 자’, ‘그의 명령안에서 떤다.’ 그렇게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 하나님의 명령을 향해서 떤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 깊은 두려움, 더 쉽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언약을 믿으면서도 그 언약의 교리 때문에 방종해지지 아니하고 그 하나님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그 다음에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꾀를 좇아 의논을 좇아 의논은 단수로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런 상황에 있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그러는데 주님께로 돌아가면서도 자기들이 돌아가야 할 모든 길들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말씀하시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일꾼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리고 지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였던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대한 설교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게 되는 것도 그것입니다. 의논은 단수로 나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초점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준행하는 자의 한 의논 또는 같은 의견을 좇아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경건하고 주의 교훈을 좇으며 그런 사람들의 의무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시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사고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카리스마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무 무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며 그분의 임재를 느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렇게 하나님의 일꾼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그들의 의논을 좇아서 행하는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회의가 너무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노예입니다.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참된 카리스마가 아니고 그릇된 카리스마니까 그릇된 카리스마에 의존해서 교회가 곤두박질치는 것보다는 민주적인 방식에 의한 회의에 의해서 교회가 갈 길을 진단하면서 가는 것이 피해가 적다는 경험적인 결론을 많이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로교 제도의 근본적인 것들이 지금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여기서 서리집사님들 계시면 섭섭한 이야기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권사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서리집사를 뭐하게 그렇게 회의에 끼워 넣습니까? 집사로 확실한 사람으로 안수집사를 세우고 그들에 의해서 통과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습니까? 서리집사는 어르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 많습니다. 교회의 신자로 잡아두기 위해서 어르기 위해서 말입니다. 안수집사에 의해서 교회의 예산이라든지 그런 것으로 가고 그리고 그렇게 가면 되는 것이지 이것은 너무 세속주의적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굳센 믿음을 심어주고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오나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라고 하는 이것을 가지고 나가면 돌멩이는 길거리에서 주워가지고 가면 되는데 이놈한테 창을 맞을까봐 갑옷, 칼 맞을까봐 방패, 투구, 군화, 각반, 벨트, 온통 뒤집어 씌어놓았으니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나는 만군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그것 없어도 죽지는 않는다. 이런 것입니다. 은과 금이 많이 있으니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것은 못해도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더군다나 무슨 기념패까지 만들어서 집사 아무개 그것도 서리집사를 말입니다. 서리집사도 집사입니까? 서리집사를 만들어서 거기에 이름 석 자를 새겨서 금테로 해서 그것은 너무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까? 뭔가 복음에 사무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꾸 얼러주는 것에 의해서 예수를 믿는 그런 식의 것들이 유행하니까 말입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보면 그런 영적인 사람들을 상황이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여기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상황이 이렇게 영적으로 위기일 때에는 이런 영적인 사람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뿐만 아니라 늘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격이 됩니까?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여기 에스라의 상황에 서있는데 여히엘의 스가냐가 일어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나니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에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그럴 때 긴급동의 있습니다. 그러면서 손을 들고 김경해 집사를 추천합니다. 그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개종을 시켜서 아내와 그 소생들을 그러니까 원초적으로 먼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부터 먼저 해결을 보아야합니다. 이 모든 아내와 그리고 이 모든 소생들을 다 내어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치러야할 대가를 죄에 대한 대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죗값을 기꺼이 치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된 회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그랬습니다. 결국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것은 지난날들에 대해서 ‘뭐가 잘못되었으니까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가를 기꺼이 치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르면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은 회개하는 것은 ‘안 그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올시다.’ 그런 수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명서를 낭독하는 수준의 회개가 유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르고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상회복 시키고자하는 것 그것이 회개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것은 결코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좀 더 깊은 묵상을 해보십시오.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한 것, 이제 헤어지면 뒷구멍으로 가서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생이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방여자들과 부부싸움을 하고 지금 여기에 나온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 그들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그것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학적입니까? 나를 위하여 전토와 부모와 자식을 버린 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따라가는 제자의 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더 많은 묵상을 요구합니다.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한다. 고 하는데 보통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이 낫지 죽음으로써 속죄하겠나이다. 그것이 낫지 그것을 안 나가겠다고 몸부림을 치면서 아빠, 아빠 그러는 아이를 떨쳐버리고 ‘꺼져라 그리고 다시 너희는 살아서 나를 보지 못하리라.’ 선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여보 왜 그래? 왜 우리보고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야?’ ‘우리 하나님을 만났어. 회개했음’ 이것밖에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왜 나를 얻었어?’ 그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께 돌아와서 ‘여보 보따리 싸!’ ‘왜? 어린애는 안 데리고 가려고?’ ‘아니. 너도 보따리 싸라.’ 벌써 눈물을 흘리면서 ‘왜?’ ‘우리는 이것으로 끝이다.’ ‘무슨 소리야? 어제까지 안 그랬는데 왜 그래?’ ‘회개하고 왔어!’ 이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온 동리 온 고을에서 몇 집 건너 한집씩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 울고불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회의 기본적인 주축이 뒤흔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무엇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느냐하면 이런 참된 영적 부흥만이 그런 단단히 박혀있는 것들을 뽑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세제상에 불이익을 주고 이방 여인과 그 자식들은 의료보험이 안 된다는 그런 정도의 제제조치 가지고 이 사회적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고쳐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의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여기서 잘 생각해야합니다. 신앙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에는 언약을 세우는 일들이 가끔 일어났습니다. 에드워드의 부흥운동 시절을 보니까 언약을 세웁니다. 그 언약서를 에드워드 목사가 작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 것을 하나님 앞에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수준이 엄청 높습니다. 생각나십니까?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해치고 나를 모함하여도 나는 그를 사랑하리라.’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면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특별히 젊은이들이 거기에 대해서 강요는 안하지만 각자 그 종이를 가지고 집에 가서 집안 식구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거기에 서명을 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힘쓰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 앞에 언약을 새롭게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충실한 언약관계로 돌아가겠다는 것이고 하나님만이 기업이라는 사실을 지금 이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케케묵고 시대에 뒤떨어져있고 과학적이지도 않고 고루했던 그 율법 책이 다시 먼지를 털면서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에는 항상 이렇게 사람들에게 성경책, 성경말씀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해설하고 그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는 강의와 설교들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사람들의 관심이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우리가 8시 반에 모여서 3절 뒷부분을 손을 좀 댄 다음에 4절과 그 이후의 실제적인 개혁의 문제들을 더듬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