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얼굴 빛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2-3)
녹취자: 백지영
여기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낫세 이 이름은 요셉의 자녀들입니다.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애굽으로 와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절에서 요셉을 이야기했으니까 2절에서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를 이야기 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의 후손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어 주시는 것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하나님 앞에 탄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세 개의 동사를 가지고 표현을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혹은 선지자를 통해서 다양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이키도록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슈브’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명령형으로 나옵니다. “너희는 돌이켜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 중 여러 곳에 특별히 시편에 이렇게 우리를 돌이켜 달라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의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우리의 마음속에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께 우리를 돌이켜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이렇게 국가적인 위기를 겪고 거룩한 땅이 파괴되어서 이민족의 침입을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가까운 맥락에서 보면 나라가 힘이 없고 군대가 모자라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더 멀리 바라다보면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와 패역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것인 것이기 때문에 이 시인은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지 않으면 결코 우리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이켜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이키시되 무슨 물건의 위치를 옮기는 것처럼 그렇게 돌이키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우리 스스로 판단과 그리고 일을 행할 수 있는 가진 존재로 대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거스르면 거스릅니다. 주님을 거슬러서 악한 곳으로 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하지만 거기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그 일은 우리의 힘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게 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돌이키려는 의지와 돌이키게 하시는 은혜 사이의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존 화이트’라고 하는 저자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팰 때 결을 거슬러서 자르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쪼갤 나무의 결을 보고 곧추세워놓고 도끼로 정수리를 쳐서 쪼갭니다. 그리고 반이 갈라지면 다시 그것을 엎어놓고 정수리를 쳐서 그래서 또 쪼갭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쪼개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인간의 의지의 행사는 이렇게 신비한 연관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차원에서는 이 두 가지가 모순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모든 차원을 능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사이의 신비한 조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은 하나님이 돌이키심으로 우리가 돌아온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돌이키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돌이키지 않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가 끊임없이 돌이키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필수적인 우리의 대안인 것입니다.
이 돌이킴 다음에 나오는 동사가 ‘비추사’입니다. “주의 열굴 빛을 비추사”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주의 얼굴 빛’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신다, 당신이 당신의 얼굴을 대면하신다고 할 때는 두 가지인데,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향해서는 은총의 임재의 빛을 비추시고 악인을 향해서는 진노하사 징벌하기 위해 그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시고 두 번째는 당신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춰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영적인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돌아섰을 때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은 나라나 성전이나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 얼굴빛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 얼굴빛이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있어서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 그리고 자비와 놀라운 용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때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미끄러진 것이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우리의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한번 펼쳐보기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지만 결국 알고 보면 주님의 그 임재의 은총 속에서 살았던 때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행복하고 기뻤던 때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얼굴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끔 날마다 우리를 이끄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 번째 나오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소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가 “돌이키소서, 비추소서, 구원하소서.”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그 상황을 가져왔던 근본적인 문제를 차례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우리가 이러이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저 대적들은 무찌르시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맨 나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영적인 축복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인종이 옷을 바꿔 입었다고 사람을 먹는 습관을 버리겠습니까? 아프리카에서 혹은 밀림에서 생활할 때에만 사람이 먹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문명세계에 나와도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도시락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인은 하나님이 그것은 먼저 고치고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시면서 결국은 이 모든 비참한 이민족의 압제로부터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되어서 힘겹게 될 때에는 우리도 이런 순서를 따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당하게 된 이 시련과 고난이 하나님 앞에 죄짓고 불순종하여 어긋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두 번째는 주님의 그 은혜의 빛을 나에게 회복시켜 주십시오. 세 번째는 급기야 나를 그 시련에서 건져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그것이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매튜 핸리라는 영국의 주석가가 자기의 주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우리나 혹은 다른 사람의 질병된 상태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시되 고쳐주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도 함께 고쳐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의 문제들 굽음의 문제들을 함께 치료하시면서 우리의 상황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