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시 81:10-11)
녹취자: 유은수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은 최대의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낸 것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 각인되는 사건이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기 전까지 그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기억이라고 해야 기껏해야 족장들과 함께하셨던 역사였을 것입니다.
(예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 이르는 역사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기적적인 사건도 일어나고 하나님의 여러 가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사건도 나타나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가족의 역사 속에 머물러 있었던 그런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지만 우주적인 기적의 사건이라기보다는 섭리의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그 이전으로 넘어가면 아브라함 이전이 나옵니다. 그것으로 넘어가 보면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점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신앙이 훌륭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과연 그 이전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많은 사건들. 특히 바벨탑의 사건이라든지, 혹은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사건이라든지 하는 등등의 사건들, 아브라함 때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런 사건들이 사실 그들에게는 너무나 먼 사건이고 아마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느끼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잊혔던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에 들어온 지 430년을 마치는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합니다. 그러면 20세를 한세대로 본다고 하더라도 약 40세대라 하는 긴 세월이 지났을 때에 애굽에서 혹독한 노예살이를 하면서 20세대라고 하는 긴 세대를 지났을 때에 그 사람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었을까요? 물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 하던지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충만한 하나님을 아는 빛 가운데서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행하신 10번의 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은 충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 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9번째 재앙입니다. 애굽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신이 태양신입니다. 10개의 재앙이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애굽에서 절대시 하던 신들에 대한 관념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어두움, 장자 이렇게 나옵니다. 피같은 경우는 애굽사람에게 경배의 대상은 나일 강이었습니다. 그 나일 강이 엄청난 생명력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홍수가나면 상류에서 기름진 흙을 홍수가 실어다 날라서 새로운 흙을 가져나 날라서 기름진 흙이므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최소한 기원전3000년 이전에 원의 넓이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기하학이 아주 발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살아서 거기에서 물고기들을 채집해서 먹고살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신으로 여깁니다. 다곤 신을 곡식이 ‘다곤’ 입니다. ‘낱알곡식을 섬기는 토템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학자는 ‘다곤’이 ‘다그’에서 왔다고 봅니다. 다그는 히브리어로 물고기 입니다. 뭐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의견이 있을 정도로 나일 강에 대한 숭배가 중요한 그들의 신앙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번에 피로 막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고기들이 다 죽는 것입니다. 핏속에서 물고기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악질, 독종 이런 것들을 퍼트림으로써 희생 제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태양이 빛을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두려움과 충격의 사건이었습니다. 또 하나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 하나님의 능력 말고 무엇이 있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놀라운 자비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에 하나님이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겪다가 그담에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사람을 갈라서 온 세상이 어두워 졌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은 환하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걸 구분지어서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놀라운 긍휼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장자의 죽음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을 죽임으로써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지 않고 넘어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절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이 있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놓임을 받게 됨으로써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백성이라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 사건은 지워지지 않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커다란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식어도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해 내신 여호와라는 기억은 잊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광야의 40년의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며 행하신 위대한 능력과 도우심 마지막에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가나안 정복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 이" 모든 것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라는 이 표현이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수시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회상했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도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실 때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이 말씀을 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에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는 근거가 되지만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것이 십계명을 주시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것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되었다가 나중엔 구속하신 것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결국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놀라운 자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 입을 크게 열어라 내가 채우리라" 어저께 설명드린것과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게 된 이유가 무엇때문이라고 했나요? 이세상의 번영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이 이방신을 섬기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입을 크게 열어라. 나를 향해 충분한 기대를 갖거라. 그리고 나에게 부르짖듯 기도하거라. 내가 그것을 채워주겠노라."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 정신, 그리고 그들의 신령한 측면에 있어서만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의 육체와 영혼 모든 존재가 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너희는 나를 의지하거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해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주겠노라. 너희는 나를 신뢰하거라. 내가 만복의 근원이다.”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관계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과만 관계를 맺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주리라. 왜냐하면 이방신들조차도 만약에 있다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들입니다. 그들에게 바치는 곡식이나 포도주나 그 모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땅의 소산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열쇠는 하나님 밖에서 행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도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 없이 행복해 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이런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사랑을 저버린 것입니다.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8절에 나오는 "내 백성이여 들으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와 정배치 되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어제도 설명 드렸습니다만 히브리말로 "샤마,배" 전치사가 따라오는데 "here into"입니다.
(예화) 그러니까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키다 보면 마음이 그 일에 가 있고 나를 신뢰하고 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말을 하면 내 말하는 말은 수단이고 내 마음을 알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화가 끝나고 나면 내 마음이 그에게 전수가 되어 그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수된 마음은 전달된 말의 크기보다 훨씬 깊고 크고 때로는 간절하고 때로는 절실합니다. 그게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순종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말을 하면 말을 조금밖에 안했는데도 가슴에 절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짜 저 사람이 저렇게 원하는데 그 일이 이루어졌으면 참 좋겠다. 그리고 내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를 헌신해서 그 사람 마음 먹은 대로 되게 하는 게 참 좋겠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때 말을 한때 말은 전달의 수단이고 마음을 전수받고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과 함께 있느냐 떨어져 있느냐 그 사람이 미국에 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서 있어서 "이거해. 이거해" 그래서 일사분란하게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 훌륭한 리더십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그 조직이 움직일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움직일 때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인 것입니다.
(예화) 마치 우리가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보시면 당신 그렇게 섬기는 것을 기뻐하시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분은 계시지도 않는데 그분이 계신 것처럼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주일학교 학생들도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는것 그러니까 지도자는 죽어도 자기는 죽어서 사라졌는데도 지도력은 남기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민족의 한 집단의 하나의 정신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잘못 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허전하고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섞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자신의 재능으로 혹은 다른 신들을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을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약에서 ‘리브패턴’이라고 하는데 ‘리브’가 원래 히브리말로 ‘다투다’ 하는 뜻입니다. 무엇을 다투냐 하면 "너희가 나를 버렸도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우리가 절기를 안지킨적이 없고 희생제물을 바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이방신을 함께 섬기는 것은 나를 버린 것이다. 이러면서 소위 이야기 하는 논쟁의 패턴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순종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는 모든 시도들이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큰 것이든지 작은 것이든지. 좀 더 하고 싶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끝임 없는 관계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얼마나 핵심을 찌르는 말씀입니까?
(예화) "나 당신 사랑해."와 "나 당신 통장을 사랑해."는 다릅니다. "나 아빠 좋아."와 "나 아빠의 유산을 좋아해"는 다릅니다. 시름시름 늙어 가는데 자식들이 와서 그렇게 아빠 만나기를 원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와서 계세요.” 라며 말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 어느 집에서 죽는 것이 조금이라도 유리하잖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표현에 의하면 나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존재 자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이 왜 나를 그렇게 사랑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못합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아내가 "여보, 당신 왜 이렇게 사랑해?"라고 묻는다면 "하루세끼 밥해주잖아." 그렇다면 손발에 힘이 없어서 자리보존하고 밥을 못해 준다면 근거와 요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랑해?" "예쁘잖아." 그 예쁨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참 이상합니다. 젊었을 때 빼어나게 예쁜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그 아름다움도 잃어버리면 사랑의 근거가 사라지잖습니까? 이런 거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 그것이 자기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에 그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시는 풍년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주시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원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통해 얻든지 하나님을 통해 얻든지 이세상의 성공과 부귀만 주면 충분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정곡을 찌르시면서 "이스라엘은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나를 싫어하였도다."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타락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을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하며 믿음을 새롭게 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촉구가 어찌 이스라엘에게만 필요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