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얼굴의 광채를 비추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녹취자: 김백화
제 80편의 마지막 결론을 내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이 19절의 기도는 이미 3절의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 올렸던 간구의 내용이 확장되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만 첨가된 것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그 내용이 첨가되어 있는데 그것도 3절에 보면 ‘우리를 돌이키시고’ 라는 내용이 꼭 같이 거의 유사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결국은 이 구절은 3절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80장의 시작에서 하나님께 올렸던 간구가 모든 간구의 내용을 하나님께 올리고 그리고 19절에서 결론적으로 반복을 하고 있는데 똑같은 내용이 정 중앙인 7절에서도 반복이 됩니다. 약간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거의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는데 그래서 이것을 후렴구처럼 사용해서 스탄자라고 하는데 한 소절이 끝나면서 이 후렴구가 들어가고 한 소절이 끝나면 후렴구가 들어가고 한 소절이 끝나면 후렴구가 들어가고 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내용입니다. 이미 내용은 예전에 살펴보았으나 그러나 결론 부분이니까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이여 라고 시작된 이 노래가 마지막에 끝날 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라고 끝납니다. 7절에서는 그냥 ‘하나님이여’ 라고 끝났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여호와여’ 하고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함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는 온 땅과 모든 인류와 세계에 대해 위대한 주권의 능력을 가지신 높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여호와는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히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도우시는 그런 여호와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위대하신 하나님을 먼저 부르고 자신들을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을 다시 반복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함 두 개 나란히 온 것을 가지고 이 속에서 무슨 교리를 발견한 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해석을 해본다면 자신들이 지금 이렇게 바벨론의 억압받고 있는 이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인류와 각 나라 특별히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공평한 주권을 행사하셔서 악한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더 이상 짓밟지 못하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만군의’ 라는 하나님께 대한 수식 어구가 들어갑니다. ‘엘로힘 째바우트’라고 하는데 이 ‘째바’는 ‘짜바’의 복수인데 이것은 군대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을 거느리고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이 세상에서 바벨론은 위대한 나라이고 그래서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가 그 나라에게 대들고 그들을 꺾을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시니 당신이 거느리신 천군과 천사들에게 명령만 하신다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시인의 간절한 신앙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이십니다. 특히 이 여호와는 언약관계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계시되는 이름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스라엘은 이 여호와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하나님이 비록 이스라엘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그 언약의 관계를 기억하셔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다 라는 소망을 가지고 이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나란히 부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우리를 돌이켜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7절에는 ‘회복하여주시고’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사실 똑같이 ‘돌이켜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아마 이 시인이 돌이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이중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여겨집니다. 우선 첫째는 나라의 형편을 돌려놔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국권을 다 잃어버리고 바벨론에게 짓밟혀 있고 포로된 이런 상태이니까 이 국권을 다 회복시켜서 나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심으신 그 의도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들어서 사용하시고자 이들을 세우셨는데 국권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나라가 짓밟히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런 상태를 돌이켜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이 시인은 이 커다란 국가적인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영적으로 돌이켜 달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그래서 5절에 보면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결국은 죄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위는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겠습니까?’ 죄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이미 이 시인이 역사해석을 자신들이 죄를 지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래서 자신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난의 길을 걸으며 눈물로 양식을 먹고 그 눈물로 음료를 삼으면서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다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돌이켜 달라고, 자신들이 돌이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 신앙에서 이탈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때 결국은 우리의 삶의 질서들도 뒤엉키고 시련이 오게 됩니다. 오늘 내가 잘못했다고 해서 한 시간 후에 그런 일이 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니까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우리의 삶의 질서들도 흔들리고 시련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렇게 어려움이 생기면 그 어려움이 없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을 때 단지 괴롭다는 것을 느끼고 이 고통이 제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승들도 하는 것입니다.
(예화) 개도 앞발을 잡아서 뜨거운 곳에 데면 소리를 지르며 앞발을 치웁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편안한 상태에 있으려고 하지 스스로 고통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환경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당신 한분만을 바라보면서는 돌이켜 달라고 기도 못하던 사람이 환경이 어렵게 되니까 이 환경을 바꿔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돌이켜 서야할 자신의 잘못된 상태를 깨닫게 해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것은 신자가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화) 여러분들이 자식을 낳아서 자식이 뭘 잘못하면 혼을 내기도 하고 어렸을 땐 때리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결과에 대해서 화가 나서 자식을 때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절대로 그렇게 징계하면 안 됩니다. 우리 옛 어른들이 손에 살이 들어 있다고 하잖습니까? 발로 차고 언덕을 굴러도 안 죽던 사람이 머리 한 대 쳤는데 죽지 않습니까? 그것을 살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기 그릇 같은 것은 떨어지기 전에는 안 깨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화가 나서 주방에 들어가서 사기그릇을 막 씻을 때 어떤 때는 ‘쫙‘하고 깨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 힘으로는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정신과 물질적이 세계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래서 쪼개지는 것입니다. 저는 전공자가 아니라서 쉽게 얘기할 수 없지만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인데 그 기적의 방식에 대해서 어느 과학자들은 설명을 합니다. 얼마든지 음성으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을 딱 맞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지만 그래서 물질이 음향에 의해서 그렇게 파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랬기 때문에 그 사건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인간의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사이에 그런 아주 세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살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살이 들어있는 손으로 자식을 때리면 뺨 한대 맞고도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자녀를 올바로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혈기로 그렇게 자녀를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에 차서 하는 행동은 나중에 해석해서 잘되라고 하는 것이지 못되라고 하는 것이냐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라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시련이나 환란이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수 하신다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형벌을 집행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무수한 시간동안 말씀하시고 그의 마음을 일깨우고자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하나님의 자녀가 계속 망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물의 질서들을 움직이셔서 시련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환경을 예전의 상태로 돌이켜야 되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무 고통스럽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더 깊은 의도는 그 매달림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돌이키게 하는데 있습니다.
(예화) 싸두 썬다씽이라고 하는 인도의 기독교인으로서 성자와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주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산을 다 넘는 것은 아니지만 히말라야를 이제 넘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는데 평생 전도자였습니다. 중간쯤 가는데 막 눈보라가 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길을 떠나면 안 되는데 노인 하나가 가다가 지쳐서 쓰러져있습니다. 그러면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에 사람들이 다 그냥 지나간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놔두면 노인이 죽게 생겼습니다. 썬다씽이 바짝 마르고 불쌍해 보이는 노인을 엎고 산길을 걸었습니다. 눈보라가 엄청 거셌습니다.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서 걸었는데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도저히 걸어갈 수 없을 정도인데 여기서 멈추었다가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하면서 이 노인을 엎고 가는데 앞에 가던 사람들이 결국은 눈이 많이 오고 날이 추우니까 몇 사람이 지쳐서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이 썬다씽은 할아버지를 엎고 오면서 온몸에 땀이 나는 겁니다. 그렇게 그 할아버지를 엎고 거기를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니까 이것이 오히려 썬다씽으로 하여금 거기서 얼어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자기 책임감과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야 하는 이것이 오히려 이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강하게 해서 그 산을 넘어가게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히려 주시는 문제와 어려움들은 그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 보복하거나 복수하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이 화를 풀기 위해서 우리를 후려치시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어떤 신앙과 자세를 갖느냐 할 때에 그렇게 자기들이 당하는 시련은 다른 색깔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있을 때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당해도 나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이것이 후려치는 복수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었던 죄나 잘못하고 연상이 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양심을 찌르면서 이것들이 고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다가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주님께 돌아가야 되겠다는 그래서 주님 없이 번영하기 보다는 차라리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 낫겠다고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계로 돌아갈 때에는 그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서 자기를 부르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연단하시고 도덕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돌이켜 주시고 라는 기도가 갖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어 주소서’는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당신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단지 시련에서 건져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깝게는 이 비참한, 고난의 국권을 잃어버린 이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고 멀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고난 속에서도 그렇게 주님을 이렇게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