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형식과 내용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시 81:3-4)
녹취자: 표명희
이 시 자체가 개인적으로 암송하기도 하였겠지만 그 용도 자체가 이스라엘의 큰 축제일에 공동체적으로 암송되던 시입니다. 특별히 장막절이나 유월절 같은 이런 민족적인 큰 경축일에 공동체가 모두 이 시를 낭송함으로서 이 시가 주는 기쁨에 참여 했던 것입니다. 여기 보면 초하루와 보름 그랬는데 예전 성경에는 어려운 한자말로 월삭과 월망 그리고 절기 그랬는데 이번에는 편안하게 초하루 보름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초하루는 월삭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는 아니지만 정기적인 제사일 이였고 보름은 원래 월망 이라고 해서 15일 입니다. 매달 15일 이였던 것 같지는 않고 민수기 29장에 보면 장막절이 7얼 15일에 시작을 합니다. 이때에 하나님 앞에 커다란 경배를 드리는데 그걸 두고 한 보름이 아닌가.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명절, 절기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은 장막절이나 유월절과 같은 커다란 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공동체적으로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율례와 규례라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율례와 규례는 각각 다른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도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생각하기를 이 율례에는 제사를 지내는 법도와 관련된 율법의 규정들이고 규례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생활에 있어서의 법도 일 것이다. 라고 주장을 하는데 뭐 확고한 근거를 가진 구별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보든지 거의 유사한 말의 반복으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있으면 그 율법이 구어체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아라. 하는 그 규정들을 율례 혹은 규례라고 하지 않을까 이렇게 봅니다. 법이라는 큰 개념아래서 구체적인 삶과 하나님을 섬기는 지침들을 얘기합니다. 그 정도로 해석을 하면 모두 동의를 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보면 율법이라기보다는 그 율법을 구체화하는 실행 사항들 일거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뭐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으로 악기를 연주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월삭과 월망 그리고 절기에 하나님 앞에 나팔을 불며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이루는 하나의 종교적 시행사항이다 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떤 교훈들을 여기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이거 아닐까요? 신앙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신앙의 형식들이 있어도 만약에 1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없다면 이 형식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 형식이 요구하는 바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족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삶에 있어서 이런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 하나님 앞에서 선택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행복, 이것이 그들의 마음에 넘쳐 날 때에 이런 신앙의 형식들이 내용을 가질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행복이 없다면 이 형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물론 신앙의 형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기쁨과 경외의 정이 없다면 그 형식이 주어 질 때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바를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식은 무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식자체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전달해 주시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을까요? 특히 그들이 내용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경외의 정이 없었을 때 말입니다.
(예화) 전에 전도사생활 할 때 있었던 일인데 영적인 침체에 빠졌던 교사 한사람이 주일날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불러서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이들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자체를 못나왔냐? 그랬더니 인천에 놀러 갔었답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놀러 갔다 라기 보다 교회 오다 인천 앞바다에 가서 하루종인 바다를 바라보고 상념에 잠기다가 집에 간 것입니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까 하는 말이 어차피 주일날 와서 예배드려도 하나님은 내 예배를 안 받으시고 은혜도 안 주시는데 뭐 온들 안온들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래서 내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에 미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과 아예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막보는 거다. 우리도 막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거 어쨌어요. 하면 아 죄송합니다. 이러는 게 아니라 그래 그랬다 어쩔래? 이제 너 같은 인간하고는 관계가 깨져도 하나도 두렵지 않고 무섭지도 않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은 신실하지 못한 태도와 막보는 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공개적인 도전이고 모욕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형식이 주어지고 내용으로 그 형식을 채울 수 없을 때에는 거기에서 깊은 가책을 느끼고 문제를 느끼고 내가 왜 이 예배에 참여해서 은혜를 못 받을까? 나에게 무슨 결함이 있는 것일까? 엄격하게 애기하면 예배가 끝나고 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감격 때문에 못 일어나고, 못 받은 사람은 가책 때문에 못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그렇게 될 경우에 그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경외의 정이 충만하지 못해서, 설령 초하루와 보름과 명절에 나팔을 불고 소고를 치는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의 기준을 못 채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그 사건을 통해서 반성하는 것입니다. 아 나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 되었구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그것이 거울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들을 만약에 염두 해 두고 이 성경구절을 우리들이 본다면 그러면 정말 많은 적용 점들을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많은 신앙의 의무들은 일방적인 의무가 아니라 그자체가 우리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방적인 의무는 우리의 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짐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가는 일에 있어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훌륭한 은혜의 기회이자 훌륭한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형식들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경외의 정이 모자라서 그 형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형식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예배시간에 은혜를 못 받아도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저희가 예배에서 이탈해서 인천으로 구경이나 하러 가서 주일을 범하는 것은 이건 하나님을 향한 공개적인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배 즉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우리가 이 예배로부터 커다란 영적인 유익을 누리는 통로 이기도하지만 예배에 참여해서 주님 앞에 그렇게 경배를 올리는 것 자체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의무는 우리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우리에게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화) 미얀마의 민주화의 투사의 아이콘이라 여겨지는 아웅산 수지여사가 정말 혹독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그 독제 속에서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은 망명을 했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망명하면 영원히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민주화의 꿈은 요원해지니까 그 고난을 받으면서 그냥 미얀마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 꽃다웠던 여자가 할머니가 됐는데 duty , 의무라는 이 한 단어가 나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다. 이 민주주의는 그냥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그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묻고 그것을 요구할 때에 그때 민주화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의무였다. 의무 duty라는 한 단어가 나를 그 고난 속에 살아있게 했다.
똑같은 고백을 누가했느냐? 하면 청교도들 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정말 사랑했던 단어중 하나가 duty 의무였습니다. 청교도 시대 때에 나온 책들에서 보면 duty혹은 duties라는 그것이 붙은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앞에 수많은 수식어구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 삶에 있어서의 의무, 기도생활에 있어서의 의무, 설교를 해야 할 목회자들의 의무, 평신도들의 의무...앞에 수많은 수식어가 달렸지만 이 의무는 그들이 아주 즐겨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속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손에 지음 바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거룩한 하나님과 맺은 언약, 언약에 따르는 권리와 함께 그 언약에 따르는 특권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 우리를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못한 모든 사람과 우리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가운데 하나라. 그래서 그 의무를 행하는 것을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냐 하면 그 의무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의무에 대한 관념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을 올바르게 세우며 살아가는데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그 의무를 그것이 너무 무겁고 나의 신앙의 내용이 그 형식을 채울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벗어 버림으로서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벗어 버린다고 해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자유를 통해서 진정으로 우리를 부자유케 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없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그것들을 내안에서 회복함으로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