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21 새벽에배
환란날에 부르짖으리니
“나의 환란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 하시리이다”(시 86:7)
녹취자: 김미영
확실히 시인이 증명하고 있는 상황은 쉬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이제 하나님 앞에 간청하는 14절과 그리고 16절, 17절의 간구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지금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이 사태를 환란 날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환란의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 하시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쳐 줍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환란의 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평상시에 우리들이 하던 대로 해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삶의 사태들이 뒤흔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환란은, 시험은 내적인 것을 가리키지만 환란은 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태의 커다란 변화가 없고 마음에만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환란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환란은 반드시 나를 둘러싼 외적인 상황의 질서들이 급격하게 움직여서 예전에 하던 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환란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시인에게도 이런 환란의 때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시사점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인간들의 죄에 대해서 벌하시기 위해서 환란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허락하시는 환란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높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순전함,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런 환란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도 하나님 앞에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이런 환란을 당해보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환란 그 자체 안에 사람을 순결하가 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생 많이 한 사람들은 아주 순결한 사람들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상황의 변화나 그로 말미암는 인간의 고통은 인간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정화하는 놀라운 능력은 그 고난을 해석하고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데서 순결해지게 하는 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 처음부터 이미 새로운 인생관을 갖고 새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생관은 삶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수많은 사태들을 해석하게 만들어주는 인생을 바라보는 일관된 입장입니다. 그런 입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해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뜨겁고 경건할 때에는 그 해석이 아주 잘 됩니다. 그래서 삶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매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거기서 오는 고난과 시련의 의미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형통함과 기쁨의 의미도 해석을 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을 돌아보는 반성과 참회,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뜨거움이 사라지고 경건의 능력이 사라지게 되면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거의 동물적인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동물들이 어떻죠?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만족하면 자고, 그리고 자기가 싫은 상황이 되면 울부짖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자기가 감각적으로 원하고 좋은 것을 찾지만 그러나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 아주 중요한 작용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환란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서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시편 119편에서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나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짐승과 같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존 오웬 목사님은 영적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영적으로 기울어지면 이런 자신의 사태에 대한 아주 탁월한 해석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치 좋은 음식을 입에 한 입 가득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정말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꼭꼭 씹어서 삼켜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제 목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항문까지 약 9m정도 되는데 그 장을 지나면서, 위와 장을 지나면서 온 몸에 흡수가 됩니다. 거기에서 모든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듣고 난 후에는 그것을 곧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끊임없이 곱씹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터득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religion'이라고 하는데 이 라틴어 ‘랠리가래’에서 옵니다. ‘묶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이성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신앙을 갖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신앙적인 가치에 묶지 않으면 곧 풀어져서 동물적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순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그런 생활을 안 하면 누구도 그의 삶이 하나님께 매인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수준이나 이런 게 소용이 없습니다. 매일 매일 오죽했으면 사도바울도 자신은 매일 죽노라고 그랬겠습니까? 저런 환란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들에게도 오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이 환란을 사용하셔서 순결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이 환란 날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자녀들에 대한 태도가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부르짖다’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카라’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그냥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로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을 큰 소리를 내어서 그가 들을 수 있도록 부르는 것, 이것이 ‘카라’ 입니다. 이 단어가 기도와 관련되어서 사용될 때에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소리 내어서 기도하는 것과 관련지어서 우리들이 항상 유의할 것은 이런 것 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간절한 부르짖음은 마음속에 억제할 수 없는 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누를 수 없는 내면의 간절함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냥 건성으로 습관적으로 소리를 내어서 기도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서 기도 하다가 우리도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의 정을 억제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소리 내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물론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거나 혹은 누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덕입니다. 덕은 나로 말미암아서 다른 사람들이 일체의 피해를 느끼지 않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덕입니다.
지금은 예배당이 엄청나게 크니까 한 구석에서 누구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해도 음악소리에 묻히고 공간에 묻히고 해서 잘 들리지 않습니다. 옛날에 교회 처음 시작할 때에는 예배당이 조그만 하잖아요. 누가 한 사람이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기도에 방해가 됐습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충고를 했습니다. 정말 소리를 내서 기도하고 싶으면 수건을 하나 가지고 새벽 기도를 와라 그걸로 입에다 대고 때론 눈물도 많이 흐르니까 그렇게 기도하면 되지 않겠느냐 저도 그렇게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덕이 필요하지만 어쨌든 마음에서 억제할 수 없는 깊은 정이 있을 때에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터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마음속에 가득 찬 기도의 정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014.2.21 새벽예배
시련과 환란을 많이 당했다고 해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기도의 정이 이렇게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의 상태가 나쁘면 환란을 많이 당해도 마음이 강퍅해지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기도가 내면에서 바짝 마릅니다. 머릿속에서 수 만 가지의 생각들이 빗발쳐도 기도를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도의 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란을 만난다고 기도하면 어려움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014.2.21 새벽예배
그런데 이 시인은 환란을 당하면서 자신의 죄와 잘못을 돌아보면서 뉘우치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에 기도의 은혜의 물이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올바른 사람은 아니지만 얼마나 많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살았던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그 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기꺼이 따르겠노라고 하는 준비된 내적인 복종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분 이외에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렇게 기도의 영이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마치 수온에 물이 쏟아지듯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이것이 시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환란을 당했을 때에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마지막 세 번째 “주께서 내게 응답 하시리이다” 이것이 시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울거나 보챌 때에 다른 사람들은 아이에게 관심이 없지만 아이가 부르짖는 뭔가 간청하는 소식을 들을 때에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은 가장 먼저 움직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자녀들이 환란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처럼 내게 응답하시리라는 이 믿음을 가지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 내게 일어난 환란은 나쁜 것이지만 이 나쁜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나쁜 일을 하나님은 바꾸어서 더 좋은 것으로 만들 것 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이렇게 환란 때에 우리 주님께 마음을 쏟으며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