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시리도록 그립다 가족
녹취자 : 오희열
반갑습니다. 젊었을 때는 제가 생각이 좀 모자라서 독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나이가 들고 철이 들다보니까 책의 홍수 속에서 제 책을 읽어주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최소한 한 권을 읽고 오셨을 것입니다. “가족”, 읽어 주신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드리고 저에게 허락된 짧은 시간동안에 가족이라는 이 책과 주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화) 저는 어렸을 때 강아지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저희 집에 강아지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붙여주고 항상 개와 함께 살고 개와 함께 웃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기르던 강아지가 죽는 것을 몇 번 경험하면서 그것이 커다란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이별하고 헤어지는 것도 이 험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힘든 일인데, 내가 왜 그 인연을 개에게까지 확장을 해서 그 개와 이별하는 슬픔을 느껴야 하는지, 그것이 싫어서 우리 애들이 개를 기르자고 수없이 졸랐는데도 단칼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생각이 변함이 없었는데 제가 중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문자가 왔습니다. 보니까 사진이 한 장 왔는데 개 한마리가 저희 집사람 무릎에 앉아있었습니다. 딱 보니까 조그마한 인형 같았습니다. 인형으로 생각하고 제가 농담으로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걸 어떻게 기르려고 그래?” 그랬더니, “우리 딸이 책임지겠대.” 그래서, ‘아! 진짜 강아지가 들어왔구나! 어떻게 하나?’ 생각했지만, 이 나이에 아내에게 항거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 다음으로 존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예쁘게 생겼네, 우리 예뻐해 줍시다.”하고 돌아왔습니다. 조그마한 말티즈인데 보는 그 순간 너무 예뻤습니다. 유기견은 아니고 난지 한 달 된 강아지였습니다. 너무 예뻤습니다. 더구나 손주 손녀도 아빠가 공부한다고 해서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예화) 제가 젊었을 때는 아들도 예뻤지만 딸을 낳고 나니 그렇게 예뻤습니다. 딸을 막 좋아하니까 딸도 저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크고 나니까 아빠를 별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맨날 짝사랑이었습니다. ‘우리 딸 뭘 좀 사줄까?’ 하며 백화점에서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장가를 가서 딸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예쁜지, 마치 연애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낮에는 집에 절대 안 들어가는데 오후에 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서 아이를 보고 한 번 안아주고 와야지만 오후에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유아용품 코너만 다녔습니다. 아이가 할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크고 나니까 자기 가족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러고 나니까 할아버지도 별로이고 할머니도 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외롭던 차에 강아지가 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딸을 위해서 백화점을 기웃거리다가 손녀를 위해서 유아용품 코너를 기웃거리고 이제는 애견용품 코너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이것을 비관적으로 보면 인생이 참 슬픈 것입니다. 저는 그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아지를 키운 지 이제 다섯 달 되었습니다.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예화) 여러분도 아이를 키워봤겠지만 아빠가 하루 종일 일하다가 “띵똥~” 하고 집에 들어가면, 자기가 기분이 좋을 때는 “아빠!, 오셨어요?” 하지만 기분이 별로 안 좋으면 TV보면서 앉아 있습니다. “아빠 왔다.” 하면, “네.”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 개는 언제나 달려옵니다.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만 나면 벌써 달려와서 문을 긁습니다. 그리고는 안아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이 개를 야단치지 않고 사랑해줬습니다. 이 개를 데리고 애견카페라는 곳에 갔습니다. 저는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 딸이 데리고 가서 가보니까 개를 데리고 와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인데 뒤뜰에 가니까 자그마한 인조 잔디 운동장이 있었고 거기에 온갖 개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큰 개부터 작은 개까지 나와 있는데 우리 개를 거기에 탁 풀어놓으니까 이 개가 기고만장하며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큰 개에게도 가서 한 번 짖어도 보고 툭 건드려보기도 합니다. 쫓아오면 도망도 갑니다. 그걸 보면서 느끼는 것이 너무 자신감이 충만하고 두려움이나 염려가 없었습니다. 구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과 비교를 해보니 저는 저 개 같지 않았습니다. 늘 세상을 사는 것이 두렵고 어디를 가든지 구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구겨진 구석이 있고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개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저 개새끼도 세 식구가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주니까 저렇게 자신감이 충만하고 큰 개에게도 가서 대들고 헤집고 다니는구나!” 개가 들어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너무 예뻐서 개를 끌어안고 생각했습니다. “이 개가 만약 불치의 병에 걸린다면 내가 얼마까지 지출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얼마쯤 지출할 수 있습니까? 500? 300? 200? 돈 들어가면 버리겠습니까? 마지막에 계산을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이, “그거 계산 안 한다.” 우리 딸이 이름을 코코라고 지었는데, “코코야, 넌 참 잘 왔다.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 잘 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를 지켜줄게. 너는 내 품에서 편안히 쉬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거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사람이 되는 것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80% 이상 인간성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 책을 읽으셨겠지만 저는 그 한 줄 한 줄을 펜으로 쓴 것이 아니라 피로 썼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아픔이 없었다면 쓰여 질 수 없는 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마어마하게 많이 팔린 것은 아니지만 안 팔린 것도 아닙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현재에 비하면 좀 팔렸지만 기대했던 바에는 미치지 못 했습니다. 문제는 어떤 가정에 태어난 것이 우리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부모님이 너무 존경스럽고, 다시 태어나도 이 아내를 만나고 싶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크게 대답하시는데, 어느 부부가 대화를 했습니다. 남편에게 어느 순간 아내에 대해서 감동이 확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가슴 벅차게 고백을 했습니다. “여보!”, “왜?”, “나 고백할 말이 있어서.”, “뭔데?”, “여보, 나 좀 똑바로 쳐다봐.”, “응.”,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할거야!”, 했더니 아내가 신경질을 팍 내면서, “당신은 어떻게 내세에서도 당신 생각만 해?” 했답니다.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는 분이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 맘대로 그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인데 만약 내가 지금 태어난 가정이 내가 별로 원하지 않는 상태라고 해도 그것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바꾼다는 것은 의절하고 안 보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우선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가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류에 미치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어디에서도 듣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아파르”라고 나오는데,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흙이 아니라 티끌을 가지고 사람을 빚으십니다. 그런데 어떤 피조물도 그렇게 빚어서 만든 피조물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있어라.”하시니까 생겨났는데 인간만 그 형체를 당신의 손을 빚으십니다. “빚다”라는 단어는 토기를 빚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는데 이것은 당신을 나눠주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행동입니다. 그 순간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 육체와 영혼이 만나서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똑같이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잠재우고 갈비뼈 하나를 떼어서 그것으로 여자를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봐라, 남자가 먼저다.”합니다. 시간적으로는 먼저이지만 여자가 신제품입니다. 그리고 원 재료를 보더라도 티끌보다는 갈비뼈가 훨씬 고급의 재료입니다. 그래서 작품으로서의 기본적인 완성도는 여성이 더 높습니다.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자를 만드십니다. 자, 그러면 왜 하나님이 남자를 만드는 방식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 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겠습니까? 그것은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인류는 어떻게 퍼지게 되었느냐 하면 둘이 성적인 결합을 합니다. 철학적으로 비존재에서 존재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신비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엮어지면서 수많은 인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혼을 성립시키실 때 하나님이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셔서 데리고 오시니까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is the best choice”를 의미합니다.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없는 The best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국한된 고백이 아니라 온 인류를 포괄하는 고백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두 사람에 밑으로 자식이 태어나면 두 부부가 자식을 보면서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엄마에게 남아있습니다. 병원에 계시니까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엄마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그 아이가 부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당연히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이 태어나면, 손자가 태어나면, 손녀가 태어나면,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실 때 겨냥하셨던 것은 “사회”입니다. 그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기를 원하셨는가 하면, 문명이야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발달했겠지만 문명은 상대적인 것이고 문명과는 상관없이 그 모든 인류 구성원이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의 사회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그것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 깨어진 것을 마지막 날에 완성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은 완전한 사랑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사랑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이 이루어질 그 사회를 미리 앞당겨서 우리로 하여금 느끼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도입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들어온 사회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연합, 그 사람들이 서로를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회, 그것이 바로 미래에 이루어질 사회를 미리 보는 예고편인 것입니다. 맛보기입니다.
이런 구도를 가지고 가정을 보겠습니다. 가정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제일 먼저 전제로 해야 할 것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결의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절하거나 완전히 도피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실을 직면한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하는 존재입니다. 이 명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것이겠지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철학적인 것입니다. 목숨을 연명만 하고 있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구현하면서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내가 태어난 가정이 내가 원하는 가정이 아니고 내가 새로 태어나면 우리 엄마 아빠 밑에서 태어나지 않고, 내가 다시 시집을 가면 저런 놈은 낳지 않겠다고 해도 우리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현실이 내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성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자녀는 정서 장애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분들께 이런 말이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정서 장애아를 둔 부모의 고통을 보면 차라리 신체의 어느 한 쪽이 부자유한 것이 낫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몸무게가 80kg씩 나가는 스무 살인데 45kg되는 엄마 무릎에 앉겠다고 하며 올라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해결도 없다. 이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앉아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무섭고 아주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것도 우리 부모님께서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부모님은 강원도에서 사업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당신 곁에 두고 시골학교 다니게 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껏 뛰놀게 말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이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두 분에게 어머 어마한 교육열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저를 할머니와 고모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입니다. 거기서 엄마 아빠가 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아십니까? 한참을 그리워하다가 계속 못 만나게 되면 그리움이 없어집니다. 중학교 입학시험도 있던 시절이었는데 방학 때 한 번씩 가면 장날이 두 번 올 때까지, 그러니까 10일정도만 있을 수 있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인생을 그렇게 살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늘 아버지에 대해서 손님 같은 마음, 그리고 동의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이나 가정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을 보면서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너무 싫었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녔고 마지막에는 우체국장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를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이 못된 자식, 이제 먹고 살만하니까 이제 신학교를 간다고 하느냐? 네가 신학교 가는 꼴을 나는 못 본다. 신학교를 가려면 호적을 파 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네, 파 갈게요.” 했습니다. 저는 진짜 성씨 개명을 해도 아무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매인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중에는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내 인생에 도와준 것이 뭐가 있기에 이제 와서 내가 신학교를 가는데 등록금을 대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손해를 끼친다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조상을 섬기면서 신념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는 것이지, 마음 상하지도 않고 호적을 파서 간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예수 믿고 회심하고 나서도 아버지가 용서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동네 교회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려고 간 게 아니었는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얘야, 네 아버지를 용서해라. 네 아버지에게는 네가 사랑을 못 받았지만 내가 너에게 베풀어 준 사랑이 그보다 크지 않니?”하시는 마음이 들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아버지가 한 사람의 영혼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과거와 단절하고 그 아버지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충분히 아버지를 사랑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살았기 때문에 표현하는 것 자체도 피차가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으로는 항상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황당하신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연락이 왔습니다. “나 좀 보자.”, “네.” 그 연세에 조용히 집에 계시면 연금도 나오고 하는데, “내가 사업하다가 어려운 일을 겪었다. 1억만 해 내라.” 하셨습니다. 목사가 1억이 어디 있습니까? 동생들과 모아다가 해 드렸습니다. 예전과 다른 것은, 그런 일이 예전에 있었으면 더 미워졌을 텐데 그때는 아버지가 너무 귀여워 보였습니다. 사고를 치시는 아버지께서 너무 귀여우셨습니다.
(예화)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아버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바짝 마른 몸에 하얀 와이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으시고 박스에 뭔가를 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하고 불렀는데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보청기를 해 드린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못 들으셨습니다. “아버지, 저예요.” 하면서 팔꿈치를 툭 건드렸는데 휙 돌아보시면서, “응, 너 왔니?” 하시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새벽에 그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베갯잇을 흠뻑 적시도록 울었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아, 내가 왜 그랬을까? 살아계실 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왜 그것밖에 표현하지 못했을까? 더 많이 표현할 수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렇게 보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들면서 그리움이 사무쳐왔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부모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많은 상처를 주어도 살아있는 것 자체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건강하시고 평생을 새벽 4시에 일어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런 폐렴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막 아프면서도 다행인 것은,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용서한 것이 26살 때 인데 그때부터 시작해서 한 28년 정도 되는 세월동안 제 힘닿는 대로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했고 그리고 진심으로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몰래 용돈도 넉넉하게 드리고 설날에는 세뱃돈을 작년보다 더 많이 작년보다 더 많이 드리려는 원칙을 세워서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 해에는 150만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랬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제가 그때까지도 아버지를 미워하고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중에 그것을 내가 깨닫고 가슴아파했다면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물론 아버지로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아직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아무것도 이제는 저에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가정에 태어나게 하셔서 그런 많은 아픔을 겪는 가운데 불완전한 인간 아버지를 떠나서 완전하신 아버지를 보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의 결정적인 결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식들에게 어떤 아빠가 되어야할 지에 대한 그림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저는 스물여섯에 결혼을 해서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생겼는데 유산을 하고 6년 동안 아이가 없다가 7년 만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7년 만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막 좋아했는데 나중에 커 가면서 뭔가를 해 달라고 하는데 해 주지 않으면, “에이, 엄마는 내가 7년 만에 태어났는데 그것도 안 해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얼굴도 그때는 너무 예뻐서 데리고 나오면 동네 사람들이, 심지어 학교에 데리고 오면 예쁘다고 쓰다듬어 주고 정말 잘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공부를 너무 잘했습니다. 초등학교 1, 2, 3학년 때 계속해서 올백을 맞아왔습니다. “얘가 참 수재구나. 내가 이루지 못한 탁월한 공부의 꿈을 이루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예화) 저는 사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아주 엄청난 학습지진아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가고 나니까 훨씬 공부를 잘 했고 대학원에 가니까 훨씬 더 공부를 잘 했고, 다 그만두고 혼자 공부하니까 훨씬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를 아는 주위의 사람들은 저를 학습지진아라고 하거나 지능에 문제가 있는 학습 장애적인 성향을 가진 목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오늘도 공부하러 온 것입니다.
(예화) 그런데 이 아이가 그렇게 공부를 잘 하니까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 아이가 이룬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4학년 때부터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도 안 하고 먹기만 먹으면서 계속 비만형태가 되어가고 정리정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두 번씩 이 아이를 심하게 때렸습니다. 딸은 때리지 않았습니다. 딸에게는 때리는 시늉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저에게 몇 번을 맞았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가 아빠를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아빠가 집회가 있어서 지방에 내려가서 며칠 안 들어온다고 하면 너무 좋아하면서, “그럼 엄마하고만 있는 거야? 너무 좋아!” 했답니다. 그러면서 나도 뭔가 갈 길을 몰랐는데 자동차를 혼자 몰고 가다가 상념에 잠겼습니다. 그런데 전광석화와 같이 한 순간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아니고 내 양심 속에 들린 소리였습니다. “얘야, 네 자식은 네 아들이고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네 자식의 아빠고 나는 네 아빠인데, 네가 아들을 다루는 방식은 내가 너를 다루는 방식과는 너무 다르지 않니?” 차를 몰고 가다가 구석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운전대를 붙들고 한 30분 이상을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살아오는 동안에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인도하셨는지, 그 생각을 해 보니 하나님은 그냥 아빠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엄마와 같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지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한없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시면서 대해 오셨는지 스쳐지나갔습니다. 이 아이를 보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아이가 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공부도 잘 해, 책을 쓰니까 글도 잘 써. 그리고 아빠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 자신을 보니까 ‘공부도 못해, 아빠처럼 정리에 탁월하지도 않아.’ 하면서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자기 자존감을 잃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깊이 통곡하고 운 다음에 제가 아버지에 대해서 변화되었던 것처럼 아들에 대해서 변화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그 순간부터 이제까지 일체 아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사랑하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5학년인가 6학년 때, “아들아 가자.” 하고 백화점 옆에 있는 의류점 많은 곳에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 신발까지 색깔을 맞춰서 옷을 사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매 학기마다 아들의 성적표를 앞에 놓고 문초를 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잘 한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후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성적표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우리 아빠가 정말 좋아하는 나는, 공부 잘 하고 글 잘 쓰고 뭔가를 많이 하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자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아빠는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심각한 학습지진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해 보니까 이 나라의 교육이 저에게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사람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습니다.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을 보면, 혹시 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면서 동병상련의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아들도 조금 더 공부를 잘하길 바랐지만 그렇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이 되니까 치고 올라가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지금은 자기 힘으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예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관계가 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에게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한 자매가 있었는데 공부를 아주 잘 합니다. 하루는 그 자매가 은혜를 받고 울면서 저와 상담을 했는데 자기가 어떻게 공부를 잘 했는지 저보고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묻길래 내가 그걸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냥 잘하니까 잘하겠지 했는데, 아니랍니다. 자기는 매 학기마다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성적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집사님은, “어휴, 우리 자식도 복수 좀 하지.” 했습니다. 이 자매에게 오빠가 있는데 아빠의 모든 관심사가 이 오빠에게만 쏟아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얘, 그거 오빠꺼야.”, “오빠 좀 도와줘라.”, “그거 네가 해라. 오빠 시키지 말고.” 이런 식으로 입에 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무엇도 아빠에게 인정을 못 받는데 딱 하나 인정받을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빠보다 나은 성적표를 보여줄 때인 것입니다. “그래, 네가 한 가지는 오빠보다 낫구나.” 이 말을 듣기 위해서 아버지에 대한 모든 미움을 복수심으로 불타게 해서 공부하는 데에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인간이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처를 받아봤지만 아빠에 대한 미움을 공부에 쏟을 때 그것이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우선은 상처가 있는 집안의 사람들은 그 부모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용서해서 그 부모를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것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입니다. 물론 주님의 인생이지만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인생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주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야하는데 누구 때문에 불행하다거나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는 억눌림 속에서 인생을 사는 것은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자기 한 사람이 살아있는데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완전히 불행해지고 망가질 수 있을 정도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이 세상에 없어야 합니다. 여기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이런 꿈을 꿉니다. 엄청나게 멋있는 사람이 나타나고 헌신적인 사랑을 쏟아 부어서 하늘에 있는 별도 따다주고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꿈꾸고 기다립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 있으면 그런 사람에게 시집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런 사람과 결혼하면 불행해집니다. 제가 우리 청년들에게 항상 이야기합니다. “얘들아, 외모를 안 볼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유효기간이 6개월이란다.” 했더니, 어느 날 막 신혼여행을 다녀온 한 자매가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설교 말씀에 늘 은혜를 받는데 한 가지는 틀렸습니다.”, “그게 뭔데?”, “배우자의 외모의 유효기간이 6개월이라는 거요.”, “그게 왜?”, “4박 5일이더라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신혼여행가서 5일째 날 대판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갈 때 항상 자기 자신이 확고한 주체성을 가지고 누구도 내 인생을 후두둑 무릎 꿇고 주저앉아버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연은 만들면 안 됩니다.
제가 형제들에게 늘 이야기하는데 자매가 나타나서 “나 형제가 너무 좋아!”, 혹은 “나 오빠가 너무 좋아!”, “오빠가 아니면 난 혼자 살꺼야.”, “나는 독신으로 살든지 오빠랑 결혼하든지, 이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 이런 여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남자도, “나는 당신에게 올인 했습니다.”, “나에게 당신 없는 인생은 무가치합니다.” 하며 돌진하면 그 말이 거짓말일 경우라면 결혼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진실일 경우에는 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첫째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여러 번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하더라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쿨 하게 “너하고 나하고 결혼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 한 번 따져보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한 번 해 볼까? 노력해보자. 꼭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런 사람들이 결혼에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휘몰아치는 파토스(pathos), 그것이 소설 속에서는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실질적으로 그런 정념에 사로잡히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결국에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보면, 주인공이 어느 날 변신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물방개처럼 커다란 벌레로 변신을 합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아버지를 사랑해서 투잡을 뛰면서 아버지를 부양하고 동생이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 하고 음악학교를 가고 싶어 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가족을 위해서 희생했는데, 알고 보니까 아버지는 이미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너무 사랑했는데 동생은 자기를 향해서 그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있는데 큰 벌레로 변한 모습을 보고 사과를 확 던졌는데 그것이 탄환처럼 껍질을 뚫고 들어와서 결국 죽게 됩니다. 그가 죽은 날에 온 가족은 해방감을 느끼며 야유회를 떠나는 것으로 소설을 끝이 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이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인생의 의미를 사랑을 받는 것에서 찾는다면 일평생 만족스런 관계를 찾지 못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그렇게 애달프게, 죽어서 넋이라도 여러분을 끝까지 사랑해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님이 계십니까? 부모님의 사랑도 영원하지 않거니와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그것은 영원히 유아 아닙니까? 그러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그렇게 사랑해 준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도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을 어디에서 그렇게 희구합니까? 그런 꿈을 꾸면 꿀수록 우리의 인생은 아주 비참하고 우울해 보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없는 살림을 살면서도 동해안으로 놀러갈 꿈을 꾸었습니다. 그렇게 가슴이 벅차 있는데 뒷집 아주머니가 마실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아주머니는 유럽 8개국을 일주하겠다고 하면서 한 사람에 1000만원씩, 가족 모두 4000만원어치 티켓을 끊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자기의 계획이 너무 시시해지고 짜증이 확 납니다. 이걸 꼭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렇게 찬송을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사랑에는 놀라운 공식이 있는데,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롭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사람은 그만두고 강아지 한 마리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고 싶은 대상이 있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거기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 속에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이미 가족관계는 주어졌습니다. 자녀도 부모도 배우자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인생을 향한 기본적인 예의는 이 관계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데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가 살아있는 한은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그렇게 사람을 한없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 영혼의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끊임없이 무한한 사랑으로 공급받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고 그렇게 오랫동안 상처를 받으면서 깨어졌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한 순간에 회복을 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스물여섯 살에 그 마룻바닥에 기도한 이후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곱씹으면서 아버지를 미워한 적이 내 의식 속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운전대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한 이후로 ‘왜 우리 아들은 이것밖에 안 될까?’ 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해 본 적도 없습니다. “네가 어떤 능력으로 태어났든지, 어떤 길을 가고 싶든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라. 나는 너를 위해서 하늘을 열어주마! 네 인생을 훨훨 날며 살아라.” 그것이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의와 응답>
질문 1) 이렇게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저희 직원들이 가진 질문이 있어서 질문을 각자 할 수도 있지만 중복되지 않고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기 위해서 미리 받아 둔 질문들이 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아까 목사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버님에 대한 표현, 아버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을 때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 그렇게 관계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사랑하는 마음은 굉장히 많은데, 내가 아내나 부모나 자식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표현하고 싶은데 참 표현이 안 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거나 그런 습관이 있다면 가족끼리도 사랑의 표현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내나 자식이나 누가 죽었을 때 비로소 그때 통곡을 하면서 사랑의 표현을 하면서 우시는 분들을 많이 보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좋든 안 좋든 사랑하는 마음은 있어도 그런 것이 너무 서툴고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는지 부탁드립니다.
답변 1) 사실 의외로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마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표현을 잘 못하는 분들입니다. 그것이 타고난 성품도 있지만 사실은 가정의 환경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안아주신 기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왜 그러셨느냐고 여쭤보니까 그때는 애들 안아주는 것이 동네에서 큰 흉이었다고 하시면서 어물쩍 넘어가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문화에서 자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저를 서울에서 키우시면서 학교를 보내셨는데 할머니께서 저를 늘 안아주셨습니다. 너무 귀여우니까, 당신에게는 제가 삶의 기쁨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는 제가 하나님보다 위에 있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 집사람도 성향이 아주 비슷해서 hug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하면 웃기지만 지금 저희 딸이 스물여섯인데 지금도 real hug 하고 뺨을 부빕니다. 그리고 스물 한두 살까지는 볼에 뽀뽀도 했는데 요새는 서로 늙었으니까 끌어안고 뺨을 부비기만 합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결혼해서도 스킨십을 잘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런 것을 표현을 못 하니까 나에게 중대한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조금씩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나 노래 못해.” 하고 평생을 살면 한 번도 노래를 못하고 노래방도 못 가고 끝납니다. “나 노래 못 해서 노래방 안 가.”해 버립니다. 그런데 노력을 해 보십시오. 동요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글도 나는 못 쓴다고 하면서 “나 글 못 써!, 못 써, 못 써!”하지 말고 한 번 써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생각보다 잘 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시도 쓰고 산문도 쓰고 그렇게 표현을 하면 자기 안에 있는 잠재적인 역량들이 생겨나고 표현의 기쁨을 알고 나면 그 다음에는 표현이 됩니다. 노력하십시오. 조금씩, 조금씩 말입니다. 대답이 되셨습니까?
질문 2)저희 병원에 보시면 워킹맘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워킹맘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에서의 도움이 없이는 그 자리에 서기가 어려운 일들이 있는데, 특히나 가정을 가지시고 일을 하시면서 여러 가지 관문들이 있겠지만 아이가 하나인 가정에서는 동생을 더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클 것 같습니다. 어쨌든 워킹맘으로서 직장에서도, 남편도 케어(care)하기 원하고 또한 엄마로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아이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데 그게 완벽하지 않다보니까 주위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주위의 도움을 받으면서 친정이나 시댁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그 도움 없이는 저희가 여기 나와서 일을 할 수 있는 분들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생각하면 동생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맞는 건지,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말입니다. 워킹맘들을 보시면 항상 미안함과 죄책감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워킹맘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2) 제가 여기 와서 책망을 하겠습니까? 제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를 두 개 읽어드리겠습니다. 준비하고 온 것이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시골에 있는 아이가 늘 농사지으며 고생하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쓴 시입니다. 제목은 “엄마는 진짜 애쓴다(김용택)” 입니다. 짧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엄마는 아침밥 해 먹고 설거지하고
방 청소하고 빨래해서 걸어두고
마당에다가 고추 널고 또 고추 따러 간다
얼굴이 빨갛게 땀을 흘리며
하루 종일 고추를 딴다
해지면 집에 와서 고추 담고
저녁밥 해 먹고 설거지하고
고추를 방에다 부어놓고
고추를 가린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가리며
꾸벅꾸벅 존다
우리 엄마는 날마다 진짜 애쓴다
이 시를 본 강남에 있는 애가 시를 하나 썼습니다. 제목은 “우리 엄마는 진짜 애 안 쓴다.”
엄마는 아침밥 대충 해 주고 설거지 대충하고 방청소도 안 하고
세탁기에 빨래 돌려서 건조기에 던져놓고 실내 자전거타면서
핸드폰 보면서 노래나 흥얼거린다.
얼굴에는 시원한 선풍기 바람 쐬면서 티비를 본다.
티비 보면서 파프리카 질겅질겅 씹어 먹고
저녁 밥 대충 해 주고 설거지 대충 하고
토마토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다.
그리고는 저녁때 나보고 수학을 풀라고 잔소리를 하고
자기는 똥 싸러 간다.
다 풀면 채점하고 엄마 와서 인사하면
아빠 와서 인사하고 바로 씻고 들어가 버린다.
우리 엄마는 진짜 애 안 쓴다.
이게 누구 웃기려고 쓴 시가 아니라 초등학교 2, 3학년 아이에게 비친 엄마의 모습입니다. 물론 제일 좋은 교육은 엄마가 그 아이와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있어주기만 한다고 그 아이의 교육이 잘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육의 효용성은 많은 시간을 같이 있어 주는 것도 요소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격적인 신뢰와 사랑입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떨어져 있거나 엄마가 일을 나간다고 해도 그 마음 중심이 자기를 향해 있는지 딴 데 가 있는지를 금방 압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면 훌륭한 엄마라고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는 저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는 비서를 비롯해서, 워킹맘이면서도 집에 붙어 앉아 있는 엄마보다 훨씬 더 아이들 교육을 잘 시키는 유능한 자매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물리적으로 그 아이와 함께 있어주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라고 일단 말씀을 드리고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동생을 낳는 문제인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예전에 우리가 자랄 때의 육아와 생활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더 거칠고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가난할 때라서 서울 시내의 학교에 올라가서 보면 우리 동네는 다 판잣집이었고 큰 건물은 관공서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에는 엄마가 그냥 가정을 돌보는 게 아니라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서 풀빵이라도 구워서 팔아야 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지금 시대에 오면서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어야 한다, 그때에는 내가 감당해야할 인생의 무게가 이만큼이라고 하는 이 크기에 대해서 자매들이 잡는 크기가 매우 작아졌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워져도 그게 감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 크기를 크게 그렸습니다. 그래서 많이 고생을 해도 “엄마가 해야 한다.”는 이 예상된 크기 안에 다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이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여기서 강사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고 본인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엄마가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정신의 크기가 매우 작은 사람이 무리를 해서 모든 것을 다 시도하고 난 다음에는 감당이 안 되서 우울증도 오고 신경쇠약도 오고 육신에 질병까지 나타납니다. 그러나 정신의 크기가 크면 그것들을 감당해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그 정신의 크기를 키운다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그냥 정신의 크기를 막연하게 키우지만 우리는 그 정신의 크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길러내고 기본적으로 남편들이 아주 열심히 가사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아내와 37년을 함께 살았고 마지막으로 말다툼을 한 것은 22년 전입니다. 살아오면서 제가 잘 한 것은 별로 없지만 이런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보, 양말 어디 있어?”, “내 와이셔츠 다려놓았어?”, “이거는 왜 없어?”, “손수건이 없는데?”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내도 매우 바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아내에게 신세를 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분이 워킹맘일 경우에는 남편이 훨씬 더 많이 도와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이 집안에서 어린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줄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웃으신다.”, 아멘? 갓난아이가 없으셔서 기저귀 갈 일이 없으시니까 저렇게 큰 소리로 아멘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 3) 이번 질문은 제가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책에서 나온 것처럼 정신적, 육체적, 영적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부부의 대표적인 모델이 있을까요? 이 질문은 그 다음 질문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인 줄 알고 살고 있는데 살아보니까 이 사람에게 가정폭력도 있고 아주 안 좋은 기질도 있고 외도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내 남편이기 때문에 또는 하나님이 짝 지어주었다는 것 때문에 참고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나요? 이런 상황에는 부부가 같은 집, 같은 방을 쓴다고 해도 외로운 느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3) 우선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남편이 외도를 했다. 아내가 외도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중대한 혼인해지사유가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상대방 즉, 피해를 당사자가 혼인의 해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적으로 허락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만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아주 엄격한 신앙을 추구한 사람들이지만 굉장한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결혼을 했는데 성 능력이 안 되는 경우에는 교회에 보고를 합니다. “우리 남편은 성적으로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내가 너무 욕망이 커서 만족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고 보니까 심각한 결함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사실 심리를 하고 이혼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현대적으로 적용하자면, 그때는 별로 없었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있을 경우에도 이혼이 허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상습적인 폭력의 습성이 있을 때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같은 경우에는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적인 질병도 심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일방적으로 모든 것의 귀책사유를 본인에게만 돌리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약물중독이나 이런 문제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혼이 허락되는 것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살다보면 결혼하고 첫날부터 서로에게서 결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는 사랑 여하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면서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그와 상응하는 배필을 지으리니”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배필”이라는 말이 “에제르”인데 히브리말로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요,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로다” 할 때의 그 “도움”입니다. 원래 이 에제르는 응원군입니다. 전세가 기울어질 때 달려와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응원군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결혼제도를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그 제도의 의도는,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창조하셨지만 남자와 여자를 각기 다른 성향의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로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더욱이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보완관계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결혼을 해서 살아봅니다. 엄청나게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고 해서 뭐든지 다 해 줄줄 알았는데 4박5일 밖에 안 가고, 뭐든지 다 해준다고 해서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결함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자의 경우에 돈을 벌 능력이 없어서 정신없이 돈을 쓰는 것이나, 남자의 경우에 경제 개념이 없거나,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사랑은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게 합니다. 내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다가 아내에게서 어떤 결함을 발견하게 되면 “이 여자에게 이런 결함이 있네? 아, 만약에 나를 안 만나고 살았더라면 자신도 잘 모르는 저 결함 때문에 얼마나 힘겨운 인생을 살았을까? 하나님께서 저 여자가 혼자 살았으면 해결되지 않았을 저런 결함을 나에게 보충해주라고 나를 부르셨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의 결함 속에서 이 세상의 어떤 남자도 공유하지 못한 독특한 소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결혼 생활에서 무슨 결함 때문에 이혼을 하거나 깨지는 것은 그 결함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크기 문제입니다.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사랑에는 이런 특성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없어집니다. 서른 살에 만나서 연애를 하는데 어려서 얼마나 상처받은 가정에서 외롭게 자랐는지를 울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받았던 상처와 가정의 폭력을 이야기 합니다. 나이가 서른이면 18년이나 지났지만 마음속에서는 한 아이가 아빠에게 매 맞고 혼자 빈 방에서 엎드려 울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것이 가슴을 찢으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 그 자체가 영원, eternity 의 모상이기 때문에 사랑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은 영원하다고 하는 의미가 유행가 가사가 아니라, 단순히 everlasting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간을 넘나드는 특성이 사랑 속에 있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내가 먼저 죽은 후에 이 사람은 내가 죽고 나면 내 도움이 없어서 많은 문제를 안고 살고 결혼도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노년을 떠올립니다. 나는 지금 죽어 가는데 내 아픔과 슬픔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두고 가는 내 남자친구가 외롭게 살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누구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먼저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 식은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동안에는 항상 다른 식으로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했는데 그 뜻은 사랑하면 나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성향이 우리 안에 있으면 모든 일들을 해석할 때 나쁜 쪽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렇게 나쁜 기질이 있고 가정폭력도 있지만 사랑하면 그게 얼마나 저 사람을 아프고 힘들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척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닌 사람이 와서 새벽마다 기도하러 오는데 한 마디도 기도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어느 날 내가 기도하고 있는데 저에게 와서 “목사님, 저 안수기도 한 번 해주세요.”, “왜요?”, “하여튼 지금 기도해 주십시오.” 하길래, 가서 손을 얹고, “뭘 기도해 드릴까요?” 하니까, “얼른 이혼하게 해 주세요.” 합니다. 그 기도를 목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뭐라고 하고 기도하고 보냈습니다. 알고 보니까 남편이 술, 상남자였습니다. 별로 훌륭하지도 않은데, 직장은 그저 그런 곳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남자 행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이 이혼하게 해 달라고 새벽마다 와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문이 열리겠습니까? 근심과 걱정이 꽉 차 있는데 오기로 새벽기도를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첫 번째 변화가 자기 남편이 너무 가엾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별로 사랑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자분이 퇴직을 하고 나서 곧바로 중풍에 걸렸습니다. 하반신이 마비가 된 상태인데 그 부인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목사가 심방을 가서 보면 끌어안고 볼을 부비고 난리입니다. 꼴불견일 정도로 말입니다. 사랑이 그렇게 해석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날 상대방에게 정색을 하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고쳐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모든 답은 결국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심하십시오. “내 인생에 한 번 만난 이 남자를 사랑하고 말리라!” 뜻을 세우십시오.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가 되실 줄로 믿습니다.
질문 4) 책 내용에 보면 친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혼서약을 하시고 연금으로 아이를 케어 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그 아이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나중에 커서 되돌아봤을 때 아버지의 그 헌신과 희생이 얼마나 귀하고 존경스러웠는지 느끼게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아버지를 더 사랑하게 되고 말입니다. 현재 이혼한 가정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본인이 만족하기에 많은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이 이야기처럼 부인이 가정뿐만 아니라 부인 자체도 아름답게 가꾸어간 사연이 있는데 요즘 이혼 가정들에서는 아이와 시간을 같이 가질 수 있는 시간도 없고 아이의 형제를 돌볼 수 있는 부분들도 없는데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런 가정에 자기 자신의 삶과 아이의 삶,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와 이런 가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답변 4) 이게 사실 제 친구의 이야기인 실화입니다. 다 헤어졌지만 아버지가 군인이셨는데 아주 높은 군인은 아니고 소령, 중령쯤 되셨을 것입니다. 부인이 외도를 해서 가정에서 떨어져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셋이나 있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을 교육을 해야 하는데 아침도시락부터 시작해서 그 아이들을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대학까지는 못 보낸 것으로 압니다. 하나는 군대에 보내고 하나는 기술 쪽을 나가게 하고 그렇게 키웠습니다. 그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빠가 솥뚜껑 돌리면서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이런 것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리고 남자의 입장에서는 그때 연세가 한 40정도밖에 안 되었을 텐데 제가 보기에 그 형편에 결혼하실 수 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 이분이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강직하시고 섬세하신 분이어서 결혼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사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녀들이 불평도 많이 했는데 나중에 자란 후에는 아버지를 그렇게 애잔해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에게 이런 사연을 강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결혼한 아내와 남편들이 너무 쉽게 제2의 인생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가정을 너무 쉽게 깨뜨리는 요인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가정폭력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그것을 참고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잡아 놓고, 병원이든 어디든 넣어 놓고 그 다음에 얘기를 하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 가정을 깨도 나에게 제2의 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아주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끝나고 보면 그렇게 된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풀숲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희귀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너무 가볍게 그런 꿈을 꾸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든 것을 더듬어 들어가면 마지막에 결론은, 오래 참고 비록 내가 부모로부터,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않아도 그 사랑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을 불행하도록 내 인생을 뿌리부터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한다는 확고한 자기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인생은 어떻게 하든지 내가 살아내야 한다는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 저는 그런 것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이혼한 사람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고 결혼할 수 없다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쉽게 가정을 깨도 또 다른 인생이 아주 쉽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사랑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이 인생에 대한 문제가 결국 사랑의 문제로 귀착되는데 그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독교가 우리 인생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해결 방안인 것입니다. 대답이 되셨습니까?
질문 5) 5번 문제는 결혼 안 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인데 이 문제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특히 크리스천 청년들이, 아까 목사님처럼 스물여섯 살에 아버님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계기가 되어서 가정 내의 어떤 컴플레인을 해결하면 다행인데 결혼할 때가 되어서도 가정과 자기 자신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한 가정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교회에서 늘 들었던 가정의 모습은 굉장히 아름답고 서로 사랑하고 섬겨주고 그런 것인데 실질적으로 보았거나 보이는 가정은 사실 그렇지 않은, 깨진 곳도 많고 지지고 볶고 사는 그런 가정의 경우가 많아서 과연 내가 결혼을 해서 이 가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은 어떤 것인가? 하는 갈등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어떻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답변 5) 우선 (독신) 확고한 확신이 있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외모나 조건이나 이런 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주위에서 보면 외모도 좋은데도 결혼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사회성입니다. 처음에는 외모에 끌리지만 일단 끌리고 난 다음부터는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기쁨, 즐거움에 의해서 관계가 심화되는 것인데, 그런 능력이 현저하게 없는 청년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오실 날까지 번창 할 사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중매입니다. 그때 주식을 사 놓으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결혼이 잘 안 되는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도 훌륭한 인생의 한 삶의 양식이라고 인정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찾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일평생 결혼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커다란 결함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또 결혼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도 50살 넘은 청년이 결혼을 했는데, 기회가 올지도 모르고 혹시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몇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 둘째는 친구, 외롭지만 왜냐하면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결혼 사람은 남편이 있는데 없습니다. 그래서 셋째, 의무감을 가지고 운동하고 잘 먹고 건강을 체크하면서 건강하게 하고 넷째 경제적인 여유, 다섯째, 저축과 보장,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혼자 살아가면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희망적인 소명, 그 무엇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하루하루가 아직 결혼하지 못한 것이 그림자로 드리우지 않은 그런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결혼할 능력이 없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제가 보기에 교육을 따로 받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육을 받으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나아집니다. 그리고 가정을 이룰 때 존경할만한 선배나 목회자, 혹은 동료의 관계 속에 자기 가정이 있게 하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결혼을 해서 막 부딪치고 깨지면서 아프게 살아가는 가정을 보면 결혼할 생각이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것은 쓰디쓴 결혼 생활 속에도 달콤한 열매를 주셔서 그런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도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과히 나쁘지는 않습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질문 6) 자녀 양육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보면 가정의 모든 우선순위가 사실 자녀의 기준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자녀교육을 비롯한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 많은 고민과 기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고 내가 누리지 못한 좋은 교육도 아이에게 제공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과연 잘 하고 있는가 하는 고민도 함께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바람직하게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답변 6) 저도 아이를 길러본 부모로서, 사실 아직은 그 아이들이 하나는 결혼하고 하나는 안 했으니까 겸손하게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고 나 자신이 자녀 교육이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정도도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부모가 자녀교육으로 무엇을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묻는 것입니다. 자녀교육, 자녀교육 이야기하는데 자녀에게 무엇을 교육시키겠다는 것입니까? 진짜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 주어야 할 교육은 어떻게 인류대학을 갈 수 있는지 코스를 알아서 학교에 친목회도 다니고 학원비도 많이 들여가면서 가리켜서 사회의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자녀교육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경쟁사회니까 자녀교육의 일부는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설령 그 경쟁에서 살아남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그 이상입니다. 자녀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물을 때 부모도 자녀에게 해 주어야 할, 세상 사람들이 대신 해 줄 수 없는, 부모에게 위탁한 고유한 교육이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교육입니다. 물론 부모는 동일 조건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환경을 만들어주어서 경쟁사회에서 이기도록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고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경쟁사회에서 놀랍게 이길 수 있도록 승리자가 되게 해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마다 다 같은 조건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차피 우열이 가려지게 되어있고 winner 와 loser가 있게 됩니다. 어떤 때는 loser 가 되고 어떤 때는 winner가 되고 그런 것이 계속 반복되면서 우리 인생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형편이 닿는다면 좀 더 좋은 교육을 시키고 환경을 바꿔줘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좋은 길을 걸어가도록 돕는 것은 말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그것이 1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제가 열네 살 2개월 되는 해, 정확하게 중학교 2학년 때인데, 주일에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순간 슬픔이 하늘로부터 확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논둑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가난? 물론 그때 우리는 부자가 아니었고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할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울음의 원인은 질문이었습니다. 그 열네 살 2개월의 아이가 하늘 아래 나밖에 없구나 하는 외로움 속에서 피어린 오열을 하게 만든 것은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세상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 교회에서는 아무도 대답을 주지 않았고 교회 다니면서도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주일학교 선생님을 만났지만 나를 영혼으로 생각하고 나에게 다가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 일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매일매일 그냥그냥 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오늘도 사람으로서 살아야 되는구나.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은 어린 나이에 워낙 영특하셨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서 게임만 해요.” 하는데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틀렸다. 교육이라는 것은 그 아이 속에 있지만 아직 흘러나오지 않은, 밖으로 나오지 않은, 에듀카레(educare) 끄집어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이들에게 공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진짜 내가 어렸을 때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몸서리 쳐 지도록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매일매일 살아야 합니다. 그 아이가 저 깊은 속에서 흐느끼고 힘들어 하다가 하다가 해답이 없으니까 게임에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쾌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스터턴이라는 사상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너무 외로운 것입니다. 결국 부모가 자식을 교육한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에 태어난 나에게 이세상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신은 존재하는가? 이런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열네 살 2개월 된 아이에게서 떠오른, 통곡하게 만든 이 질문이 사실 인류 역사에서 철학자들이 제기했던 질문의 거의 전부입니다. 그 답이 나왔습니까? 답이 나왔으면 우리에게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답을 못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 앞에 한 인간으로서 고뇌한 구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그 교육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밥 먹어라. 밥 먹고 이빨 닦아라.”, “제 시간에 똥 눠라.” 이것은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참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부모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보기에 든든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목회해 보니까 이른 아침에 새벽기도에 오고 화장하고 직장으로 뛰고 밤늦게 들어오고 자기들이 챙기고 그렇지만 뭔가 엄마를 바라보면 든든합니다. 자기는 마치 쪽배를 타고 파도치는 바다 위에 찰랑거리는 것 같은데 엄마는 큰 군함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최고의 교육은 존재를 교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자녀에게 정말 교육해야 할 것들을 고뇌해보시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이고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성경에 배운 것처럼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대화 속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조금 가르쳐도 삶속에서 나타내야합니다.
질문 7) 저는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는데 아까 목사님 말씀하시면서 사랑하는 표현을 하라는 것을 들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모님도 있고 자녀를 기르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보면 자녀에 대한 어떤 생각과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부모에 대하는 생각이 약간 다를 수도 있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아프시고 여러 가지 상황이 어려워지게 되면, 그리고 가정 자체가 어려워지는 가정도 많고, 우리가 챙겨드리지 못하니까 요양병원에 맡기기도 하고, 최근에 보면 이런 가정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은데, 나이가 들면서 효도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크리스천 가정에서 부모님을 사랑하고 효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7) 어려운 문제입니다. 시계를 한 30년이나 40년 전으로 돌리면 집안에 할머니 같은 분이 힘든 일을 당하시게 되면 온 가족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니까 같이 희생하면서 그것을 맞닥뜨립니다. 사실 가족들의 삶도 많이 피폐해집니다. 이제 사회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런 가정의 문제를 국가가 어느 부분만큼은 책임지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핵가족 사회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많은 가정도 그렇고 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족을 생각할 때 엄마 아빠가 아닙니다. 가족이라고 할 때 아내와 자녀 이렇게 딱 끊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것을 부모에게 배워서 자식한테 자신도 짤립니다. 이게 좋은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한 번에 뒤집을 수는 없지만 가족이라는 의식구조를 같이 산다, 안 산다는 문제를 떠나서 가족이라는 의식구조를 부모,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의 자녀, 여기까지는 우리가 최소한 가족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현실적인 문제로, 부모가 언제 치료기간이 끝날지 모르는 질병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그럴 경우에 우리는 대부분 가정의 모든 리듬이 다 깨어지고 삶이 망가지면서도 우리가 온 몸으로 그 부모를 책임지고 수발해야 하겠느냐는 것은 각자 판단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나 항상 한 쪽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요양병원이 그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요양병원에 많이 심방을 다니면서 나를 그런 곳에 보내주길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런 곳에 보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이 원리에 의해서 부모님에게 어떻게 해드려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정신의 크기로 부모를 사랑할 수 없고 상처가 있고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상태라면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문제를 보면, 치매와 관련돼서 온 집안의 살림이 망가지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문제는 누가 이것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분이 어디에 있든지 가족들이 어떤 사람에 의해 요양원에서 보살핌을 받든, 기본적으로 가족끼리 애정이 얼마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자녀들이 부모를 생각하면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일들도 자녀들이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준비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질문 8)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시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답변 8)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