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구함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몬 1:19-20)
녹취자 : 오희열
사도바울이 자기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고백을 했지만 눈이 별로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 대필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에는 편지를 대필한 사람이 이름이 ‘더디오’라고도 나옵니다. 그래도 편지의 끝에 바울 자신이 썼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친필로 몇 마디씩 적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서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도 빌레몬서의 앞부분을 누군가가 대필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뒷부분을 사도바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친필로 적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갚으려니와”(19절) 무엇을 갚는다는 뜻일까요? 앞에서 얘기했던, 오네시모가 법을 어기고 노예였는데도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친 것, 그리고 도망쳐 나올 때 빌레몬의 집에 무엇인가 물질적인 손해를 끼친 것, 그것에 대해서 바울이 대신 갚겠다고 얘기한 뒤에 뭔가 다른 사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 그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9절)” 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에게 빌레몬이 부요한 사람으로서 물질적인 빚을 졌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이것은 결국 로마서에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랑의 빚일 것입니다.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그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해주고, 구원 얻은 그를 지속적으로 가르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그런 목양에서 오는 관계, 거기에서 사도바울이 빌레몬을 위해 양심의 구김이 없이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도바울이 빌레몬에게 “네가 내게 빚진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육신적으로 빚을 진 오네시모의 빚이 결코 빌레몬이 사도바울에게 진 영적이고 정신적인 빚보다 더 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깨닫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결국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사랑의 빚을 지면서 사는 삶입니다. 옛말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흐르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이 그것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정말 은혜인 것과 빚진 것이라는 것을 잘 기억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잊어버릴 뿐이지, 사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이런 사랑의 빚을 지며 살아오는 삶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믿음을 가지고 일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이런 더 큰 사랑의 빚, 그리스도 사랑의 빚, 하나님의 복음의 빚, 이런 것들을 지면서 살아오는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목회자로서 빌레몬의 신앙에, 빌레몬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 그리고 이렇게 평신도 지도자로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베풀고 기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그것을 빌레몬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고,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기를 구하지만 그것이 바울에게 진 신세 때문에 빌레몬이 억지로 하는 것이 되게 하지는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기의 문제입니다. 빌레몬이 사도바울에게 빚진 것을 생각하여 오네시모를 용납하는 대신 하나님이 빌레몬을 어떻게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기억하면,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복음적 내용이 이 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사도바울이 빌레몬에게 베푼 많은 은혜 때문에 빌레몬을 압박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빌레몬에게 압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이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하셨으니 또한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치고 나쁜 일을 행한 오네시모를 용서해 달라고 복음을 믿는 빌레몬의 인격적인 신앙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는 너그럽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 전체가 끊임없이 관계를 깨뜨리고 원수를 맺으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런 모든 관계들을 오히려 좋게 만들고 변화시킬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신앙의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이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경험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사랑의 빚을 지거나 나쁜 짓을 하더라도 주님께 자기가 받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주님이 자신에게 베푸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현재적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지각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거나 악을 행한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그러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자기도 사람이니까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용납함에 있어서 자신이 빌레몬에게 베푼 어떤 사랑이나 섬김, 이런 것을 담보로 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 진 사랑의 빚을 기억하라”는 복음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 빌레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화목한 모든 사람들이 당신과의 화목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화목이 이루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과의 평화가 사람들 속에서도 이루어질 때, 위로는 하나님과, 옆으로는 사람들과 평화가 이루어질 때,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우리는 이 둘을 늘 분리하지만 성경을 이것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마음과 성품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시며 이 두 가지 계명을 하나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빌레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고, 자신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고, 빌레몬과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이 사람은 빌레몬에 집에 적지 않은 손해를 끼친 나쁜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이루어졌으니 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도 평강을 이루어 우리 모두 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과 화목이 있게 하자,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빌레몬에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방법입니다. 이 모든 노력은 오네시모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 사랑은 당연히 자기와 같이 죄인 중에 괴수인 사람을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구원해주신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죄인을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있었기에 이 사람을 이렇게 진심으로 용납하고 또 이 사람이 도망친 노예로서의 과거를 씻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동역자로서 얽매인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중재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죄를 지은 사람이, 동일하게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고 이러한 중보의 은혜에 덕을 입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함께 애쓰며 이것을 위해서 수고하고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목을 널리 퍼뜨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