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13번
요나를 가르치시는 하나님 (욘 4:4-11)
요나서의 결론 부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내리시기로 하신 재앙을 내리시지 아니한 것 그리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한 것을 보면서 심히 싫어하고 노하고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성을 내게 되었습니다. 결국 왜 그러면 요나가 하나님 앞에 무례하게 성내게 되었느냐 그래서 어떤 주석 가는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선교의 성과가 없을까봐 고민인데 이 사람은 선교의 성과가 너무 놀랍게 나타나는 것을 인해서 왜 하나님께서 내 선교에 이런 성과를 주셨냐고 불평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나도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요나만이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못한 모든 사람은 모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예가운데 하나가 있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밤에 함께 제자들과 떡을 떼고 식탁을 나누실 때에 거기서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에 관해서 예언하셨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내가 대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넘기어져 죽게 되리라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하니까 베드로가 살아난다는 것은 무슨뜻인지 모르니까 죽는다는 말을 듣고 있다 놀라면서 아니 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죽기까지 내가 당신을 쫒겠나이다. 그랬는데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잡혀 가시니까 도망을 가고 그러다가 또 가야바의 뜰에 가서는 내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가서는 대성통곡하고 통곡한 다음에는 다시 고기 집으로 바닷가로 가고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삶이 이어지는 것 이런 사람들이 바로 요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그 주석가는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모를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에 의해서 생각과 신앙이 체계가 잡히고 정돈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제일 대하기 어려운 삶이 누구이냐 하면은 열심은 있는데 정리가 안 된 사람들 좌충우돌입니다. 여기저기 가서 부딪힙니다. 오늘은 이렇게 생각을 하길래 다음엔 이렇게 대해주면 그 다음날은 저렇게 생각을 하고, 요나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은혜를 받고 정리가 안 된 사람들은 이렇게 혼돈을 일으킵니다. 오늘 요나가 그런 거거든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셔서 니느웨에서 말씀을 전했더니 말씀전하는 종들이 기대하는 바는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더 딱딱해 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뉘우치고 변화받기를 원하는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우주적인 회개가 일어나고 질적으로도 놀랍고 기도와 관련되고 긍휼을 기대하고 하나님 앞에 응답까지 받는 이런 질적으로 구별되는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데도 그것을 심히 싫어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정도가 어느정도냐 하면 하나님 앞에 따지듯이 대들 정도로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조짐이 보인다는 그 사실 때문에 혐오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화낼 이유가 무엇이 있냐 하고 물어보면 아마 이 사람은 할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 수준에서는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결국엔 편견이 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은 고넬료의 집에 집회가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보자기와 같은 그릇에 귀퉁이를 메고 거기에 각종 더러운 율법에서 먹지 못하게 되어 있는 더러운 곤충들이 거기에 실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먹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무엇이었냐 하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똑같이 긍휼히 여기시는 방법으로 복음의 혜택에 있어서 차별을 두지 아니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동일하게 다루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예언의 말씀이었거든요. 그런데 먹을 수 없습니다. 결단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사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동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때문이였죠? 왜 예수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실 때 마지막에 너희들이 핍박을 받을 터인데 그들이 이렇게 너희들을 핍박하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도라고 생각하면서 핍박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그것이 바로 편견 때문입니다. 그릇된 편견에 붙잡혀 있으니까 성내서는 안되는 일에 성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나님이 요나를 이렇게 까지 참아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것입니다.
평범한 상황에서는 통용될 수 있는 하나의 상식이 진리와 맞는 것 같은데, 또 다른 상황에서는 자기가 늘 자기의 생각 속에서 옳다고 생각되고 통용되는 그 진술이 어떤 상황에서는 안맞을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이 내가 알기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줄 알았도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가서 보니까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도 환란과 고생을 많이 당하더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 모순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중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는 이러한 초등학교 교과서 적인 신앙의 수준 가지고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가? 예전에는 고난을 받으면 은 모두 마음이 정결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수준 가지고는 또 다른 상황에서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편안히 살았는데 어느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정결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이 시인은 발견하게 됩니다. 아까 가지고 있던 신앙의 상식 가지고 서는 대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혼란이 일어 납니다. 혼란이 일어날 때 복 있는 사람은 오히려 나는 이해 할수 없으나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며 사는 것입니다.그것이 믿음이겠죠.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를 알까 하여 망루에 올라가서 하나님앞에 대면하여 서서 주님 직접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이러는 사람이겠죠. 그러나 신앙이 그 정도가 안 되면 은 73편에 있는 시인처럼 차라리 혼돈을 일으키는 게 낮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보니까 마음이 정결하면서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에 혼돈을 느끼는 게 낮다. 혼돈을 느낀다는 게 무슨이야기냐 하면은 자기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확신도 믿지 많은 왠지 이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음이 정결한 사람이 고통 받는 이 현실에 대해서 뭔가 대답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갈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잠시 영적으로 큰 혼란이 오게 되는 것을 73편에서 분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경우는 가장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들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다가 마음이 정결하면서도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보니까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결한데 어떻게 고통을 받을 수 있겠느냐 정결한 것 같지만은 아마도 너는 정결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욥기에서 나오는 욥의 친구들이 그런 닫힌 신앙의 세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수준에서 대학생의 고민을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라고 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들과 아주 유사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라고 하는 것이 물론 성경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시고 이스라엘을 해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대신하여 싸우셔서 징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이스라엘을 위하는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적용을 올바르게 시키지 못하면 은 가지고 있는 확신은 성경적인데 적용이 비 성경적이면 결과적으로 비 성경적인 믿음을 낳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측면이 있지만은 하나님은 거기에만 매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이야기한 성경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 이렇게 인정했던 성경이 또한 뭐라고 말을 하냐면은 누가 그를 알겠느냐 신묘막측하신 분이시다.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신 분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나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성경적인 측면이 있었지만은 그러나 적용시킴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상식에 매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내가 하나님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셔야 한다는 태도의 편견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사람들이 볼 때에 그런 상식을 성경적인 면이 있는 그런 상식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낮사옵니다. 라고 말할 때는 같은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신앙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장한 자기의 신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신념의 틀 속에서 움직여 주시기를 원하는 것 그 신념의 틀을 가지고 교회와 역사와 모든 것을 다 판단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도 그 틀 위에서 움직여야 하니까 이것이 종교적인 신념을 넘어서서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상은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비판을 받고 평가를 받고 새로워지고 거듭나고 정리되고 정결케 되어 지고 그래야 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네 생각이 잘못 되었다 말씀하시는데 차라리 나를 죽이지 읍소서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그가 신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 같은 것들을 올려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입학 면접을 하면서 제일 위험하게 생각되는 상황이 신념에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면접하는 시간 3분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면 교수가 물어보면 묻는 말에 대답하면 되는데 입에 침을 튀면서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신학교 다니면 안 그러던 사람도 그렇게 되는데 벌써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해서 솟구치는 기쁨과 소명감 때문에 그러는 순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자기보다 우월한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승인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욕구 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태도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성경을 읽을 때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말씀이 나를 고치시 옵소서 . 심지어 위필드 같은 사람은 주석을 읽을 때에도 무릎을 꿇고 주석을 읽었습니다. 그런 태도들이 다 사라져가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동의 받고 싶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자기의 상식과 자기의 편견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에는 상당히 헌신되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 같고 입만 떼면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지 주저리주저리 나옵니다. 그런데 편견입니다. 편견은 자기 의와 통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계속 하나님이 드러내 주시면 이런 요나와 같이 자신의 모습을 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2장에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쏟아지는 바닷물을 마시면서 미역줄기를 뒤집어쓰고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회개할 때 그 모습이 얼마나 폼 났겠습니까. 3장에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다시 입하고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걸어들어 갈 때 그 모습이 얼마나 대단했어요. 그러나 여전히 외모는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환경을 통해서 바꾸어 놓으셨지만 깊은 내면의 세계 속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바닷물에도 안 바뀌고 물고기 뱃속에서도 뒤집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저는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말씀을 제가 전할기회가 있었고 그는 들을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 특별히 상념이 많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무지 가운데 견고하게 하나님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훨씬 우위에 두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일생을 속아서 무지 가운데 살아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모릅니다. 교정되어지지 않습니다. 교정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인해서 아주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이야기 하는대로 예수그리스도는 패하고 흥함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뻐하는 것도 두 가지 인데 하나는 패하고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인간적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상식들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우실 때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확인을 받으면서 기뻐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한 측면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상당히 일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당히 동의 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쪽이 있으면 이쪽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집과 같습니다. 우주와 같습니다. 질서가 있습니다. 한 말씀이 한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체계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런 편견을 요나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보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요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신앙의 사람 이였습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요나를 생각할 수 없고 사명을 떠나서는 요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요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요나가 가지고 있는 편견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 때 그가 아무리 회개하고 아무리 뜨거운 열심이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과 병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가지나 두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맞을 수 있는데 들으면 들을수도록 하나님의 말씀의 윤곽이 들어나는데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합치하지 않을 때 그것이 올바르게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나를 버리고 그 말씀 앞에 무너지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은 결국은 반대의 결과가 오게 되는데 그 편견에 붙잡혀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의 태도가 똑같은 것입니다. 성내며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분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반기를 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요나가 이런 놀라운 일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체험이 얼마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바뀌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요나와 같이 짧은 시간에 파노라마와 같은 신앙의 다이너미즘을 경험한 사람이겠어요. 솟굳쳤다가는 물속으로 내려가고 물속으로 내려갔다 다시 성으로 들어가고 들어갔다가는 회개를 보고... 이런 커다란 변화를 온통 겪으면서도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삼년동안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을 가르치신 것은 주님 자신 이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희미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걸 가지고 지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들리는 이유는 지능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다른 생각이 너무 많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안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는 죽어야 된다. 인자는 죽어야 하리라, 내가 가야지만 보혜사가 온다. 내가 죽으며 다시 살아난다. 누차 이야기 했는데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잘못된 생각이 들어와서 편견이 사로잡히니까 이야기가 안 들리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가 이런 것들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만나서 소명을 받기 전에 쓸데없는 세상의 잡다한 지식들이 굉장히 잘못 입력되어 있었습니다. 잘못 입력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시고 그 큰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무너지지 않은 대표적인 선지자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르켜서 불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순종의 배후에는 물론 알면서도 그 아는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연약함 때문에 생기는 불순종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순종의 대부분의 원인은 신앙의 세계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검증하고 새로운 자기를 건축해 나갈 수 있도록 힘써서 말씀을 탐구하고 그리고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니까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저쪽 동편에 앉아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고 그늘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약 40일 동안 가까이 계속되었습니다. 40일 이후에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행하셨으니까. 이렇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할지도 모른다는 패역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성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너지면 자기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밖에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요나가 그런 편견 때문이기도 했고 또 하나 개인의 명애 때문에 그랬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죠? 40일이 지나면은 이 성이 무너지리라 그랬는데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안무너 지면은 자기는 뭐가되나?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이 사람은 만에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은 이 사람은 선지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지 몰랐던 것입니다. 선지자 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할 때도 전심으로 멸망되어져야 한다하는 열망으로 예언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멸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0일이 지나면 은 무너지리라고 한 선지자의 외침을 사용하셔서 내리기로 하신 심판을 멈추실 수 있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결국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되는것아닙니까 끝났대요. 하나님의 사명 앞에 완전히 깨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할 하나님의 이름보다도 자기의 이름과 명애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밖에 나가서 초막을 짓고 그리고 어떻게 망하나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 밖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니느웨성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했을 리 없죠. 마지막에 긴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선지자를 가르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급속하게 박넝쿨을 준비하십니다. 이 선지자가 평안하게 쉴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상대가 안 될 정도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타이르시고 설득하시기를 기뻐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선 생각이 고쳐져야 하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선지자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에 대해 선지자가 잘 받아들였는지를 성경을 읽어보니까 결국은 요나서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결국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요나와 정 반대되는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회의로 출발했지만은 마지막은 큰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박넝쿨을 만드셔서 시원하게 했는데 6절에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라. 쓸데 없는 것 때문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은 항상 중요한 것 때문에는 좋아할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요나서 전체를 보면은 요나의 감정체계를 보십시오. 보통사람하고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꼬브러지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담대히 타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러다가는 배에 타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고 생사를 걸고 씨름할 때 이 사람은 편안하게 자요. 그러다가 갑자기 인생모두 체념한 것 같이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해요. 막상바다에 던지우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니까 생각이 달라져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해서 거기서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신앙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 같더니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니까 말씀대로 담대하게 순종하는 모습으로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요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서 백성들이 회개하니까 싫어해요, 감정의 체계가 이상합니다.
불안정적인 감정의 체계가 그 사람의 인생을 주관하는 것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천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감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질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기질적으로 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민하지 않고 감정의 반응이 둔한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무슨 이야기 하나만 들으면 파르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기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기질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받은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기질을 평준화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고 인격적으로 많이 성화될수록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요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 성령에 의해 통제받지 못하는 그런 고삐 없는 망아지와 같은 감정체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도 불안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요나가 아주 작은 일을 인해서 기뻐합니다. 작은 일을 인해서 차라리 죽는 게 낮다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사소한 것을 인해서 기쁨이 솟구치니까 가치없는 사소한 것의 상실을 인해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죄인 속에 깃들여 있는 성령에 의해 통제받지 못한 그런 기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체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이 더욱 가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지 만은 그 사랑은 결코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 과 같은 솟구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논리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질서가 있는 사랑이며 우리에게 찾아오는 방식이 정해져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정서를 볼 것 같으면 예수그리스도는 무언가 꽉 찬 정서의 세계 속에서 사셨습니다. 때로는 분노, 깊은 슬픔, 뜨거운 사랑, 열렬한 기도, 복받치는 열망, 이런 것들로 가득 찬 삶을 사셨거든요. 그렇지만 언제든지 복받치는 정서가 논리를 파괴하거나 무너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이 그러한 방식의 사랑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넝쿨 하나가 생기자 뛸 뜻이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막 좋아하고 인생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릴 것처럼 뛰다가 뭔가 하나나가 자기의 뜻대로 안될 때에는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으로 대드는 잘못된 성령에 의해 통제 받지 못하는 정서의 체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기뻐했는데 하나님이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은 물론 요나가 뙤약볕 아래서 고생할까봐 초막위에 박넝쿨을 놓아주셨겠죠. 또 한편으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나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인격적입니까? 강압에 의해서 교정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군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집의 아이들도 3-4년 때까지는 때려서 교회가라고 하면 가능하겠지만 이제 머리가 크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말 잘 들어서 신앙생활의 모습을 갖추게 하는데 에 열심을 낼 것이 아니라 그가 진심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도록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는 타월한 지도력이나 무언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면 아이들을 기계적으로 잘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너 앞으로 그런 소리 한번만 더 하면은 다시는 물고기 뱃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라고 한번만 말했더라고 멈출 수 있을 거애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뜻도 모르고 그런 식으로 복종하는 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깊이 깨닫고 동의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람의 생각하는 수준이 너무 낮고 유치해서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수준대로 상대해 주시기 위해서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넝쿨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같이 신앙의 형제들끼리 대화 하면서 나는 주관이 뚜렷해 나는 죽어도 이런 것은 안 해 이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사실은 위험합니다. 자기의 의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만약에 하나님의 명령이면은 자기의 이름을 걸고 그렇게 맹세 할필요없습니다. 모든 말씀을 그렇게 지켜야지 어느 한 말씀만 그렇게 지켜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대부분이 성경말씀에 의해 입력된 것 보다는 자기의 선입견에 의해 입력되어서 자기 속에 맹목적인 신념들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구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신앙의 결단이 대단하다 이렇게 이야기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듯이 신앙에 있어서 신념은 똑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런 좋은 박넝쿨을 벌레를 보내어서 씹어 먹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해가 뜨는데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풍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습니다. 이 뜨거운 동풍이 이쪽지방에서는 아주 유명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뜨거운 열기를 담은 바람이 불면은 하루하루가 부는데 배추나 채소 잎이 말라서 누렇게 뜨는 것입니다. 크나큰 열풍이였습니다. 뜨거운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너무 혼광하여서 마지막에 죽기를 구하여 죽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 이다 이게 바로 죄인의 감정체계 입니다. 죽여주소서. 이야기 하는데 이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썩 좋지 않게 들리는 것입니다. 일생을 계속해서 하나님과 함께 한없이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인하여 이 땅에 사는 가치를 느끼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 죽여주시옵소서. 이것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 이다. 빌립보서에서 썼습니다. 빌립보서를 써내려 가는 정신이 그리스도 때문에 한없이 행복하고 기쁜상황속에서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언제나 심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결단이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서 신앙적인 결단을 동반한 죽음의 간구라기보다는 불만족에서 오는 간구 입니다.
그러니까 자살은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사옵나이다 하는 아주 중요한 고백입니다. 결국은 그런 죽음들은 하나님을 향한 극도의 반항이며 불순종입니다. 우리속에 있는 죄성과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십시오. 죽어야 겠다는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보다는 불순종하며 죽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인 속에 깃들여 있는 이 죄성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자살은 어떤 식으로든 미화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죽는 것이 나으니 이다. 이 고백을 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진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가로되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 하나아다. 신앙이 한번 잘못 나갈 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무서움을 갖는 것이지 한참 곁길로 나아가면 막가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처음에는 교역자들이 심방하면 미안하게 생각하다 계속해서 연락하면 막보는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가 유사한 경우입니다. 어찌 합당햐냐? 하면 즉시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주여 모르겠나옵 나이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옵소서. 이정도로 나가야지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속에 불만족이 가득 차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와 함께 놀아주는 친구가 아닙니다. 요나는 지금 친구도 이렇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을 따라서 행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편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성경보다 위에 올려놓거나 그 편견을 더 집착할 때 저는 묘사하기를 잘 못된 편견은 불순종을 양성해 내는 기계입니다. 무엇을 입력하더라고 불순종이 양상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계가 이미 요나 안에 예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를 네가 박넝쿨 때문에 괴로워 하고 지금 죽겠다고 하는데 네가 박넝쿨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 있느냐 물을 준적이 있느냐 , 박넝쿨을 기른적이 있느냐 박넝쿨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이냐? 보아라 하루만에 생겨났다가 하루 만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박넝쿨은 영원히 없어졌다 그것이 바로 박넝쿨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가 이 하찮은 박넝쿨에 대해서도 이런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내 성품을 생각해 보아라 내가 얼마나 이 백성들에 대해서 애착과 애정을 가지고 있겠느냐를 보라. 니 편견으로 나를 제지 말아라 니가 나를 제면서 내가 이루고 있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거부하고 거역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네 마음속에 있는 이 백성을 향한 한 없이 솟아오르는 목메는 긍휼을 너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치 없는 박넝쿨과 하루밖에 밖에 같이 안지냈는 데도 지금 네가 박넝쿨 하나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낮사옵니다. 고백할 정도가 되었는데 이 백성들을 내가 영원 전부터 사랑한 백성들이다. 보아라. 그리고 이들은 범죄한 자들만 이 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분별할수 없는 쉽게 말해서 어린아이죠. 사람들이 이만명이다. 학자들은 대게 이 성의 인구가 최소한 60만명~80되었을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다 네가 그런 가치 없는 박넝쿨 하나를 그렇게 사랑했다면은 내가 영원 전부터 구원해야겠다고 택한 이 백성들을 향한 나의 연민과 사랑이 얼마나 내게 크겠느냐.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느냐. 결국은 선교사로써 가장 눈떠야 할 하나님의 기본적인 성품에 대해서 결국은 눈을 못 뜨니까, 요나 없이도 이루어진 선교가 되었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위해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크고 놀라운 위대한 니느웨 부흥이 일어 났을 때 하나님의 도구로 이곳에 보냄을 받아서 그 부흥이 오게 했던 장본인인 이 선교사는 오히려 기쁨을 잃어버리고 깊은 침체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 사명이 끝나서 다시 또 불순종의 길로 가야하는 이러한 불행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커다란 불행입니까.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 정리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라도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길 원하지 많은 그러나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도구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잠시 지체되는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 결국은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마는 것입니다. 결국 불행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커다란 구원의 뜻을 이루는데 동참할 수 있는 그 놀라운 특권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뜻과 성취되는 것과 함께 그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다들 불행한 사람들 입니다. 그는 마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 예언했지만 그러나 하나도 수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면서 부지중에 수난을 예언한 그러한 경우와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한 껍질이 굴러다니는 신앙생활을 우리가 한다고 하면은 참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체를 통해서 두 번째로 정리 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방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벌써 2600년 전 이야기 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벌써 이방의 나라를 위한 위대한 구원의 계획들, 그리고 구원계획에 관한 하나님의 뜨거운 열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가장 수준이 낮고 형편없고 정돈되지 않고 엉터리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훌륭히 이루신 사실을 보면서 역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 손안에 달려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에 있어서 성취된 모든 위대한 결과를 보면은 사람을 높이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울이 선교역사상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을 공부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그 바울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주목해야 할 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을 통해서 사용하시지만 인간은 영원해 하나님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도구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해서 사용해 주실 때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 선지자가 호세아나 아모스 이런 선지자 같이 수준 높은 선지자가 아니고 하박국과 같이 그렇게 놀랍게 마지막에 가서 정돈되고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지식으로 나간 선지가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던 이 우둔한 선지자를 사용하셨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남김없이 다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고 물을 때 대답할 수 있는 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은 기필코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요나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기여한다면 결국은 요나도 기여했습니다.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방선교사의 대표적인 선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다면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겠지만은 그러나 개인에게 있어서 너무 불행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소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명이 완수 될 때 기뻐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졌을 때 오히려 낙담하고 죽어야겠다고 혀를 깨물며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야 하는 사람 만약 이 사람이 우리들이라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사용되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만을 보며 즐거워 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 한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말일에 너희들이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기적을 행하여 나이다 그렇게 말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말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전혀 모르노라. 하나님이 이 말씀은 교회에도 해주신 말씀입니다. 끊임없이 삶의 외관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거룩한 사역에 쓰여지는 것 같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처럼 경건하게 살고 하는데 결국은 요나와 같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너무 비참하고 불행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히려 바울과 같이 하박국과 같이 호세아와 같이 이사야와 같이 이렇게 쓰임을 받아서 마지막에 니느웨 성이 완전한 구원이 일어 났을 때 사람들이 와서 40일이 지나면 망한다고 하더니 하나님이 놀라운 구원을 베푸셨잖아 그랬을 리가 없어요.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으면 오늘밤에 당신의 영혼을 거두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은혜 받고 생명을 연장받았을때 다가와가지고 설교자에게 죽는다며, 나 살았는데.,.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메츄에디 같은 사람은 요나가 아마 니느웨성에서 상당한 존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저도 거기에 동의 합니다. 40일 후면 하나님이 니느웨를 무너뜨리리라 할 때 모두 베옷을 입고 엎드리어 눈물을 흘릴 때 오직 누구만을 바라봐야 했겠어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데 하나님은 요나를 누구를 통해서 당신을 보여주시니까 요나가 상당히 높이 여김을 받았을 것임에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석가의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그런 모든 융숭한 대접과 교재하기를 원하고 그들가운데 있기를 원하는 모든 요구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동쪽으로 나갈을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요나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할 때 그때 진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했다면 자기 말이 틀리는 것 같은 것이 무슨문제가 되겠어요.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니느웨성에 일어나는데 그러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며 이방의 백성들과 함께 손을 붙잡고 여호와의 이름을 높였을 때 그야말로 의가 비처럼 내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겠느냐 , 동풍이 무슨필요가 있고, 초막이 무슨 필요가 있고 벌레가 무슨 필요가 있고, 박넝쿨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그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며 주님이 나타내신 그 위대한 구원을 통해서 이방의 모든 나라들이 오히려 그것을 보고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 그저 티끌일 뿐임을 알게 되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더라면 은 얼마나 위대한 선지자로써 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만 사용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셔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마지막 증거자가 얼마나 훌륭하게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요나서 공부를 마치면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은 홀로 일하실수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실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불안전하고 미완성인 인간, 편견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보다는 그 편견을 붙잡고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홀로 일하실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의 그 도도한 물결은 흘러가지 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 된 성품을 고치고 편견을 바꾸고 그릇된 생각을 고치고 깨닫게 하시고 인격적으로 설복하시고 마음속에 열망을 주시고 바꾸셔서 결국은 기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동참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함께 기뻐하고 주님이 슬퍼하실 때 함께 흐느끼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졌을 때 주님의 이름을 함께 높이면서 그렇게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서가 여러분에게 주는 마지막 도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