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부활주일설교 (2013.03.31 주일오전) 예수 부활과 우리 생명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장사 지낸바 되신 이튿날은 안식일이었고, 그 다음날은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되려면 아직 미명인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넣기 위해 무덤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도달했을 때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고,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치워버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 울기 시작했고, 그때 천사는 “너희가 어찌하여 여기서 우느냐?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하여 죽은 자 중에 찾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이 여인들은 기독교 역사상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이 여자들은 십자가 아래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고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과 함께 역사적인 사건이지 우리의 소망을 투사한 신화적 사건일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힘은 역사성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고 이것을 본 증인들에 의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해석되어 교회를 든든히 붙들어 주는 신앙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복음 때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복음을 위하여 영원 전부터 택정함을 입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II.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A. 하나님 아들의 선포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성격의 부활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선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을 때부터 어린 아이를 거쳐 성년이 되어 공생애를 사시고 마지막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신비로운 사실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부인할 수 없도록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를 꿈꾸는 야망에 가득 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의 지파의 족속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변호하고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이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거짓된 신앙의 도를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허망한 풍설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순수한 유대교에 불결한 누룩과 같은 존재라고 믿었고, 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다메섹으로 가서 그들을 잡아 가둘 책임을 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남에게 들었다면 부인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그분과 대화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 청년의 지성 속에서는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라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고, 하나님이 살리실 사람이라면 저주하셨을 리가 없는데 둘 다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뵈오며 그의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암흑처럼 캄캄했던 그의 지성이 찢어지고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부활의 빛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신 것이 사실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인류의 죄 때문에 대신 당하신 고난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구원하실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려내실 이유가 너무나 분명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매달린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은 순결한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자 사도의 마음속에는 의심할 수 없이 나사렛의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부터 눈멀게 하였던 두 가지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사렛 이단자 예수는 결코 메시야일 수 없다는 신학적인 편견이었고, 또 하나는 유대인 이외에 모든 인종들은 쓰레기 같은 족속들이요 가치 없는 인간들이라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유대인만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을 위한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시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사랑이 유대 민족을 넘어서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골수 유대교 분자였던 이 사람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소명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거룩한 확신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세계와 인간의 존재의 의미, 인생의 목적과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의 지혜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선포에 사로잡혀 복음 전파를 위한 사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선포되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인정받는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의심할 수 없게끔 온 세상에 선포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의 의미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를 깨닫고 다른 하나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미 깨달은 하나의 깨달음도 온전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의미를 알았다기보다는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가르쳐 준 수많은 음모 어린 편견들의 비늘이 벗겨지고, 그들의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도록 어떠한 사실보다 웅장하게 모든 사람 앞에서 선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B.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으니”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이후로부터 모든 인류에게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죽음이 덮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산 죄의 삯이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의 보편성은 모든 인류를 삼켜버렸고, 죽음에 있어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살아나심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되셨던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의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사단과 정세와 권세의 모든 능력을 무장 해제시킨 사건이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단이 가지고 있었던 최고의 카드가 무효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카드는 바로 죽음이라는 카드였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지만 죽음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두렵게 할 권한은 마귀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 죄에 굴복하고 종노릇하였습니다. 인간들이 오늘날 허무하게 인생의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는 수많은 몸부림도 결국은 죄의 결과로 인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사단과 정사와 권세의 마지막 히든카드인 죽음의 공포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게 되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교회론적인 해석으로 이해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몸인 우리들이 접붙여져 있습니다. 머리이신 그분이 죽음을 이기고 육체로 다시 살아나 죽음을 무력화시키시는 놀라운 일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육체의 죽음을 모두 극복하거나 이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죽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죽게 됩니다. 불순종하던 사람도 죽지만 은혜 많이 받은 사람도 늙고 병들고 마지막에 죽어갑니다.
그러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죽음을 깨고 살아나심으로서 사단이 손에 들고 인류를 자기 종으로 부릴 수 있는 마지막 히든카드가 무력화 되어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비록 죽어도 다시 살 것이라고 하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지 않고 사단을 무서워하지 않는 수많은 인류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육체로 부활하신 놀라운 사건은 겨우 첫 열매였습니다. 이제 그분의 머리에 접붙여진 우리의 몸이 모두 함께 육체의 죽음에서 부활하여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하고 불멸한 육체로 다시 태어나게 될 영광스러운 날이 마지막 심판 때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육체로 부활하신 사건은 마지막 날에 주의 호령 소리와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우리의 육체의 완전한 부활의 위대한 보증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이었고, 이 부활은 우리에게 내세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마귀에게 순종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더 이상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자들이 아니요 부활의 소망을 가질 자들임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C. 거룩한 성령을 통한 부활
세 번째로는 거룩한 성령을 통한 부활입니다. 본문에는 매우 어려운 구절이 하나 나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4절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성결의 영으로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3절을 보십시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눈에 띄는 것은 ‘으로는’이라고 하는 두 개의 전치사입니다. ‘육신으로는, 영으로는’ 이 두 개가 짝을 이루고 동일하게 이 육신이 예수를 가리키는 것처럼 영도 예수의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육신으로는’은 희랍어 성경에 ‘카타 사르크스(κατά σάρξ)’라고 나오는데 “육신의 몸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육신은 태어난 것이고 영은 부활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은 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의 영이 부활했다고 하는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러면 ‘성결의 영으로는’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이 성결한 영이기 때문에 이 표현을 썼다고 말합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은 죽은 적이 없으니 부활하셨다는 표현은 어떤 식으로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영어 번역본들이 이 희랍어 본문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할 수 없이 글자 그대로 번역하고 말았습니다. 글자 그대로 번역을 하면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육신을 따라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영을 따라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원어에 충실하면서도 현대 언어 감각을 잘 반영한 신뢰할 수 있는 영어 번역 중 하나가 “New International Version”입니다. 저는 영어 성경을 찾는 사람들에게 “New International Version”을 많이 권합니다. 실제로 제가 신학대학원 다니던 시절에 거의 20개 정도의 성경 번역을 놓고 그리고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를 1년 동안 대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영어 성경이 두 권이 있었는데 “King James Version”과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였습니다.
NIV 성경은 이미 오래전에 나왔고 2011년도에 그동안 미진했던 것들을 학자들이 새롭게 더 밝혀서 최신 번역의 개정판을 내놓았습니다. 그 개정판에서 이 원문의 의미에 가장 근접하도록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 성경에 의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As to earthly life” 즉 “지상에서의 생명에 관해서 말하자면 다윗의 혈통으로부터 태어나셨고”, “through the holy spirit”, “거룩한 영을 통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저는 이 번역이 원문의 의미에 신학적으로 비평학적으로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성결의 영으로는”이라는 단어를 희랍어로 ‘카타 프뉴마 하기오수네스’(κατὰ πνεῦμα ἁγιωσύνης)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직역하면 “거룩함의 영을 따라서 혹은 거룩함의 영을 좇아서, 거룩함의 영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이 됩니다. ‘거룩함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사람의 고유한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의의 사람’이라고 하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 아직도 이러한 표현 방식이 남아있는데 ‘of + 추상명사’는 형용사입니다. 히브리어에 ‘이쉬 엘로힘’(vya !yhil~a)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쉬’(vya)는 ‘남자 사람’이라는 뜻이고, ‘엘로힘’(!yhil~a)은 ‘하나님’입니다. 직역하면 ‘a man of God’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번역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 혹은 경건한 사람이라고 통상 번역을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성결’이라고 하는 말은 의미를 벗어난 번역이고, ‘거룩함의 영을 통하여, 거룩함의 영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으니 이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셨다.” 이렇게 번역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에 있어서 성령의 주도권을 의미 깊게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기를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었는데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처음 육체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될 때 그 생명의 형성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육체가 파괴되고 죽어버렸을 때 다시 육체에 생명을 부여하여 두 번째 육체를 갖게 해주시는 일도 성령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시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겠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정말 부끄러울 정도로 잘못된 번역입니다. ‘운행하다’라고 하는 것은 버스 같은 것들이 노선을 따라서 시발점에서 종착점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운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되는 단어 ‘운행하시니라’고 하는 ‘메라 헤페트’(ְרַחֶ֖פֶת)라는 단어는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닭이 알을 품고 이것을 덮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감싸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독수리가 작은 둥지 위에서 거대한 날개를 펴고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 펄럭거리는 동작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보다 훨씬 커서 수면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감싸 안아 있는 상태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세상의 창조가 이루어지고 인간들이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자신의 책 속에서 세계와 인간이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창조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생명을 주는 창조의 사역에 첫 번째 관여하신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물론 이 창조는 삼위일체의 사역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도적으로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역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부활도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 사도가 4절에서 밝히고 있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몸에 접붙여진 교회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육체가 다시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머리이신 그분과 운명을 같이하는 몸인 교회도 언젠가는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몸의 부활의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교회의 행복한 운명을 이 성경 구절이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특권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지금 우리는 예수처럼 몸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하나님 정하신 때로 유보되어 있습니다. 유보되어 있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서 바라만 보고 기다려야 할 부활은 아닙니다.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소망을 위한 보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잘하거나 재능이 있어서 어느 회사에서 여러분을 스카우트했다고 합시다. “3개월 후에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함께 일합시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만 하고 가버렸습니다. 나는 3개월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다른데서 좋은 취업 제의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스카우트하려는 회사에서 상당한 돈을 보증금으로 줍니다. “이게 계약금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3개월 후에 당신을 채용할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이것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더 쉬운 비유를 하나 들어봅시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매달 벌어서 매달 쓰면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달 조금씩 부어서 목돈으로 1억을 마련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100만원씩 아마 8년 정도 부으면 1억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작정을 하고 어려운 생활에 매달 100만원씩 적금을 부었습니다. 자신에게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매달 은행에 모두 갖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달 은행에 돈을 낼 때마다 은행에서는 통장에 도장을 찍어줍니다. 이것이 보증이 됩니다. 여기에 받은 직원의 이름도 있고 지점장의 싸인도 있습니다. 그들이 해고 되거나 이동을 하거나 혹은 은행이 이사를 간다고 할지라도 이 통장은 8년이 지나고 나면 1억을 나에게 줄 것이라고 하는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활의 보증을 하나님이 교회에 주셨는데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육신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만약에 그때 우리가 죽어 있으면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상태에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전망에 대한 보증으로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매순간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제가 야왕을 애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두 번 남았습니다. 이제 내일 하고 모레 하면 끝납니다. 지난 주 화요일 편이 재미있었습니다. 최근에 그렇게 눈여겨본 드라마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어떻게 저렇게 악랄할 수 있을까? 대선 후보를 협박해서 결국은 강제로 혼인 신고에 도장을 찍게 합니다. 결국은 영부인이 됩니다. 법적으로 남편이 된 대통령은 이 여자를 꼴 보기도 싫어합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나오는 대사가 이것입니다. 팔짱을 끼고 법적인 부인에게 “이제 임기가 끝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5년 후에도 더 이상 우리가 부부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내 인생에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랬더니 이 여자가 “물론이지요. 5년만 내가 이 지위를 누리고 5년 후에는 당신을 자유롭게 놔 주겠습니다. 대신 5년 동안은 역사상 최고의 영부인이 되겠습니다.” 최고의 영부인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이 여자가 사람을 죽이고, 남편도 버리고 딸도 버리고 허황된 영광을 쫓아서 범죄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웹툰을 통해 전국에 퍼져나갑니다. 이 여자를 존경하던 시선이 의혹으로, 의혹의 시선이 이제는 무엇인가 파헤쳐봐야 할 비밀을 가진 나쁜 여자라는 인상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스스로를 구출하기 위해서 더 악한 일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줍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인간이 멀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체의 생명이 결핍된 것이 아니라 육체는 젊음이 넘쳐나고 생명을 지니고 있어도 영혼의 생명이 사라졌을 때 죽음의 기운이 어떻게 한 사람을 뒤덮어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수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이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곤고한 일이 많고 심경이 괴로울 때 예배당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까? 불 꺼진 조용한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나의 아픈 가슴을 주님 앞에 쏟아놓습니다. 좋으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우리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고, 복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오히려 사랑하며 살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내하도록 해서 결국은 부르심을 완성해가는 놀라운 은혜의 작용이 예수 생명의 작용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죽었던 우리를 끊임없이 다시 살리고 다시 살리는 부활로 나타납니다. 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부활이 바로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예수처럼 우리의 육신도 미래에 함께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지복의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보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거룩한 성령을 통한 부활이고, 오늘 우리는 그 부활의 어떤 측면들을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부활의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D. 능력으로 이루어짐
네 번째로 이 부활은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으니”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인데 예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부활이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무효화시킨 생명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도처에 넘치는 죽음의 기운을 보십시오. 육체의 기운은 활기차고 넘쳤지만 영혼은 죽었기 때문에 죽은 행실을 하면서 그렇게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의 죽음을 무효화시킨 생명의 능력은 죽음의 힘보다도 강한 것이었고, 그것은 곧 사랑의 능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 유대 종교 지도자의 명망 있는 삶을 꿈꾸던 야심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나서 그의 인생관에 혁명적인 변화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목표가 종교 지도자가 되어서 명망 있는 삶을 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것,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그분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 그분이 구주이신 것,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면 부활의 권능은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앎이었고, 이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2000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고난의 신비를 배워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장 심오한 지식이었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분골쇄신하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의 신비를 배워갔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의 깊이를 더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헌신의 삶이야말로 예수가 누구신지를 아는 첩경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무위도식하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와 함께 사는 부활의 능력과 비밀이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위도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예수를 위해 섬기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해 자기를 버려 헌신하는 현장적인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 죽은 자 가운데 살리는 부활의 위대한 능력의 권능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신앙의 진보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 부활은 예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예수처럼 다시 사는 일은 종말에 보증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어주신 생명과 성령을 통해서 죽음의 기운들이 극복되고, 죽은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면서 운명처럼 여기고 있는 인생의 실패에 익숙해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최고의 재앙은 도전과 모험이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비참함입니다. 무한한 예수를 다시 살리신 무한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죽은 자와 방불한 나의 영혼을 살릴 수 있고, 지옥 같은 인생의 고통에서 나를 건지실 수 있을 것이라는 생명에 대한 소망을 잊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은 자신을 능력으로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이런 신적인 생명의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고난과 슬픔과 좌절을 이기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영광스러운 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이 고난 주간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고난 주간에는 뜻을 세우고 심각한 질병에 시달려 죽음과 싸우고 있는 지체들을 심방합니다. 이번 주간에도 여러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조금 아픈 것은 불편할 뿐입니다. 그런데 의사를 찾아갔는데 “선생님, 주변을 정리하시죠. 2개월 남았습니다.” 할 때,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으니 편히 쉬시다가 운명하십시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이 없다면 그 선고 앞에 우리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정말로 놀랍습니다. 제가 심방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체는 우리보다 비참한 질병에 처해 있지만 영혼은 우리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내일 죽을지, 다음 달에 죽을지, 혹은 몇 달 더 있다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매순간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을 붙듭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렇게 죽을병에 걸린 것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불행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자원이 아닙니다. 생명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 능력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살리신 것은 그 아들에게 접붙여진 또 다른 아들인 우리들도 그렇게 살려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우리의 주가 되심
A. “주”(kyrios)의 의미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그리스도는 무엇이 되셨고,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바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주’라고 되어 있는 ‘퀴리오스’(κυριΟζ)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우리의 주가 아니셨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전에도 예수님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위임을 받아 온 인류와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다른 해석입니다. 예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당신을 대신하여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여호와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경배 받도록 해주시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의 어떤 분들은 또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퀴리에’ ‘주여’ 혹은 ‘주님이시여’라는 호칭이 수없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도 주님으로 인정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퀴리오스’라는 단어는 그 당시에 신적인 경배의 대상에게만 사용되는 종교적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상전이나 존경할만한 선생님, 혹은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대부분의 호칭은 관습상 불러준 호칭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 때 ‘주여’라고 부른 것을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할 때는 분명하게 그 ‘주’가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주’라는 호칭은 여호와 하나님께 고정된 호칭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에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공생애 기간이 아니라 부활하고 나서부터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주’라는 호칭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이라고 부르면 그것은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신학적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세 이름이 나옵니다. ‘야훼, 엘로힘, 아도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이 됩니다. 이 세 단어 중에서 ‘야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입니다. 애칭이나 태명, 별명, 아이디, 이런 것이 아니라 호적 등본을 떼면 나오는 법적인 이름입니다. 우리 존재의 고유한 이름이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름인데,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함이 ‘야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사실 의미하는 단어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을 합니다. ‘야훼’라는 것도 사실은 정확한 발음인지 아무도 확신을 못합니다. 이 이름이 너무 거룩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을 필사하다가 이 이름이 나오면 붓을 씻어서 ‘테트라그라마톤(YHVH (IHVH))’이라고 하는 네 글자로 된 하나님의 실명을 썼고, 감히 부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위대한 사람의 이름을 쓰고, 읽을 때는 ‘그 분이’ 이렇게 읽는 것처럼 읽었습니다. 그래서 ‘야훼’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라고 가장 근접하게 추측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녀 교육상 포로 이후 시대에 1년에 한 번씩 자녀들에게 이 이름을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말해준 다음에는 십계명을 어긴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한 계명을 어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비에 감춰진 이름이 ‘야훼’입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에게만 게시된 이름이었지만 ‘엘로힘’은 모든 사람에게 게시된 이름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다음에 나옵니다. ‘아도나이’라는 이름은 ‘주, 주인, 지배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지배자이시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과 주인 됨을 강조할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야훼’라는 이름을 쓸 때 ‘야훼’의 자음을 쓰고 모음은 ‘야훼’라고 안 붙이고 ‘아도나이’에 모음을 붙여서 ‘야훼’라고 쓰고 읽을 때는 ‘주님’이라고 읽었던 것입니다. 그 ‘주님’이 여기에서 ‘퀴리오스’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높아지신 것이 얼마나 우주적이며, 야훼 하나님을 향한 공경과 경배가 그리스도께 향해지도록 만든 사건인지를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독론은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여기까지는 계속 낮아지시는 기독론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사 만물을 그 발아래 무릎 꿇어 그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고 할 때 그 ‘주’가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아도나이’, ‘야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온 땅과 우주를 주관하시고 인류를 주장하시는 위대한 통치 주로서 하나님께 높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곧 ‘건져낼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가 인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기름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로서 그분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C. “주되심”에 복종함
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주가 되셨다고 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우리의 생애의 목표와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나의 모든 불행과 죄로 말미암은 비참은 나를 주인 삼고 나를 임금 삼으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결과는 죄였고 죽음이었고 비참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참함과 죽음을 우리가 짊어지는 것을 보실 수가 없어서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우리의 주가 되셨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는 새로운 인생의 길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너희를 주인삼아 하나님과 대적하며 불행한 처지에서 비참하게 살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너의 아도나이, 주인임을 알고 그분 앞에 복종하여 경배하며 삶을 살아 너를 인간으로 창조한 목적을 이루어 내 앞에 행복한 자들이 되라.”는 것이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신 것의 신학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은사를 받았느냐,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느냐, 심지어는 내가 정말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것 같다고 하는 느낌과 신기한 경험이 있느냐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거듭나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참 나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주님 앞에 복종하며 그분을 아도나이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없다면 누구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는 완전해져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전에는 우리의 주인이 나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앞에 복종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당신을 믿는 모든 자녀들에게 영원한 몸의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40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요 죽은 자는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예수처럼 다시 살게 되는 것이 종말로 연기되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보증을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에 죽음의 기운이 엄습할 때, 나에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 같을 때, 주님의 은혜와 진리를 구해 보십시오. 조용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바라보고 죽음의 위협에서 나를 살려달라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놀라운 영혼의 생명을 우리 속에 부어주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순간 우리를 부활하게 하셔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사랑으로 이기게 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도록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