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설교 (2011.9.11 주일오전) 무엇으로 감사할까 1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레 7:12) |
I. 본문해설
중추가절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때가 되면 한 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감사하며 조상에게 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며 이웃들과 함께 인심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없었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경의를 자신의 조상들에게 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 있기 때문에 이처럼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모든 은덕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알지 못하는 조상에게 올려드렸던 우리의 모든 공덕들은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합니다. 되돌아보면 올 한 해 만큼 복잡하고 어려움이 많았던 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권은 시종 불안했고, 유래 없이 쏟아진 물 폭탄으로 많은 수재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나앉는 일도 있었습니다. 큰 흉년이 들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하나님이 올해도 곡식과 많은 과실들을 두루 여물게 하셔서 먹고 사는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돌봐주셨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어려움 속에서 우리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주 주저앉지 않고 나름대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II. 화목제의 규례
중추 감사절에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무엇보다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 본문에는 화목제의 규례가 등장합니다. 이 화목제는 히브리말로 ‘쉘렘’(!l,v)인데 이 말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샬롬’과 어원이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도 자신과 자신의 이웃들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안녕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의 화목제에는 크게 세 가지 제사가 있었는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올리는 감사의 제사였고, 서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올리는 서원제가 있었습니다. 가슴 벅차는 감격적인 일이 있거나 누구의 강요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을 때에 올리는 낙헌제, 혹은 자원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화목제는 개인적으로만 하나님께 올렸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공동체적으로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오순절과 같은 명절 때 이 화목제를 국가적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국가의 큰 경사가 있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헌신하는 마음으로 온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화목의 제사에는 레위인은 물론, 빈부나 귀천 없이, 노비들까지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함께 참여하여 제사에 공여되었던 음식들을 함께 나누며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한 가족임을 확인했습니다.
III. 감사로 드릴 제사
A. 기름 섞은 무교병
본문은 화목의 제사에서 하나님 앞에 올려야 할 제물에 어떤 것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일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제물은 세 가지로 나오게 되는데, 첫 번째가 기름을 섞은 무교병입니다. 기름을 섞은 무교병, 기름을 바른 무교병, 고운 가루로 빚어서 구운 전병, 이렇게 특별한 재물이 등장을 하는데 세 제물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기름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올려지는 기름 섞은 무교병도 기름을 섞어서 반죽을 지어 만든 종류의 떡입니다. 그 떡은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외식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자신의 명예를 높일 의도로 짐짓 선한 모양을 꾸미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름 섞은 누룩 없는 무교병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정이 넘칠 때 주님 앞에 올바로 감사하는 첫 번째 제물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꾸밈이 없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예물이요 헌신인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 가식들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진리의 기준들이 사람들에게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덕목이 되지 않고 오늘날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진실하다, 꾸밈이 없다, 정직하다’라고 하는 것들은 더 이상 덕목이 아닙니다. 세상이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선교할 기회가 더 많아졌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꾸밈없는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고,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더 잘 알아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룩이 없는 떡, 외식 없는 순수한 신앙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활기에 넘치는 생명력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그렇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며 건강한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을 북돋을 수 있는 교육과 문화적인 여가와 예술, 이런 것들을 향유하면서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안정되게 해주셨습니다. 실로 한 해 동안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들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가 겪었던 모든 나쁜 것들 중에 주님이 직접 주신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주 앞에 드려야 할 첫 번째 제사는 꾸밈이 없는 진실한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올릴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반듯하고 박수칠만한 아름다운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면 차라리 버림받고 깨어지고 상처 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정직하게 드려진 사람보다 나을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을 우리에게 숨길 수 있지만 우리가 어찌 당신에게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 알려졌고 감추어진 것이 없으니 우리가 고백하지 않은들, 주께 드러나지 않은 무엇이 있겠나이까?”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어떠한 허위와 외식에도 속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우리의 자의식 속에서 그렇다고 고백할 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야 할 가장 훌륭한 제물은 꾸밈이 없는 순수한 신앙입니다. 다윗은 범죄 했고 어느 때보다 불결하고 더러운 영혼이 되었지만, 바로 그때 하나님 앞에 올려야할 최상의 예물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 속죄의 번제를 올리고 싶어 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었으니 많은 제물이 그의 수중에 있었고, 제사장 중 누구에게 명령하기만 하면 즉시 왕을 위하여 제사를 봉헌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주님께 올릴 최고의 예물이 바로 상한 심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는 번제를 기뻐하는 분이 아니시니 그랬다면 제가 이미 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바였던 것입니다.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합니까? 주님께 올릴 최고의 예물은 여러분 자신이 순수한 신앙으로 그 은혜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꾸밈이 없고 거짓과 가식과 형식주의가 아닌 내면의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신앙을 보여드리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감사절에 받으실 최고의 제물입니다. 이 제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B. 기름 바른 무교병
두 번째는 기름 바른 무교병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이라고 되어 있는데 ‘바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마솨흐’(hv'm)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메시야’라는 명사와 같은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마솨흐’는 ‘기름 붓다’라는 뜻이고 ‘메시야’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름 부음 받은바 된 떡’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름을 겉에 부은 것입니다. 만들어진 떡 위에 기름을 부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윤리적인 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깥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나는 부분이 하나님의 법에 맞게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두 가지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오디오로 들려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비디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비디오가 나오는데 오디오가 나오지 않는다면 답답할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저녁이면 귀 기울여 듣던 라디오 연속극을 지금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디오로 들려주는 것이 바로 사상, 신학, 성경지식, 교리,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철저히 무장해서 사상에 빈틈이 없는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이번에 교리반을 350명을 목표로 모집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가지고도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교인이 450명 늘었는데, 350명을 해도 절반 이상은 교리반을 못하는 것입니다. 교리반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을 교인이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참새가 전깃줄에 앉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17년 동안의 목회 경험은 교리반을 성실하게 수행한 사람 중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이 매우 적고, 성실하게 교리반을 수료하지 않고 견고하게 신앙생활을 한 교인도 매우 적더라는 것이 17년 동안의 우리의 목회의 경험입니다. 목회자들은 교리반을 수료하지 않은 사람들도 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전깃줄에 앉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든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의무는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것만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이번 교직원예배 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철학자이신 강요한 박사님이 오셨습니다. 함께 교제를 나눴는데 그분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이 교회 모토가 ‘스투데오 에르고숨’이라면서요?”라고 묻습니다.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뜻입니다. 먹고 소화시키고 먹는 순간 즐거워하고 소화시켜서 힘을 내고 배변하는 것은 짐승들도 하는 것입니다. 짐승보다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맛있게 즐기고 짐승보다 더 깨끗한 집에서 살고 짐승보다 더 고급 변기에 배변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하면 그는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히 배우라고 주님이 머리도 주시고 정신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간으로 만드신 목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것은 짐승의 행복이지 사람의 행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죽는 순간까지, 마지막 죽기 전까지 눈 뜨고 의식이 살아있는 날까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철저히 배워서 “나는 이렇게 믿을 수밖에 없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다.”라고 사상이 확고하게 선 것이 기독교의 위대한 힘입니다.
또 하나는 윤리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듣고 싶으니 이야기해보라고 우리에게 시간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3일 여유를 줄 테니 기독교 신앙과 사상에 대해서 전해달라고 기회를 주지도 않습니다. 오디오는 상당히 많은 경우 틀지도 못하고 들고만 다닙니다. 그러나 비디오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보고, 보기 싫다고 안 보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뚜렷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뒤에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덕 운동이 지향하는 윤리와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윤리가 다른 것은 이것입니다. 도덕 운동 속에서 강조하는 윤리는 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한 윤리이지만 우리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존경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일 뿐이고 우리는 또 다른 왕국에 속해서 그 왕국의 통치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이 윤리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속해 있는데, 그 나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율법과 복음으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서도 합당하지 않게 살면 벌이 있고 책망이 있으며,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종종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의 법과 세상 나라의 법이 충돌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 세상 나라의 법을 가차 없이 버립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를 통치하는 보다 더 완전한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복종하기를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윤리적인 삶의 힘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삽니다. 속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자기가 만족을 얻는 것이지만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표는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지식을 삶으로 표명하고, 이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담대하게 살되, 그렇게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손해나 박해를 받거나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윤리적인 생활이 기독교의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기독교가 힘이 있습니까? 사상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아주 미개한 지식을 가지고 자신이 옛날에 겪었던 몇 가지의 체험이나 신념에 신앙을 걸고 생활을 하는데 사상의 힘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이익과 충돌하면 언제든지 이 정도의 사상은 버릴 수 있고, 심지어는 세상의 세속적인 사조에 의해 용해되어 버립니다. 윤리적인 힘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가치를 기독교적인 가치와 섞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이제는 누구도 진실이든 진리이든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굳게 붙들고 고난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미국을 갔습니다. 바쁜 시간에 잠시 틈을 내어서 시카고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에는 인문학 서적으로 미국에서도 정평이 있는 대학입니다. 책을 꽤 샀습니다. 그것도 부족한 것 같아서 좀 책을 싸게 살 요량으로 골목에 있는 중고 서점에 들렀습니다. 많이 사지는 못하고 1000불 정도 책을 사서 패킹을 해서 보내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디로 보내야 되냐고 묻기에 한국이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놀라냐고 물어봤더니 그 사람이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 달 전, 상당량의 책의 주문이 들어와서 책을 모두 패킹하고 미국에 있는 고객들에게 보내는 것처럼 송장을 넣어서 함께 보냈답니다. 당연히 송장을 받고 받았다는 연락과 함께 입금을 해줄 줄 알았는데 화물은 한국에 도착한 것이 확인이 되었는데 여러달이 지나도 돈도 안 주고 아무런 연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왜 한국 사람들은 너절한 삶을 살아서 세계 방방곡곡에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먹칠을 하고 국가의 위신에 손상이 가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사정이야 있을 것입니다. 책을 받은 사람이 갑자기 해고됐든지 아니면 죽었든지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신학교 전체가 지진이 일어나서 땅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것은 개인이 주문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한 것일 텐데, 그러면 누군가는 받았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답변을 하고 받은 상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직원들이 늦장 부리다가 공사비나 임금을 한 달씩 늦게 주면 저는 항상 야단을 칩니다. 야고보서를 봐라. “저희의 품삯이 소리를 지르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아주 어쩔 수 없는 경우에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즉시 돈을 줘야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원칙 아닙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 집에 가서 일을 했더니 두 달 만에 어음을 끊어줬는데, 교회에 오니까 즉석에서 입금을 해주더라. 할 수만 있으면 교회에 가서 일하고 싶다.” 그렇게 되어야지, 한 번 거래하고 난 다음에 “세상에 책임지는 인간이 없는 것이 교회구나. 정말 매력 없는 거래처가 교회구나.”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너무 화가 나고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사람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데 꼭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정말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돈을 대신 내주고 싶었습니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 정권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몇몇 교회들에서는 이승만 독재 정권의 타도를 외치는 설교를 주일마다 퍼부었습니다. 그 중 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는 올라가서 이 정권의 부도덕함과 독재적인 만행에 대해 규탄하고, 온 교인이 저항권을 가지고 궐기하여 이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쳤습니다. 강단에는 밝은 빛이 환하게 비취고 있었고 그 전깃불은 계량기를 통하지 않고 들어온 도전(盜電)이었다고 합니다. 도전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바깥에서 전기가 들어오면 계량기를 통해서 집안으로 분배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전기세가 너무 비쌌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기세가 비싼 게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가난해서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매일 전기세 내는 문제를 가지고 싸움을 하고 그랬습니다. 교회 강단에 비추는 전깃불을 계량기를 통하지 않고 도전을 해서 불을 환히 밝히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독재정권을 타도하라고 외쳤으니 그게 어디 하나님 앞에 가당키나 한 삶입니까?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행복해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십일조 하는 것 외에는 세상에서 추호의 손해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끊임없는 타협과 협상을 가져오고, 비굴한 굴복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윤리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추루한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최근의 역사 가운데서도 나라와 함께 일어났던 굵직굵직한 추문들과 끔찍한 사건들의 앞 뒤 옆에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윤리의 표준들이 그러하니 보이는 비디오로 사람들이 알게 되는 기독교가 얼마나 지저분한 기독교이겠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지구를 떠나면 이 세상의 인간들은 훨씬 행복해질 것이라고 울부짖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디오가 꺼진 것이 사상적인 무신론이라면, 비디오가 꺼진 것은 실천적인 무신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부정직하게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수시로 뇌물을 먹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정권에 들어서서 자기들끼리 결탁을 해서 모두 해먹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의 연줄을 놓아 정치적, 행정적으로 어떤 이익을 보고 있을 때,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이 느끼는 박탈감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까?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는 서슴없이 교회에 다니는 공직자들의 힘을 빌어서 교회의 일들을 처리하고, 비록 뇌물이 오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교회의 편을 들도록 사람들을 지시합니다. 신앙으로 맺어진 영적인 관계를 세상의 목적을 도모하는 관계로 사용하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친분관계 속에서 만난 금융계, 정치계, 사회계 인사들과 밧줄처럼 엮어져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것들이 자기들끼리는 성도의 교제요 하나님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관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볼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결탁해서 법질서를 훼파하고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개독교의 전형적인 구태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형제는 감정사였습니다. 감정 평가를 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어느 도시에 내려갔는데 꽤 큰 물건이었습니다. 그 감정의 가격을 10%만 올려주어도 대출이 몇 백억 좌우될 정도 큰 물건이었습니다. 사장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묵고 있는 여관에 찾아와서 무릎을 꿇더랍니다. “감정사님, 나를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이 부동산을 은행에 걸고 대출을 받아서 회사를 살리려고 하는데 감정사님의 감정에 따라 이 회사는 살 수도 있고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방에서 너덜너덜한 만 원짜리 100매 묶음을 10개씩 묶은 두 덩어리, 1500만원에서 2000만원 되는 돈을 신문지를 싸서 앞에 갖다 놓더랍니다. 그래서 형제가 말했답니다. “얼마나 어려우시겠어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감정을 해서 회장님 회사가 살아나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회장이 눈물이 글썽거리면서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가져가십시오.” “아이 왜 그러십니까?” “저도 돈이 좋고 이거 가지고 가면 쓸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세요?” “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거든요. 제가 예수만 안 믿었더라면 벌써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뇌물을 바치고 탈세하고 부정직하고 거짓되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고 출세하면, 이 비디오를 세상 사람들은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살던 사람이 성경 찬송을 끼고 교회에 오는 모습은 그 사람이 교회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주일에 술집에 갔더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가 예수 믿는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오디오가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삶을 사람들이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제 3의 힘이 있는데, 이것은 은혜의 힘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힘이 은혜의 힘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난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성도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을까요?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게 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가슴 쓰라린 감격으로 다가올 때, 그의 마음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습니다. 절대 순종.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합니까?
(찬양)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그 은혜 이기리
이 마음입니다. 어린 유년부, 주일학교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같은 마음입니다. 그 외의 마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왔을 때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무엇이 여러분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지 그 장애물을 치우십시오.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십시오.”라고 목회자가 목 놓아 외치는 이유가 은혜 없이는 이 둘을 연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 윤리의 힘,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은혜의 힘입니다. 이 두 개는 사람들에게 들리고 보이는데 은혜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힘과 자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릅니다.
이슬람만 욕할 필요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어린 아이와 여자는 무시당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일어나기 바로 전, 우리 교회 지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갔습니다. 한 시간 반 차이를 두고 아프가니스탄 인질 납치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하고 가서 온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그곳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밝히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그곳에 있는 아이들을 일주일 동안 돌보았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날, 그곳 부시장이라는 사람이 우리 모임에 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도 잘 돌보아주지 않는 어린 아이들을 사랑으로 따뜻하게 돌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저 사람들 속에 있는 사랑이 어디로부터 온 사랑인지 궁금합니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로 부터요.”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열린교회 여러분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든 봉사하고 싶다면 언제든 여러분을 받아줄 것을 엄숙히 약속 합니다.”라고 보증을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비디오입니다.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때 우리가 드릴 최상의 제물은 기름 부은 바 된 무교병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된 윤리적인 삶과 생활,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C. 고운 가루로 빚어 구운 전병
세 번째는 ‘고운 가루로 빚어 구운 과자’라고 그랬는데 이것이 사실은 전병, 케잌입니다. 이 특별한 전병은 곡식을 갈아서 만듭니다. 가늘게 빻거나 절구로 찧은 가루를 체에 칩니다. 그리고 남은 곡식은 더 빻아서 더 가느다란 체에 내리고, 그 곡식은 다시 빻거나 갈아서 더 가느다란 체에 쳐서 내리면서 가장 부드러운 곡식의 가루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기름을 넣어서 빚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기 깨어짐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슬러 살던 죄인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기 의가 깨뜨려지고 자기 사랑에서 깨뜨려져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깨어짐이야 말로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의 제물입니다.
여기에 기름이 빠지지 않는 것은 성령이 빠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한하고 영이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과 교제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중재자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고운 가루로 빚어진다고 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 깨어짐을 의미하고, 깨어진 위에 기름이 부어지고 주인의 손에 반죽으로 들려져 주인이 원하는 대로 빚어져 본래의 형체를 잃어버리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떡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뜻을 예수를 이용해서 성취하려고 하고 자기의 뜻에 하나님을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신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듭니다.
(찬양)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나의 뜻을 다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반죽이 되면 주님이 우리를 빚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기뻐하는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빚어진 전병은 불에 구워짐으로써 하나님 앞에 바쳐질만한 제물이 됩니다. 오늘 집에 가시면 송편을 빚으실 것입니다. 좋은 반죽에 맛있는 소를 넣었다고 할지라도 익히지 않고 생 송편을 먹을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인의 손에 빚어진 전병은 불에 구워져야 합니다. 이것은 시련과 연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자기를 주 앞에 드렸던 사람, 자기 자신을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을 위해 바치면서 예수의 형상을 이루며 섬기며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 중 시련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라도로 집회를 내려갔었습니다. 책을 보급하기 위해 두세 명의 지체들과 함께 내려갔는데, 마침 저녁에 강의가 끝나고 올라오는 길에 군산 어디에 가면 아주 맛있는 횟집이 있다기에 오느라 고생했으니까 가서 한번 사 주마 하고 갔습니다. 찾아갔는데 명성에 맞지 않게 지저분하고 음식도 별로였습니다. 알고 보니 딴 집에 갔었던 것입니다. 큰 생선을 노르스름하게 구워서 쇠로 만든 접시에 올려서 내놓았습니다. 저는 구운 생선을 참 좋아합니다. 기름에 튀기지 않고 오븐이나 석쇠에 구운 것을 좋아하는데, 너무 감칠맛이 나보여서 젓가락으로 찔렀는데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밥숟가락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몇 달 동안은 구운 생선을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잘 빚어진 전병이면 뭐합니까? 익지 않았는데 구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입으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하면서 시련은 싫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마다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고난을 받겠다고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고백한 그대로 사는 것은 치열한 고난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납 될만한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성도들 중, 시련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환란과 고난을 겪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구워진 성도로서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믿음을 따라 윤리적인 삶의 표준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성도들은 그렇게 행동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지 복음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 큰 희생을 치렀는데 돌아오는 대가는 영광이나 박수가 아니라 모욕과 비난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윤리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같은 시련이 있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
불같은 신앙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주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신앙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윤리적인 생활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깨어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두 감사의 열매로 받으십니다.
D. 희생제물과 함께 드림
우리의 눈길을 끄는 성경 구절이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감사의 희생 제물과 함께 드릴지니라”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소제라고 불렀는데,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단독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는 없는 제사였습니다.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리는 동물의 희생제 위에 겹쳐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희생 제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죽임을 당하고 찢겨져 먼저 올려진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실 예표였습니다. 우리가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립니다. 윤리적인 생활로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올립니다. 나아가서 자기 깨어짐이 있는 회개의 생활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립니다. 이것들이 아무리 아름답게 드려진 제사라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순수한 신앙 자체나 윤리적인 생활이나 회개 자체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이루신 속죄 때문입니다.
IV. 은혜에 합당하게 살자
우리는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윤리적인 생활로 하나님께 헌신의 제사를 올리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 깨어짐에 참여하면서도 우리는 교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절기가 될 적마다 많은 감사의 제목들,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 앞에 올리는 희생의 제사는 소제일 뿐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원래의 기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소제에는 우리가 보탤 것이 있었지만 희생 제물에는 우리가 무엇을 보탤 수 있습니까?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에 우리가 보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줄을 알고 눈물을 흘릴 뿐이고,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에 목 메일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라고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회고할 때 사상에 대한 투철함과 윤리적인 삶에 대한 분명한 표준이 있어서 거기에 자기를 헌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체험은 대부분 자기만족적 영성으로 부패하거나 신비주의로 흘러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의미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V. 결 론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중추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하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 우리에게 베푸신 한량없는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감격을 가슴에 품고 순수한 신앙으로, 윤리적인 생활로, 깨어짐이 있는 회개로 주께 제사를 올리는 성도들이 된다면 주님은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여러분에 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