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게 살아가는 길
(2002-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7월 17일
목 차
1. 환경에 꺾이지 않는 섬김(단6:10) 2002.12.9 교직원예배 1
2. 하나님과 함께 강하여라(삼하5:10) 2003.1.2 교직원예배 11
3. 할 수 없는 상황에 굴복치 않는 신앙(막2:1-4) 2003.3.1 교직원예배 15
4. 물러가지 말라(히10:38) 2003.4.7 교직원예배 23
5. 만나가 싫어질 때(민11:4) 2003.10.13 교직원예배 27
6. 겉 사람은 후패하나(고후4:16-17) 2003.12.29 교직원예배 33
7. 환란 때 약해지지 않는 법(잠24:10) 2004.4.26 교직원예배 35
8. 마음을 믿지 말라, 마음은 곧 그 사람입니다(잠28:26) 2004.4.27 교직원예배 40
9. 말씀의 미각을 잃지 말라(민11:4-6) 2004.10.22 교직원예배 42
10. 견고함과 의지의 단호함(수1:7上) 2004.10.28 교직원예배 48
11. 물러가지 않는 신앙(잠1:32-33) 2005.4.12 교직원예배 54
1.환경에 꺾이지 않는 섬김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단 6:10)
환경이 좋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또 환경이 나쁘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면서 환경에 영향을 안 받는다고 그러면 그것은 거짓말이죠. 반드시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제아무리 출중한 신앙을 가졌어도 반드시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과 환경에 휘둘린다는 것은 다르거든요. 물론 성경은 종종 환경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탁월한 믿음의 사람을 가끔 이야기 합니다.
오늘 다니엘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그런 사람은 아니고 평범한 많은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을 받고, 또 그렇게 출중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거죠, 그런데 영향을 받는 것과 환경에 휘둘리는 것은 별개다. 별개다, 어,.... 나무를 심어놓고 사람이 나무를 심었으면 가만 내버려 두어야 되는데 자꾸만 와서 흔들어, 자꾸 와서 나무를 흔든다 말야, 그런 정도를 가지고는 나무가 죽지는 않아요. 그런데 나무를 뽑았다 다시 심었다. 뽑았다, 다시 심었다를 두 세 번만 하면은 그 나무는 죽는다고... 생존력이 떨어진단 말이죠.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 나무를 흔드는 것이라고 하면 환경에 휘둘린다는 것은 뿌리 채 뽑혀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그렇게 허락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죠
오늘 성경에 보니까 다니엘이 왕 이외에, 왕의 신상이외에 다른 신들에게 절하거나 기도하면 사람을 죽인다고 하는 그런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을 향한 동쪽 창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감사 기도했다 그 얘기거든요. 오늘 보니까 전에 행하던 대로, 그건데 사실 상황이 엄청 바뀌었거든요. 예전에는 기도해도 아무 문제가 안 되었는데 이제는 기도하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엄청나게 바뀐 거에요. 그런데 그 상황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전에 행하던 대로 행하는 거에요. 환경은 가만있지 않거든요, 작년의 환경과 올해환경이 또 다릅니다. 지난달과 이달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또 다릅니다. 만나는 사람도 다르고 사역을 하는 대상도 다르고 사역의 종류도 다르고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 마주쳐야 하는 어려움도 다르고 ... 이런거거든요, 이런 속에서 살아가는 거죠.
근데 목회를 하면서 봐도 전에 행하던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에요. 어려울 때 하나님 그렇게 찾다가 주님이 정말 복을 부어 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전에 행하던 대로 하면 오늘 받는 축복은 미래에 받는 축복에 그저 맞보기에 불과할 텐데 그렇게 안해요. 전에 행하던 대로 안해요, 교만해지고, 나태해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분수에 넘는 마음을 품고, 이렇게 되는 거죠. 또 모든 환경이 괜찮을 때에 신앙을 잘 하던 사람이 어려움이 오잖아요, 그 어려움이 와도 다니엘 정도는 안되더라도, 어려움이 와도 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해야지 하고 전에 행하던 대로 행하면 되는데 안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한결같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 몰라요. 사람들은 항상 현재 자기가 맡고 있는 그 일,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것 보다는 항상 미래의 일들을 꿈꾸고 생각해요. 그러느냐고 오늘의 일에 충실하지 못하는 거, 이런 것들도 전에 행하던 대로 행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반드시 우리에게 우리의 사역이나 삶에 어려움이 올 때에는 이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못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 (예화) 지금 카나다에서 목회하고 있는 제 친구가 있는데 아주 진실하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그런 친구가 있어요, 근데 야간 신학교를 다녔으니까, 나도 직장 다니고 그 친구도 직장 다니고, 그래 이제 늘 같이 다니고 했는데, 밤에 학교가 끝나면 빨리 집에 가서 전철 타고 가서 쉬는 게 최고인데... 야, 우리 기도하고 가자, 그래서 채플실에 내려와서 그 밤중에 기도를 하면 자기도 울고 나도 울고..,, 가만히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면은 이게 직장 다니면서 공부를 하려니까 공부를 할 수가 없는 거에요. 주의 일꾼이 되어야 될 텐데 아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에요. 근데 그 어느 날 아주 희색이 만면해서 왔어, 뭐 좋은 일이 있냐, 직장을 드디어 그만두게 되었데요. 하나님의 은혜구나! 무엇을 먹고 살려고 그러느냐고 했더니 후리랜서로 ..말하자면 회사가 필요하면 도와주고 한달에 한 1,200,000-1,300,000원 받기로 했대요. 그런데 전에는 그 친구가 한달에 7,80만원 받았어요, 거의 제가 전도사로 교회에서 받는 사례금에 10배정도 되는 금액이었어요, 81년도, 82년도에 80만원이었으니까 굉장한 돈이었죠, 펄펄 날 것 같애, 그러더니 한 서너 달 지나더니 아, 나 다시 직장 다녀야 되는가봐, 왜 그러느냐, 텔레비전 보는 시간만 자꾸 늘어났대요.
그러니까 어려운 환경에 있을 때는 주위의 어려운 환경이 자기로 하여금 무엇을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환경적인 제약의 요인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진정한 적수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고 바뀌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속에서 부패와 태만, 나태, 이런 것들이 정말 적인 줄은 모르는 거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환경이 사역자를 이렇게 사역자를 고사시켜서 죽이는 법은 없어요, 다시 반복 할께요, 어려운 환경이 사역자를 고사시키는 적은 없어요, 절대 없어요, 환경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이 부패성과 나태함,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도전하기를 싫어하는 그 소심함, 내지는 주님 앞에 새로운 목표와 계획을 향해서 싫어하는 안일함, 변화를 싫어하는 마음, 그리고 이제껏 익숙해져 왔던 편안한 신발과 같은 것을 벗지 않으려고 하는 그 구태 의연함, 더 어려운 것을 모험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 이런 것들이 결국 그 사람을 고사시키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상황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죠.
그런데 다니엘은 전에 행하던 그대로 했습니다. 전에 행하던 대로, 이 사건을 통해서 다니엘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바벨론에 끌려와서 포로로 끌려왔지만 결국에는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그리고 탁월한 영예와 영광이 뒤 따랐을 거에요, 그렇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그가 진짜 섬긴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입증이 되었지요, 예루살렘을 향해 낸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감사 기도했다고 그랬는데, 만약에 조서에 어인이 찍힌 그 다음날 창문을 열고 기도하다가 첫 번째 발각이 되었다면 한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댓가로 자신의 부귀와 영화와 지위 그리고 마지막 자신의 생명까지 댓가로 지불해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개의치 않았다 이거죠, 무슨 얘기냐 하면 그가 그렇게 화려한 영광으로 고관대작의 지위를 누리고 살았지만 그가 티끌만큼도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그가 오직 사랑하고 그가 전심으로 섬겼던 분이 다리오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변화된 환경 속에서 좋은 신앙의 이 자세를 흐트려뜨리지 않고 계속한다는 것은 그가 정말 누구를 위해서 사는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죠, 항상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도 환경의 영향을 받죠, 어떤 때는 낙심 될 때가 있죠, 성도들도 늘어나지 않고, 회심은커녕, 좋은 신앙 가지고 잇던 지체들이 자기 교구에서, 자기 부서에서 미끌어져 가는, 생각지도 않던 어려운 일들이 펑펑 터지면서 자기를 곤고하게 하면 영향을 받죠, 어떤 때는 낙심도 되고 그리고 가슴이 아프고 그리고 어떤 때는 아, 정말 내가 무능하구나, 그런 것도 느끼고, 그래서 좌절도 되고, 그런거죠, 영향을 어떻게 안 받겠어요, 강철같은 사람은 정말 없어요, 영향을 받고, 그런 것이 인간인데 그런 영향을 받아도 거기에 휘둘려서는 안되죠, 할 것 못하고, 그리고 그냥 그 상황에 짓눌려가지고 헉헉대면서 주저앉아서 엎드려있으면 우리가 지도자일 수가 없죠, 지도자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휘둘려서는 안 되는 거죠. 여러분의 사역 속에도 한 상황이라는 것이 수시로 바뀔 거에요.
지금은 여러분 각자 판단할 때 지금은 나의 사역의 상황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정말 감사하다, 이런 분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또 반대로 정말 어려워졌다. 그럴 수도 있을 거에요, 아무리 돌아보아도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요인들은 없어 보이고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고 낙망시키는 그런 요인들이 많이 부각되고 떠올라요, 그러면 낙심되고 가슴 아프고 그렇죠,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휘둘리면 안 된다 이거죠, 오히려 그런 영향을 잠시 받더라도 다시 떨치고 일어나서 그 상황과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요, 그래서 수많은 성도들을 지휘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이 목회자는 만신창이야, 진리를 따라 살았으니까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할 것이고 수많은 날아오는 화살들을 맞고 그것들을 또 뽑아버리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만신창이야,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그런 것들을 다 극복하고 상황에 매이지 않고 잠시는 영향을 받아서 거기 흔들리지 않고 떨치고 일어나서 걸어가는 그 비범한 삶 때문에 그가 지도자가 되어 가는 거죠, 되어 가는 거죠, 뭐
전도사는, 꼭 우리 교회 사역자를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이렇게 앉아서 밥도 먹고 얘기도 해 보고 .. 그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너무 약하다, 너무 약하다,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유약한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어요, 강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거에요. 그것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쇠를 풀무 속에 집어넣고 수 없이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달구는 것처럼 단단한 무쇠가 되는 것처럼, 무쇠는 두들기면 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져버리잖아요, 그러한 강한 쇠가 되는 것처럼, 지도자가 되려면 그렇게 강한 자가 되어야 해요, 이번에도 겨울 수련회를 하면서 그렇게 가슴 아팠던 것은 너무 약하다, 우리가,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인데, 너무 약하다, 환경에 너무 휘둘린다, 환경은 마치 아낙 자손들 같고 그 앞에 서 있는 여러분들은 그 낙심하던 이스라엘 자손과 같다. 그렇게 되서는 안 된다. 휘둘리면 안 된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다니엘이 보통 강한 것이 아니라 외침이나 호령이 없어도 그 어마어마한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전에 행하던 그 기도하는 그 모습 속에서 엄청나게 강한 폭발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런 폭발력을 가진 큰 아름다움 신앙, 강한 믿음을 여기서 고백하게 되는 거에요, 그것이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숱한 시련, 그 숱한 환란, 그 숱한 모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 속에서 모두 그런 시련과 환란들을 겪으면서 거기에서 전에 행하던 살려고 몸부림쳤던 그것이 이 사람을 강한 사람으로 만든 거에요,
이거 보세요, 상황에 휘둘려서 사는 것은 힘들지 않잖아요, 상황에 밀리는 대로 밀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힘든 것이라고요, 왜, 육체적으로는 그것이 힘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상황에 휘둘리면서 살면 그 상황에 휘둘리면서 산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그 영광에 그 무거운 죄의 짐과 주님 앞에 마음의 정함이 없이 살았던 그 무거운 하중들이 그 영혼을 짓누르는 거에요, 그러니까 상황에 휘둘리면서 살면 그것이 힘들지 않은데 그러나 힘들다 이거에요, 반대로 그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잠시는 영향을 받아도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걸어가는 그것은 쉽지 않잖아요, 낙심 될 때 절로 노력하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불평하고 투덜대는 거에요, 그리고 주저앉아 버리는 거죠, 한 가지만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내가 이 사역을 계속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은 없고 한계에 이르면 닫혀요, 정말에요, 내가 이런 사역을 계속해야 되나, 기도하다 이런 회의에 빠지면 한계에 이르면 닫힌다고요, 절대로 닫힌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그런 사역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자기가 맡고 있는 사역 전체에 재앙이에요, 그것은 믿음이 없는 거에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하면 안 되요, 절대로, 그래서 이 불타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여기에 세워 주셨으면 내가 전심으로 전해 행하던 대로 살면 나는 힘들어도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실 것이며 영광스러운 승리가 약속 되어있다. 이렇게 믿고 가도 쉬운게 아닙니다. 그런데 근원적인 것부터 흔들리는 거에요.
예) (예화) 어저께도 모여서 어느 목사님들과 얘기하니까 자기 선임자가 담임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사역을 했다는 거에요, 정말, 그러니까 뭐 한 7년 정도 만에 교인이 한 200명 되었으니까, 그것도 쉬운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장로님들이 아주 고달프게 하는 거에요, 예를 들자면 임직식을 하는데 목사님들 오시는데 사례금을 꼭 주어야 되는가, 그거 뭐 부패한 거 아니냐고, 뭐 우리 같았으면 자기가 개척교회인데 혼 구멍을 내고서라도 가르쳐서라도 하던지 할 텐데 목사님을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꿍꿍 앓다가 겨 어떻게 해요, 장로들은 돈을 안준다고 하고, 주지 말라고 하고, 당신 월급을 털어서 구두표를 사가지고 그것을 봉지에다 하나씩 넣어서 교회에서 주는 거라고 하면서 주더래요.
목회자가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니까 그 다음서부터는 목사님이 목회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버리는 거에요, 왜, 내가 이 교회에 있어야 되나, 일단 목회자가 그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구름처럼 쫙 가려지는 이 영성이 흐려지면서 하늘의 축복이 문이 쿵하고 닫히는 거에요, 하나님은 불타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거에요, 내가 여기서 목회를 해야 되나, 그리고 목사님은 교회가 성장도 안 되고 있어야 되나, 안 있어야 되나, 하다가 딴 데로 가셨어요.
그러니까 절대 우리가 마지막까지 확신에 불타야 되는 사람이 지도자에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요, 그 속에서 하늘의 문은 닫히고 여러분의 영혼은 거기서 서서히 고사되는 거에요, 차라리 그럴 경우에는 생명을 걸고 매달려요, 일주일 금식기도하면 되잖아요, 하나님 여기서 내가 사역을 해야 됩니까, 집어 치워야 됩니까, 하늘을 열고 집어 치워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집어 치우면 되고 응,.. 해라, 아멘.. 그렇게 태도를 분명히 하고 해야 된다 말에요, 전쟁을 하는데 이거 진짜 전쟁을 해야 되 이런 사람하고 반드시 무찌르고야 말리라 내 조국의 원수여, 하고 싸우는 사람하고 어느 군대가 이겨요, 이건 적수가 안되는 거에요, 근데 이 다니엘을 보면은 상황적으로는 이럴 수가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거에요, 우리에게 많은 상황들이 펼쳐져요 뭐 무슨 상황은 안 펼쳐지겠어요. . 그래도 죽을 때 까지 흔들릴 수는 있어요, 잠시, 사람인데.. 담임 목사인 나도 가끔 이렇게 사역을 해야 되나, 흔들릴 수는 있으나 그러나 뿌리 채 흔들려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보면 이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이 소망을 기도로 피력한거에요. 그러니까 잘 들어보세요. 지도자가 기도의 영이 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고는 이렇게 불붙는 확신으로 살수가 없어요. 지도자가 기도의 영성이 살아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불붙는 확신으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탄탄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어서 그것이 자신의 신앙을 자극해서 자신의 인격을 뒤흔드는 가운데 나오는 확신이 있을 때는 담대하고 강해, 그러나 그것이 없고 단지 자기가 강한 것처럼 길을 이야기하고 확신을 피력할 때는 항상 내면적으로 외치면서도 공허함이 있다고요, 외치는 내용과 외치는 자 사이에 분리현상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면은 마치 왜 큰소리 잘 치지만은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더 큰 소리치면서 ‘네가 뭔데’. 그러면 기가 팍 죽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하고 똑같아 지는 거에요. 탄탄하지 않으니까, 근데 그런 것들이 이 사역자들에게도 있는 거에요. 그래서 다니엘이 이런 극단적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이 기도의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엎드려서 그 임재의 영광의 빛을 가슴에 담고 얼굴에 바르고 나오는 사람은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있다고요.
그래서 설교를 할 때 저는 그것을 투피라고 말하는데 ( )타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어떤 명제적인 선포가 앞에 p라면 두 번째 P는 뭐냐 ( )이에요. 사람들을 설득을 해야 합니다. 맨 날 명제만 얘기하면은 완전히 물리는게 된다구요, 왜, 그 명제대로 살아야 되는지를 설득을 하는 거지요, 설득만 있고 그 다음에 ( )이 없으면 그럼 설교가 장황한 변명처럼만 들리는 거에요. 이 두 가지가 함께 섞이면서 절묘하게 나아가야 되요. 목회도 그런 거에요. 이 두 가지가 같이 나가야 되요. 합리적으로 사람들을 잘 설득을 해서 이해하게 해서 데리고 나아가는 것이 목회의 기본이지만 위기의 순간 어떤 때에는 전광석화와 같이 대안을 내 놓고 이거다, 이거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거다, 그리고 이 길로 가야 한다. 살고자 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매일 그러면 안되지만 가끔 위기에 처했을 때는 참모들을 모아놓고 회의하는 것 말고 뭔가 어느 날 지도자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대안을 가지고 나아서 이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그리고 갈 수 있는 그런 게 있어야 되는 거에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자기 자신이 믿음 속에서 더 깊은 이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을 때에 ( mind를 가지고 있고 자기 상황을 해석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뭔가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 중 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에스라 아니에요. 에스라, 에스라가 그 에서 소문이 들리는데 포로로 돌아왔는데 이것들이 율법을 어기고 온갖 죄를 짓고 말이지 사생아를 낳고 생 난리를 하고 있는거 아니에요. 에스라가 딱 들었을 때 에스라가 지나가야잖아야, 생사를 여탈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에스라는 제일먼저 참모회의를 소집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해요, 여호와 하나님의 방으로 들어가잖아요, 그들은 성전에 나아가서 엎드려서 간절히 울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회개 하면서 그 주위에 모이기 시작하는 거에요, 참모회의도 안하고 작전회의도 안 해요, 그러더니 어느 순간에 탁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라, 모이지 않으면 모든 가산을 처벌하겠다. 그러면서 단안을 내리는 거에요. 에스라는 에스라 전체를 볼 때 그렇게 거칠고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선지자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학사였지요. 율법이 있는 한 선생님이었어요. 그런데 기도하니까 그런 단안과 용기가 생겨나는 거에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세계를 지니고 있어야지만 지도자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자기 자신조차도 주체하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거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말이지. 그거 마치 전속력으로 바다에다 배 띄워놓고 그리고 키를 안 붙들고 그냥 돌리고 있는 거랑 똑 같으다 이거지, 어디로 가서 부딪힐지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뭔가 자기가 맡은 사역이 방향을 잃고 뭔가 표류하고 있다고 느낄 때에는 사실은 상황이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표류하고 있다는 거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자기를 위에서 볼 수 있어야 된다 이거죠. 볼 수 있어야 된다. 그런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권위가 있어요. 또 모아놓고 교사들을 모아놓고 혹은 교구의 구역장들을 모아놓고, 봐라 지금 위기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봐라 이제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당신들이 한 번 봐라, 이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말야. 이런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말이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예루살렘을 향해 감사하였더라, 사실 감사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감사할게 뭐 있었요, 한번 기도로 목이 떨어지게 생겼고 모든 부귀와 영화가 다 날아가는데. 근데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거를 생각해 보는 거에요. 이렇게 지도력이 표류할 때가 되고 거 기도의 세계가 약화되고 이렇게 되기 시작하면 이미 사역자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원망, 상황에 대해 흔들리는 거에 대해서 불안감 이런 것들이 막 떠오르는 거에요. 그래서 사역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다 드리면서 치열하게 살 때는 사람을 그렇게 의식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게 없는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을 의식하는 거에요. 동료들과 경쟁의식을 느끼고, 그 다음에 뭐 당회에 잘 보이려고 하고, 그 다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에 동조자들을 모으고, 담임목사한테 아부하고 이런 아주 인간적인 일들이 생겨나는 거에요. 왜냐하면 불안하고 무엇인가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 같은 것 들이 없어요. 그 때에 환경에 휘둘리면서 어려움이 생겨나고 그래서 마음이 가라앉고 낙심되고 좌절하고 그럴 때 있잖아요, 그 때에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생각을 바꾸는 거에요. 그리고 감사하는 거에요. 그거는 순간적으로 내리는 소낙비와 같아서 들판에 붙어 있는 불길들을 뭐 지금 호주에도 불났다고 그러는데 뭐 몇 주 몇 달 타는 거 일도 아닙니다. 근데 안 됩니다. 뭐 헬리콥터에다 물을 퍼 갖고 분다고 해서 안됩니다. 결국은 소낙비가 서너 시간만 좍 내리면 그 불은 잡힙니다.
근데 감사가 그런 효과를 가지고 있는 거에요. 감사가,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어야 되나, 그러면 내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확실한 거 하나는 그 사람 마음속에 감사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지 않으셨더라면 지금도 죄악 된 세상에서 방황하고 그리고 바보처럼 말도 안 되는 사역을 하면서 제깐에는 잘 한다고 그러면서 영혼들에게 유익도 못 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텐데 내가 이만큼이라도 깨닫고 여기서 영혼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특권인가, 참 감사하다. 그러면 그 마음에 타고 있던 여러 가지 악한 생각과 더러운 불만, 지난주에 저녁 설교 한 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기여하지 않는데서 오는 불평, 불만 이런 것들이 불길들이 막 일어나다가도 그 감사의 소낙비를 맞고 좍 꺼져버리는 거에요. 생각이 순간적으로 확 바뀌게 되는 거지요. 감사의 조건을 찾는 순간에, 참 감사하다. 주님이 이렇게 나에게 섬길 기회를 주시고 또 섬길 마음을 주시고, 얼마나 감사한가, 정말 감사하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사는 거에요. 이것이 한 사람에게 소명이 진실하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증표가 되는 거에요.
우리도 지금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 살고 있지요. 연말이 다가오고 한 해를 새롭게 맞고 교구들이 바뀌고 목회적인 상황이 이사 오면서 바뀌고 이제 새로운 국면들을 맞이하죠, 이제 금년에 하반기에서는 이사 온 다음부터는 12월까지는 조정기였습니다. 조정기였고 이제는 조정기가 끝나면서 이제 새해서부터는 뭔가 쭉 뻗어나가는 아웃트 위치가 이루어 질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우선 여러분 자신이 아주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모험적인 정신을 가져야 되요. 아유, 새해가 또 다가오는데 어떻게 하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죄인의 완고함을 능가하는 거룩한 강인함, 죄인들이 자신이 살아온 옛 삶에 집착하려는 그 집념보다 더 강한 그들을 변화시켜야 되겠다 라고 하는 강한 집념,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끈질긴 강청, 그래서 좀처럼 이를 악물고 자신의 사역의 묵도를 상황에 쉽게 내어주지 않는 그런 다부지고 강인한 마음, 이것이 있을 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는 거죠. 그러면 이제 믿음이 아니면은 불가능하죠. 그래서 회의주의적인 사역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어요.
뭔가 이렇게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불타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야 되요, 누가 여러분에게 그대가 여기 왜 있는가? 하고 물을 때에 어 저로서는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하면 축복은 없는 거에요. 누가 여기에 왜 있느냐고 이유를 물었을 때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원시 신앙처럼 나는 원래 유리하던 한 마리 어린 양이었는데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변화를 받아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다가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거역할 수 없는 소명을 따라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이제는 주님께 영혼을 섬기는 이 자리의 지도자로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확실해야지만 해요.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주님이 제게 맡겨 주신 양떼와 아직도 인도하여할 많은 양들이 우리 밖에 있는 데 그 양떼들을 위해서 내가 사는 것이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한 확신과 신념으로 살아야 해요. 그렇게 말씀드려야 해요. 여태까지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런 마음이 여러분 속에 남아있었다면 이제는 금년과 함께 싹 쓸어서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정말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그리고 내가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늘을 열고 그 하늘의 문이 쉽게 안 열려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하늘을 열고 확 부어주시는 그 문이 설교자의 영혼 속에 내리면은 하나님의 그 기이한 말씀의 빛이 되는 것이고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에게 내리면은 구원의 빛이 되는 거고 하늘을 열고 하나님이 축복을 쏟아 부어주시면 자기의 사역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안 열린다고... 장난삼아 가끔 가서 열어줘요, 예, 예, 그런다고 해서 그게 문이 열리느냐 하면 안 열려요. 나도 한 번 열어줘요, 예, 그거 한 번 장난삼아 가서 몇 마디씩 중얼거린다고 해서 열리는 게 아니란 말이죠.
자기를 다 걸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도움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서 길이 필요하시다면 내 육체를 갈라서 그 길을 삼고 오시옵소서! 오늘날에 그 우리를 포함해서 이 피라밋 같은 사역자들이 되어 버린 난쟁이 같은 사역자들이 되어 버린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이런 갈망이 없는 거에요. 나를 쪼개서라도 내 갈라진 육체 사이로 주님이 오셨으면 주겠다는 그런 갈망, 그런 갈망을 가진 사람을 찾는 거에요. 간절히 강청하고 갈망하면 그래서 열어지지 않는 하늘 문을 향해서 원한이 맺힌 것 과 같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게 없는 거에요.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흥을 볼 수 없는 정말 이유 중에 하나에요.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사역 속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원해요. 근데 원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은 다른 거에요.
오늘 이 다니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전에 행하던 대로 근데 전에 잘 살았어야지. 그러니까 전에 하나님 앞에 잘 살았던 것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전에 행하던 대로, 그리고 그렇게 못 살았던 것은 전과는 달리 참 치열하고 갈망하는 거에요.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거에요.
예) 어제 김남근 집사가 그런 얘기를 해요. 형님!, 형님! 진짜 귀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을 꿨는데, 어떻든 부흥 때 비슷한 애기를 해요. 뭔 꿈을 꿨는데...어느 날 꿈을 꿨는데 이 열린 교회 마당에 사람들이 백차에 타듯이 꽉 찼드래. 그게 어느 정도라 하면 본당에는 5/1이고 본당 바깥에 5/4가 모였드래. 근데 형이 그렇게 원망스럽드래요. 왜 그랬냐고 그랬더니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본당에서만 설교를 하드래요. 그래서 세상에 말이지 답답하다. 본당에서 설교하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설교를 듣지 못해서 저러고 있는데..하고 막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러더니 막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단을 끌고 막 바깥으로 나오더래요. ‘나 이제부터 여기서 설교한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아니 꿈이라도 참 기분이 좋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그래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시겠지. 근데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구요. 한 번 하나님이 그 집에 문 좀 열어줘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아요. 전 세계에. 전 세계에 많아, 마치 아합의 시대에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았을 때에 그 비 좀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안 되었을 것 같애요. 근데 그 사람들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고 오직 한 사람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시잖아요. 그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기도를 특별히 들어 주시는 거에요. 그 사람이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그런 거에요. 비 좀 내려 주지 말아 달라고. 기도한 이유가 뭔데요.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다시 비를 내려 달라고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나머지들은 무엇 때문에. 먹고 살라고. 먹고 살라고. 내가 지금 말하고 싶어요. 왜 우리는 이렇게 맡고 있는 축복을 원해요? 교회 앞에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래도 담임 목사 앞에 면목이 서기 위해서, 그런 거라면 마치 그런 우리들의 기도는 아합의 시대에 먹고 살려고 비 좀 내려 줘요. 예 그리고 기도하던 사람들과 똑 같으단 말에요. 타는 것 같은 하나님의 갈망을 가지고 어떤 확신을 가져야 하냐면 내가 맡고 있는 이 사역에 하나님이 축복을 부으시고 많은 영혼들을 붙여주시고 그 영혼들이 진실한 신자로 변화되기만 하면은 반드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리라 그 확신에 불타야 된다고.. 그 하나에 목숨을 건 사람이 바로 사역자들이라 이거죠. 반대로 내 사역에 영혼들을 잘 붙여주시지 않고 그 영혼들을 잘 돌보지 않아서 쓰러지고 그 영혼들이 배교의 길을 걸어가게 되면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모욕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쁠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내 사역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게 불타야 된다 말이죠. 불타야 되요.
기도하겠습니다.
2.하나님과 함께 강하여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삼하5:10)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셨지만 하루아침에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부분에 가보면 다윗과 사울의 집안의 싸움이 오래 간지라 그랬습니다. 오래도록 싸우면서 사울의 집안은 점점 약하여 가고 다윗의 집안은 점점 강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강한 다윗의 집안이 나라를 접수하고 그리고 인근에 있는 부족들을 섬멸해 갔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호칭이 나오는데 ‘만군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하여져갔더라’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군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전쟁과 관련한 컨텍스트에서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존함입니다. 다윗은 강성한 나라를 이루었지만, 그때 까지 또 그 나라를 이룬 뒤에서 무력으로 주위의 많은 나라를 복속시켜서 늘 부끄럽게 이방의 나라에 굴복하며 조공을 드리고 속국으로 살던 처지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주위의 작은 많은 족속과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강대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우리의 섬김은 그저 비유를 하자 면은 넓은 초원에 그저 건축업자들이 가져다 넣은 돌멩이와 나무를 가지고 집을 짓는 것 같은 그런 사역이 아닙니다. 마치 느헤미야의 포로귀환과 같이 성을 수축하려고 할 때 수많은 이단들과 그리고 적들의 공격과 시비와 다툼이 있기 때문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손에는 망치를 들고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는 많은 대적들과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세워가야 하는 그런 고달픈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훌륭한 일꾼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일을 방해하는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는 많은 적들과 적절하게 싸워서 순간순간 이길 수 있는 전투의 비결을 몸에 익힌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적들과 모두 싸워서 이기는 것, 절반 또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해서 싸워나가는 것 절반, 그래서 하나님의 집을 세워 나가는 것이죠.
구약시대에 보면 예후라는 인물이 나오죠. 그 사람은 오므리 왕가의 아합왕과 실정을 보면서 배교를 보면서 아주 피 끓는 분노를 느꼈던 사람이였죠. 정말 일대기를 보면은 주님의 도구인 것처럼 쓰임을 받아서 아주 무참하도록 예후가 무참하도록 오므리 왕가에 많은 우상숭배에 동참했던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고 선지자들도 처참하게 도륙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얼마나 멋있는 나라가 세워졌겠어요. 그런데 자기 자신도 그 우상 숭배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잘 몰랐던 것은 뭐냐 하면 피 끓는 혁명을 일으켜서 부정한 정권을 타도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이 싸움의 전부 다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적들을 소탕하니까 말하자면 이 나라의 적들은 모두 소멸되었다라고 생각한거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죠. 또 다른 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적이었어요. 우리의 마음은 무수한 적군들을 파송해서 내보는 말하자면 전투기지와 같애, 거... 에니메이션 영화 같은데 보면은 손오공이 바늘에다 훅하고 불면은 손오공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무수한 적군들이 쏟아져 나와요. 그리고 거기에 함락되는 것이죠.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이 사실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일을 하는 그 자체는 어렵지가 않아요. 복음의 말씀을 그냥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 너무 쉬운 일이에요.
심방을 받고 싶어서 책상을 펴놓고 무릎을 펴 놓고 무슨 말씀인지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교인이 있는 집에 심방을 가는 것은 정말 너무 쉬운 일이에요. 기도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는 데 어렵다하는 것은 그런 수많은 우리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전쟁의 요인들이 우리 밖에, 우리 안에 수없이 있어요. 수없이 있는 거죠. 저는 맨 처음 사역할 때 아직 목회가 뭔지 모를 때에는 제일 힘들었던 것이 자존심이었요. 자존심, 내가 직장 다니고 교회에 십일조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좀 하고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게 평신도로 생활할 때는 목사님도 그렇게 웃으면서 악수를 하고 어떤 때는 ‘이 분이 나한테 아부하시나’ 할 정도로 잘해주시더니, 교회에서 월급 몇 푼 받고 봉사하기 시작하니까 얼마나 사람을 막 다루시는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는 거죠. 그런 데서 오는 자존심, 그리고 교인들에게 무시 받는다고 느꼈을 때 오는 자존심, ‘내가 교역자가 안 되었으면 한 되거리 하는 건데’... 하는 그런 억눌림 이런 것 때문에 참 힘들었어요. 알고 보니까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망치는, 내 안에 있는 그런 적들이에요.
근데 그런 모든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어요. 누구에게나 있고. 그리고 그것들과 싸워서 안팎에 있는 많은 적들과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목회나 하나님의 사역이나 훌륭하게 할 수 있는 많은 재능이 빛을 보지 못해요. 빛을 보지 못해요. 여러분들은 정말 봤을 거에요. 재능은 참 많은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은혜를 맡겨주지 않는 것. 그런 사람들을 여러분은 보셨을거에요. 그래서 일 자체를 잘 하는 것도 귀하지만 그것을 못하게 방해하는 많은 우리의 섬김의 적들과 더불어 싸워서 이기는 것이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일 자체가 힘든 것보다 일을 못하게 하는 대적하는 요소와 더불어서 안팎에서 싸우는 그것이 힘들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자기 사역을 망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죠.
오늘 성경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다윗을 강하게 하심으로 강하여져 갔더라”. 그런 안팎에 에워싼 하나님을 섬기기를 가로막는 많은 대적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해요. 강해지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전쟁에서 강해지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에게 불어넣어주고 싶은 것은 뭐냐하면 전투적인 사기를 잃게 하는 거에요.
예) (예화) 그래서 옛날에 중국에 삼국지에 보면은 전쟁을 하다가 성을 지키는데 도저히 저 밖에 있는 원수들이 에워쌓는데. 도저히 저것들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럴 경우에는 심리전을 쓰는 거에요. 그래서 그 피리를 구슬프게 부는 사람들을 배치해가지고 밤에 고요하게 자는 그 시간에 고향에서 듣던 그 구슬픈 가락을 울려서 그 성밖으로 날려 보내는 거죠. 그러면 그 가락을 듣고 있던 사람 하나하나가 처음에는 피리소리가 나니까 그런가보다. 그러다가 하나 둘 셋, 이렇게 그 가락에 동화되면서 엄마 생각도 나면서 두고 온 처 자자 생각도 나고 그리고 훌쩍거리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싸움의 반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용을 하는 거죠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충천하는 사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확신이 없고 내가 이 일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여기 정말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셨을까, 내가 엉겁결에 왔을까, 이렇게 모든 일에 확신이 없이 서있는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을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중요한 건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셨고, 나는 주님의 부름을 받아 여기 있으며 여기 말고는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서 있을 자리가 없고 그리고 여기서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고 섬기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과 수많은 원수들이 안팎에 있지만 주님이 여기에 세우셨기에 여기에서 잘 감당하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강한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강인한거, 그래서 강하다고 하는 것은 우선 영적으로도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런 영들에 대해서 강한 것도 의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격적으로 강인해서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자기 자신이 얼어붙고 의지가 괴멸되는 소위 말하는 (영점의 싯귀 ? )에 도달하지 않는 그런 강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영적으로 강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강하고 신앙적으로 강해서 그래서 목표를 향해 걸어가기에 충분한 영적이고 인격적이고 이런 모든 힘을 갖추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디에 세워주신 사람이 되든지 간에 그 섬김에서 미끌어짐의 시작은 확신의 결핍입니다. 주님이 여기에 나를 보내셨다. 그리고 나를 세워주셨다. 여기서 하나님이 내가 있는 것을 정말 기뻐하신다. 다른 선택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 때는 강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그렇지만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군대에서 군인들이 탈영하듯이 그렇게 우리 자신의 사역에서, 섬김에서 미끌어져 나가는 거에요.
그런데 강한 것이 그렇게 좋은데 그 강해지는 비결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함께 하시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니까 강해졌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강한 사람들을 세상이나 환경이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그 짓밟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죠. 요셉에게서도 그런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죠.. 그런데 큰 환난과 어려움이 닥아옵니다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모함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다시 자기가 도움을 준 사람에게 잊혀진바 되고 하는 그런 많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는데도 그 고통스런 과정 하나하나를 통해서 요셉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죠. 더 찬란하게 만개하게 되는 것이죠. 백합화가 가시에 찔리면서도 더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게 되듯이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던지 간에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어떻게 환경이 짓밟고 사람들이 밟아도 그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섬김이라 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에도 우리는 뭐 구지 장밋빛 꿈을 가질 그런 이유는 없습니다. 올 한에도 내년에는 우리 앞에 사역이 펼쳐질 것이고 작년에 나타난 대적들이 우리 앞에 안 나타날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냥 꿈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책을 세우면서 꾸는 꿈이 진짜 실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난 한해 동안의 삶을 면밀히 돌아보고 올 한해도 이렇게 강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아서 여기 서 있고 그리고 내가 여기 서 있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르심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든지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실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과 동행해서 가정적으로도 잘 감당하고 또 사역에 있어서 교회적으로도 감당해 나가고 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여러분들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성화의 삶에도 놀라운 진보가 있어서 점점 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싶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내년 한 해에 더 많은 싸움에서 승리하고 다윗의 집안처럼 이렇게 강하여져 가는 복된 여러분들의 한해가 되기를 빕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3.할 수 없는 상황에 굴복치 않는 신앙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 2:1-4 )
오늘 말씀의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은 선뜻 동의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은 이런거죠, 지혜롭지 못한 것은 충성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위에 보면은 워...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기도라도 받고 좀 고쳐볼까 하고 갔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지 대체 몸을 어떻게 가눌 줄 모를 정도로 들어찼습니다. 어... 그러니까 자기 일도 아니고 남의 일인데 갔더니 사람이 너무 많데요. 도저히 뭐 접근할 수도 없었요. 말도 마세요. 우리가 죽는 줄 알았어요. 환자를 거기 데리고 갔다가는 차라리 중풍병 걸리는 게 낫지 사람들에게 밟힐 뻔 했어요. 그리고 이 사람을 메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면 사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죠. 그렇다는데 무슨 할 얘기가 있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다음 지붕을 뜯어서 줄로 달아가지고 그 상이 내려오게 했어요. 근데 그 예수님을 비롯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줄 서서 기다리는데 이게 뭐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나더니 뚜껑이 열리더니 하늘이 훤하게 보이더니 거기 뭐 수레 같은 거 내려오는 거에요. 사람이 매달려가지고.... 그때 주님께서 이것을 믿음으로 보신 것이죠.
그래서 게으름이 단지 손을 놓고 머물러 포기하고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것만이 게으름이 아니라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 만치 충분히 에너지를 거기다 쏟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게으름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할 수 있는데 끝까지, 느낄 수 있는데 끝까지, 행할 수 있는데 끝까지, 그래서 지, 정, 의가 모두 끝까지 움직이는 것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여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성령을 의지해서 일을 한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은 그것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이죠. 무슨 얘기냐면 진짜 성령을 의지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그런 능력과 은혜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밖에 못한다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존 오웬이 성령의 역사를 얘기하는데 성령이 열려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로이드 존스하고 또 다르지만은... 12장에 나오는 그 은사들을 다 인정합니다. 지금도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물론 그레이드에 있어서는 좀 다르다고 보죠.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뭐냐하면 이미 그 시대에도 복음이 많이 전파되지 못하고 참된 신앙이 아닌 배교적인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원인들이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강한 역사 특이한 성령에 의한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일이 안 이루어지고 복음전파의 역사가 더디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근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오웬이 말하는 것은 뭐냐면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틀리다 라고 보는 것이라는 거죠. 왜 그러냐하면 지금 비록 초대교회에 있었던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하는 이런 역사가 안 일어나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는데 우리들이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그래서 그 말씀이 영혼 속에 들어가서 그 영혼이 회심하고 그리고 그 본성이 변화되고 이런 역사가 나타날 수 있다는 거에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상황에 의해서 핑계되지 않는 그런 사명을 가지고 행한다면 할 수 있다 이거죠. 하나님이 그렇게 축복하신다 이거죠.
내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이거에요. 초대교회 때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변화된 사람들의 믿음이 견고해요. 아니면 오늘 우리가 목회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고 진리에 다져지는 사람들의 믿음이 견고해요? 어느 쪽이 더 견고한 거에요. 쉽게 얘기하면 어마어마한 체험을 보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같은 체험을 하고 그것을 회심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 회심의 깊이가 어느 정도는 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하나의 깊이를 가지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초대교회의 역사까지는 그런 정도의 깊이까지는 아닐지라도 깊이 회심하고 매일 매일 말씀을 통해서 거룩한 삶으로 다져진 사람이 그렇게 강력하게 하늘이 쪼개지는 체험을 하고 그 다음에 제대로 양육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보다는 이 사람이 더 낫다 이거에요. 물론 그런 체험도 하고 그 다음에 더 다져졌으면 그거야 더 뛰어나지요. 초대교회의 그 거룩한 사람들아니냐?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하면 충성하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교회 학교를 하면서 교사들에게 심방을 시키잖아요. 그러면 지금 열흘째야, 심방가려고 전화했더니 없데요. 그것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가니까 아무도 없데요. 그 두 가지 보다 더 못한 것은 뭐냐면, 생각을 해보니까 없을 것 같애서 전화 안 했습니다. 이게 전부 다 환경, 할 수 없어서라는 그 환경에 아주 쉽게 굴복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 충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예) 내가 지금도 기억을 하는데 아주 좋은 형제 만나서 좋은 데 시집가서 잘 사는데 전도사님 할 줄 아는데 지금은 안하더라고요. 자맨데 , 32살에 시집을 갔는데, 진짜 영혼 구원밖에 몰라요. 누구세요. 하고 대답을 했어요. 저, 목동교회에서 왔는데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러면 대답을 안하는 거에요. 신앙도 방법이에요. 그러면 끌어내서 툇마루에 앉혀놓고 눈물을 뽑고 있는거야, 그게 사람 저돌적이다. 저돌적인 것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거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 영혼이 저기 있는데, 내가 일주일 동안을 기도를 했는데. 지금 만날 절호의 기회인데 오늘 못 만나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가서 끄집어내서 툇마루에 앉혀놓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느냐? 선생도 울고 애도 울고 ....말이지, 난 인제 그런 일꾼들 만나고 싶어요. 물론 그 자매도 단점이 있죠. 그러나 다른 단점이 그 장점을 덮을 수 있죠. 그런 사람이 없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연애 할 시간이 있냐, 얼굴은 그래도 예쁘장하게 생겼지만은.. 뭐 고등학교 나와 가지고.. 설교할 때 박사과정 다니는 형제가 2살인가 3살인가가 어린데 ,아무튼 가슴에 화살을 맞아가지고 그 자매가 솔직한 면은 없어요. 세상에 예쁜 자매들 다 소개시켜줘도 다 마다하는 거에요.
그러니 이 꽁생원은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자매가 그 자매에요. 그러니까 내가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 기절을 하는 거에요. 내가 데리고 있는 자매였으니까, 거기 소개시켜주었죠. 그리면 딴 자매를 계속 소개시켜 주는 거에요. 한 번 만나면 퇴짜, 퇴짜... 그러면서 나중에 얘기하는데 거기라는 거에요.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뭘 볼 게 있다고. 그 얼굴도 예쁘고 신앙도 좋고. 지금은 지방대학교 교수하고 있어요. 결혼했어요. 자매는 자매가 얼굴도 예쁘고 똑똑해서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심방했더니 하나님이 시집보내시는 구나! 나 그렇게 믿는다, 그래가지고 자매는 가만히 앉았다가 형제가 와가지고 자기하고 결혼해 달라고 통 사정을 해 가지고 그래가지고 서로 연애하다가 금방 장가 갔어요.
하나님은 꼭 중매만 해가지고 시집을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을 묵상하면서 괴로운 것이 뭐냐하면 너무 내가 너무 약해, 너무 쉽게 뒤로 물러서, 우리 주님의 생애가 어떻는지 아시잖아요. 굴복하신적이 없으신 생애잖아요. 십자가 지실 일이 힘드니까 전날 밤에 당신의 에너지를 어떻게 보여주셨는가 하면 피를 쏟으면서 기도하심으로서 당신이 얼마나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서 십자가를 지실려고 하시는지 자기의 내면에 있는 것을 보이시는 거에요. 나는 있죠, 정말 눈물이 나요. 오죽했으면 사경회 때 그 자매가 아프다고 하면 그 때 우황 청심환을, 그 때 우황 청심환이 좀 비싸요. 한 박스를 사다주었어요. 한 박스를. 내가 딴 것은 없지만 돈은 있다. 돈은 있다. 그때 교수였으니까 돈은 있다.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다. 야, 우황청심환 먹어라, 그래서 내 손으로 까가지고 먹고, 거기서 몇 개 꺼내서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야, 너 교회 나오다가 ... 몇 번 쓰러졌거든요, 교회 나오다가, 새벽 기도에 와서 사회를 봐라, 그랬더니 몸이 펄펄 나서 몸살이 났는데 거기에 택시를 타고 면목동에서 부터 와서 새벽기도에 오느라고 거기서 쓰러져서 그 다음에 택시에 실려서 다시 집으로 가는 거에요. 그러면 왜 우황청심환을 아무리 있어도 왜 한 박스 안 사주었느냐고. 그래서 내가 먹어라, 지극히 다해 주었어요. 내가 무슨 이 교회의 주인이요, 아니면 내가 무슨 여러분의 고용인이요, 나도 여러분과 함께 손잡고 섬기는 하나님의 집의 사환 아니요? 근데 진짜 이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 마음이 드시겠느냐? 그래서 쉽게 뒤로 물러서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충성이 부족함이고 그리고 우리의 게으름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너무 많이 쉬는 것 너무 좋아하면 안되요. 나는 주위에서 이 그 영적인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 이런 것들이 얼마나 미움하고 연결되어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털어먹는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보아 왔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해야 되요. 휴식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취해야지요. 왜, 항상 어떤 생각을 해야 되야 하면 자기 속에 이 영적인 에너지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나가기 위해서는 100이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면 120을 스포트 할 수 있게끔 그렇게 하고 살아가야 되요. 그래서 매일 사람이 일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적어도 뭐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계속해서 일할 수 ... 그래서 뭐냐면 결심하다고 중간에서 자꾸 결심을 꺾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능력을 훨씬 더 믿는 거에요. 목회자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 보면 저 교회는 절대로 진보하지 않는다, 부흥까지는 몰라도 절대 성장하지 않는다. 딱 판단이 됩니다. 대화를 하는데 워, 그거 뭐... 교인들도 다 늙었고 그거 뭐 지역도 전도 되지 않는 지역이고, 신도시이고 ... 그렇게 얘기하면 목회자 입장에서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서 비록 말 많은 사람들이지만 회심하고 있습니다. 신도시 아니지만, 와르르 몰려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옛날 도시이지만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있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교회는 성장합니다. 그게 확확 성장하느냐, 이것은 나중문제이고. 하여튼 성장합니다. 그런데 “아니 왜, 열심히 전도좀 해 보죠”, “아니 안되요, 우리 지역이 그런 지역이 아니에요”. “아니 뭐 교인들 데리고 우리처럼 여리고 전도 좀 해 보죠”, “아유 목사님의 동네는 싸구려 아파트라서 문이라도 두들기지, 우리는 수위가 못 들어가게 해요”. 수위가 못 들어가게 하면 나 같으면 말이지.. 교회 반은 빠져 나가도 크게 해가지고 예수의 이름 믿으세요 하겠어요. 그런 현수막 하나 걸겠어요. 그것도 안 되겠냐고요, 게을러요, 근본적으로 게으르구요, 그리고 상황적으로 아주 꺽이게 되어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모두 그 사람들이 안락하고 평안한 삶의 환경 속에서 인격적으로 살았던 사람들 없어요. 진짜 상황이 죽일 듯이 덤벼들었습니다. 모세의 경우가 그러지 않았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해서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잠시 죄의 낙을 누리면서 거부했는데 다가온 것은 지명수배였고 정처없는 망명의 길을 떠나야했어요. 그리고 40년동안 하나님이 돌아보지도 않으셨어요. 그리고 다시 불러 주셨을 때는 험난한 고난의 길이 도달했어요. 아브라함은 안 그랬습니까, 다윗은 안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특히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은 만고 풍성을 다 겪으면서 헤쳐온 흔적이 엄격하게 남아 있어야 해요. 그래서 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인들이 얼마나 강하고 죄가 얼마나 질깁니까, 완악하죠. 그때 이 죄와 더불어서 싸우도록 독려하는 이 지도자들이 강해야 해요. 그리고 쉽게 뒤로 물러서지 않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그래서 마침내 이 사람들은 한 번 그런 피를 통한 연설로 그들의 마음에 다시 불을 질러서 그래서 가장 일어설 수 있게끔 만들어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속에 그 무엇이 역사하고 있어야 해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그 피 끓는 그 무엇이 자기 속에서 역동시키고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새벽 기도 시간에 들으니까 어느 지체가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나는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이 아니라 들리니까 들은거야, 우리 구역장을 좀 도와 달라고, 기도하게 도와달라고, 우리 구역장의 영혼이 정말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교역자이면서 기도안하는 보장이 있느냐고. 그거는 이미 벌써 그 사람, 그 구역이 어느 구역인지는 모르지만은 구역원이 그렇게 기도할 정도이면 그 사람은 그 구역에서 자기 지도력을 상실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구역에서 구역장을 잘 세워야 한다는 이유가 그거에요. 한번 구역장이 되서 영원히 구역장 되면은 그거 그렇게 하면 안되요. 안되겠어요. 그럼 그만 두라고 해요,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하면서 약하죠. 너무 약하죠. 왜 일 앞에 섰을 때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 일꾼들이 나약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혼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약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영혼들 앞에 변화되지 않은 영혼들 앞에 내 그래서 제일 싫어하는 말 ‘힘드시죠?’ 그거에요. 나 동정하지 말라, 이거죠. 어느 집사님이 나한테 ‘힘드시죠?’ ‘안 힘들다’, 나 그렇게 말하지 말라, 그래도 힘드실텐데, 그만큼도 일 않하고 밥 먹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 나한테 필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리면서 기도해 주는 거다, 강하냐? 안 강해? 진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얼마나 하찮은 존재입니까? 진짜 주님이 한 순간이라도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들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정말 영혼들에게 무엇인가 선한 것을 끼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해요.
그런데 쓰레기같이 아무것도 아니고 힘도 없어요. 너무 연약해요. 그래서 깊이 울고 그리고 내게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오늘도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담대함이 나한테 밀려와요 세상이 나를 어떻게 하랴, 환경이 안된다고 그러는데 그 환경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명시면 파도도 잔잔해지고 풍랑도 머졌는데, 제까짓 상황이 뭔데 주님이 명하시는데 평정이 안 되겠느냐, 그러면서 주님 의지하면서 사는 거에요. 그런 믿음을 지체들이 우리 안에서 보아야 해요. 진짜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오늘 이 성경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동기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은 동기야 이 환자를 사랑했겠지요, 그랬더니 어떻게 했어요. 지붕을 뜯어서 환자를 달아 내렸어요. 상식을 깬 겁니다. 상식을 깬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하나님의 일꾼이 걸어가야 될 거라고 봐요, 그래서 나는 가장 마음이 아플때 중의 하나가 무어냐 하면 저 사람이 어려운 난관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난관과 더불어 싸운 시간보다는 그 일이 안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준비한 시간이 더 많다고 느껴질 때 그때 너무 슬퍼요, 그러니까 우리는 되는 일을 되는 일을 될 때까지 하는 것은 우리들이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거기까지는 할 수 있는 거죠, 안되는 일을 되게끔 그리고 거기서 그 일을 이루어야 되겠다는 간절한 집착이 창의를 만들어 내는 거에요. 창의는 항상 거기서 나오는 거에요, 창의력은 거기서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끝까지 그 일을 이루어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는 사람들이 창의적이에요, - 그리고 그걸 하는 거죠. 그래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워...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그것 자체를 십자가화해야 해요, 나는 교역자를 포함해서 우리 직원들도 일주일 만에 만났지만은 나는 있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영혼을 팔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나는 원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에서 일하는 것 때문에 신앙이 망가지는 그런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말이죠, 그것을 십자가화하고 또 그것을 짊어지고 그 섬기고 일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을 향한 추구의 과정과 일치해야 된다 이거죠,
예를 들면 우리들이 죄 가운데 있거나 혹은 우리들이 곤고하게 되어져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져요, 그리고 어려움이 오게 되죠, 그렇게 될 때 곤고하고 어려움이 올 때에 우리들이 씨름하죠, 쉽게 포기하지 않죠, 어떻게 좀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매달리죠,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똑같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그렇게 하는 것은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해요, 생각을 더 많이 해야죠, 마음을 빼앗겨야죠, 시간을 쏟아야죠, 안되는 일을 되게 하려니까 희생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그렇게 해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담당할 때 정말 그렇게 어려운 난관이 나타나면 그러면 집요하게 그것을 극복하겠다, 타협하지 말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그러면서 그 일을 하나하나 해 나갈 때 그때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충성스러운 삶입니까?
밥을 사줘도 그 자매만 사주고 싶고 더 사주고 싶고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도 맛있는 거 있으면 퍼서 나도 모르게 그리로 가 야, 이거 하나 더 먹어라, 주님이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헌신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세요, 뭘 안 주시겠어요, 내가 지난 교역자 수련회를 가서 주일학교 교역자들하고 있는데 그랬어요, 차가 뭐 없어서 심방하기에 불편한데 교회학교에 봉고를 한 두 대 정도 사 주셔서 .... 장부 책 이렇게 넘기다가, 한 주일에 두 사람만 하세요, 한 주일에 두 사람,.. 그래서 내가 얘기한 것이 그거에요,
노래)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남고 행할 길을 다 가다가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영혼들이 너무 불쌍한데 차가 없어서 심방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안 한다는 거에요. 차가 문제가 아니라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니까 말씀 전하러 가, 차가 있으면 참 좋겠는데,,, 없어, 운동화 신고 걸어다녀,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니까, 택시를 주셔, 택시 타고 다니는 거야,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내가 그랬어, 하나님이 헬기도 주실거다, 나는 그런 믿음 있어, 필요하면 주실거고 나는 믿어, 여러분 빌 하이벌스 알죠, 윌로우 크릭트벌스의 빌하이스, 개인 제트기 타고 다닙니다. 교회에서 사 준 것은 아니고 여기저기에서 오라고 하는 데는 많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이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와 달라고 기도했더니 성도가 와가지고 목사님은 비행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8인승 제트기요. 그것 타고 다니며 집회 다니는 거에요. 아, 빌 하이버스는 누구고 여러분은 누구냐고, 아니 하나님 보실 때 다른 사람야, 그거 윌로우 클릭 교회 얘기 한번 읽어 보라구요, 나 신학적으로는 동의 안되는 부분이 많지만은 진짜 신실한 사람이에요, 진짜 영혼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방법은 좀 다르지만요 그렇게 진실하고 정직할 수 없어요, 그렇게 필요하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에요, 그게 간증이에요,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세요, 왜 안 주시겠어요, 그까짓 거, 그거 하나님 앞에 자동차, 비행기 그까짓 게,,,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는 것인데. 필요하면 주십니다. 걱정을 안 합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걱정은 하나님이 그거 못 주시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게 아니라, 걱정은 나야 나, 내가 걱정이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왜 안해,
예) 내 아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인데 교구를 맡겨 주었는데 누가 교구를 열심히 심방을 하나, 몇 백 맡겨주었는데, 이씨는 아니고 하여튼 그 강도사였어요. 이 강도사가 죽자 사자 심방을 하는 거야, 교구도 아니고 구역 몇 개를 맡겨 주었는데 그렇게 자기 구역 인도자라고 하면서 그렇게 심방을 하는 거에요. 구역 몇 구역이 모아가지고 엑센트 사 주었어요, 우리 전도사님 차가 꼭 필요하다고...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우리 믿음 아니겠어요, 그래서 주님이 충성하실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충성하신거 아니잖아요. 우리의 마음에 바램을 늘 점검하면서 어떤 한계가 오면은 믿음으로 나는 이것을 넘는다. 그리고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안에 주신 이 목표는 타협 할수 없고 양보 될 수 없는 목표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이것을 한다. BBC 방송에서 엘리베스 여왕의 담화를 내 보냈어요. 오래된 일이죠. 뭐가 방송실에서 잘못되어가지고 전기가 끊어졌대요. 이걸 이어야 되는데 이것을 이을 시간이 없는 거에요. 붙잡고 전기를 흘려 보냈대요. 이 전기의 특성이 흘러가면 문제가 없대요. 안 흘러가니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이걸 붙들고 생명을 걸고, 지금 여왕 폐하의 방송이 나가는데 이렇게 해서 내보는 거에요. 자기가 전선의 역할을 대신 한거에요. 생명을 건거죠, 염통을 통해서 이 전기가 흐르는데. 이거 놓으면 죽는 거에요. 그게 진짜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 주세요. 여러분들 하나님이 다 주세요. 내가 더 이상 얘기 안 할께요. 필요한거,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기만 하면은 다 주세요. 어떤 때 어느 정도냐 하면 기도한 것도 아니고 저런거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주세요.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이라고...그러니까 생각을 해요, 하나님 주세요. 내가 하나님 앞에 무슨 일을 하면서 그 댓가를 적게 받고 그리고 거기서 덜 대우 받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라도 우리에게 주세요. 무엇을 통해서라도 채워 주세요. 그래서 항상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분명하게 고정하고 그리고 웬만한 환경에 의해서 절대 굴복할 수 없고 그리고 나는 이것을 나는 먹는다. 무엇도 어떤 환경이나 부정적인 환경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이 분명한 분부를 이루어 드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갈 때 그 때 그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되는 거에요. 어렵죠. 어렵죠, 근데 그게 십자가를 지는 거에요. 어떻게 보면은 헛된 일처럼 보이죠. 줄을 섰다가 그것들을 끌고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갈 때 헛된 수고처럼 보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면서 역사하세요.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보면서 가슴아파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사실 한강에 돌을 던지기 아니에요. 내가 오늘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면 내일 회심하나? 죽을 때 까지 회심 안할 수 있어요, 내 눈물만 빼고, ..그래도 내가 변해요, 내가 바꿔지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얘기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여기에 꽉 차있어야 해요. 그냥 막 어거지로 집어 넣어가지고 뚜껑을 강제로 닫아놓은 것처럼 뚜껑 열면 펑하고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당신들이 영혼을 위해서 산다면 그렇게 살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뭔가 항상 우리 속에 억눌려있어야 되요. 이게 사람도 억눌려있고, 내가 그래서 오죽했으면 초상집에 가서 자기 교구 식구가 죽었는데도 눈물도 안흘리길래 슬프지도 않냐, 자기 지체인데, 죽었는데, 내가 말씀 가르치던 얜데, 이제는 죽었는데, 다시 못 보는데, 안 슬프냐, 가슴 아프지 않냐, 이런 얘기 들어도 눈물이 안 나오냐, 그런 것이 없으면 상황을 뛰어 넘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자기를 채우고 그래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그런 간절한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물러가지 말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
어, 사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이 뒤로 물러가야하겠다 하고 한 순간에 결심을 하고 그리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경우는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자기는 잘 하려고 했는데 계속 뒤로 물러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뒤로 물러가게 되는 것들이 요인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어... 수없이 많죠,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우리를 뒤로 물러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많이 마음이 상하고 괴로워지면 이 마음의 경건한 틀들이 무너지고 그렇게 되면은 뒤로 물러가게 적합한 환경이 되죠. 그런가 하면 또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무능을 깊이 절감하게 될 때 그 때 뒤로 물러가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교만도 안 좋지만 사역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좌절은 참 안 좋습니다. 결국은 믿음 없는데서 비롯되는 건데 이런 것들이 우리를 뒤로 물러가게 하죠. 뿐만 아니죠, 비슷한 맥락이기는 하지만은 자기의 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일에 직면하게 되면은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너무 큰일을 만나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섬기고 사역을 하고 이러는 모든 것들이 자기 능력껏 해야 합니다. 능력에 맞게.... 그래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큰일을 하고 싶어 하고 이런 일들이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일단 자기가 보람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적합한 일을 찾아서 섬기는 것이 자신의 신앙에도 좋아요. 그래서 옛날에 스펄젼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아들도 목사를 했습니다. 아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은 편지를 쓸 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도 아마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죠? 요즘은 아버지가 영향력을 행사해서 아들에게 좋은 교회를 마련해주고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너무 작은 교회도 말고 너무 큰 교회도 말고 너에 능력에 맞는 그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시도록, 포도원을 주시도록 기도를 해라” 그렇게 충고를 한 장면이 나옵니다.
물러가게 하는 것이 참 많아요. 다양한 요인들이 우리들을 물러가게 합니다. 우리를 뒤로 물러가게 하는 요인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요인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아요. 참 쉽지가 않지요. 그렇지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것을 안 기뻐하십니다. 뒤로 물러가면 안 기뻐하십니다. 정말 너무 쉬어요. 너무 쉽고, 어떤 때는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아주 깊이 낙심이 되고 그리고 그렇게 좌절이 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안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물러나지 않는 것이에요. 그리고 물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신앙과 섬김에 있어서 진보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게 진보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항상 자기가 에너지로 차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떠미를 듯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진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제 우리가 오랜 간만에 문서선교부가 1년 결산을 했습니다. 그 속에서 이제 1년 동안 이루어진 경영도 평가도 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 제가 강조한 것이 그런 것이었어요. 제가 어느 교회를 갔더니 12시 10분에 예배가 끝나는데 그날 설교가 12시 20분에 만들어져서 팔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그랬더니 그 교회 목사님이 그게 왜 안 가능하냐? 미리 다 스티커 붙여서 만들어놓고 복사 기계가 한꺼번에 50개 나오는 기계를 비치해놨어요. 설교가 딱 끝나면은 설교를 할 때에 어디를 지어야 된다는 것을 탁탁탁 해서 그래서 그것을 탁탁탁 지은 다음에 그 다음에 복사기에다 걸면 한 번에 50개가 와르르르 쏟아지는 거에요. 그러니까ㅣ 성도들이 예배가 끝나고 나서 흩어질 때가 되면 벌써 테잎이 나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많이 애용을 하죠.
그래서 내가 문서선교부에 강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항상 자기 일을 할 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에너지가 넘쳐야 되요. ‘어, 고달픈 심방 오늘 또 해야 되는 구나!, 오늘도 또 똑같은 일을 어제 했던 일을 또 해야 되는 구나!’ 그렇게 하면 안 되요. 넘쳐야 되요. 그래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하다못해 냉수 한 그릇을 가져다주는 것을 먹어도 그 것에 주는 손길 속에 그 넘치는 에너지가 보여.. 물론 그런다고 해서 냉수 드리면서 많이 드세요. 물 많이 먹으세요. 그러지 않지만 그리고 맛있었어요! 그러지는 않지만 그런데 그것이 느껴진다고요. 그것이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기꺼운 마음이에요. 기꺼운 마음. 그게 우리 속에 넘쳐야 되요. 그래서 그것이 우리들에게 사역과 신앙생활에 모든 밑바탕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들이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최소한 우리들이 물러나지는 말아야 되요. 죄나 낙심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 속에 있는 에너지를 뚝 떨어뜨릴 때, 우리 에너지를 급격하게 뚝 떨어뜨릴 때 그 때에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를 완전히 고갈시키고 뒤로 물러가게 하는 것이 목표에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면서 나로 하여금 뒤로 물러가게 하는 감정, 이런 것들을 자꾸 털어버려야 되요. 요즘에는 특별히 그런 것들이 없지만은 참, 그 사람들이 참 용서 안 될 때가 있었거든요, 그러면은 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를 해요. 내가 마음이 묶여가지고 견딜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자꾸 뒤로 물러서는 요인이 되요. 그래서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맺힌 것이 있으면 풀고 용서하고 그리고 걸어 나가야지만 뒤로 안 물러설 수 있어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우리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있으면 절대로 앞으로 진전할 수가 없습니다. 양심이나 또 그 죄의식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뭐에 있어서나 우리가 모르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아는 가운데 뭔가가 막힌 것이 있을 때에 반드시 그것이 우리를 뒤로 물러가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지켜 나가야 되요. 그래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 첫 번째 비결은 뭐냐 하면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강해야 되요. 그래서 돌과 같고 좋은 의미에서 철과 같아야 되요. 예레미야 1장에 보면은 ‘사람들이 너를 핍박할 것이나 그러나 내가 너를 놋 성벽이 되게 하리라’ 놋 성벽, 생각을 해봐요. 돌로 만든 성벽이야 부숴뜨릴 수 있고 흙으로 만든 무너뜨릴 수 있지만 놋 성벽이 되게 한다는데, 쇠로 성벽을 만들었는데 그거 어떻게 부술수 있겠느냐고.... 막 와서 망치가 때리고 곡괭이가 후벼파도 그냥 부딪치는 소리만 날 뿐이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서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마음과 이런 생각들이 유리 같아서는 안 되... 탄탄하고 철과 같아야 해요. 그래서 몇 번 와서 누가 부딪쳐도 그래도 끄덕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활용해서 끊임없이 사단이 뒤로 물러가게 해요. 근데 이 강함과 약함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강함, 성격적인 강함 그런 것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되고 반드시 부작용을 낳아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어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여기에 세워주셨다고 믿는 그 소신,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이 당연한 책임감,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나님 편에 서있다면 나는 두려운 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 불타는 확신, 그런 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지만 우리들이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삶이 결국은 무어냐 하면 믿음으로 사는 삶이에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느니라‘ 결국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의인은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에요.
또 역설적으로 반대로 하나님 앞에 말씀의 표준에 따라서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든 믿음으로 살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이 애쓰고 힘써도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있는 죄, 많이 힘쓰고 애써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우리의 허물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아주 놀라운 은혜의 도구로 회개하고 가슴아파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죄가 내 안에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가! 나도 어찌할 수 없는 허물이 내 안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인정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면서도 어느 한 순간에 도저히 내가 바르게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에요. 왜, 내 안에 그게 보이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야 믿음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우리들이 온전히 믿음으로 살 수 없잖아요?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따라서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온전히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 우리가 믿음에 있어서나 의로운 삶에 있어서나 결국은 그 모자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역설적으로 믿음이 없음으로 하나님을 더 믿게 되는 거에요. 그런 고백이 복음서 속에도 나오잖아요. 믿고 싶은데 믿음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그래요. 하다가 안 되니까 ‘주여!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그게 믿음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어냐 하면 은혜의 도구가 되는 죄도 믿음을 구하게 만드는 믿음 없음도 무두 자기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란 말이죠. 선택한 것들은 그런 힘을 우리들에게 가져다주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그 인격적인 관계의 발전을 도모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가고 그리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깊이깊이 알아가는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보실 때 야, 너는 정말 믿음으로 사는구나! 환난도 만나고 사역의 어려움도 오고 고난의 어려움도 오지만은 정말 너는 믿음으로 사는구나! 그렇게 인정해 주실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만나가 싫어질 때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11:4)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받아드려지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 때가 많지요. 그렇지만 또 한편 생각해보면 우리도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많이 있지요. 그런데 차이는 뭐냐면 하나님이 기준이지 우리가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여주시지 안는 것 같은 거절감은 하나님의 정의에 의한 것 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은 것은 우리자신이 하나님과는 다른 의지와 성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그 앞에 보면 다베라 라고 하는 지명을 불러오게 되는 사건이 나타나는데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의 말을 토해놓으니까 하나님이 진 저 끝에서부터 불이 나게 하셔서 진을 태워버리는 심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아마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 난거라 이렇게 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말을 토해놓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뒤편에 넘어가면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사람이 아무리 옳지 않은 거라고 하더라도 일단 중심이 슬퍼하고 눈물을 막 쏟아놓게 되면 그건 진심입니다. 눈물은 진실하다 그런 말 이 있잖아요? 눈물을 막 흘리면서 울고불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였었냐 하면 자신들의 처지를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사실 그렇게 자신들의 처지를 비참하다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근거는 있었지요. 그것은 첫째로 그들은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애굽 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정착된 생활이었는데 지금은 떠돌고 있지요. 두 번째는 뭐냐면 가야할 길도 명백하지가 않아요. 가나안 땅 이라곤 하지만 언제 도착을 하는 건지 그리고 진짜 도착은 할 수 있을 것인지 분명치 않은 처지였지요. 세 번째로 실제로 그들은 아주 고달픈 삶을 산거지요. 오늘 이야기 하는 것이 애굽 에 있을 때는 고기도 먹고, 외도 먹고, 그다음에 마늘도 먹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우리의 정욕이 모두 쇠약해졌다. 그들은 정말 광야에서, 뭐가 있었겠어요. 광야에서 뭐가 있었겠어요. 풀포기 하나 나지 않는 광야, 농사도 짓지 않는 광야에서 뭐가 있었겠어요. 그때는 그들에게는 진짜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진짜 정착된 애굽 생활 에서 맛볼 수 있었던 정착민으로서의 번영이나 즐거움 같은 거 없어요. 그럼 말이지요. 끝이 없는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거지요. 한모금의 물, 그것도 제때 공급 받을지 모르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 에요. 그래서 그들이 막 슬퍼하면서 눈물 흘리는 게 거짓이 아니라 진짜라 이거지요.
전 어저께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아주깊이 공감이 됐어요. 여러분도 아마 지금 제 이야기를 들으면 맞다! 그럴 거 에요. 그지요? 그래본 적 없어요? 어느 순간에 나는 뭔가? 도대체 내 인생의 즐거움이 뭐가 있는가? 이 세상에서는 친구들이 누리는 그런 즐거움을 누리면서 막 사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서 한번 호화스런 삶을 살아 본 것도 아니고, 뭐 하나님 잘 섬기지는 못했지만 주일날은 주님께 바치고 공휴일 날도교회에 바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았고, 한번 가슴이 찡할 정도로 마음을 터놓고 연애를 해 본적도 없고, 하나님 을 뼈 빠지게 섬긴 적 도 없지만 또 뼈 빠지게 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려 본적도 없고 나의 사는 날이 정말 헛되구나.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이 있나? 가슴에 찬 바람이 확 돌면서 이 가슴이 시려 본적 없어요? 난 많아요. 그런 적이 아주 많아요. 솔직히 고백을 하면 목사가 된 다음에도 그럴 때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그때 진실해져요. 서러워 진다구. 눈물이 핑 돌고, 어느 때는 엎드려서 엉엉 울고 싶은 때도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하나님이 그때 오셔서 ‘그렇게 서럽고 외롭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것 같고 그러냐?’ ‘네’ ‘그러면 너 어떻게 해 줄까?’ 그러면 ‘나 뭐도 갖고 싶어요. 뭐도 되고 뭐도 되고 그러면 나 행복 할 것 같아요.’ 그런 건 또 아니야.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정서가 확 밀려오는 거 에요. 그때 막 눈물을 흘린다구. 울어요. 그때 심정이 어떠냐 하면 이 세상에서 나처럼 초라하고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런 마음이 확 드는 거 에요.
그런데 문제는 뭔지 알아요? 그게 거룩한 정서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거 에요. 어떻게 입증의 되느냐 하면은, 그런 정서를 가지고 흐느껴 울 때는 하나님께로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이거에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어느 정도의 원망이 내재 되어있는 거 에요. 그래서 타락한 정서와 거룩한 정서는 종이 한 장 차이야. 그런 거거든요. 이스라엘백성들이 꼭 그렇게 우는 거 에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서럽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고향도 다 떠나서 그래서 남의나라 땅 에 가서 더부살이를 해서 430년간 살아서 이제 정착을 했는데 그때 놀라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애굽의 나일 강을 피로 만드시고, 그냥 온 하늘을 캄캄하게 하시고, 태양신의 얼굴을 시커멓게 만들어 버리시고, 그리고 바로의 첫 자식까지도 모두다 처 죽이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했잖아요? 광야에서 언제 하나님이 그런 거 행하셨어요? 하나님의 크고 위대 하신 능력은 자기들을 책망하시는 데 사용이 된 거 에요. 막 진을 불태우시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 서러운 마음이 드는 거 에요. 그러면서 통곡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러한 정서에 사로잡혀서 통곡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다 구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던 거 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제일 하지 말아야 될 파괴적인 태도가 있어요. 뭐냐면 자기연민에 빠지는 거 에요. 그거는 우리의 영적 삶을 황패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거 에요.
그래서 오늘 궁금한 거는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 난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그들이 자기의 현실을 보면서 처량하고 비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면서 우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냐? 겉으로 보면 참회 비슷하기도 하고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은 그러나 그런 정서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경우에요. 그래서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이유가 뭐였느냐 이거지요. 그 이유가 뭐였느냐 하면 아주 간단해요. 너무 간단해. 그리고 명쾌해요. 여러 가지, 여러 가지 불만들이 생겨났거든 비참의 원인, 그담에 먹고 싶은 것 도 많이 생각이 났고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비정함도 다 생각이 났고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됐는데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이 두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도 아니고, 오직 하나에요. 명쾌하고 명료한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모든 악하고 패역한 일들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게 된 거 에요. 사악한 욕망들이 일어나게 된 거 에요. 거기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서러움들이 생겨 난거 에요. 그 명쾌하고 명료한 한 가지가 뭔지 아세요? 만나에 대한 맛을 잃어버린 거 에요. 그것을 지겹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맛대가리 없는 식품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거 에요. 그러면서 그들의 불만이 뭐냐면 우리에게는 이 만나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도다.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한 가지 때문에 나머지 모든 파괴적인 결과가 온 거 에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서러움,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절망, 하나님을 향한 원망, 애굽 의 생활에서의 부러움, 그리고 그때 먹고 마시던 것들에 대한 욕망, 이런 것들이 막 벌 때처럼 일어나게 되는 거 에요. 두 가지가 아니에요. 오직 딱 하나에요. 제가 12주 동안을 열두 번에 걸쳐서 ‘죄의 속임을 이기는 길’이라는 시리즈를 전개 했어요.
그 모든 내용을 딱 하나로 간추려서 결론적으로 우리보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죄의 속임을 이긴다는 거냐? 묻는다면 한줄 로 대답 할 수 있어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상태 속 에서 살라는 거 에요. 두 줄도 아니야 딱 한줄 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아서 그 말씀이 살아서 자신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상태를 유지하라 이거 에요. 유지하라. 그것이 우리의 총명을 흐려지지 않게 하고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투명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순결하게 하는 거 에요. 목사든지 장로든지 집사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가 누구든지 간에 오직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거에요. 그것 이 에요. 생애 적으로 하나님 만나는 것만 이야기 하지 말고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게 능사가 아니야. 한 장을 읽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셔서 자기로 하여금 그 마음을 찌르는 말씀들이 느껴져야 되는 거 에요. 그리고 그런 말씀이 끊어진지 여러 날이 지났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영혼에 붉은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에요. 주일날 한번 은혜 받는 것 가지고 안돼! 사경회에 한번 은혜 받는 것 가지고 안돼! 매일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자극하고, 그래서 깊이 찔림을 받게 하고, 그래서 성경 앞에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구나! 그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구나! 이런 감화를 받으며 마음이 신령한 은혜에 감동될 때, 그때에 이 생각은 올곧은 것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는 것을 삶의 기본적인 추구로 삼아야 되요. 내 주위에 깨닫지 못한 채 놓여있는 모든 말씀은 내 것이 아니에요. 책을 쌓아두고tape을 쌓아두어도 내 것이 아니에요. 심지어는 그 말씀을 내가듣고 이전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뭐냐. 내 것은 뭐냐면 지금 내 마음 가운데 살아있는 말씀이 에요. 여러분 이런 생각 안 해 봤어요? 만나를 내리실 때 잔뜩 내리셔서 추수하듯이 쭉 거두어서 가마니에 차곡차곡 넣어서 쌓아두고 거기서 가을에 타작한 추수한 쌀을 그렇게 가마니에 쌓아둔 다음에 일년 내내 꺼내서 먹고 사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도 있잖아요. 그지요? 안식일 전날 거둔 것을 안식일까지 썩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이 이틀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일년은 못하시겠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안하셨을까? 그거 보여주는 거 에요. 신자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일년에 한번씩 추수해서 살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가르치셨어요? 금년에 우리 먹을 양식을 주옵시고. 그렇게 하지 않고 매일 매일의 빵을 하나님 앞에 기도 하라고 우리에게 부탁 하신 거 에요. 그것 없이는 누구도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없어요. 죄의 지배아래서도 이따금씩 가슴이 녹는 듯한 기도를 경험 할 수 있고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완전히 미끄러져서 범죄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릴 수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되서는 안돼요.
난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 중에서 교역자를 포함해서 매일매일 말씀 앞에 성경을 통독으로 읽어나가는 그거 말고 말씀 앞에 오늘도 내가 읽는 이 성경을 통해서 꼭 주님의 음성을 한마디 듣고 하루를 살아야 되겠다. 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매일아침 성경을 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해요. 그렇게 안하면 여러분들의 삶은 속히 부패하는 거 에요. 그리고 온갖 탐욕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 에요. 여기서 탐욕이라 그래서 꼭 이 세상의 사악한 정욕이나, 성적인 탐닉이나 물질에 대한 탐욕, 이런 걸 의미 한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탐욕의 진정한 의미는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마음의 상태에서 이탈한 가운데 생겨나는 모든 욕망이에요. 그게 탐욕이에요. 그렇게 살면 안돼요. 여러분들을 보면서 느끼는 게 뭐냐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지금 여기 있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하고 너무 비슷해!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도 보았어요. 한때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담대하게 애굽 을 떠났어요. 갈라진 홍해사이로 지났어요. 그리고 믿음으로 광야의 길에 들어섰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도 가졌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말씀에 대한 참맛을 잊어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온갖 탐욕들에 사로잡히는 거 에요. 그 자신의 인생이 너무 비참해 지는 거 에요. 불쌍해지고, 싸구려 연민에 사로잡히고 그렇게 되는 거 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행복은 뭐냐면 그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거 에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며. 이 팔복 중에서 탑이에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거기에서 금싸라기처럼 자기에게만 내려 주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거 에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요. 자기의 죄와 악함을 고백할 때 자비로운 용서를 경험해요. 우둔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혼란을 느낄 때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내 영혼에 빛을 주셔요. 허기진 영혼에 만족을 주셔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한 것을 경험하도록 도와주세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동을 받게 되는 거 에요. 은혜를 받게 되는 거 에요. 그러면서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자녀로 서의최선의 행복이고 애굽 에서 먹는 참외나 정욕에 좋은 마늘이나, 외나 이런 것 하고는 비교 될 수 없는 거 에요. 비교 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거 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다운 감화와 그 맛이 사라지고 나면 이런 것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거 에요. 그래서 맛대가리 없는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맨 날 그 지겨운 하나님의 말씀, 따지듯이, 해부하듯이 파고 들어가는 그 지긋지긋하고 지루한 하나님말씀 이외에 우리에게 쥐뿔이나 보이는 게 뭐가 있느냐. 그래서 내 인생은 슬프고 외롭다. 그리고 서럽고, 그리고 가슴 아프다. 하나님 앞에 그것은 깊은 패역이에요.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죄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거 에요. 신자가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을 때 그는 이미 목에까지 가득 찬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렇게 자기 속에는 깊은 매일매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쉴 새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면서 가르쳐요. 허위에요. 허위! 그렇게 하는 일이 없을 수 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이거 에요. 허위라 이거 에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맛을 잃어버리는 것을 굉장히 두렵게 생각해야 해요. 그리고 나면 마지막에 탐욕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행복을 잃어버려요. 그리고 사로잡히게 되요. 그리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가 없어요. 아무에게도 잘 안 가르쳐 주는 건데 오늘 특별히 여러분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제가 가르쳐주겠어요. 어떻게 하냐면 하루에 4장 읽는 거는 편한 시간에 읽어요. 그런데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쭉쭉 읽어나가는 것과 성경을 깊이 숙고하는 것을 혼동하지 말라 이거에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4장을 아침이건 저녁이건 쭉 읽어서 맥체인 성경읽기 표 에 줄 을 친 것이 여러분들의 영적 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느냐구요. 하나님의 말씀은 읽는데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가 가슴속에 스며 들어와야 해요. 그래서 그 물이 가슴에 와서 닿아야 돼! 지금 목이 말라서 거의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그 사람 위에다가 물을 바께스 로 들어부어도 그 사람의 갈증은 해결이 안돼. 단 한잔의 물이라도 마시고 그 물이 식도를 통해서 위로 흘러 들어가고 위속에서 흡수가 되어서 그래서 삽시간 내에 모든 기관에 퍼져야 되요. 액체를 먹고 오 분이면 흡수되기 시작해요. 그래서 그게 각 핏줄로 돌아요. 그리고 한번 쾅쾅할 때 그 박동을 통해서 이 피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물이 흡수가 되어서 세포 속 구석구석이 흩어질 때 에 그때에 그가 기갈을 면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에요. 그래서 성경읽기 표를 따라서 체크하면서 성경을 안 읽는 것은 더 나쁜 게으름이지만 두 번째 나쁜 것은 작대기 그으면서 만족을 느끼는 거 에요. 그게 무슨 소용 있냐구. 배를 타고 그물을 들고 바다에 나가는 것은 고기를 잡기 위함이지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야. 난 실제로 성경을 매일매일 꾸준히 읽으면서도 정말 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옥 목사님도 한번 자신의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초창기에 목회 하는데 요한계시록을 완벽하게 외는 집사가 하나 있었데. 그냥 뭐 줄줄줄 외워.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는 깨어진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 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안하고 있다면 내일서부터 당장 시행을 하세요. 작은 수첩을 하나 사! 요정도 크기 로 사고 아침이 제일 좋아요. 아침이 왜 좋냐면 아침 시간이 이성적인 시간이 에요. 논리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기에 가장 최적의 상태라 이거지요. 그래서 아침에 성경을 펴요. 내가 여러분들처럼 교회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면 난 아침에 한 시간 반 정도 일찍 나오겠어요. 더 열심 있으면 두 시간 정도 기도를 하고, 그리고 조용한 장소에서 큐티 를 해야지요. 그런데 큐티 하는 방식이, 성경을 펼치고 성경을 한 장 읽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난 성경 한절을 열두 시간 읽은 적도 있어요. 그러니까 천천히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해주시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면서 성경을 읽으면 읽어가다가 더 이상 읽기 어려운지점이 등장을 해요. 그러면 어디까지 읽어야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말고 거기서 멈춰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요. 마음에 걸렸던 그 부분을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읽어가요. 그러니까 시간이 필요하지요. 오 분 내에 뚝딱 해 치우려고 하면 안 된다 이거지요. 시간이 필요해요. 천천히 읽어요. 두 번 세 번 읽었는데도 처음에는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게 있는 것 같더니 느껴지지 않아요. 그러면 계속 나가는 거 에요. 그러면 한번,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점점 메시지가 아주 뚜렷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어요. 그러면 멈춰요. 그곳을 천천히 읽고 글의 앞뒤 문맥을 생각하면서 거기에 몰입해요. 그러면 거기서 메시지가 들려요. 말씀의 참된 맛을 잊어버리니까 이 사람들이 이렇게 통곡하면서 우는 구나. 자기 자신의 처지가 생각이 나는 거 에요. 하나하나 논리를 세우면서 읽어요. 깨달아져요. 그러다보면 어떤 때 는 더 이상 참기어려 운 때가 와! 혹은 그 정도 까진 아니어도 감동이 와! 그다음에 중요한건 그렇게 감동을 받은 메시지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는 거 에요. 퍼지지 말고 기도를 확대하지 말고 거길 초점에 딱 맞추는 거 에요. 이렇게 통곡하고 우는 이 모습이 제 모습입니다.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나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는 사실은 수많은 탐욕들이 있었고 그 모든 하나님 앞에서의 패역한 반응 밑바닥에는 여러 날 동안 말씀에 대한 감화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런 나의 영적생활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가 맛대가리 없는 음식 이였던 것처럼 내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무미건조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오는 거 에요. 때로는 그 기도가 새벽에 나와서 하는 그 기도보다 훨씬 깊고 훨씬 장시간의 기도가 될 수 있는 거 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감화가 없으면 기도만을 놓고 불을 붙이려고 하는 것은 마치 뭐와 똑같으냐하면 쏘시게 없이 방금 산에서 베 온 큰 통나무를 놓고 계속 성냥불을 계속 켜려는 것과 같은 거 에요. 결국을 실패해요. 그렇게 하고나면 마음에 흡족한 감동이 쭉 오고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적셔지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웬만큼 강렬하거나 혹은 머릿속으로 잘 정리해 놓지 않으면 그렇게 받은 은혜를 삼일 뒤에 다시 반복해서 고백을 하라고 하면 못하는 경우가 허다해요. 그래서 그다음에 뭐냐면 노트가 필요한거 에요. 사라지기 전에 즉시 바로 그 자리에서 펼쳐서 그래서 그것을 기록을 하기 시작 하는 거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이렇게 뼈대를 만드는 거지요. 만약에 내가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준다면, 혹은 앞으로도 내가 참고 하면서 이것을 보고 받은 은혜를 충분히 회상 할 수 있기에 충분할 정도로 기록을 하는 거 에요. 맨 위에다 성경구절을 적고, 그리고 기록을 하는 거 에요. 이렇게, 이렇게 그러다 어떤 때는 굉장히 많은 메시지를 주시는 거 에요. 이렇게, 그리고 수시로 이전에 묵상한 내용들을 다시 묵상해!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 에요. 하나씩 이렇게 어떤 땐 노트가 없어 광고 전단지에다 해 놓았다가 성경책에 끼었다가 노트에다 갖다 붙여. 그러면서 하나하나 씩 그렇게 하면서 아무리 많은 학문을 하고 말씀에 관해서 많이 탐구를 하고 그래도 그것으로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 에요. 자기마음에 계속 살아 있어야 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지 않으면 결국은 미끄러진 자가 되는 거 에요. 반드시 미끄러진 자가 돼!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매일 매일 은혜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제가 한 두 달 전 에 (처음에는 적응 안돼서 부작용이 났던 런닝 머신도 적응 되어 가면서 개운하게 잠을 잘 자게 되고 저녁마다 달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 이하 생략!·) 살기 나름이라 이거에요. 여러분에게 이거 하나 이야기 해 주고 싶어요. 내일 아침에 당장 시행을 하면, 내일 아침 당장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거라곤 기대하지 마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지 않을 때 는 성경을 두건 뒤집어쓰고 읽어도 가슴에 하나도 다가오지 않아요. 말씀 안 하셔요. 그래서 사람들이 큐 티를 계속 못하는 거 에요. 말씀 안하셔요. 이런 이야기 하긴 뭐하지만 어떤 때는 이틀씩, 삼일씩 전혀 음성을 못 들으면서 성경만 넘길 때 가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다시 나가서 내 마음의 더러움을 고백하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지 하나님 앞에 아뢰는 거지요. 도와 달라고 가도하는 거지요. 그리고 성경을 읽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실 때는 너무 놀라운 게 뭐냐면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잠간 폈는데도 한절을 읽었는데 거기서 말씀하시는 거 에요. 그래서 노트가 늘어나게 되는 거 에요. 시리즈가 많아지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거 에요. 그런데 거기에서 맛보는 그 즐거움이 그까짓 참외나 먹고 마늘이나 먹어서 정욕이 생겨나는 그런 기쁨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거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야.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지요. 다른 길이 없어요. 이것은 거룩한 삶을 위한 양보할 수 없는 조건 이 에요.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 바로잡힌 간절한 기도가 나오게 되는 거 에요. 여러분 가운데는 육체의 게으름을 이기고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기도하지 못한다면 안 나온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건 사실이에요. 있는 건 있는 거구 없는 건 없는 거 에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말씀에 깊이 젖어야 되요. 그것도 매일매일 젖어야 되요. 그런 상태 속에서 여러분들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 이 에요. 그래서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여러분 스스로가 들어간 부패의 자리에서 목덜미를 잡고 기중기처럼 번쩍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요. 그런 일 은 일생에 몇 번밖에 일어나지 않아요.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되요. 양보 할 수 없는 조건 이 에요. 그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요. 뉴 라이프 를 위한 뉴 스타트를 하라구! 삶의 방식을 쇄신해요. 해도 안 되는 삶을 계속 살지 말고 말 이 에요. 성경을 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나 말씀 하시지 않나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느 지점에 있는 지 깨닫게 될 거 에요. 그런 개인적인 성경의 탐구 없이 주일날 설교만을 기대 하는 것은 그건 절대로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는 신앙생활이 아니 에요. 설교자를 의지하면서 사는 거지 하나님을 의지 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이거지요. 그때에 자기가 개인적으로 읽은 말씀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일치가 이뤄지면서 은혜가 증폭되는 거지요. 기도하겠습니다.
6.겉 사람은 후패하나
“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6-17)
뭐 지금부터 한 15년쯤 되었을까? 박기철 목사님이 교역자회의를 하면서 꼭 이맘때였습니다. 흉내까지 내자면은 꼭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세월이 살 같이 빠르다는 얘기는 문학작품에나 나오는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살고 보니까 정말 빨리 지나가더라' 이런 이야기 입니다. 사실입이다. 저는 열린신문 ( ) 나오고 나서 특별히 저로 하여금 목회 10년을 되돌아보게끔 많이 자극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쩌면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줄 몰라요. 지난주에도 내가 오대산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8살, 9살, 10살 때 뛰어놀던 겨울인데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저, 방조제는 40년 전에 공사를 했었는데 아직까지도 끄떡없이 남아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왔습니다. 아무튼 그 만큼만 세월이 더 흐르면 저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가슴이 저미도록 허무한 것이고 그리고 가슴이 저미도록 뼈아픈 것이죠.
어제 열린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도록 이렇게 있었는데... 어떤 아줌마하나가 와서 목사님! 저 아시겠어요? 이렇게 보니까 88년도에 전도사 생활을 할 때 교사로 섬기던 자매였어요. “야, 너 완희 아니냐, 완희”, 그때는 26살, 25살에 했던 처녀였는데 요즘은 한 40이 넘었겠죠? 그래서 전 진짜 세월이 지나간 것을 실감을 했습니다. 그런데 식물은 세월이 흘러가도 나무 같은 것들은 참 멋있게 자라잖아요. 그런데 동물을 나이가 먹으면 정말 추해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그것 보면은 여기에서 ‘후패하다’ 라고 표현합니다. 썩어버린다는 거죠.
근데 그것을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헛되고 허무한가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극복하면서 사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러면 정말 우리의 속사람의 새로움으로 인해서 겉 사람이 후패해지는 가운데 경험하는 그 패배감과 낙담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 엊그제는 누가 , 누구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래요. 어느 날 목사님을 보니까 흰머리가 나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하드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래서 내가 그랬죠, ‘본인은 얼마나 이상하냐’... 겉 사람이 후패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없어요.
저는 옛날에 노인 예찬론자였어요. 그래서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있는데 또 이 얘기하면 무식이 탄로 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있잖아요. 거기에서 나오는 스토리가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어느 날 주인공이 괴테가 얘기하는 그 질풍과 노도와 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젊음의 때를 지내서 젊은 것을 인해서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 괴로워하다가 겨울 길을 걷게 되었네요. 눈이 하얗게 왔죠. 걸어오면서 자기가 이제 폭풍과 노도와 같은 젊은 그 시절을 끝내고 이제는 노년에 들어갔구나! 하고 안심을 하는데 눈이 녹아내리니까 까만 머리가 나오고 그래서 다시 슬퍼지더라 뭐 그런 내용이죠.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 젊은 시절을 그렇게 혹독하게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정신적으로 고통하면서 살아서 그런지 하여튼 노년예찬론자였어요. 완전히 늙은 노년이 아니라 한 50대 반백의 반백 예찬론자였어요. 근데 살아보니까 다 헛소리야, 다 쓸데없는 소리야, 몸이 자꾸 이상이 오는거야, 하나도 노인을 예찬할 것이 없어요. 허리도 아프고 뼈도 팅그러지고 눈도 안보여서 직진신호인지 좌회전신호인지 두개가 한꺼번에 겹치고 빨간색과 파란색이 합쳐서 보라색으로 보이고.. 이게 뭐가 좋냐 이거죠. 뭐가 좋냐,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그래요. 아이고 뭐 언제는 노년 예찬론하더니....그게 다 실수한거다, 실수한거지. 그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가 날마다 걸 수 있는 기대는 뭐냐하면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거, 그래서 그 속사람이 새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일을 함으로서 우리가 속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겠어요? 뭔가를 많이 소유함으로서 속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겠어요? 불끈불끈 솟아나는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킴으로서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벤쟈민 프랭크린이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주 훌륭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 부자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펜실베니아 대학을 설립한 사람인데. 첫 번째 마음에 솟아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후에 뒤따라오는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기보다는 훨씬 쉽다. 그렇게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겠습니까? 안되거든요. 우리들이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거룩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 감으로서 그럼으로써 우리가 속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속사람이 새로워질 때 비로소 우리가 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또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해가기 위해서 당하는 많은 고통들을 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래서 내게 당하는 고통이 너무 크다 그리고 너무 엄청나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은 경미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사소한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지어준 무거운 짐과 십자가를 가볍게 여기고 살 수 있는 것이죠. 그 소망이, 소망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에요. 무슨 소망?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화하게 될 그런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리고 그 놀라운 축복 가운데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하는 소망, 그리고 주님께 우리가 살았던 삶에 대해서 주님이 정확히 헤아리시고 우리에게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 이런 것들에 대한 소망이 우리에게 당하는 고난을 경미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의 고난은 엄청나게 중요해 보이고 세상밖에는 없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환란 때 약해지지 않는 법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전쟁을 할 때는 결코 우연히, 그리고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한 나라는 정신병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쟁을 하기 이미 오래전부터 그 나라의 국력과 자신의 나라의 국력을 비교하고 그들이 어떤 허점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이 어떤 강점을 가지고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적군은 얼마나 멸망할 것이고 자신들에게는 얼마나 피해가 있을 것이며 그 전쟁의 종료와 함께 자신들이 얻는 이득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희생보다 큰 가 적은가 이런 거를 모두 판단하고 그 담에 전략으로, 전술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한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얕잡아 보이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역사를 둘러보시면 알지만 조선조 초기까지만 해도 왜군은 그야말로 왜구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이꼬다까모리’ 이후로 정한 룰이 대두 되면서 치밀하게 한국을 연구 했습니다. 그리고 한판 붙으면 이길 수 있다 생각이 되었을 때 침략이 이뤄진 거지요. 우리가 이 죄와의 싸움, 사단과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찮게 보이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 악의 세력들이 벌 때처럼 달려들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의 미약함을 보이지 말아야지만 영적인 싸움에서도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 자만 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은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자존감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존감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다음에 인생은 정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 버리는 거 에요. 그래 저는 이렇게 진실하지 않고 자기를 과시하고 하고 이런 것 들은 전 적성에 별로 맞지 않습니다. 만은 그러나 저는 누구에게도 스스로 약하고, 미약하고, 자존감이 없고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흔히 가정부인들도 보면 은 다른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집안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야기, 그 다음에 약점, 남편의 결함, 이런 것 들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 해 보십시오. 그래서 항상 당당하고, 그리고 누구에게도 자신이 미약하거나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것이지요. 근데 이런 미약함이 환란 날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환란 날 에! 정말 인간의 강함과 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에요. 그래서 보 면은 애인 관계에서도 성격이 매우 강해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돌아앉아서 혼자 있을 때 눈물 흘리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인간의 강함과 약함은 종이 한 장이에요. 신앙적인 영력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사사기 16장에 나오는 삼손의 이야기가 생각나실 것입니다. 나귀의 턱 뼈로 일천명의블레셋 군사를 때려죽여서 무덤처럼 쌓아 놓았는데 딱 끝나고 나니까 그는 죽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이제 한명만 더 악한 원수들이 공격하면 자기는 그 할례 받지 못한 자 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은 깊은 무기력과 연약함을 느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앞에 샘을 터치셨지요. 그래서 그것을 먹고 소생을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영역에서도 강함과 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요. 전 인생을 살면서 누구보다도 가슴에 피멍이 드는 것 같은 그런 환란을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제가 목회의 길에 들어서려고 어린나이에 결심했을 때 하나님 앞에 자신 있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다른 건 자신이 없지만 내가 목회의 사역 길에 들어서면서 가난해지는 것은 내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왜! 많이 겪어봤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부 하던 것이 있었는데 내가 참는 거 하나는 잘 할 수 있다. 근데 막상 그 길에 들어서고 나니까 그건 모두 다 몰라서 하는 이야기였고 특히 후자, 이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환란이 뭐가 두렵냐? 그 까짓게 무슨 문제냐? 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란을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거고 자기가 한번 그 불같은 시련 속에 한번 들어가 보라는 거 에요. 안 약해질 수 있나 정말 약해지는 거 에요. 더군다나 큰 환란이 닥치면서 그 환란을 사용 한 악한 영들의 역사가 커다란 두려움과 놀램으로 그의 영혼에 임하게 될 때 그때 그는 말할 수 없이 약해지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아덴에서 복음전파에 거의 실패한 이후 고린도지방에 복음을 들고 들어섰을 때 그는 심히 두렵고 떨었다 했습니다. 환란을 당하게 되면 우리 신자의 마음이 믿음이 있어도 약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을 많이 살고 달관한 이 지혜 자가 환란 날에는 너희 미약함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라 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렇게 원수에게 미약하게 보이는 요인이 어디에 있냐하면 내면속 에 있는 거 에요. 낙담이 에요 낙담! 이 낙담은 어떤 상황에서 이 전에 붙들고 있던 희망들이 끊어지면서 이렇게 좌절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좌절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의 모든 기능들이 장애상태 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음이 희망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사물은 볼 때도 다르게 보입니다. 저거 할 수 있다. 저거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은 그러나 내가 저것들이 어떻게 작용할지 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기능들이 살아있습니다. 왜냐면 그런 모든 것들을 작동하는 이 에너지의 근원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 안 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 것이 솟아나는 거 에요. 근데 덜컥하고 낙담하게 된다. 그러면 마치 전압이 떨어지는 것처럼 이 전깃불이 전압이 떨어져서 흐려지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거지요. 여러분들은 경험 못하셨겠지만 한 사십년 전으로 거슬려 올라가보면 말이지요. 불이 이렇게 들어오지 않아요. 밝았다 흐렸다 밝았다 흐렸다 이렇게 막 지 맘대로 움직입니다. 지금도 자가 발전기를 돌립니다. 그러면 밝지요. 그러다 엔진이 돌기 시작하면은 다시 밝아집니다. 말하자면 낙담은 그렇게 전기를 공급하는 전원의 힘이 약해지는 것 같은 효과를 가져와요. 그래서 모든 정신적인 기능들과 육체의 기능들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 에요. 그래서 심하게 낙담하면은 육체에 까지 영향이 미쳐서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깊이 낙담하게 되는 거 에요. 그게 믿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두려움이에요. 정말 우리들이 평범한 인생의 때에 평안할 때에 평안하게 잘 살아가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힘으로도 충분 합니다. 그러나 환란 날에는 죄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환란 그 자체를 통과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 에요. 그렇습니다. 어마 어마한 에너지를 요구하고 환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엄청난 정신의 집중을 요구해요. 그리고 환란 그 자체가 그런 것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죄가 문 앞에 엎드릴 때 다른 때 에는 능히 이길 수 있었던 죄를 환란 날에는 이기지를 못하고 그 죄에 사로 잡히게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이 환란 같은 것들이 다가 올 때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하는 거지요. 가장 첫 번째 뚜렷한 지침은 뭐냐면 그 환란 날에 그 환란을 계기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해요. 그것이 첫 번째 지침이 에요. 왜냐하면 환란을 당하게 되면 그 환란 속에 엄청난 에너지가 빼앗겨요. 요즘 그 교육관 한다고 말이지요. 일주일을 한달처럼 지내면서 노심초사 했더니 눈이 흐려졌어요. 더 안보여요. 한 한달 사이에 눈이 더 나빠져서 글씨가 잘 안보여요. 토할 것 같아요. 내가 그 교육관을 가서 벽돌 하나 나른 것이 없지만은 그렇게 에너지가 한없이 뺏기는 거 에요. 한없이 에너지가 뺏기는 거 에요. 그리고 어느 한순간에 두려움이 확 임하는 거 에요. 그때 우리들이 얼마나 쉽게 낙담하는지 몰라요. 그 모든 것들을 이기는 방법이 뭐냐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도와 달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가서 환란을 만났는데 좀 보태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뒤로 던지고 문제를 엎고 가! 그리고 자기가 먼저 하나님 앞에 가는 거 에요. 하나님이 자기를 안 기뻐하시는데 그 환란에서 문제가 해결이 되겠어요?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신다면 그 문제가 문제 일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 그 문제가 문제일수 있겠느냐 구요. 그리고 중요한건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게 아니라 사실은 문제가 자기를 들고 하나님 앞에 가게끔 그렇게 처신해야 해요. 그런데 한점의 구김 없이 그러면 된 거에요. 그런데 불행이도 그렇지 못해!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그러면은 내가 하나님 앞에 들고 간 이 문제 때문에 내가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게 아니라 문제가 하나님 앞에 데려간 나 때문에 문제가 괴롭습니다. 그러고 하나님 앞에 서는 거 에요. 큰 환란을 당해서 딸은 강간을 당하고 자식들은 가나안 족속과 큰 싸움을 불러일으킬 만한 경솔한 행동을 하고 멸문지하의위기에 놓였던 이 야곱이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고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벹엘 로 올라가자. 거기서 내가 단을 쌓으리라.”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첫 번째 지침이 되었어요.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지침을 세우면 겁날 것이 없지요. 내가 하나님 앞에 그 환란을 통해서 의롭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양심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면 할렐루야고, 불행이 안 그래! 그러면 전공 법으로 가는 거 에요. 환란을 당하기전엔 몰랐는데 환란을 당하고 보니까 내 생각이나 모든 의지들이 하나님이 뜻에서 이탈되어 있었습니다. 이 나 를 새롭게 해 주십시오. 그것 말고 방법이 어디 있느냐 말이지요. 때가 환란을 안 당했더라면 그때가 좀 후일이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는데 환란을 당해서 계기가 되어서 그 일이 조금 당겨졌어요. 오히려 감사하잖아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는 거 에요. 그러면은 그 환란 속서 하나님의 많은 음성이 들려요. 우리의 인생의 일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이 인생의 격난, 커다란 풍파 속에는 반드시 그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깃들여 있어요. 그것들을 영혼의 감각으로 찾아내는 거 에요. 그리고 판단해요.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새로워질 것은 새로워지고 버릴 것은 또 버리고 경고 받을 것은 깊이 경고 받아요. 대개 환란과 어려움이 오면 은 줄서서 한가지로 오는 것이 아니라 포위해서 한꺼번에 돌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이 미약하게보이고 우리가 낙담하는 때가 흔치 않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 결정적일 때에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이지요. 전 참 신기했습니다. 작년에 여름 수련회에 가서 얼마나 아팠는지 그래서 매일 병원에를 갔는데 온몸이 쑤셔서 견딜 수 가없어요. 의사 선생님이 “이거 한대 맞으시겠습니까?” 영양제에요. 그래 그러더니 그 영양제를 맞으니까 한 십분 만에 견딜 수 없이 쑤시던 게 싹 낳아요. “이게 웬일 입니까?”그랬더니 이 감기 기운이 들어오면 우리의 연약한대로 총 집합해서 거기를 갉아먹는데요. 거기가 어디냐 그러니까 그게 관절이래요. 관절! 그게 공격을 하는 거 에요. 그래 뼈마디가 쑤시면서 막 욱신욱신해서 거기에서 뼈마디에서 나오는 아미노산 같은 것을 빨아 먹으면서 거기서 자기 세력을 불리는 에요. 그러다가 혈관을 타고 주사액 아미노산이 들어가니까 “여기 붙을게 뭐냐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이 들어오는데 우리 흩어지자.” 하고 쫙 흩어지는 거 에요. 그 참 신기했어요. 그래서 사일을 꼬박 꼬박 갔어요. 그랬더니 그 의사가 넷째 날은 나보고 물어봐요. “선생님 뭐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의사가 시키는 대로 모범생처럼 잘합니까?” “나도 옛날에 대학에 선생 이였습니다.” 그랬더니 “아 역시 선생이여서 선생이야길 잘 들으시는군요.” 근데 정말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결정적인 순간에 총 공격합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비가 오면 은 소낙비와 같이 온다고 했는데 우리의 환란도 마찬가지 에요. 욥이 당한 시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고린도후서 일장에서 사도바울이 당했던 그 시련들을 열거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우리들이 어느 일정 시점에서 약해보이면 시험들이 한꺼번에 폭풍과 같이 닥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원입니다. 자원! 힘이 있어야 싸우지요. 힘만 있으면 싸운단 말이에요. 왜? 원수가 우릴 이길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린 힘만 있으면 싸워요. 근데 힘이 없어요. 그 힘이 어디로부터 주어집니까? 물론 육체의 힘은 음식으로부터 주어지기도 하고 그리고 쾌활한 마음의 힘은 좋은 교제로부터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하늘의 자원이 에요. 그 하늘의자원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것이 에요. 아주 평범한 사실이 에요. 하나님이 그런 자원을 누구에게 공급해 주십니까? 당신 앞에 선 사람들 당신 앞에 서서 문제 그 자체보다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문제로 인해서 받는 자신의 고통보다 변화 되지 못하는 자신을 통해 받는 하나님의 고통에 더 많이 마음 쓰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거 에요. 부어주시는 거 에요. 그렇게 하면서 강한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받기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거 에요. 그때 우리는 그 환란을 통해서 오히려 미약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통해서 오히려 내 마음이 상승하는 것을 경험해요. 그리고 그 잔잔한 바다 위를 항해 할 때는 그냥 항해 했지만 그러나 큰 파도가 치면서 폭풍이 일어 날 때는 그 비바람을 맞으면서 굵은 팔뚝으로 이 방향타를 잡고 키를 잡고 그리고 고함치면서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과 같이 그렇게 오히려 환란을 통해서 더 마음이 깊이 감화를 얻고 더 그 환란 때문에 오히려 상승 되게 되는 거 에요. 고양되는 거 에요. 그것이 첫 번째 지침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은 믿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아야하는 거지요. 마음이 환란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낙담이 되고 눈을 들어서 모든 것을 보면 비관적으로 보이고 낙심 스럽게 인식이 되는 거 에요. 그래서 그 틈을 타고 죄가 우리를 속이고 생각을 어둠 속에 사로잡히게 하는 거지요. 그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 에요. 그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힘과 능력을 줘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라. 그런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고 동시에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 환란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붙드신 경험들을 다시 묵상하는 거 에요. 그때 믿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 볼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그 믿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우리가 낙담하기 쉬운 모든 환경과 이유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처럼 보이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여기 있나니 라고 고백을 하는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그리고 반드시 우리를 지켜주셔서 환란과 어려움을 통과하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다시 영광스런 회복으로 불러주실 것 이다. 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마음은 하나님께 더 많이 집중되고 그래서 우리자신을 의지하던 티끌 같은 마음도 모두 다 버리게 만드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 에요.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그 환란의 큰 파도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하나는 무엇이냐면 이렇게 환란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은 낙담하기가 쉽고 그래서 우리 자신이 아주 미약해지기 쉽거든요. 그때에 우리들이 해야 할 역할이 뭐냐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서 하늘이 열리고 부어지는 하늘의 자원에 공급에 대한 경험, 믿음의 눈으로 상황 을 인식한 새로운 시야,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격려해야 되요. 그 교회나 집안이나 직장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이렇게 큰 환란을 당하게 되면 은 나오는 이 한숨이요. 들리는 이 모두 근심하는 이야기 밖에 즐거운 이야기가 들리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사도행전 28절에서 로마로 압송되어가던 바울이 탔던 배를 기억하실 겁니다. 바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배는 출발을 했고 ‘유라굴로’ 라고 하는 계절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엄청난 폭풍을 만나고 일주일동안을 흑암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배가 미친 듯, 쪼개질 듯 이 뛰노니까 사람들은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짐들을 다 버렸고 완전히 탈진해서 살 소망까지 모두 끊어져 버렸습니다. 로마의 군인들, 뱃사람들 모두 다 지쳐서 예전에 죄수인 사울을 압송하던 그 군인으로서의 위엄은 간데없는데 그때에 그들과 함께 풍랑을 겪으며 배 한편에 묶여있던 바울이 입을 열고 말합니다. “걱정하지마라. 어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셨는데 이 풍랑을 인해서 너희 중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있지 말고 뭘 좀 먹어라! 기운을 차려라. 너희들은 모두다 살수 있을 것 이다. 그리고 평안 하라!” 이게 죄수가 묶여서 자기를 압송하는 군인들에게 하는 이야기 에요. 그 격려가 이 뱃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거 에요. 그의 처지는 비록 배에 묶여 있지만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그 풍랑에 관한 궁극적인 결과를 모두다 통고 받았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게 그렇게 선언 할 수 있었고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 이지요. 그래서 우리지도자들은 항상 당황하지 말아야 해요. 그래서 아무 일도 없어도 지도자가 큰 일 났다 ! 그러면 진짜 큰 일 난거고 다 쪼개져서 난리가 나도 괜찮다! 그러면 괜찮습니다. 이게 바로 환란 가운데서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있는 영혼이 함께 환란을 당한 사람들에게 주는 위로에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 되고 다시 그 환난 속에서 오히려 자신들을 노리던 원수를 비웃고 믿음의 항진을 계속하는 거 에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서 환란 속 에서 오히려 담대해지고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정결해지고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와 함께 죽은 우리의 그 죽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고 그래서 우리가 더 온전한 신자가 되도록 성화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시는 것이 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갈 때 뭔 일은 없겠어요? 하지만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고 우리의 갈길 을 가야해! 그런 어려움들을 죽 겪으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더 순종하고 더 온전해져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 갈수 있는 그런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8.마음을 믿지 말라, 마음은 곧 그 사람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28:26)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올바른 길로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의 마음 그 자체에는 많은 모순율이 있어서 이것과 저것이 서로 상치하고 또 저것과 이것이 서로 부딪히면서 많은 갈등과 모순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온전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마음속에는 언제나 번잡함이 있습니다. 지혜자가 아침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지 말아라.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다.’ 이거지요. 생각이 떠오르고 그리고 그 생각들이 움직이고 하는 이모든 마음의 작용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은 그러나 떠오른 마음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올곧은 길로 갈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라고 아마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마음이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하면서 살면 우리의 영혼이 진정한 생명을 누릴 수 가없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배가 바다를 항해할 때 그 바다에 골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나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배가 그 넓은 대양 한 가운데를 가지 않습니까? 비행기가 하늘을 날 때 하늘에 무슨 골목이 있겠습니까? 나무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거치는 것이 없이 펼쳐진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도 조정사와 항해사가 있어서 그래서 한순간도 자기가 붙들고 있는 핸들을 놓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다를 항해하고 하늘을 운항하는 배와 비행기의 운행방식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암초가 가득한 좁은 해협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때로는 우리가 많이 성화 되어졌다고 스스로 판단이 되어서 혹은 환경적으로 어려움이 없어서 드넓은 바다처럼 이렇게 펼쳐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그 펼쳐진 바다와 같은 환경 속에서 우리들이 항해할 때 그때도 우리의 마음을 붙든 그 핸들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많은 작용들을 주시하고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가 우리자신을 공정히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그런 판단력들이 생겨나게 마련이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많은 교훈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작용들을 직시하라고 하는 교훈이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않고는 마땅히 가야할 올바른 성화의 길을 갈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고 그래서 무감각해지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더 더욱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들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실한 참회다 자기 깨어짐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을 지키는 삶에서 본다면 오래 동안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도록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자신의 삶 중심부에 있는 자신의 마음을 향한 주도권을 자신이 쟁취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음이 굳어져 있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지만 마음이 깨뜨려지고 온전히 변화된 다음에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주관하고 움직이기 쉽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마음이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새롭게 되는 그런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많은 작용,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많은 일들, 이런 것 들을 부인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 삶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이 될 수 있고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9.말씀의 미각을 잃지 말라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11:4-6)
이 사건은 다베라 의사건, 혹은 기브롯 핫다아와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뒤에 보면 알지만 불이 붙은 걸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이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탐욕의 무덤이라고 해서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은 욕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욕심! 우리 성경엔 여기 특별히 탐욕이라고 했는데 욕심을 다루고 있어요. 이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느냐하면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시고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들을 치셔서 그중에 상당수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장면이 여기에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람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탐욕을 품었다 그러지만은 무슨 온 세상의 돈을 다 갖겠다는 거 에요? 아니면 뭐 하나님을 축출하고 자신들이 임금이 되겠다는 거 에요. 아니면 무슨 하나님의 돈을 훔쳐서 뭘 하겠다는 거 에요. 아니거든요. 이렇게 죽임을 당할 정도로 이렇게 사람들이 잘못을 했습니까? 그래 지금 계속 투덜대는 건 뭐 에요? 고기 좀 먹고 싶다는 거 에요. 고기 그러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광야의 길을 지나면서 그냥 만나만 먹었으니까 고기 좀 먹고 싶다는 거 에요. 누가우리에게 고기를 주어서 좀 먹게 할꼬? 그리고 고기를 좀 먹어야 되겠다. 그런 거지요. 그래 사실은 모세의 태도도 좀 문제가 있지요. 그렇지요? 보면 좀 모세가 우유부단한 지도자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만은 그럴 때 모세가 강력하게 백성들을 야단치고 말이지 정신이 번쩍 나게 했으면 좋으련만 모세도 지친 것 같아요. 하나님 앞에 나가서 “내가 이들을 낳았습니까? 도저히 이제는 싫습니다. 이제 차라리 날 죽이십시오. 내가 이 백성들 이제 진짜 지겹습니다.” 참 지도자로서는 그릇된 태도였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지요. 하나님이 이제 모세를 제쳐놓고 문제를 직접 다루시는 거 에요. 그런데 그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지요. 고기 좀 먹고 싶다는데 여러분은 뭐 고기 먹고 싶을 때 없어요? 고기 좀 먹고 싶다는데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게 뭐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걸 탐욕이라고 규정하신 거 에요. 그리고 그들을 강력하게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 탐욕이라고 하는 것은 크기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기를 인간적으로 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게 뭐냐면 신앙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동의가 되어진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건 다 사람들의 생각이고 이 탐욕은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탐욕 자체를 가지고 있으면 그러면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겨나게 되요. 그것이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문제가 되냐? 첫째는 뭐냐면 이 탐욕은 어디에서 생겨나게 되냐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맛,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살아가는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린 데서 이 탐욕이 발생을 하는 거 에요. 그랬기 때문에 이 탐욕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탐욕이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미각,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영속 에서 살아가는 진실한 기쁨을 상실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에요. 여러분들에게 한번이야기 해봅시다. 만나가 너무 맛있었는데 고기를 생각하니까 만나가 맛대가리 없는 음식이 된 겁니까? 그게 아니라 만나 자체에 대해서 싫증나는 일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다음에 고기와 ,생선, 외, 부추 점점 거기서 진전을 해서 이제는 맛있는 것뿐 아니라 정욕에 좋은 것 까지 생각을 하게 된 거 에요. 그런 거라 이거지요. 그래서 이 탐욕이 무서운 거라 이거지요. 그러나 우리인간은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인간은 탐욕덩어리가 이거에요. 정말 탐욕덩어리 에요. 정말로! 그것이 뭐냐면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하늘 자원을 공급받는 기쁨과, 그 은혜의 세계를 상실하게 될 수록 그 부족한 자원을 자신의 힘으로 채우려고 노력을 하는 거 에요.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19장 이하를 설교 하면서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지요. 우리 인생을 누가 제일 잘 돌보십니까? 하나님이 돌보시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을 때는 그 다음에 우리를 잘 돌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 입니까? 자기 자신이다 이거에요. 이건 신자에게도 동일한 이치에요. 인간이 신령한 자원을 공급받는 은혜의 비밀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다음에 반드시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나 즐거움으로 자기공급에 힘쓰게 되고 자기공급에 대한 힘씀은 반드시 탐욕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 에요. 이건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이 탐욕이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부패를 가져온다. 라고 하는 것 이지요. 두 번째는 뭐냐면 이 탐욕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굽을 뛰쳐나와서 광야로 들어섰을 때 그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행복해 했던 것은 그들이 이미 큰 땅이나 아니면 재산을 누렸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그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나 탐욕은 우리로 하여금 예전에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우리 마음속에서 앗아가 버려서 우리를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채워요. 이유는 무엇 때문이지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탐욕 할 수 있지만 탐욕은 대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에요. 돈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있는 돈이면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탐욕 아니에요. 그런 탐욕을 별로 없다 이거지요. 탐욕은 있는 것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고 아직자신 의 것이 되지 못한 것들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욕망으로 나타나는 거 에요. 탐욕을 품기 전에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 감사해요. 가끔 내가 교인들이나, 혹은 직원들이나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낙심하고, 좀 실망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이 있고, 그러면은 그런 이야기를 해요. 당신이 안 가진 게 뭐가 있냐? 이거에요. 언젠가 우리교인을 심방 가서 당신이 부러운 게 뭐가 있느냐? 구원받았고, 사랑할 교회가 있고, 당신을 위해서 염려해주고 돌보는 목자가 있고, 가족들 건강하고, 자녀들 신앙생활하고, 도대체 안 받은 게 뭐가 있냐 이거에요.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주신 것 들 에 대해서는 잘 생각을 안 해. 그리고 자기가 안가지고 있는 것을 인해서 깊이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 에요. 그게 탐욕이 시키는 일이에요. 탐욕은 마음에서 감사를 사라지게 해요. 그래 여러분도 보면 알지만 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 합디까? 달란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 합디까? 아니에요. 감사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탐욕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항상 자신은 모자라는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 에요. 그게 감사 한거 에요. 나는 여러분들이 하는 질문 가운데 제일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 뭐냐면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 한다고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목사님 무슨 선물 해 드릴까요? 그런데 필요 한 게 없어요. 진심이에요. 진짜 그러니까 정말 내 자신이 내게는 없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마음이 안분지족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거 에요. 탐욕을 품고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 점 에서 탐욕은 큰 해가 되는 거 에요. 세 번째는 뭐냐면 종종 탐욕은 진실한 슬픔을 동반해요. 진지한 슬픔을 동반해요. 어떤 이유이든지간에 인간이 눈물을 흘린다. 라고 하는 것은 진지해 진다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면과 자신의 외면이 합치되지 않고는 눈물이 나올 수 가 없는 거 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말하기를 거짓눈물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거짓눈물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내면과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요. 그런데 궁금한 게 영화배우 들이 어떻게 그렇게 잘 울까?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잡지에 보니까 그 영화배우가 이야기를 하는데, 배우마다 그 눈물을 흘릴 때는 그 극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울기도 하지만 그 극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생에서 일어났던 가장 슬픈 기억을 동원한다는 거에 요. 그래서 어떤 배우는 자기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가슴이 아팠는데 그걸 자신은 항상 감정이입을 한다는 거지요. 우리들이 거짓눈물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거짓눈물이 아니지. 그 순간에는 자기 할머니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서 슬퍼서 눈물을 흘린 거 에요. 그러니까 마음과 내면이 하나가 되어서 흘러나온 눈물이니까 그것도 진실하다 이거지요.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부분적인 연관관계에 있어서는 진실하다 할지라도 총체적인 관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를 이탈한 가운데 느끼는 슬픔, 그러한 이탈한 가운데 느끼는 진지한 슬픔이나 고통, 이런 것 들은 우리들이 진실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에요.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거에요. 사실 동정의 눈빛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어요? 이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큰 걸 요구 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내 쫒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거 에요? 아니면 하나님 섬기려고 모아 두었던 헌금 통 털어서 뭐 처먹겠다는 거 에요? 그런 거 아니잖아요. 뭐냐면 광야의 길에 너무 고달프고 즐거움이 없이 그렇게 고단한 인생을 지나왔으니까 이제 우리가 그 고기를 한번 먹고 싶다.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렇게 탐욕을 갖는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막 눈물이 흐르는 거 에요. 무슨 눈물일까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타향살이의 서러움, 그다음에 나그네 길의 고통, 그다음에 그 처량함, 이런 것들이 막 떠오른 거지요. 그러면서 애굽에서 두고 왔던 여러 가지 애 뜻한 사연들이 생각이 났어요.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이제 우리는 정말 누구를 의지하며 사냐고 눈물을 흘릴 때 누가 감히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냐 이거지요? 이처럼 탐욕은 종종 진지한 슬픔을 동반한다. 이거지요. 인간은 누구든지 간에 자신이 진지한 슬픔에 휩싸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정당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거 에요. 다시 한번 반복할게요. 기원이 어디가 됐든지 간에 인간이 이런 진지한 슬픔 속에 싸이고 눈물을 흘리게 되면 자기 자신이 옳다고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거 에요. 무슨 뜻이지 아세요? 그런 거라 이거지요. 이해를 얼마나 하셨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측면이 있어요. 이것이 말하자면 미끄러진 자의 침윤의 상태에서 정서가 주는 영적인 영양이에요. 그런 걸 받게 된다 이거지요. 그래서 이런 것 들을 깊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는 거 에요. 이런 것 들이 어디에 잘 나타나느냐 하면 말이지요.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이성적인 관계에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이탈해서, 그래서 사랑에 빠지거나 그럴 수 있잖아요?그렇지요? 그런데 그들 속에 아주 진지한 슬픔이 흐를 때 그때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고 거기에 포커스가 맞여지는 거 에요. 그런 것 들을 확 부각시켜서 보편가치를 뒤집어 엎어버리려고 하는 그것이 말하자면 탈 도덕적인 그런 휴머니즘 이라 이거에요. 더 이야기 할 순 없지만 시간상 어쨌든 그런 탐욕은 때때로 이런 진지한 슬픔을 동반해요. 그래서 마치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원망을 하는데 “나 진짜 고기도 못 먹고 광야에서 이게 뭘까?” 그러면서 막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하나가 될 때 때 그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면서 깨뜨려져지는 상태와 너무 유사하다 이거 에요. 무슨 뜻 인지 알아요? 그때 자기 자신의 총체적인 태도가 하나님 의 뜻으로부터 이탈되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서를 잘 관리하면서 살아야 되요.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이거에요. 거기에서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췰 수 있게 되는 것 이 에요. 그런데 그런 진지한 감정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거지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그런 식으로 감정에 충실해져서 그래서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슬픔이 가시고 나면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선하다는 사실은 점점 믿어지지 않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매우 부당하게 취급하고 계신다고 하는 원망이지기속에 말하자면 깊이 뿌리 내리게 될 것 아니에요? 그런 속에서 솟아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하는 마음이 간과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거지요. 그런 종류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 때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지요.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분께 복종하는 마음이 생겨나지만 그런 식 의 눈물을 흘리게 되면 하나님을 거스리고 반역하게 되는 마음이 강화 되는 것이 에요. 그래서 이런 모든 원망이 어디에서 왔느냐면 결국은 탐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 이지요. 하나님께서 오히려 자기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마음은 이렇게 자기 자신의 빛나간 정서에 충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에 대한 신뢰의 마음으로 덮여진 상태를 유지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기 때문에 제가 묵상을 하라고 여러분들에게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깊이 묵상을 해야 해요. 오늘 아침에도 목사님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지만, 구원의 도리를 매일 묵상해요. 나는 여러분들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아침마다 한 챕터 혹은 반 챕터씩만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구원이 무엇이고, 자신이 지금 구원의 도상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침에 20분씩만 묵상하면은 열흘이 지나기 전에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는 많이 달라 질 거 에요. 문제가 뭐냐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귀를 스쳐가지만 가슴에 깊이 타고 흘러내려오는 이러한 침투가 없는 거 에요.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이 객관적이고, 마지막 최종적인 결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보고 멋대가리가 없다고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맛대가리가 없게 느껴지는 거 에요. 그리고 나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탐욕을 향하여서 눈뜨고 그리로 향하여 치닫는 그 마음을 여러분들이 누구라도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이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헌신을 원하시지요. 그리고 그러한 헌신이 있을 때 하나님이 그 헌신을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들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섬기며 살아야 됩니다. 물론 우리들 가운데는 게으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맡았든지 간에 그가 게으르게 사는 것은 아주 더러운 것이에요.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게으르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맡은 직무 하나, 개별적인 의무에 대해서 게으른 것만이 그것이 더럽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는 물론 더러운 거고 왜냐하면 그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물론 더러운 것이고, 삶의 자세 자체가 게으른 것은 아주 더러운 것이에요. 추악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러니까 게으름 그 속에는 이미 창조의 목적에 도전하고, 배치하는 인간의 악하고 죄 된 경향성이 주류가 되어 있는 것이에요. 이러한 게으름은 타락 이후에 물밀 듯이 들어 온 거 에요. 그러니까 그 게으른 것은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것 이지요. 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라고 말한다면 부지런함이라고 나는 서슴없이 말하고 싶어요. 부지런해야해 게으르게 살아가는 것은 아주 더러운 것이에요. 게으르면서도 신령한 영성과 순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게으른 사람의 친구는 오히려 신령함이 아니라 세속적임, 그리고 순결함이 아니라 부패, 타락, 정욕, 이런 것 들 이에요.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게으르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에 기도 하면서 정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주님을 만난이후로 진짜 게으르지 않기 위해서 살아오려고 애를 썼어요. 그런 몸부림 속에서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개인적으로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목회하기 전까지는 어떤 내 일을 하다가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죽을 수 도 있겠구나. 그런 정도로 과로해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는 더 젊어서 그랬겠지만. 그런데 교회를 하고 나서 한 세 번 인가 네 번 정도 꼭 있었어요. 그래서 영적으로 다운되고, 말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육체적으로 내가 지금아주 경계선 까지 왔구나! 바가지로 내 육체의 샘에 고인 물을 소리 날 때 까지 거의 긁어냈구나. 그리고 사람들이 과로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인가보다 그걸 한 세 번인가 네 번 정도를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그중에 한번을 아주 심각하게 경험 할 때가 있었는데 제가 혼자서 호주에 가서 한 열흘 정도 쉬고 온 바로 그때였어요. 그때는 이렇게 한 삼일 정도만 더 살면 하늘나라에 갈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많은 사람이 저처럼 살아요. 많은 사람이 저처럼 삽니다. 저만 그렇게 사는 것 아니고 여러분만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렇게 헌신하면서 사는데, 그런데 왜 그런 헌신에 괄목할만한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까? 그렇지요?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기까지 그렇게 많이 헌신하는 데, 왜 괄목할만한 하나님의 은혜의 부어지심이 없을까? 여기서우리 들이 한 가지 또 다른 요소를 만나게 되는 거지요. 뭐냐면 순결해야 되요. 순결해야 돼. 이 탐욕은 그 순결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적이에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기도 하면서 그렇게 마음이 아팠던 것이 그거에요. 게으르진 않으려고 애를 썼던 거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항상 내 섬김에는 그런 부패가 깃들여 있었어요. 깨끗하질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깨끗함이 없었기 때문에, 많이 수고했으나 열매는 적고 우리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수고한 많은 헌신들은 폐기처분되는 거지요.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해지고자 하는 노력! 이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 게으르지 않고 정말 깊이 자기를 바치면서 헌신 하면서 사는 그 올곧은 삶이 갈멜산 위에 놓여있던 장작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 앞에 일체의 탐욕을 버린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하늘을 향해 올리던 그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 와 같은 것이에요. 정작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불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장작을 모두 쌓아 놓았고, 그 후에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불이 하늘로부터 내린 거 에요. 장작이 불을 불러 온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기도가 불을 불러 온 것이에요. 우리의 헌신을 장작과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장작을 쌓아 놓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은 둘 다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가 있고 난후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쌓아올린 그 장작에 불로 임하시자 활활 타오르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심지어는 그 불이 그 위에도랑에 도랑저서 흘러내리던 물까지 모두 핥아 버리면서 타 올랐어요. 우리도 마찬가지 에요. 우리가 결점이 없겠습니까? 부족한 점이 없겠습니까? 있거든요. 성령의 강력한 하나님의 그 은혜의 불이 자신을 다 바치는 그 헌신위에 불붙어 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점까지도 태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격적으로 참 모나고 부족한 사람들도 교회의 역사에서 사용하시잖아요? 그러나 문제는 뭐 에요? 탐욕은 그렇게 안 된다 이거에요. 탐욕이 우리로 하여금 헌신은 가능하게 하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은 가로 막아요. 파죽지세로 가나안 원주민을 공격할 때 그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 한순간에 멈추는 역사가 아이 성의 전투에서 나타나지요. 금덩어리 하나하고 외투, 그 까짓것 때문에 하나님의 그 강력한 임재의 영광이 멈춘 거 에요.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아간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서 그렇게 된 거 에요. 탐욕이 그렇게 무서운 거 에요. 여러분 오늘 만약에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른 삶이 아니라 여기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삼기면서 살아가게 해주신 은혜에 대한 그 감사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그 뒤를 반드시 여러분이 돌아보면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 있을 거 에요. 그것이 뭐냐면 바로 하나님을 향한 탐욕이에요. 이 탐욕이라고 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를 구성하는 욕망만 탐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고기 좀 먹겠다는데 그게 뭐 그렇게 큰 범죄에요. 지금 뭐 간음을 하겠다는 거 에요? 반역을 하겠다는 거 에요. 아니면 무슨 돈을 훔치러 창고를 털겠다는 거 에요. 그게 아니잖아요? 이들이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으로 도덕적으로 중대한 범죄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에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에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거지요. 싫어하시는 거 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 가운데 두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쁘셨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각자각자 세워주신 자리에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거지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이번에도 베트남을 갔다 왔는데 하여튼 그렇게 마음이 아팠어요.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아팠는데 하나는 이렇게 평화로운 나라를 40년 전에 우리나라 군인들이 와서 짓밟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아팠고 두 번째는 거기에 있는 영혼들이에요. 한인이 약 사만명이 사이공에 살고 있는데 교회가 네 개 에 요. 거기서 우리 교인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야기 하는 거 에요. 목사님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곤고합니다. 왜 그러느냐. 교회가도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한국에서 교회 잘 다니던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교회를 안다닌다는 거 에요. 그러면서 뭐라면 “목사님 여기서 개척을 하십시오. 무제한으로 모아다 드리겠습니다.” “열린 교회는 어떻게 하고” “그건 또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지요.” 정말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내 몸을 반 쪼갤 수 있다면, 반쪽은 거기 두고 오고 싶었어요. 거기서 누군가가 그 방황하고 신음하는 영혼들을 싸매 앉고 문물을 흘리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래서 정말 세계는 넓고 할일은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오면서 그랬어요. 한국에 있는 교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 너무 몰라요. 나는 세계 여러 나라, 특히 거기에 사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절망적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어요. 주님이 우리가 여러 곳을 우리를 두실 수 있는데도 하나님이 여기에 두셨어요. 이게 마치 흐르는 물에 떠 밀려서, 마치 장마철에 개울에 흐르는 그 물에 떠밀려서, 쓰레기 봉지가 어느 바위에 부딪쳐서 거기에 자기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갇혀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하나님이 여기에 두신 것을 기뻐하셨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자기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만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두시고 여기에 두시는 것이 하나님이 참 아름답다고 그러셨구나.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은혜들을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돼야 해요. 그리고 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느냐 하면 내게는 필요 없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돼요. 모든 것이 있고 내게는 필요 없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안 주신 것이 없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돼요. 거기서 하나님을 정말 기쁘게 섬기면서 그러면서 매일 매일을 기쁘게 살아가는 거 에요. 그게 우리의 분깃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탐욕을 품었을 때 하나님 앞에 아주 더러운 사람들이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그 때를 털어버리시는 거 에요. 악을 털어버리는 거 에요. 그래서 인생의 참다운 가치는 재화의 다과나, 지위의 높고 낮음, 주위 사람들이 내 인생에 보내는 박수갈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야. 인생의 참다운 가치는 개개의 삶의 구간에서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삶의 자리에서서, 그래서 그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힘입으면서,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참된 보람이요, 가치요, 행복인 것이에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탐욕이 자리 할 수 없어요. 아침마다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오늘도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 있도록 길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거 에요. 거기에서 사명감 이라고 하는 것도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나는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마음에서 항상 사라지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뭐냐면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섬기는 동안에 섬기면 섬길수록 귀한주님을 알아가는 것이에요. 주님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그 큰 깊이와 넓이, 그 높이를, 알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자라가게 되는 것이 에요. 그래 오늘부터 한번 예배 끝나고 나서부터 오늘부터 한번 마음에 시간 있을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정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안주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주셔서 하나님이 누리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한번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을 해보세요. 감사의 깊은 고백을 해보세요. 이 탐욕들이 물러가는 것을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탐욕은 우리를 서럽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소외 됐다고 느끼게 만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신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을 앗아가고,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려고 만들어요.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그래 오늘부터 한번 감사해 보세요.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고 그것을 고백해 보세요. 정말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마음속에 느껴질 거 에요.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견고함과 의지의 단호함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수1:7상)
여호수아가 영성이 있는 사람이었고 또 오래 훈련된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모세의 행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비서처럼 잘 보았던 사람이었고 아주 훌륭한 제자였지요. 그렇지만 모세와 여호수아를 비교하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었지요. 모세가 죽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을 그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불새출 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카리스마가 이 여호수아 에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모세의 뒤를 이어서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지요. 내종 모세와 내가 함께해 주었던 것처럼 내가 너와도 함께 하마! 그러니까 너는 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가 약속해준 그 땅으로 들어가거라.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이러한 어려운 순간에 이 여호수아에게 당부하시는 것이 있었어요. 뭐냐면 ‘강하고 담대 하거라.’ 그거였습니다. 이 여호수아가 처함 위험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첫째는 그 불새출 의 탁월한 지도자가 죽고 그 사람의 뒤를 이었다는 것 자체가 위기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어느 교회의 후임목사로 갔는데, 아니 뭐 그렇게 이야기하면 여기하곤 적응성이 없으니까 내가 어느 부서에 간사로 들어갔는데 한사람이 그만둬서 가게 됐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억수로 게겼어요. 그러니까 하여튼 담임목사의 마음을 굉장히 힘들게 했어요. 그 뒤에 후임으로 가는 사람은 출근만 제때에 해도 담임 목사의 마음이 기뻐! 가고 새로 온 사람이 보배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한사람이 있었는데 정말 탁월했어요. 너무너무 잘 한거야. 그럼 그 후임에 간 사람은 웬만큼 잘해 가지고는 빛이 안나! 옛날에 그 자매가 참 잘했는데~ 결재만 맡으러 가면 옛날에 그 간사는 이렇게 안 했는데~ 몇 번만 그렇게 하면 열 받아서 일 할 맛이 나겠어요? 모세가 워낙 탁월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뒤를 이었다는 것 자체가 안 되는 거 에요. 그래서 교회에서도 말 이지요. 잘 봐요. 아주 훌륭한 종들이 목회하던 교회 후임으로 간 목사들이 평안한 교회가 아무도 없어요. 한 경직 목사 후임으로 간 사람들이 평안 합디까? 알지요? 이름 다 거명 안 해도 여러분 다 알거 에요. 간단하지 않아요. 교인들이 목사님은 저러지 않았는데, 목사님은 설교도 저렇게 안 하셨는데, 목사님은 참 검소하셨는데, 목사님은 훨씬 훌륭하셨는데, 목사님은 사랑도 많으셨는데, 이게 상대가 안 되는 거 에요, 이런 것 자체가 이 사람의 위기였어요. 그러니까 안으로는 이 백성들을 포괄하고 이끄는 것이 이게 위기였다 이거지요. 또 하나는 뭐냐면 밖으로 모세가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전쟁은 이제부터 에요. 왜? 가나안이 비어있는 공터에요? 거기 선진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병기를 들고 거길 굳게 지키고 오죽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전에 정탐을 갔다가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그러고 울면서 돌아온데 아니에요. 40년 동안 얼마나 더 발전을 했겠느냐 이거에요. 거기 가서 이 애굽 에서 광야로 40년 동안 떠돌아다니던 그 떨거지들이 붙어야 되는데 그게 사실은 가당키나 한 일이에요? 가당키나 한 애기냐 이거지요. 더구나 여호수아에게는 모세와 같은 그런 철저한 학문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위기지요. 그래서 여호수아가 진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였어요. 그때에 하나님이 먼저 약속의 보증을 하시는 거 에요. 내가 함께 해 줄게. 모세와 너를 내가 차별 대우할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불안해하지 마라.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내가 너와 함께 해 주마. 그리고 일단 안심을 시키시고 그리고 주님이 말씀 하시는 게 뭐냐면 강하라 담대 하라. 이 두 가지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은 말의 반복이 에요. 강하라는 것이 외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담대하라고 하는 것은 내적인 말하자면 이 내면의 경향성과 질을 가치키는 것이 에요. 담대하고 강하라고 하는 말이에요. 사실 여기서 우리들은 말장난 같지만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거 에요.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면 됐지요. 호수아가 무슨 힘이 있건대 그에게 강하게 하라 그러시나? 이게 바로 올곧음에 대한 촉구에요. 그래서 그 올곧음은, 하나님께서 홀로 올곧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올곧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올곧게 하시는 거 에요. 그리고 그들을 강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하시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여호수아는 자신 안에 있는 한계 안에서만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여호수아 뿐 만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이걸 기억을 해야 돼요. 마음을 굳세고 강하게 먹을 때에 발휘되는 자원과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에 발휘되는 자원은 엄청 달라요. 그걸 기억을 해야 되는 거지요.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굳세게 마음을 먹고, 어느 한 가지 목표에 고정해서 이루어야 하리라 하고 그 몰두하는 것은, 그때에 나오는 에너지는 그런 것 이 없을 때에 나오는 에너지하고는 양과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거 에요. 그래서 열정을 가지고 인생을산 사람들이 신화적인 업적을 이루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 이라 이거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누 신화적인 일을 이루게 하는 그 열정이, 방향이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 이 에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방향이 정해졌고 목표도 너무나 분명해!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 이거 에요. 그래 이건 우리의 의지의 행사의 올곧음에 있어서 중요한 허물 이 에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거룩한 강인함을 소유한 사람들 이었어요. 꺾이지 않는 열심과 거룩한 강인함이 그들의 견고한 신앙생활의 주춧돌이 되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강함을 소유한 사람들 이였다 이거지요. 그 강함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서 온 것이냐 하면 의지적으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올곧음을 의지적인 결단과 집착 속에서 그것들을 보호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을 때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셨던 그 올곧음의 성향을 오랫동안 보존해 올수 있었던 것이에요. 마치 이런 원리에요. 옛날에 시골에서는 성냥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불을 피우면 항상 그 불을 놋그릇 같은 단지에다가 재를 많이 넣고 거기에다가 불씨를 집어넣고 덮어요. 그걸 보관하는 곳이 있어요. 사당처럼 보관을 한다구! 그다음 날 아침 그걸 꺼내서 불을 피우는 거 에요. 그걸 시집오면 시어머니한테 불려 받는 거 에요. 그때 비로소 그 집안의 안주인이 되는 거야 그걸 지금 몇 년 전에 잡지에서 보니까 500년째 이어 오는 집안이 있어요. 아직까지도. 만약에 그것을 꺼뜨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건 집안이 중대한 액운이 온다고 생각을 해서 그것이 그 여자가 소박을 맞는 원인이 되는 거 에요. 하나님이 이런 올곧음을 우리에게 중생과 함께 주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도 다시 하나님 앞에 클리브, 하나님 앞에 딱 붙어서 살려고 하는 다바크 의 경향을 우리에게 주시거든요. 그분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그걸 우리에게 주신다. 새롭게 해주신다 이거지요. 그런데 그게 만약에 불씨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내가 강하게 살리라. 내가 마음먹은 대로 살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지키리라. 내가 이렇게 살리라. 그리고 끊임없이 의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그 불씨를 감싸고 있는 재야! 불씨가 좀 작아도 그렇게 따뜻한 재에 의해서 잘 싸여있는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이거지요. 그런데 그런 위지적인 화답!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에 대한 의지의 화답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그 불씨를 아무 보호 장치 없이 그냥 이런 접시에다가 불씨를 담아 보관한 것과 같다 이거에요. 아무리 시뻘겋게 달아오른 불씨를 올려놔도 두 시간도 안돼서 두 시간은 무슨 이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새까맣게 사려서 꺼지는 거 에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은혜의 강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 에요. 그런데 아니에요. 세상없이 강력한 은혜의 체험이 그에게 주어져도 이의지의 보호 없이는 주님이 주신 이 올곧음의 성향들을 보존 할 수가 없는 거 에요. 여러분 가끔 보면 어떻게 그렇게 열심 있는 사람이 저 정도가 되지? 그런 경우 있잖아요? 그 이유가 그가 받았던 은혜가 작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 할거 에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 맞지요? 그거 맞아요. 그런데 이제 내일이나 모레쯤 나올 텐데 이런 이야기 에요. 올곧음의 성향을 소유하고 있는, 올곧음을 유지하고 있는 신자는 범죄 하지 않느냐? 그거 아니라는 거 에요. 올곧음 가운데 있는 신자도 범죄 한다 이거에요. 그런데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면 올곧음 가운데 범죄 한 신자는 고무줄과 같아요. 잡아당기잖아요? 그러면 이 선에서 이탈하잖아요? 범죄 끝난 후에는 탕하고 돌아오는 거 에요. 이게 견디지 못하고 돌아오는 거 에요. 그러나 여기만약에 이렇게 있는데 납으로 만든 줄 같은 거 있다고 해봐요 이렇게 잡아 당겨요. 그럼 어떻게 되요? 돌아와요? 돌아오지 않지요.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무결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올곧음 사람도 범죄 할 때 있지요. 미끄러지지요. 즉시 돌아온다 이거에요. 괴로워하면서 즉시 원형복구를 한다 이거에요. 그게 그 은혜의 강도가 떨어져서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거냐 이거 에요. 그거 아니라 이거에요. 저는 설교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회심의 광경을 목격했어요. 그런데 진짜 어떤 사람들은 정말 거의에드워드의 부흥에 나오는 사람들과 유사 할 정도로 엄청나요. 여러분 회개 하다가 까무러진 거 보신 적 있어요? 회개를 하다가 실신을 해 버려요. 얼마나 회개가 집요하고 엄청나면 그렇겠어요. 왜 실신을 하게 될까요? 무슨 귀신이 누른다고 생각하는 데 그게 아니에요. 마음을 모우고 하나님께 다 토설하고 쏟아 놓는데 이 기력이 진한 거 에요. 그게 졸도에요. 그래도 미끄러지더라고! 그래도.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런 체험 없어요. 그냥 말씀 듣고 휴지만 수북이 쌓이는 거 에요. 지금도 곁에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휴지만 수북이 쌓여! 어떤 비상한 체험도 없어요. 그런데 견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은혜의 크기의 문제만이 문제가 된 게 아니라 주신바 그 올곧음의 은혜를 끊임없는 의지의 결단 속에서. 그것들을 끊임없는 의지의 결단 속에서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이 매일 매일의 노력과 자기 쇄신, 그것이 주신바 은혜를 오래도록 보존하게 하시는 거 에요. 그러니까 은혜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 자기 결단을 남발하고 그것으로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 이지요. 그러나 결단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결단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하고, 이런 결단 속에서 이 결단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공급이 필수적입니다. 그러고 그 모든 자원이 주님께 있습니다. 내가 그걸 찾고, 또 두드리고, 그리고 내가 구합니다. 그런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의지적인 결단을 내리면서 사는 이 삶이, 이게 신앙생활이여야 되는 거 에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최근에 결단을 내리신 적이 있어요? 최근에? 결단을 내린 적이 있느냐 구요?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매일매일 발견을 할 거 에요. 이거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대한 방해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달을 거 에요. 깨달지 못했다면 더 심각한 상태지요. 깨달으면 그걸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이건 아니다 하고 끊어 낼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걸 누가 하는 거 에요? 의지가 하는 거 에요. 의지가. 그래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거 에요. 왜! 의지가 결단을 하는 거 에요. 그 결단은 항상 아픔을 동반하는 거 에요. 오늘 먹으러 가자! 그런 건 결단 이 아니야! 그래 오늘은 결심을 하고 한번 퍼질러 자는 거야. 그런 건 결단이 아니라 이거 에요. 그런 건 상관이 없어요. 항상 여기서 이야기하는 은혜의 올곧음을 유지하게 하는 결단이라고 하는 것은 악한 본성이 싫어하는 결단이 에요. 그걸 내리는 거 에요. 직원들 있는데 이런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만 석 달 이상 내가 깊이 망설이다가 교역자들 이번 주 까지는 지나가고 다음주부터 새벽기도 카드 찍으라고 내가 명령을 했어요. 직원들까지 다 하고 싶지만 여기 집 먼 사람들도 있고 직원들은 놔뒀는데, 찍으라고 그랬어요. 마지막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요. 왜 약간의 비인격적인 요소가 있으니까. 그러나 내가 하기로 결심을 했어요. 왜? 여러분들이 새벽기도 하나도 안 나와도 교회 안 무너져요. 주님이 나보고 이 열린 교회 이끌어 가시는 거 에요. 나만 똑바로 서서 새벽기도 나오면 교회 쓰러지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이거에요. 여러분들이 불쌍하다 이거에요. 지도자로서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수없는 의지적인 결단의피 흘림이 있고 나서 생기는 마지막 결과에요. 그것은 마치 중들의 사리와 같은 거 에요. 수없는 세월동안 장자불화의 삶을 살고, 그리고 무릎을 끊는 참소 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의 몸속에 맺히는 것이 사리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안 된다 이거 에요. 심지어는 말이지 최근 한 달 동안에 담임목사가 불 켜주는 사람이 없어서 새벽예배를 제 시간에 못 드린 것이 두 번이나 되요. 회개가 안 되지요. 그렇게 올곧음이 없어가지고 어떻게 지도자가 되려고 하겠어요? 그렇게 해서 교인들 모아놓고 말이지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가르치는 게 그게 다 거짓말이지 그게 무슨 진실이냐 이거에요. 진실은 평면적인진술이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 피가 묻어있어야 된다 이거에요. 그런 올곧음으로 어떻게 지도자의 길을 걸어 가냐 이거 에요. 지도자의 위대한 힘은 입술에 달려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지도자가 계속 노는 것 같다가도 위기를 만났을 때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한번 연설을 하는 거 에요. 그때 입에서 불을 토하는 것 같고, 연설을 들었을 때 사람들 마음속에 모두 낙심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할 수 있다는 혼이 불어 넣어지는 거 에요. 그게 지도자의 역할 이 에요.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되냐면 그 사람이 피어린 가시밭길을 지나온 사람이어야 된다 이거에요.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승리하고, 상황과의 싸움 속에서 피 흘리고, 그리고 남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길을 넘었던 사람, 그런 피 맺힌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런 정신이 그 인격 속에 베이는 거 에요. 그렇게 떠밀리듯 살아가지고 어떻게 미래의 영적 지도자들이 되냐 이거에요. 월요일, 목요일이면 절반도 새벽기도 안 나와요. 하나님이 슬퍼 하신다구요. 뭐라 그러시는지 알아요? 나는 너에게서 온전함을 발견할 수가 없다. 착해요. 여러분들은 착해요. 그런데 지도자는 착한 것 가지고 안돼! 그 이상의 어떤 혼이 그 정신 속에 깃들여있어야 한다 이거에요. 그것은 깃들여지는 것이 아니에요. 한사람이 올라가서 기도를 해요.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지어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어떤 사람이 올라가서 기도해. 모두 그 품에 그 대표기도자의 품에 앉기는 것 같아. 그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는 거 에요. 필요한 그 순간에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속에서 피 흘린 길을 걸어가면서 베이는 거 에요. 이 여호수아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카리스마적이지 않은 이 사람이 여기에 설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출애굽기 32장 34장에서 다 나오잖아요? 이스라엘백성들이 범죄하고 회 막 을 세웠을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거기에 나와서 기도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모세가 회 막에 들어가면 일어났다 앉았다 했어요. 모두 돌아가고 심지어는 모세까지 집에 들어가서 자는데 끝까지 그 회 막을 지키던 사람이 있었어요. 여호수아에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영적인 지도력이라고 하는 것은 책이나 몇 권 읽고, 무슨 잘되는 교회 들락날락하면서 몇 장 베껴 온다고 해서 그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이거에요. 그게 아니에요. ( 찬양! 거친 바다 험한 산 피 가 맺혀도~ 이하 생략) 그렇게 살 때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예수의 사랑을 전할 그 용기가 생겨나는 거 에요. 안돼요. 언젠가 한번 꽃을 좋아하니까, 예쁜 나무 하나를 화원에 가서 사 왔어요. 어느 날 한달 있었는데, 이거 햇빛을 이렇게 못 봐서 되겠나? 번쩍 않아가지고 저 방배동에 있을 때 저 앞마당에 햇빛 잘 드는데 화단 앞에 문서 선교 부 있는데 갖다 놨거든요. 저녁때 어딜 갔다가 들어 왔는데 잎이 전부다 하얗게 됐어요. 그래서 나중에 화원에 가서 항의를 했어요. 무슨 나무가 금방 이렇게 이파리가 누렇게 되고 그러냐고? 그래 어떻게 하셨냐고 하기에 햇빛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한 달 만에 햇빛에 내 놓았다고 하니까 굉장히 가련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여기서도 햇빛을 제대로 못보고 이 비닐하우스 온상에서 따듯하게 자랐는데 방에다가 한 달 이상 놔 둔 것을 정오의 뜨거운 태양에 내 놓았는데 그게 사냐고? 안타 죽은 게 다행이라고 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니까 그걸 정말 햇빛을 쏘이고 싶으면 어두운데서 조금 씩 조금 씩 걸려서 며칠을 끌고 나와야 된다고 그래요. 내가 이야기 할까요? 목회지 는 땡볕 이 내리 찌는 광야야! 온실에서 그렇게 살지요. 그래 뭐가되는 것 같지요? 그런데 거기서 내다 놔봐? 하얗게 타버려. 쓸모없어지는 거 에요. 어느 순간 이상해지는 거 에요. 옛날엔 그래도 장점도 많았는데. 그건 온상에서 장점이 많았던 거 에요. 광야에선 다 타 버린다 이거에요. 그렇게 해 가지곤 안 된다 이거에요. 나는 이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여러분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에요. 가슴이 미어져. 우리 후손들이 이제 누구를 믿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누구에게 그 영혼을 의탁하고 사나 하는. 지도자가 묘목 같은데 누구를 믿고 의탁 하냐 이거 에요. 한 송이 국화꽃이 필 때 까지 소쩍새가 그 긴 세월을 피를 토하면서 울었어요. 그러고 나서 국화꽃이 피는 거 에요. 여기 봐요. ‘강하고 담대 하라.’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이 올 것을 암시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잔잔한 호숫가에서 보트나 타는 것 같은 미래일 것 같으면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처음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 하시겠어요? ‘애야 마음 풀어라 엔 죠이 하거 라’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잖아요? 강하라! ‘여호수아야! 너는 강하라. 담대 하라 무슨 뜻이에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꺽 이지 말거라. 무슨 커다란 일이 일어나도 넌 놀라지 말거라 ’그 이야기 아니 에요. 얼마나 엄청난 일이일어 날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 에요. 저는 몇 달 전에 실미도 라는 영화를 보면서 사실은 깊은 감동을 느꼈어요. 하나는 뭐냐면 요새도 느끼고 있는 거지만, 왜 우리 민족은 이렇게 비겁할까? 너무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요. 왜 우리 민족은 이렇게 말하자면 비겁할까? 최근에도 얼마동안 한국 교회의 근대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비겁할까? 어떻게 우리들이 완전 할 수 있겠어요. 잘못됐으면 그걸 정직하게 고백하고, 그 용서를 빌고 새 출발을 해야 되잖아요? 왜 그렇게 비겁할까? 지금이라도 실미도가 사실은 이런 부대였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러고 국민의 이름으로 용서를 빌고 그들에게 보상을 해야 되잖아요? 아직 안 하잖아.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며칠 전 아침에도 그렇게 가슴이 아팠던 게 뭐냐면 그런 민족적인 더러운 기질이 내 안에도 있다는 거 에요. 똑 같이 있다는 거 에요. 그리고 교회 안에도 있지요? 왜 한국 민족이 세운 교회니까. 또 하나는 뭐냐면 인간의 강함이라는 것이 끝이 없구나. 그 사람들, 전부사회의 문제아고 불량배들이고 규모가 없는 사람들 이였잖아요? 그런데 그 영화에서 뭐라 그래요? 세계 최강입니다. 자신 있게 그 대장이 말하잖아요? 세계 최강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실미도 부대 거기에 들어갔던 사람 이야기는 그 영화는 그건 장난이래. 게임도 안 된다 이거에요. 실제는 어마어마한 훈련을 받았다는 거지요. 그랬더니 그 뒷골목의 깡패, 너절하고 아무규모도 없는 떨거지 같은 인간들이 세계 최강이 되는 거 에요. 미국의 네이비씰 같은데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블랙베레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괴력을 지닌 부대가 됐다는 거 에요. 그게 뭐 에요? 강한 훈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거 에요. 강한 훈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거 에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지 생각을 해 봐요. 우리는 너무나 약해! 그리고 미끄러지는 것을 밥 먹듯이 하면서, 그러면서 마음에 정함이 없이 살아요. 그래서 인생을 다 살고 보면 주를 위해서 산 날보다는 침체에 빠진 날이 많고, 주를 위해서 산 날보다는 침체에서 허덕거리고 빠져 나오는 시간이 더 길어 그래서 실제로 남자답게 굳거니 서서 주를 위해서 싸웠던 시간들은 지극히 찰나에 지나지 않아요. 그 인생이 무슨 보람이 있겠어요? 그렇게 살아서는 사상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거 에요. 할 수 없는 거지요. 한사람이 입을 열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증거하고 그 짧은 증거 속에서 마음의 깊은 감화를 받아서 아!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이러한 감화를 끼치게 되기 위해서는 그가 피나는 고난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만이 입을 열 때 그런 효과가 나타나는 거 에요. 목회를 십년하면서 얻은 결론이 하나있어요. 잘 들어요. 교인들로 하여금 땀 흘리며 주를 섬기는 교회가 되도록 만들려면 목회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야 되요. 교인들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사랑에 대한 감격 때문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하려면 자기는 피를 쏟아야 되요. 그래야지 겨우 눈물이 흘러요. 그게 기독교의 역사야. 단순히 어느 한순간에 스퍼트를 내서 한 두 번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거 그것이 훌륭한 것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고 애쓰고,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하고 행하지 못하게끔 가로막는 모든 요인과 더불어서 싸우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이것이 올곧음 이 에요.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고난이 많아요. 얼마나 고난이 많은 줄 몰라요. 남들이 쉴때 그는 고단하게 일하고, 남들이 웃을 때 그는 그 고단한 싸움을 싸우면서 하나님 앞에 능력을 구하기 위해서 한 구석에서 흐느끼는 눈물을 흘려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노래 할 때 그는 자기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 방법을 연구하고 기량을 연마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요. 하나님이 어떻게 그 두 종류의 사람을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을 해 주시겠어요? 그런다면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에 어긋나는 것 이지요.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사는 전자의 사람들은 사소한 사람들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은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각각 다르게 하나님이 대우해 주셔야 되요. 이 땅 에서의 축복도 다르고, 그리고 하늘나라에서의 상급도 달라야 되지 않겠어요? 다르게 취급해 주시는 거 에요. 그는 그렇게 살던 사람은 마지막 죽는 그 순간에도 환희 가운데 주님의영광속 으로 들어갈 것이에요. 전자의 사람은 부끄럼 속에 끌려가듯이 그 분 앞에 서게 될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공평한거 에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갖고 의지의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내적자원을 공급해 주셔요. 그래서 이기게 하시는 거 에요. 승리하게 하시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수시로 마음속에 그걸 그려야 되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그를 사랑한 역사 속에 많은 사람들이 장열하게 주를 위해서 그 올곧음 안에서 순결했던 광경들을 생각해 봐요.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되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이에요.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위로는 지금 우리들이 올곧은 길을 가기위해서 당하는 그 고난과 수고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많은 선배들이 살수 있는 길을 버리고 죽을 길을 택했고,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세상과 오히려 맞서기를 원했어요. 그리고 고난의 길을 택하고 순교의 잔을 마셨어요. 결국은 그들은 잃은 자 같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얻은 자들이 되었던 것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11.물러가지 않는 신앙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잠 1:32-33)
녹취자: 전인현
성경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미련한 사람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냥 일반적인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잠언을 지혜자가 이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널리 읽힐 목적으로 출판하려고 잠언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아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신실한 언약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 이 지혜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는 뒤에 나오는 34절과 반대의 병행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2-33절 이 두 절은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토막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문학적으로 병행기법입니다. 그래서 앞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는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와 짝을 이루고 퇴보하고 멸망한다 이야기는 뒤에 나오는 안연히 살고 환난 중에 두려하지 않는다는 것과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운이 딱 떨어지지 않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낱말의 짝이 딱 맞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자는 일반적인 삶의 태도를 가리키지만 그 삶의 태도를 깊이 뿌리를 더듬어 내려가면 하나님을 깊이 인정하는 경외하는 신앙심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어리석은 삶과 미련한 자의 삶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시인들도 노래했고 지혜자도 노래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자의 결국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퇴보한다 끊임없이 뒤로 물러간다하는 것입니다. 이 물러가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뒤로 물러가는 것만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자신이 함께 나아가지 못하거나 가만히 있거나 혹은 다른 사람보다 현저하게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현저하게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러면 결국은 그것이 상대적인 퇴보입니다.
(예화) 경제 논술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일본에서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며칠 전에 소니와 삼성이 그 전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특허를 서로 공유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일등 국가 일본 세계최고의 가전제품 소니로 대표되는 일본의 이 자존심을 산산히 땅에 떨어뜨렸다고 해서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참 웃기는 일입니다. 소니가 가전제품에서 일 년에 얻어 들이는 순이익을 열배를 삼성이 얻고 있습니다. 몇 년 안에 소니는 게임도 되지 않습니다. 작년에 타임지 기사를 보니까 삼성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2020년에는 전 세계에 삼성브랜드의 인지도를 소니를 능가하겠다. 그랬더니 뒤에 나오는 기사가 재밌습니다. 소니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는 2020년까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시장은 모두 잠식해버렸고 그리고 기술력에 있어서는 몇몇 부분은 탁월할 정도로 쫓아갔고 어떤 부분은 추월하고 있습니다.
(예화) 최근에 경제잡지에 보니까 소니와 삼성이 미국에 특허로 등록된 그 숫자를 보니까 거의 엇비슷할 정도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소니가 놀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개발했습니다. 특히 텔레비전 같은 것들은 아직까지 우리가 도저히 쫓아가지 못하는 기술들이 숨어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삼성과 같은 후발 기업들이 치열하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개발을 하면서 추격을 한 것입니다. 결국은 소니는 뒤로 선적이 없지만 결국은 물러선 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꼭 같습니다. 은혜를 받지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는 지체들을 보면서 교만하지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치열하게 찾으면서 진보하는 경건과 삶 지식과 생활에 있어서 탁월한 진보를 나타내는 지체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옷깃을 여밉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경제적으로 어렵고 시퍼런 나이에 전부다 직장에서 쫓겨나서 오갈 데가 없는 세상 아닙니까?
(예화) 그런데 언젠가 한번 뉴스를 보니까 정년이 되어서 퇴직을 했는데 회사에서 못나가게 붙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이 얘기하는 명장들입니다. 건축이나 인테리어 설계 특수공법에 있어서 대가의 성실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지런히 후배들이 따라왔지만 그 격차를 도저히 줄일 수가 없습니다. 몇 십 억 달러짜리 프로젝트를 받았는데 이 한 사람이 떠나가면 공사의 컬러티를 좌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명예퇴직 정년퇴직을 시킨 다음 다시 초빙을 합니다. 그래가지고 명장으로 발령을 합니다. 그래갔고 회사에서 그 짓을 왜 하겠습니까? 올해도 안줘 한 5년 정도씩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5년 안에 후배들이 그 솜씨를 따라잡아서 이제 선배가 없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 있어서도 자신의 가치를 계속 높이는 사람들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대접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태되어야지만 사회가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도태 되서 연금으로나 살 수 있게끔 구제 차원에서만 도와줘야지 사회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중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 있어서도 적용점을 가집니다. 눈부시게 발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교회에 근무하지만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성도들이 직장에서 5년이나 10년 이렇게 근무하면 받는 생활비가 상당히 많이 올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갑절 이상 더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때 자신의 가치가 갑절이 넘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정말 쓸모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비결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주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적용시킨다면 우리에게 끝없는 영적인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뒤에 물러가는 소이 백슬라이딩을 경계합니다.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았다고 자만하지 말고 옆에 있는 수많은 지체들이 구도자의 삶을 살면서 피나게 주님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예전에는 내가 불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몇 줄 가르쳐줄 때 머리를 조아리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던 지체인데 이제는 나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에는 교회에 등록해서 교회의 신세만 지던 지체였는데 이제는 교회가 그 사람 없으면 정말 아쉬울 정도로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에 유익을 끼칩니다.
그런 것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의미에서 시기심을 가져야 됩니다. 진심으로 가져야 합니다. 선한의도에서 시기심을 가져야 합니다. 엊그제 목사님들이 와서 교제하면서 저한테 자기네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몇 권씩 주고 갔습니다. 그 중에도 설교를 죽 읽고 읽으면서 그렇게 마음속에서 비감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비감한 느낌이 들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에드워즈가 서른 몇 살에 한 설교인데 도저히 그 나이에 그 설교를 했다고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겨우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언저리에서 방황하고 있던 그 나이에 그 사람은 장엄한 필체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말씀의 세계와 우주의 의미를 열어내고 있었습니다. 시기심이 났습니다. 그런 그 시기심이 없는 것은 거의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끊임없는 진보가 여러분 속에 계속되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특히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최고의 적이 그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진보해가지 않으면 처음에는 커 보였던 교역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주먹만하게 보이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의탁할 수 없는 매우 작은 자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치열하게 구도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최근에 제가 읽은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회자의 신분은 하나님의 교회와 결혼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하나님께 정결한 신부로 바치기 위해서 또 중매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임무는 끈임없이 영혼의 변화를 사모하고 그 일을 돕고 자기 부인에 힘쓰고 그리고 참 신자가 되어가기 위한 부단한 성화에 노력이 있어서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에 모두 매진해야 하고 성도는 이런 길을 가는 목회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절대로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끊임없이 발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를수록 교인들이 너무 어려워 보이게 그렇게 발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안일한 자의 미련한 자의 안일이라 그랬습니다. 안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렇게 쾌락을 즐기고 놀러나 다니고 또 먹기나 좋아하고 그저 퍼질러 드러누워서 티브이나 보기를 좋아하고 오락에 몰두하고 이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믿는 것은 하나님의 믿는 자녀의 삶에 있어서 안일한 삶의 정의는 하나님을 향한 추구점이 없는 것! 그것이 안일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도 안일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 그 분을 추구하지 않고 사는 모든 부지런함은 초점이 구도에 맞추어진 부지런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애쓰고 자기의 욕심을 혹사시키면서 고난 속에 노동하면서 그것이 안일한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한 추구 이것이 미련한 자에게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삶이 되려면 무엇인가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주님을 즐거워하면서 그러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것들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어리석고 미련한 자가 아닌 또 다른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안연한 사람이고 두려움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안연하다고 하는 것은 환경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상황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평강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연한 사람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요 나의 빛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천만인이 나를 쓰러뜨리려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늘 내적 평강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인데 어젯밤에 스펄전을 잠깐 읽다가 밤이 좀 늦었는데 기도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펄전은 만 58세에 부름을 받았는데 그가 해놓은 일들은 정말 어마어마 합니다. 스펄전이 그 어마어마한 회중이 일만 이천 명이나 모였을 때 설교하고 목회자 대학 설교 사회사업 그리고 어마어마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러고도 500이지 책을 한 주에 6권씩 읽었다고 합니다. 그 삶을 이렇게 보면서 이전이나 이 시점에 서서 머무적거리면서 살긴 살았는데 무얼 하면서 살았나, 나는 그 사람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지 못하고 더 깊은 말씀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고 더 뛰어난 재능도 없는데 어찌나 이렇게 초인적인 삶을 살았을까 오늘 성경에 보면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듣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귀울이는 사람들이 안일하고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안일하고 두려움이 없는 삶의 본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끊임없이 진보하고 안일에 빠지지 않는 삶입니다. 아주 핵심을 말하자면,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깊이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심령으로 자극을 받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물러설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받고 여기까지 걸오온 구도의 길인데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여기에서 뒤로 물러설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깨달은 지식이고 어떻게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신령한 자극 속에서 분발해야 합니다. 분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너무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쇠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육신이 쇠하고 나면은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기력도 없고 빨리 빨리 움직이지도 못해서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끊임없이 영적으로 진보해서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최고의 성화상태가 되고 그 때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가장 완전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보해야 합니다. 진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부지런히 주님을 추구해서 안일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탐독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보다 더 온전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 그렇게 달려가는 길이 선한 싸움을 싸우는 길이고 그렇게 산 사람들이 마지막 그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선한 싸움을 싸웠으니 이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리라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잘 못하지만 그 육상경기 하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막 달려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일등으로 결승 테입을 끊고 그리고 쓰러지듯이 바닥에 엎드려서 가뿐한 숨을 몰아쉽니다. 그 때에 그 선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도 짧습니다. 기도합시다.
견고하게 살아가는 길 1